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 가을 사랑 -
가을을 걸으며
박종천
아마
너 없는 세상이라도
나는 살아가겠지
슬픔도 기쁨도 없는 그 어디쯤으로
아마
늘 그리워하겠지
물기 하나 없는 바스라지는 낙엽으로
아마
조금씩 지우겠지
눈물의 양만큼 덜해지겠지
그래도
잊지는 못하겠지
가을빛은 이리도 좋은데
*박종천 : 대구출생, 경영학사. 현 필봉 문학회 회원
개울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컴컴한 밤길이었지만, 나는 하나도 외롭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건 당연히 유희가 있기 때문이었다. 개울로 가는 과정은 마치 그녀와 어떤 목적지에 가는 것처럼 설렜다. 하지만 길을 걷는 동안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몹시 복잡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밤에 둘러싸인 호젓한 산길을 그녀와 단둘이 걷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안 추워? 괜찮아?”
“조금요.”
그녀가 잠시 몸을 떨기에 나는 내 상의를 입혀주고 왼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자연 그녀의 몸이 내게로 기울어지자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댔다. 그때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아까 불렀던 노래가 청춘이란 곡이죠?”
“그래, 기억나?”
“그럼요. 그때 광안리 바닷가에서 직접 기타로 불러줬잖아요. 그때 아저씨가 저더러 너의 청춘도 나처럼 세월이 흐르면 덧없이 갈 거야, 하고 놀렸죠. 그 말이 신기하게도 딱 맞아 떨어지네요.”
그녀는 울퉁불퉁한 산길에 행여 넘어질까 봐 내 몸에 더욱 밀착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발을 약간 삐꺽했다.
“어머!”
“왜 그래? 다쳤어?”
“아니에요.”
놀란 나는 손전등을 그녀의 발에 비췄다. 다행히 크게 비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털고 일어섰다. 아직 개울로 가려면 좀 더 가야 했다.
“안 되겠어. 내게 업혀.”
나는 얼른 그녀 앞에서 다리를 접었다.
“뭐에요? 창피하게.”
“창피할 게 뭐 있어? 개울에 가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야.”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뭐해? 예전에도 많이 업혀놓고선. 새삼스럽게. 기억나? 우리 그때 광안리 바닷가 가기 전, 어떤 골목길에서 오늘처럼 발을 삐어 내가 그곳까지 업고 갔잖아.”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었다.
“기억나요. 그때 아저씨가 몹시 힘들어했잖아요.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들었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그녀는 진정으로 날 걱정해서 한 말이었으나,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이, 라는 단어가 나오자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아직 내 마음은 최소한 그녀에게만큼은 젊은 청춘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때보다 난 지금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해. 매일 산에 나무하러 가고, 텃밭을 가꾸면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고 있잖아. 못 믿겠으면 한 번 업혀 봐.”
그러자 그녀는 못내 미더워하면서 내 등에 업혔다. 그녀의 체온은 따뜻했고 그녀 특유의 향은 향긋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 그녀를 업었을 때보다 오늘은 그녀가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말한 대로, 내 육체가 강건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현재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일상이 불안하면 먹는 게 쉬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불면과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까만 봐도 그녀는 친구인 미란보다 음식을 훨씬 적게 먹었다.
“괜찮아요?”
잠시 그 생각으로 산길을 걸어갈 때 그녀가 또 걱정되듯이 내게 물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날 걱정해주는 그녀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나보다 그대는 지금 어때? 정말 괜찮은 거야?”
“…….”
그녀는 침묵했다.
“아까, 미란이에게서 조금은 들었어. 그러니 내겐 다 말해도 괜찮아.”
“빨리 가요. 물소리가 듣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완강히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다. 심정은 이해되었으나 나는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가을밤 개울물 소리는 듣기에 따라 장엄한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들리기도 했고, 잔잔한 모차르트의 선율이 되기도 했다. 유희는 지난번에 함께 폭우를 맞았던 바위로 올라갔다. 짙은 숲 내음이 사방으로 퍼지고 풀벌레 소리는 물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마법의 공주가 귀뚜라미 등 벌레들을 모아놓고 합창의 지휘를 하는 것 같았다.
“여기 오니까, 마음이 풀려요. 너무 좋아. 맑은 물소리, 벌레 소리. 아저씨는 좋겠어요. 매일 이런 풍경 속에 있을 거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그때, 이곳에서 함께 떠내려갔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어쨌든 그녀의 표정이 밝아져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나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녀는 앉아서 손으로 개울물을 떠 밑으로 보내고 있었다. 물이 몹시 차가울 텐데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계속 살 거예요?”
그녀는 물을 떠 밑으로 보내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시선을 옮기지도 않고 내게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늙어 죽을 때까지?”
“그럴 거야. 이제 난 도시에서 살 수가 없어. 뿌연 매연과 미세먼지, 차들은 또 왜 그리 많은지, 한 번씩 무산 시에 가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어. 난 이곳, 지리산이 좋아. 여기에 있으면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 자연에서 사는 게 어쩌면 도시에 살 때 내 꿈이었을 수 있어.”
그녀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랬었죠. 저도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대는?”
나는 반문했다. 은근슬쩍 그녀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요?”
“아니, 그냥. 계속 그 희망도 없는 남편이라는 작자와 함께 숨죽이며 도시에서 살 거냐고?”
내 말에 다시 그녀는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미란이에게서 그대의 사정을 들었어. 나도 조금은 알고 있단 말이야.”
그녀는 물 떠는 것을 멈추었다. 이내 무릎을 모으더니 쪼그려 앉아 자신의 고개를 무릎 사이로 넣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녀는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기 때문에 나는 자세히 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아저씨와 미란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라구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크게 말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왜 널 때리고 매사에 의심하면서 지랄하는 거야? 뭔가 착각하는 것 아니야? ”
“다, 제 잘못이에요.”
“뭐가, 무엇이 네 잘못이라는 거야? 응? 난 너무 답답해. 그럴 밖에야 그만 이혼해버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진심이 나온 것 같아, 말을 해놓고서도 스스로 당황했다.
“그건 안 돼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순 없어. 아니, 우리 아이 때문이라도 안 돼요. 그건.”
그녀의 말에 나는 또 내 속의 쓴 뿌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난 뭐야? 나도 이혼하면서 내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고 소중한 내 아이들을 버렸어. 난 도대체 뭐냐고?”
“아깐 여기서 행복하게 산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이 대목에서 의외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난 그 점이 화가 나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넌, 너밖에 몰라! 알아?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그런데 내 말에 그녀도 지지 않았다.
“아저씬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 차마 내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아저씨도 그때 이혼만큼은 안된다, 그러지 않았어요? 아니, 그러면서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아저씨 마음대로 했잖아요.”
논쟁은 여기까지 했으면 했다. 하지만 옛 상처가 드러나자 나와 그녀는 그때, 가장 우리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나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의 그녀와 함께 하는 가을밤을 이렇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만하자. 이럴 의도가 아니었어.”
나는 내뱉듯이 그녀에게 내 본심을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한동안 침묵했다. 다툼을 그치게 하는 좋은 방법인 침묵은 이럴 때 유용했다. 나는 그녀와 있으면서 좋았던 기억만을 의식적으로 떠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에게 받았던 상처, 배신, 실연 등의 기억은 저 흐르는 물처럼 생각에서 멀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내 마음이 그녀에게도 전달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제가 미안해요. 조심한다고 했지만, 자꾸 말이 헛나오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듯했다. 당연히 내 마음은 풀어지면서 왠지 그녀가 안타까웠다.
“내가 더 미안해.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바뀌어야 하는데, 난 아직도 그게 잘 안 돼.”
말을 끝내고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슬며시 웃고 있었다.
“아저씬 나이를 헛먹은 거예요.”
놀리듯이 말하는 걸 보니 그녀의 마음은 확실히 풀린 것 같았다.
“그런가 봐. 하하.”
이렇게 농담과 웃음으로 나와 그녀의 불편한 마음은 사라졌다. 그녀는 무엇인가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지 자꾸 내 얼굴을 곁눈질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지.”
“이혼 후 아이들과의 사이는 어때요?”
민감한 사안이었지만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날 이후로 연락이 안 돼.”
“네? 세상에. 그래도 아빠잖아요. 먼저라도 연락을 안 해보셨나요?”
그때 그 상황이 떠오르자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아파트 앞 공터에서 그들은 날 벌레 보듯 했다. 큰 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빠 인생대로 살아가세요. 원래 그런 분이니까. 대신, 엄마나 저희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요.’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날 나는 모든 것을 접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연락할 상황이 안 되었어.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에 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 잘살고 있겠지.”
“…….”
“우리 그만 일어설까? 미란 씨가 많이 기다리겠어. 얼른 가서 술친구 해주어야지. 가을밤은 길고 기니까 말이야.”
나는 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