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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암문학관 원문보기 글쓴이: 청암방효필
2013-03-25 전기수 이야기
우리는 왜 이야기를 좋아 하나?
《천하제일 전기수》(윤혜숙 장편소설, 사계절, 2013)에 부쳐
이 세상은 온갖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경이로운 세계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붙이며 꼬리를 문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뒤에 또 다른 조력자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이야기는 시간의 경과(經過)와 더불어 가지를 뻗으며 자라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세계는 변한다. 새날이 오고 새로운 삶이 생긴다.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이야기의 핵심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적인 경과와 함께 펼쳐지는 사건의 전개이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어쨌든 세상은 이야기들이 번성하는 자리다. 홍수가 세상을 쓸어간 이야기,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귀신으로 나타나 악인을 괴롭히는 이야기, 악마에게 제 영혼을 파는 이야기, 계모에게 핍박받는 아이들의 이야기, 숲속에서 백 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는 공주 이야기, 고아가 갖은 고초를 겪은 뒤에 잃었던 부모를 되찾아 공주와 왕자가 되는 이야기, 타락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의로운 기사의 이야기, 욕심 많은 부자 형과 착하고 가난한 동생의 이야기, 미운 오리새끼가 우아한 백조로 거듭나는 이야기, 사람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는 미지의 땅에 들어가 겪는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야기는 기억을 풍성하게 만들고 결국은 삶에 풍성한 생명을 불어넣는다. 사람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성욕이나 식욕과 마찬가지로 거의 본능에 가깝다. 이야기에의 욕망은 먹고 사는 것 같은 삶의 기초적 토대가 만들어진 뒤에 분출하는 더 즐겁고 더 우아하게 살고자 하는 문화와 교양에의 욕구다. 상상력은 삶과 기억이라는 씨앗들이 이야기로 발아하는데 가장 큰 촉매제요 자양분 노릇을 한다. 삶과 기억에 상상력이 보태질 때 삶과 기억은 부풀고 폭발한다. 그런 다음 삶과 기억은 질적 전환을 이루고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뀐다. 상상력은 이야기에 새로운 빛과 향기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는 삶과 기억에 기대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가치를 얻는 것은 삶과 기억이 가리고 있는 진실에 대해 말할 때다. 이야기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빛을 쬐인다.
다시 한번 묻자.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좋아하나? 첫째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다른 세계의 이야기들의 신기함 속에서 ‘나’와 닮은꼴을 찾아낸다. “아, 다른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하며 이야기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체험을 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의 환경이나 처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겪는 심리상태, 즉 슬픔, 회한, 분노, 공포에 자신의 마음을 포개고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겪어낸다. 그 감정 동일시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겪는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털어내면서 겪는 일종의 자기정화다. 아울러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나’의 동일화는 밋밋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별것 아닌 것만 같은 ‘나’의 삶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탐색한다. 그리고 그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자신 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고, 가능한 한 많이 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동일화된다는 것.”(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그와 동시에 “아, 이것은 내가 알던 세계, 혹은 내가 살아온 삶과 많이 다르구나!”하며, 그 다름 속에서 신기와 놀라움이라는 정서적 경험을 한다. 이야기 속에서 찾아낸 ‘나’와 다름은 우리를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 앞에 세우게 한다. 그 근원적 물음의 효과는 이야기에 비추어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갈망과 충동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천하제일 전기수》의 작중인물인 장생과 수한의 문답은 이야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근데 넌 왜 이야기가 좋아?”라는 장생의 물음에 수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 이야기 속에서는 가보지 못한 세상, 살아보지 못한 시간 속에도 갈 수 있잖아. 공자왈 맹자왈 어려운 말이 아니라 재미나고 생생한 이야기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잖아.” 수한의 말속에 이야기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야기의 생명은 재미와 생생함,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지혜와 통찰에 있다. 우선 사람들은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내고 돈을 내면서 들으려고 한다. 이야기는 그 안의 재미와 생생함으로 인생의 무료함과 권태에 대해 보상을 한다.
《천하제일 전기수》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이제는 사라진 ‘전기수(傳奇叟)’라는 이야기꾼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초점 화자인 수한의 이야기이고, 더 넓게 보자면 새로운 문명이 움트는 근대 초입에 ‘전기수’라는 직업 이야기꾼들이 겪는 부침(浮沈)에 관한 소설이다. 전기수’는 조선 시대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꾼으로 장터에서 민초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들이다. 이야기를 돈 받고 판다는 점에서 어엿한 직업이다. ‘전기수’는 이야기를 독점하고 이야기를 신명나게 풀어내어 민초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들은 전근대의 예인들이고, 민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직업인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기수’는 낡고 오래된 것이 새로운 문화에 밀려나는 대표적인 사양(斜陽) 산업이다. 1920년대는 옛것이 새것으로 온통 뒤바뀌고,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양식, 그리고 시대 전체가 전환하는 문명의 대전환기다. ‘전기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은 ‘변사’도 시대의 무대에서 퇴장한지 오래다. 《천일야화》 속의 이야기꾼 세헤라자드는 제 수명을 하루하루 연장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짜낸다. 그는 ‘전기수’라는 운명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인물이다. 세헤라자드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톨스토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의 전신(前身)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담(談)과 전(傳)의 형태로 구전되었다면, 현대에 그것은 기법과 매체의 다양성을 품고 소설, 드라마, 판타지, 갖가지 장르의 영화로 갈라진다. 우리는 염상섭, 김유정, 박태원, 최인훈, 이청준, 김훈, 성석제, 김영하와 같은 소설가들, 김수현이나 노희경 같은 드라마 작가,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영화감독들에게서 이야기꾼의 운명을 희미한 흔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정조 시대의 김중진은 ‘전기수’ 세계에서 신화가 된 인물이다. 김중진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는 천하가 다 알아주었다. “한 대목 한 대목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는 가슴을 꼭꼭 찌르듯 얼마나 실감나게 말했던지, 진짜 하늘나라 딴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더랬지.” ‘전기수’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효용은 무엇일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 슬픈 사람은 위로를 받았고, 나쁜 마음을 먹었던 사람은 부끄러움에 울음 터뜨렸다고 하더라. 굳이 요전법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들이 주머니를 열었지. 소문이 나서 대감댁 안방마님이, 기생집에서 돈을 싸들고 와서 어른을 모셔가려고 난리였다는구나.” 빼어난 입담으로 풀어내는 ‘전기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스며 감화와 감동을 불러오고,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야기의 효과는 명확하다. 인생의 밋밋함과 살림의 구질구질함에 물려 진절머리를 치는 사람에게 재미와 활력을 주고, 절망에 빠진 사람은 절망에서 건져내고, 고갈된 회복력에 아연 생기를 불어넣는다. 김중진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중진은 그 뒤를 잇는 모든 ‘전기수’들의 꿈이고 이상이다. 정도출이 그 뒤를 잇고, 이제 수한이 그 뒤를 이으려고 한다. 그런데 활동사진, 즉 무성영화가 나오고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리면서 ‘변사’라는 직업이 주목을 받는다. 근대인에게 무성영화란 무엇인가. “두 길 넘는 커다란 옥양목 천 위로 말 탄 사람들이 달리고, 총질도 모자라 멱살잡이까지 하고 쇳덩이 철마가 숲을 뚫고 달린다는 활동사진 얘기는 경성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귀에 솔깃한 이야기 거리였다.” 이게 무성영화에 대한 당대적 인상이고 인식이다. 무성영화는 단연 경성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의 집약이다. 거대한 쇳덩이 철마가 숲을 뚫고 달리는 것은 하늘과 땅이 놀랄 만한 이야기다. 우마차나 보고 겪은 봉건왕조 국가의 신민들이 바로 코앞에서 이 신기한 근대적 산물을 보았으니 그 의식에 가해진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무성영화는 근대인들이 새 시대가 문물의 변화와 전환의 시대요, 의식에 충격을 가하고 그것을 전도(顚倒)하는 시대라는 걸 실감으로 겪어내는 매체였다.
수한은 ‘전기수’의 재능을 타고 난 아이다. 당대 최고의 ‘변사’라 꼽히는 최한기는 수한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변사’로 키우려는 욕망을 품는다. “세월이 바뀌고 사람들도 달라졌으니,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달라지기 마련이지. 왜 극장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겠나? 이유 같은 건 없어. 그게 원하는 거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진짜 이야기꾼이 지녀야 할 덕목이지 안 그런가?”라는 최한기의 논리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사람들의 욕망과 갈구의 내용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사람들은 ‘전기수’보다 ‘변사’를 더 좋아한다. 뛰어난 ‘전기수’인 정도출이 폐병과 가난에 허덕이며 궁상스런 삶을 사는 것도 시대의 흐름에서 낙오했기 때문이 아닌가? 수한은 자신을 장안 최고의 변사로 만들어 주겠다는 최한기의 꾐에 흔들리지만 이내 꿋꿋하게 ‘전기수’의 길을 가고자 마음먹는다. 수한은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이야기 자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수한은 한사코 ‘변사’가 아니라 ‘전기수’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천하제일 전기수》에서 ‘전기수’ 정도출과 ‘변사’ 최한기는 오래된 것, 낡은 시대와 새로운 것, 새로운 시대의 대립 구도를 상징한다. 그 아래에 꿋꿋하게 ‘전기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수한과 ‘전기수’를 그만 두고 ‘변사’가 되고자 열망하는 동진의 대립이 있다. “두고 보라고. 책보다 영화가 대세인 세상이 될 테니까. 전기수는 지는 해고, 변사는 뜨는 해야.”라는 동진의 말속에는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타고 나가려는 욕망이 드러난다. 그들의 스승인 정도출의 생각과 태도는 다르다. 도출은 “이야기의 주인은 이야기를 하는 전기수도 듣는 손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 도출은 “이야기의 진짜 주인은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바로 이야기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쫓아야지 이야기 아닌 것을 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이야기꾼은 사람이나 돈을 쫓지 말고 주인인 이야기를 쫓아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진짜 전기수다.”라는 도출이 말하는 ‘전기수’는 전통적인 예술가의 모습이다. ‘전기수’는 단순한 밥벌이의 수단이 아니다.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생명의 맥동을 가진 그 무엇이고, 진정한 이야기꾼은 그것을 온전하게 지키는 사람이다. 이야기꾼이 돈이나 인기를 쫓으면 그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그 생명과 가치를 잃는다.
《천하제일 전기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것은 봉건왕조가 무너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펼쳐지는 시대, 옛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새것이 득세하는 시대에 시대의 퇴물로 낙인찍혀 퇴출하는 ‘전기수’라는 옛 직업인들에 대한 복고주의적 멜랑콜리를 자극하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새 시대의 초입에서 문명이 전환기의 몸살로 소용돌이칠 때 진로와 미래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고민하는 수한의 모습에서 원칙과 규범, 가치의 변화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제 바른 삶의 좌표를 찾으려는 한 소년의 숭고한 고뇌를 다룬 이야기인가? 아마 둘 다일 수도 있고, 그 어느 것도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이야기의 이야기, 이야기가 품은 본질과 비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에 운명을 걸고 이야기의 운명에 제 운명을 포개려는 자의 이야기이다. 이것이 초점화자인 수한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도출의 이야기로 읽히는 까닭이다. 수한의 멘토인 도출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을 들어보자. “사시사철 바람과 햇빛이 다르듯 사는 때마다, 사는 곳마다 이야기는 다 다른 법이지. 글자가 없는 때는 순전히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졌고, 이백 년 전 조선에서는 소설이라는 책으로, 그리고 지금은 무성영화가 대세이지만, 변하지 않는 건 그게 모두 이야기라는 것이지.” 이야기는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 전기수는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도출은 세상이 변해도 이야기는 불멸하는 것임을 꿰뚫는다. 《천하제일 전기수》의 또 다른 전언(傳言)은 이야기가 꿈, 공포, 신기함, 희망, 슬픔으로 활짝 피어나 사람의 감정을 화창하게 만들고, 크든 작든 경이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전기수’의 이야기에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이는 교동의 안방마님들이나 광통교 밑에 모인 사람들에서 알 수 있듯 이야기에 탐닉하는 자들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감정을 제 것으로 취한 뒤 제 경험과 상상력을 여기에 뒤섞고 발효시키며 더불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을 전유한다. 한 시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경이감 속에서 살고, 열정과 염려의 순환 속에서 타오른다.”(캐럴린 키저Carolyn Kizer) 소설, 동화, 만화, 영화, 신화가 다 경이를 품은 이야기들이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해리포터에 열광하고, 나니아 연대기에 열광하는 것도 그게 경이를 품은 신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존재인 동시에 이야기 속에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은 이야기를 짓고 품고 소비하는 서사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우리를 한 겹의 인생을 여러 겹의 인생으로 살게 한다. 불멸의 이야기는 불사에의 욕망에 대한 응답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이야기는 우리를 망각에서 기억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밋밋함에서 경이로움으로 불끈 들어 올린다. 이야기는 사람과 물건과 장소에 오묘하고 신비한 광휘를 드리운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장소건 이야기를 덧씌우면 전에 없던 아우라가 생겨난다. 어른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어린 나를 윽박지르곤 했다. 이제 그 말이 겁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누가 내게 이야기를 다오, 나는 기꺼이 그 이야기의 세계로 망명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