여행문화 원고
누운 시혼詩魂을 깨우다(8)
미완의 동양평화, 언제나 이루실까
안중근 의사 가묘
글 사진 구능회 최이해
순국 110주년의 안중근 의사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께서 순국(殉國)하신 날이었다. 안 의사께서는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0년 3월 26일, 영어(囹圄)의 몸으로 계시던 중국의 여순(旅順) 감옥에서 극형을 받아 32세라는 나이로 짧은 일생을 마감하셨으니, 올해로 순국 110주년을 맞게 되었다.
의사(義士)께서는 본래 황해도 해주(海州)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기울어가는 나라를 건져 보려는 일념하에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며 많은 고초를 겪으셨다. 고향과 평안도 등지에서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 나섰고, 후에는 침략근성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 무력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북만주를 중심으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군(日軍)들과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의병활동의 한계에 부딪쳐 고심 중,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를 방문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저격할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 경, 제정(帝政) 러시아 대장(大藏) 대신(大臣) ‘코코프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치고 기차에서 내려 환영 나온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이토오’를 저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의사께서는 어려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고, 일찍이 천주교에 귀의하여 ‘토마스’라는 영세명(領洗名)을 받았다. 1907년 정미 7조약 등으로 나라의 형세가 급격히 기울어 가자, 무력 투쟁 이외에는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다는 판단으로 항쟁(抗爭)에 나섰으나, 의사께서는 유학(儒學)에 대한 소양도 깊은 분이었다. 이는 옥중에서 지은 한시나, 유묵(遺墨), ‘동양평화론’ 같은 저술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아래에 의사께서 남긴 칠언절구 한시 한편을 소개한다.
東 洋 對 勢 思 杳 玄 (동양대세사묘현) 동양의 형세 생각하면 아득하고 캄캄하니
有 志 南 兒 豈 安 眠 (유지남아기안면) 뜻있는 남아라면 어찌 편히 잠을 이루겠나
和 局 未 成 猶 慷 慨 (화국미성유강개) 평화 세상 이루지 못하니 도리어 슬퍼하고
政 略 不 改 眞 可 憐 (정략불개진가련) 침략 야욕을 그치지 않으니 진정 가엾어라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의 평화에 대한 간절한 바램으로 여순 옥중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의사께서 순국 후에 중국의 명사(名士)들이 다투어 추모시를 헌정(獻呈)하였는데, 손문· 원세개· 장개석· 양계초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이 분들은 안 의사를 추모하면서 “공로가 온 나라를 덮었다”(손문), “살아서는 짧은 일생이었지만 죽어 천추에 길이 빛날 것”(원세개, 장개석), “의로운 거사에 온 세계 젊은이들이 놀랐다”(양계초) 라는 등의 찬양의 글을 지어 추모했다.
의사께서는 순국 전에 자신의 유해를 당분간 하얼빈 공원 근처에 묻었다가, 조국이 독립하게 되면 그 때는 조국으로 반장(返葬)하여 묻어 달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순국 110주년을 맞은 올해까지도 의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
이는 순국 당시의 간악한 일제(日帝)가 유족에게 유해 제공 협조를 하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당사자인 일본이나 또는 순국 장소를 제공한 중국 측과의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 우리 탓도 크다고 본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고자하는 민족적인 열망으로 현재 효창공원에 가묘(假墓)를 조성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들과 나란히 모시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의사(義士)란 의로운 선비라는 뜻이지만, 우리가 법제상 선열을 기리느데는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가보훈처가 주무부처인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선양 사업에서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의사'는 무력(武力)으로 항거하다 의롭게 죽어간 독립투사를 일컫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이다. '열사(烈士)'는 맨몸으로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독립운동가를 의미한다. 그 예로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등이다.
안 의사는 하얼빈에서 거사를 성공하고 현지에서 붙들렸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구역였기에 제정 러시아의 재판 관할구역이었음에도 일본의 강제에 의해 뤼순 감옥에 갇혔다.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급하게 극형을 받았다. 유해는 형장 가까이에 버혀지듯 매장되었다.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지라 아직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다.
현재 효창공원 안에 ‘삼의사 묘역’에 가묘가 있다. 삼의사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분이다. 이곳에 서쪽을 넓혀 가묘를 썼다. 서상(西上)이라고, 세 분 의사를 앞장서 거느리고 있는 형세이니 위치는 잘 잡은 셈이다. 이제나 저제나 유해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무산될 조짐이 보이자 비석을 세웠다. 세 분의 비석에 비해 새물맛이 역력하다.
효창공원은 애초에 효창원이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묘역이었거늘, 능 원 묘로 차별을 두었으니 원이란 세자와 세자빈 급의 무덤을 말한다. 정조의 장자로 세자책봉까지 받았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문효세자의 묘원이 있었다. 1944년 문효세자의 묘를 비롯하여 의빈성씨 숙의박씨 영온옹주의 묘가 모두 서삼릉 일원으로 이장되었다. 삼의사 묘역 동쪽으로는 임정요인 3인(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묘역이 있고, 서쪽으로는 김구 선생 묘도 있다. 가운데 의열사 사당에는 당초 이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최근에 동쪽 벽에 안 의사 영정과 위패가 마련되어 가묘에 세운 비석과 함께 영원히 못 돌아오는 유해에 대한 예를 갖춘 듯하다.
지난 3월 26일은 안 의사 순국 110주년 기념일이었다. 순국, 나라를 위한 죽음. 그가 이토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의 한 지역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한 주역으로 조선을 차근차근 병합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실행을 해오던 그였으니 안 의사의 공로는 실로 위대하다 할 것이다.
의열사에 새로 갖춘 영정과 위패는 물론이거니와 삼의사 묘역의 서쪽에 마련된 가묘를 참배하는 심정은 처연하다. 가묘란 언젠가 돌아올 주인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유관순 열사의 묘는 실전되어서 고향에 허묘로 조성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남해 충렬사 뒤 초장지 무덤이나 목포 고하도 무덤 등은 유해가 한때 임시로 머물렀음을 표시하는 유적이다. 하루빨리 안 의사의 유해가 돌아와 가묘가 아닌 진정한 무덤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안 의사 순국 기념행사가 두 군데서 열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다. 이번에 110주년 행사도 삼의사 묘역(이제는 사의사로 고쳐야 하나?)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이사장 김황식)가, 남산 중턱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곁 안 의사 동상 앞에서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이사장 함태웅)가 각각 조촐한 행사를 개최하였다. 중국발 우한폐렴 사태로 삼일절 국가적 행사조차 간소하게 배화여대 교정에서 치른 바에야 110주년 행사를 간소하게 치렀다 하여 탓하고 싶지는 않으나, 두 군데로 나누어 행사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일원화되어야 한다. 기념사업회나 숭모회 대표자도 안 의사 가문의 후손들이 맡도록 하면 더욱 좋겠다.
구능회 필자는 중국 여행길에서 뤄쉰 법원에 들렀다고 한다. 함께 간 일행들과 안 의사에게 극형을 언도한 법정에 가서 단막극 ‘안중근 의사’를 공연하고 비분강개 의사의 심정을 나누었으니 현장감이 무진 사무쳤을 것이다.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는 한 그루 매화가 있어 주목받는다. 이름하여 ‘와룡매’인데, 여기에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이 와룡매는 일본에서 왔다. 그런데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현해탄을 건너갔던 아비 나무의 후계목이다. 조국으로 돌아온 이 후계목의 출발지는 창덕궁 선정전이었다. 임금이 버리고 떠난 궁궐에 들어간 일인이 선정전 마당 양쪽에 용이 누운 듯 아름다운 홍매 백매 한 쌍을 훔쳐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이 매화는 가문의 절로 옮겨져 사랑받아 왔거늘 그 절 주지가 그 가지를 꺾어 후계목을 만들어 사죄의 마음을 담아 안중근 의사 기념관 재건립 축하의 뜻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홍매 백매 중 백매는 뿌리내리기에 실패, 홍매 한 그루가 가냘픈 몸으로 높게 자란 모양새가 승천하는 용을 연상케 하고 있다. 와룡매는 다른 매화 다 지고서 느즈막히 피는데, 안 의사 순국일에 맞추어 핀다. 신통한 일이다.
안 의사의 유적이 어디어디인가. 고향은 황해도 해주땅이라 가보지 못하는지라 서울의 효창공원과 남산의 기념관 그리고 중국의 뤄신 법정 등에서 그를 추모하고 느낄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남산 기념관 앞에는 안 의사의 유묵을 돌에 새긴 유묵비가 십여 기나 있고, 와룡매도 안 의사 동상을 바라보며 견디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와 적응하느라 애쓰는 와룡매 꽃 피기를 기다려 시조 한 수 지었기에 마무라 글로 올려 둔다.
와룡매
용 여실 누웠거늘 동궐의 지명 땄나
선정전 양 옆으로 기는 듯 백홍 용매
도일 후 사백 성상에 후계 귀국했구나
구능회(具綾會) : 방송인, 수필가. KBS충주방송국장과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는 노량진문화원장으로 재임 중.
최이해(崔伊海) : 여행작가, 시조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