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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꿈!
[백두대간]
○ 대간구간별 거리
빼재(신풍령)⇔(4.35)덕유삼봉산⇔(3.1)소사고개⇔(3.25)삼도봉(초점산)⇔(1.45)대덕산(투구봉)⇔(3.05)덕산재⇔(5.3)부항령⇔(8.2)삼도봉⇔(0.72)심미골재⇔(6.78)석교산(화주봉)⇔(3.55)우두령(질매재) = 약 39.75㎞
○ 구간별 소요시간
빼재(신풍령)≤0:40≥된새미기재≤1:05≥덕유삼봉산≤1:15≥소사고개≤1:20≥삼도봉(초점산)≤0:45≥대덕산(투구봉)≤1:10≥덕산재≤1:00≥선황당재≤1:15≥부항령≤1:05≥백수리산≤2:50≥삼도봉≤0:25≥심미골재≤2:30≥1172봉≤0:30≥석교산(화주봉)≤1:05≥우두령(질매재) = 약 15시간 45분(휴식시간은 별도계산)
♧ 구간 개념도
♧ 구간고도표(남진방향)
고 도 표(빼재 ~ 덕산재)
세 번째 이야기 - 대덕산 (大德山)의 덕기(德氣)를 몸에 품다.
(대 덕 산)
♧ 산 행 일 : 2010년 2월 21일(일) 날씨 : 맑음
♧ 대간코스 : 빼재(신풍령) ~ 덕산재
♧ 산 행 자 : 마눌과 함께
♧ 교 통 편 : 산지기산악회를 따라서
♧ 발 자 국
0. 산행거리 : 총 산행거리 15.2㎞[대간길 도상거리 약 15.2 ㎞, 기타거리 : 0㎞]
빼재(신풍령) → 4.35km → 삼봉산 → 3.1km → 소사고개 → 3.25km → 삼도봉 → 1.45km → 대덕산 → 3.05km → 덕산재=15.2km
0. 소요시간 : 총 6시간43분(들머리 빼재 09:35분, 날머리 덕산재 16:18분)
빼재(09:25) →호절골재(10:39) →덕유삼봉산(11:04) →소사고개(12:07) →삼도봉(14:23) →대덕산(15:04) →덕산재(16:20)=6:45(휴식포함)
♧ 대덕산의 유래 및 특징
대덕산의 정상의 안내판에는 이산에 대한 유래와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대덕산은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산남도 거창군 경상북도 김천시 등에 걸쳐 있는 신비를 간직한 영산이라 소개하고 있듯이 예로부터 대덕산은 덕이 많은 산이라 하였고 봉황을 닮은 산세는 대덕산을 몸통으로 하여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백두대간을 달리고 동쪽으로 세운 꼬리의 깃털은 수도지맥과 가야지맥, 금오지맥을 거느리고, 망덕산으로 향하는 부리는 알(풍수지리에서는 망덕산이 봉황의 알을 닮았다고 한다)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과 함께 거대한 봉황이 날아가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한다 하여 요즘 대덕산의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산이기도 한다고하며, 망덕산 아래 펼쳐지는 무풍(십승지지 중 한 곳인 무풍은 연풍. 현풍과 더 불어 삼풍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10곳 중 한곳이라 하였다) 땅은 격암 남사고(조선 명종 때 철학자로 격암유록을 남긴 예언가이다)가 덕유산 근처에 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여 임란 때 양방들이 이 곳으로 피신해 들어 와 그 들이 남겨 둔 유적은 지금도 백산서원 죽림서원 춘향서원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의 산하에서도 대덕산은 이곳으로 살러오는 사람은 모두 많은 재산을 모아 덕택을 입었다 하여 대덕산으로 불리워졌다 한다.
대덕산은 가야산을 향해 뻗은 능선을 사이에 두고 경북 김천과 경남 거창을 갈라놓은 삼도 분기점, 즉 해발1,250m의 초첨산을 옆에 둔 명산으로, 『옛날에는 다락산, 다악산으로 불리었고 정사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하는 명산이며 부드럽게 생겼으면서도 우직한 남성다운 덕기가 어린 이 산은 옛부터 수많은 인걸들을 배출했다하며, 또한 이 산이 있는 무풍동은 남사고의 십승지지 중 하나로 알려진 고장이기에 유명하다』라고 간추려 소개를 하고 있다.
♧ 산 행 기
대간산행 나선답시고 어제저녁 일찍이 잠자리에 든 탓인지 한결 가벼운 컨디션으로 어둠이 깨어나는 새벽을 맞아서 오늘은 세 번째로 빼재(신풍령)에서 대덕산을 이어가는 산지기산악회의 대간산행 따라잡기에 나선다.
오늘의 일기는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오전 오후의 기온은 영하와 영상을 오르내리고 산행지 기온은 아침 영하 2~3도 오후 영상 7~8도에 대체로 맑음이란다.
산행하기에는 참 좋은 일기인 듯이 싶다.
그런 하루아침을 접하며 설렌 마음으로 떠나는 대간산행길은 휴일이지만 새벽길이라서인지 고속도로의 차량 흐름은 굿이다.
새벽이 깨어 날빛이 밝아오는 아침햇살을 고속도로에서 맞이하며 빼재(신풍령)으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며 지나치는 시골의 산비탈과 들녘들이 군데군데 하얀 雪들을 덮고 있었는데 자아내는 그 풍경들은 삭막하고 허허로운 겨울 들녘의 빈 공간들을 하얀 눈(雪)으로 채우고 있는 마지막 겨울들녘의 모습이듯 하였다.
신풍령휴게소에 도착하여 사람의 흔적 없는 눈길에 발을 내려딛는다.
백두대간 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신풍령휴게소가 햇빛 가득 품어 안은 채 따사로워 보이고 바람한 점 없는 좋은 터 인 듯이 싶은데 주유소며 경희스포츠연구소로 사용했던 건물들이 방치되어 흉물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었는데 왜 이렇게 방치를 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사진 : 폐허가 된 신풍령휴게소)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만 보기 좋은 신풍령휴게소로 거듭날 수 있었음 좋겠다 싶다.
그래서 대간을 오가는 산님들이 잠시 이곳에 들렸을 때에 편의시설(수도, 화장실)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을 하며 도로를 건너 목판계단을 올라 입산을 한다.
(사진 : 빼재(신풍령)에서 백두대간을 오르는 목판계단)
(사진 : 대간을 이어가는 마루금은 보기와 달리 심설로 가득하다)
불길이 닿으면 금방이라도 확~~하고 연소확대로 이어질 것만 같은 앙상한 나무와 마른풀 숲들을 이루고 있는 덕유삼도봉의 마루금을 이어가는 산길을 오른다.
그런 산길이 멀리 보기에는 앙상하고 삭막한 듯이 했는데 그 숲속과 능선의 산길을 벗어나면 발목이 빠져드는 하얀 심설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 일기는 날빛이 밝아 눈(目)이 부신다.
태양광선 때문에 동남쪽 방향으로는 역광이기에 제대로 조망할 수가 없다.
빼재에서 3㎞를 걸어오고서야 호절골재 표지목을 대면한다.
화사함으로 가득한 봄날 같은 기온을 하고 있는 이곳에서 급기야 참았던 겉옷을 벗어 배낭 속에 담고 1㎞로 남은 덕유삼봉산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사진 : 호절골재 표지목)
산죽으로 가득한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다 보니 덕유삼봉산을 만나고
덕유산군을 벗어나야하는 이곳의 정상에서 간간히 능선을 오가는 부드럽고 시원스런 바람결을 맞이하며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주변경관들을 바라보면 지나왔던 백두대간의 덕유산군(빼봉,갈미봉)과 거창고재면의 들녘과 마을들이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사진 : 덕유삼봉정상 1,294m)
(사진 : 거창 고재면일대 전경)
(사진 : 덕유삼봉산을 지나 암봉 날등의 대간마루금 난간 나뭇가지에 눈이 얼어 붙은 얼음꽃이 가관이다)
(사진 : 거창 고재면 봉재리 일대 산기슭에 다락밭의 전경이다)
(사진 : 삼봉산에서 소사재를 내려 서기 위해 암봉 날등을 따라가는 협소한 대간의 마루금이다)
덕유삼봉을 지나면서 암봉 날등을 따라가다 보면 로프에 매달려 바위벽을 내려서야 하는 위험구간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구간을 피해 우회하는 길이 있다 우회하는 안전한 등로를 선택하여 내려서야 한다.
(사진 : 마루금을 비켜나면 낭떨어지기다 - 위험구간)
(사진 : 뒤 따라 내려 오는 산님들을 돌아보며 암봉 날등의 마루금을 재조명 해 본다)
삼봉산을 내려서기 위해 암봉능선을 따라가며 조망되는 주변에는 삼봉산 1,254m에서 660m소사고개로 내려서는
내리막길은 눈길로 채워져 있는 빙판길이고 가느다란 로프 줄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조심해야 할 구간이었다.
그런 구간을 미끄럼을 타듯이 산을 내려서고 보며 고랭지배추밭이 드러나는 소사재로 안착을 한다.
(사진 : 소사재로 내려서는 비탈길이 미끄러워 로프에 의지하며 내려선다)
(사진 : 소사재로 내려서다가 비탈길에 서 있는 石이 마치 삼봉산은 제일이야라고 표지한 立石같다)
(사진 : 소사재로 내려서 고랭지배추밭으로 들어서야 하는 대간길을 통제하려는 듯한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 직진하여 낙엽송길을 통해서 들어서도 대간길을 벗어나지는 않으나 원칙은 출입문을 들어서자 말자 우측 산길로 올라야 정상적인대간의 마루금을 밟고간다)
(사진 : 소사재로 내려서는 고랭지배추밭이 하얀눈으로 가득하다)
소사재 고랭지배추밭들은 하얀 雪로 가득하여 마치 선자령의 일면을 대하는 듯이 하였고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시는 그 눈밭에서 일행들은 잠시 편안한 자리를 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하는 행복한 시간을 갖고서는 고도표에 포물선을 그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덕유삼봉산에서 소사재로 내려서 고랭지배추밭을 걸으며 삼도봉(초점산)을 향해 대간길을 잡아 오른다.
(사진 : 배추밭에 먼저 지나간 산님들의 발자국이 하얀 雪에 깊이 박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진 : 배추밭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소사재로 향한다)
(사진 : 소사재다 도로건너편에 대간안내표지판이 있고 표지판 뒷편으로 대간길을 오른다 인근에는 매점이 있으며
민박도 된다)
(사진 : 소사재 대간안내판 뒤 숲길로 오른다)
(사진 : 다시 배추밭으로 대간길이 이어지는데 아까운 배추들은 수확기를 포기한 채 밭에 그대로 동사한 모습이다)
(사진 : 소사재에서 묘가 있는 뒤 언덕길로 삼도봉(초점산)을 올라서다가 내려선 삼봉산을 뒤돌아 올려다 본다)
(사진 : 산길로 접어 들기 전 하얀눈으로 가려진 배추밭에서 뾰사시 하게 이웃사촌님 사진 한장 남긴다)
(사진 :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사진 : 낙엽송으로 이어지는 대간길이다)
개가 짖는 민가를 지나 낙엽송 산길을 거닐고 솔바람 솔솔 향기 품어내는 오솔길 같은 마루금을 이어가는 산행길은 남쪽으로부터 전해오는 따스한 기온에 눈 녹임으로 흘러내리는 물기들을 자아내며 바지는 어느새 흙탕물로 범벅을 한다.
그런 산행길이 점심식사를 하여 배부른 탓인지 아님 발품을 팔고 싶어지지 않는 무력감 때문인지 소사재에서부터 삼도봉(초점산)을 오르는 길이 참으로 버겁고 힘이 들었다.
(사진 : 대간길 마루금을 안내하면서 판매상품을 홍보하는 안내판이다)
(사진 : 삼도봉(초점산)으로 어어지는 대간의 마루금도 여전히 심설로 가득하다)
(사진 : 삼도봉을 오르며 이 고장의 정겨운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난다)
(사진 : 삼도봉을 오르는 이 구간은 따뜻한 햇살로 인해 눈 녹은 물로 질퍽거리는 산행길을 오른다)
그런 힘겨움에 위안이라도 삼을 양 시조 한 구절이 떠오른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 만은 하고 중얼거리듯 하며 쌓여 있는 하얀 雪을 밟기도 하고 질퍽거리는 산행길을 오르기도 하다 보니 삼도봉(초점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마치 이곳에는 겨울의 끝자락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이른 봄의 절기가 공존하며 교차하는 시점을 만나는 듯한 따뜻한 기운들을 발하여 젖은 땅바닥에 신발은 흙으로 묻어난다.
(사진 : 삼도봉 정상에서 흔적을 남긴다)
그런 삼도봉(초점산)에서 약 40분정도 내려서다가 다시 올라서야 대덕산 정상을 만나는데 내려서다 바라보이는 대덕산의 모습은 육중한 육산으로 엎드려 있는 곰 등 같은 형상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마루금을 긋고 있었다.
그 마루금처럼 삼도봉에서 이어지는 대덕산 정상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를 수 있었다.
(사진 : 삼도봉을 내려서다 마주하는 대덕산의 육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마루금이 들어나 보인다)
(사진 : 대덕산을 오르다가 내려섰던 삼도봉을 바라다 보고)
(사진 : 대덕산 정상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대덕산은 예로부터 봉황을 닮은 산세로 덕이 많은 산이라하여 이 산이 품어내는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끊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런 의미 있는 영산(靈山)을 이번 산행길에 올라 나의 마음속에 바램들을 기원하며 대덕산의 덕기(德氣)를 마음속으로 품어 안고 산을 내려선다.
(사진 : 대덕산 정상석에서 부부가 흔적을 담아보고)
(사진 : 대덕산유래와 특징이 소개하는 안내판도 담아본다)
(사진 : 이웃사촌님 하늘이 맞닿는 대덕산정상에 서오니 우러러 보이네요)
(사진 : 정상 비탈에 녹다 남은 雪이 얼음조각을 만들어 내고있다)
(사진 : 대덕산 비탈길을 내려서 덕산재로 갑니다)
덕산재로 내려서는 비탈길 7부 능선쯤 얼음골약수터가 목을 추이기 위한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약수터 옆 표지판에는 덕산 얼음골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글귀가 남아있었다.
얼음골약수터에서 목을 추기는 길손들이시여!!
사랑하나 풀어 던진 약수터에는
바람으로 일렁거리는 그대의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모금의 샘물에서
우리를 구원함이 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우리는 한 모금의 샘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생물의 원천이 곧 물이로되 그 벗 또한 물을 생산하는 산이라는 자연의 대한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다시 발길을 옮기며 내려서다 보니 대덕산정산안내표지판에 기록되어 있던 얼음폭포 표지판을 만나게 되고 그 표지판을 따라 얼음폭포로 들어서 본다.
(사진 : 얼음폭포의 표지목)
(사진 : 얼음폭포가 雪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작은 폭포는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어 그 모습은 드러나 보여 지지 않아 폭포의 형태가 궁금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해발 980m지점의 높이에 있는 동쪽 방아골 암벽에서 떨어지는 얼음폭포는 낙동강의 발원지라 한다.
뉘라서 이 물맛을 보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나 싶어 주변에 있는 조금만한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 한바가지 퍼서 목을 적셔본다.
물맛 한번 좋다!!
산삼 썪은 물이라는 한 대원님의 말에 ㅎㅎ 웃음 한번 날리고 덕산재로 내려선다.
(사진 : 얼음폭포가 雪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사진 : 덕산재로 내려서기 위해 오르는 마지막 계단)
(사진 : 김천시 덕산면방향 들녘이 들어난다)
이번 산행은 빼재(신풍령)에서 덕산재까지 다소 짧아보였던 코스이지만 고도차이가 심하고 눈 덮인 대간산길은 빙판을 이루어 미끄럽거나 눈 녹은 물로 산행길이 질퍽거리는 등 좋지 않았던 여건으로 체력소모가 다소 심했던 산행이지 않았나 생각되며 안전산행이었기에 더 없이 이 자연과 대덕산 산신령님께 감사하며 대간산행을 종료한다.
(사진 : 덕산재고개 30번 국도다)
덕산재는 김천시 대덕면의 행정구역이고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으로 이어지는 30번국도 고개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덕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덕산재에서 대덕산 3.5키로라는 표지목과 백두대간 안내지도판이 설치되어 있고 도로 건너편에 백두대간의 비가 세워져 있었으며 그 뒤로 대덕산 산삼이라는 간판을 걸어 둔 건물이 한 채 있었으나 빈집처럼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있었다.
(사진 : 덕산재에 설치된 백두대간 안내표지판)
(사진 : 덕산재 표지목이다)
(사진 : 덕산재에 세워져 있는 백두대간비)
(사진 : 덕산재에 백두대간비에서 우리부부도)
(사진 : 이웃사촌님 부부도)
(사진 : 수고하신 대장님도 흔적을 담아본다)
♧ 백두대간의 사람들
- 큰 스님 얼굴인가, 봉황의 얼굴인가
스님은 절집을 지을 만한 땅을 찾아다니는 듯했다. 스님은 대덕산(1260m)의 이름이 무엇을 이르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법이 높은 큰 스님을 이른는 말이 ‘용상대덕’이라고 일러준 것도 스님이었다. 속리산에서만 40 성상을 지냈다는 스님이 법주사를 등지고 절 한칸 없는 대덕산 자락에 머물게 된 연유를 물었다. 스님은 머리를 깎고 이 날이 오기까지 밥을 짓는 일을 감독하는 벼슬도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이력을 들려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조계사에서 스님의 머리가 깨지고 염주를 건 할머니가 “어떻게 스님들이 이럴 수 있느냐”며 눈물짓는 일이 왜 일어나는가를 말하는 듯했다.
- 큰 스님의 덕이 사람을 가르고 12지신이 난리를 막는다
스님에게 무풍 땅이 도대체 어떤 땅이냐고 물었다. “나제통문을 지나면 독립국이여. 별세계지. 무풍성지라고 해야 맞아.” 스님은 용을 답하고 코끼리를 그린다. 스님의 느릿한 말 속에서 뿔을 세운 황소가 달려 나오고 호랑이는 표효하며 세속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스님은 법명도 일러주지 않은 채 덕산재를 내려 가버렸다.
전라북도의 동북쪽 끝에 자리잡은 무주군에서도 무풍은 동쪽 끝이다. 지도를 펴들면 무풍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로 그려진다. 북으로는 민주지산에서 뻗은 준령들이 충청북도 영동과의 길을 막는다. 1000m 이상의 높이로 버티고 선 백두대간이 동에서 남으로 휘어 감았다. 군청 소재지인 무주읍까지 나가는 길 또한 대덕산과 이어진 백두대간 삼봉산에서 가칠봉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가로막는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 무풍이다.
- 파리소에 전하는 이여송의 전설과 신라·백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이야기
대덕산의 기운을 믿는 것은 김 사장뿐이 아니었다. 무풍 사람들 대부분은 대덕산의 정기를 소중하게 여긴다. 인구 3천여명에 지나지 않는 한적한 산골 무풍이 배출한 장군의 별이 7개이고 국회의원을 두 사람씩 배출한 것도 대덕산의 정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산을 보시래요. 능선이 위엄있지만 온유하잖아요. 온순하지만 강직한 무풍 사람들의 기상도 다 저기서 오는 겁니다.” 무풍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대덕산의 능선은 사방으로 펼쳐진다. 북동에서 남서로 뻗은 능선은 백두대간을 이루고, 남쪽으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또한 가야산맥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대단하다. 명당이나 길지로 불리는 땅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대덕산의 산세도 봉황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덕산이 봉황의 몸이고 백두대간이 날개라는 것이다. 가야산맥을 봉황의 긴 꼬리로 보기에 무풍쪽으로 뚝 떨어진 날등은 봉황이 머리를 숙인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무풍에는 봉황의 알이 되는 망덕산까지 솟아 있다. 봉황이 알을 품느라 몰아주는 기운 때문에 무풍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는 게 주민들의 믿음이다.
덕산재 중턱에는 무풍이 배출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한일합방 무렵 일제에 맞서 일어섰다가 유명을 달리한 황대연, 이병열, 이종성 세 의병장을 기리는 기념물이었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김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안은 의병을 내지 못했다며 이름 밝히기조차 한사코 거부했다. “그저 살아온 내가 무슨 이름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아는 것이 없다며 겸손해 하던 할아버지의 입이 열리면서 펼쳐지는 무풍의 역사는 신라와 백제가 창검을 맞대던 시절로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김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무주를 잇는 길 ‘나제통문’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서 일제가 신작로를 내느라 뚫은 굴로 전락한다. 당나라 이여송이 지맥을 끊느라 내려친 칼에 맞아 땅이 흘린 피가 고이고 그 피웅덩이에 파리가 들끓어 파리소가 되었다는 나제통문 옆의 소는 버려진 신라와 백제의 병사들의 버려진 주검의 이야기로 사실성을 확보한다. 밀고 밀리는 전쟁. 죽은 병사를 제대로 매장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주검은 적군이 됐든 아군이 됐든 그대로 남대천 물이 만나는 파리소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는 나제통문으로 알려진 신라의 국경을 무풍읍 현내리 거문들 마을까지 끌어올린다. 나제통문에서 거문들 마을까지는 수km 떨어진 거리. 이 공간에서 백제와 신라는 밀고 밀리며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1968년에 펴낸 <무주군사>는 당시의 국경이 때로는 나제통문이 됐다가 진들마을 앞이 되고 거문들이 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분단의 역사는 이미 1500여년 전에 끝났지만 흔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거문들 앞을 흐르는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말이 다르고 풍습 또한 다르다. 나제통문이 지나는 능선을 건너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무풍은 분명 전라도 땅이건만 경상도 말씨가 익숙하다. 생활권은 김천과 거창에 두고 있다.
무풍에 양반들을 이주시킨 것은 격암 남사고의 십승지지설이었다. 남사고는 덕유산 인근에 난을 피할 수 있는 길지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풍사람들은 그곳이 무풍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임진왜란 전후 어수선한 시절 많은 양반들이 무풍으로 들어왔다. 백산서원, 난계서원, 죽림서원, 춘향서원이 이들이 남긴 유산으로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 말기에 민병석이라는 사람이 99칸에 이르는 행궁(왕이 지방에 내려갈 때 머무는 곳)을 세운 곳도 무풍이었다. 명례궁으로 불리던 행궁은 8·15 뒤 어수선하던 시기에 이리저리 헐려 팔려 나갔다고 한다. 이때 충북 영동으로 팔려 나가 지서 건물로 쓰이던 건물은 지금 무풍땅에 다시 돌아와 있다. 김 할아버지도 행궁이 다시 세워질 날을 위해 당시 쓰이던 기와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