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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2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Période Hellénique et Rome 231
제1장 소크라테스 학자들 Les socratiques 233
제2장 옛 스토아주의 L'ancien stoicisme 253
제3장 [기원전] 3세기에서 에피쿠로스주의 L'épicurisme au IIIésiècle 295
제1절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 (Epicure et ses élèves, 295)
스토아학자들의 대대적인 체계 이후에, 정원에서 휴식하는 긴장완화가 있다. 그 정원에서 에피쿠로스(Épicure, Ἐπίκουρος, 전342-전270)는 자기 친구들과 사적인 공간에서 철학하였는데, 그 당시에 제논(Zénon, Ζήνων, 전335-264)은 그림이 그려진 기둥(le portique Poecile)에서 많은 공중들에게 이론을 전파하였다. 이 두 정신적 지주들 사이에는 그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통점의 하나로서] 도시국가의 와해라는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에피쿠로스에게서는 제논에서처럼 신생 제국들과 세계시민사상의 애착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에 소피스트적인 옛 비판의 수준에 머물렀다. [다른 하나로서] 인식의 감각적 이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논에서처럼 합리적 변증법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 [또 다른 하나로서] 자연학과 도덕론 사이의 밀접한 연결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둘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은, 제논에게 종교적 존경을 불러일으킨 그 무엇을 공경하지 못하게 하도록 정확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더하여] 도덕적 선전의 크나큰 욕망이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서는 선택되고 시련을 겪은 친구들에 의해서 훈련되었다. [또한] 이 두 철학학파에게는 거의 작가[저작자]들이 없다. 그런데 제논은 새로운 용어들(des mots 단어들)과 새로운 기호화작업들(des significations)을 창안한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크뤼시포스(Chrysippe de Soles, Χρύσιππος, 전281-205)와 마찬가지로 다방면 기고가로써 단순하고 하찮은(아무렇지 않은) 언어에 만족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테네의 정원에서 그리스인들 사이에 상류층에 있는 셈이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나 출신인데 그럼에도 그는 사모스 섬에서 자랐다. 또한 그곳은 이오니아와 이웃하는 해변들과 섬들이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그의 초기 제자들이 왔다. [고대 리디(Lydie) 지방의] 해안가 트로아드(Troade)지역에 있는 람프사크(Lampsaque, Λάμψακος)에서 온 제자로서는 메트로도로스(Métrodore, Μητρόδωρος, 전331–277), 폴뤼아이노스(Polyaenus, Πoλύαινoς 전340경–278), 레온테우스(Léontée, Λεοντεύς 전 3세기경), 콜로테스(Colotès, 전320경- 268), 이도메네우스(Idoménée, Ἰδομενεύς, 전325경-270) 등이 있다. 뮈틸레네(Mytilène, Μυτιλήνη)로부터 온 사람으로는 헤르마르코스(Hermarque de Mytilène, Ἕρμαρχoς, "reign of Hermes(헤르메스의 통치)" 전325경-250경)가 있는데, 그는 에피쿠로스의 첫 계승자이다. 14살에 철학을 시작 했다고 과장하는 에피쿠로스를 받아들일 만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한 접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Ménécée, Μενοικεύς, s.d.)에게 이런 편지를 썼는데, “그 젊은이는 철학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을 정도였고, 그 늙은이는 철학하기를 피곤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정성을 쏟는데 너무 늦지도 너무 일찍 지도 않았다. 철학하는 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또는 지나갔다고 하는 말, 그 말은 행복을 욕망하는 시간이 아직 아니거나 또는 더 이상도 아니라고 하는 말이다.”
에피쿠로스는 341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사모스 섬에서 보냈고, 323[열여덟]년에 아테네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테네에서 당시 그리 오래지 있지 않았고, 콜로폰으로 은퇴했다. 알렉산드로스(356-323)대왕 사후에, 그의 은퇴는 아테네의 마케도니아 지배자들이 그에게 보여준 적대성에 연관이 있다. [이탈리아 문헌학자인] 비그노네(Ettore Bignone, 1879–1953)의 탐구 덕분에, 사람들이 에피쿠로스가 310년[서른하나]에 [로스보스 섬의] 뮈틸레네에서 행했던 교육의 중요성을 이제는 안다. 거기서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프락시파네스(Praxiphane, Πραξιφάνες, 전4세기-3세기초)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프락시파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학설을 가르쳤으며, 대화편들 중의 한 대화편은 상실되었지만, 플라톤의 도덕적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몇 년 후에 아테네로 되돌아왔고, 거기서 306년[서른다섯]에 학교를 세웠는데, 그때는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Démétrios Poliorcète, 전336-283)가 지배하던 시절이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유명한 정원(jardin, κῆπος)을 80므나(mines)로 샀다. 거기에서 270년[일흔하나]에 세상을 뜨기까지 그는 자기 친구들과 대담하였으며, 이들에게서 그는 자신 매서운 질병의 위안을 찾았다. 그 질병은 아마도 그를 여러 해 동안 마비시켰던 병이었다. 그가 쓰기를, “지혜가 우리에게 전 생애를 위하여 준비해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매 순간마다의 내밀성[친밀성]을 생각하면서, 우정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에피쿠로스의 유언장은, 그가 우리에게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에 전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가 이 공동체에의 영혼이었다. 그의 유언 집행자들은 정원(학당)을 보존할 임무를 맡았다. 헤르마르코스와 학파에서 두각을 나타낸 계승자들 모두의 임무였다. 에피쿠로스는 헤르마르코스와 학파의 철학자들에게, 이들이 공동으로 거주해야 하는 집을 유증했다. 에피쿠로스(전342-전270)는 자신과 이미 사라진 그의 제자들을 – 메트로도로스(전331–277)와 폴뤼아이노스(전340경–278) - 존경하는 추념의 행사를 매년 실행하기를 규정했다. 그는 메트로도로스 딸의 운명을 예견했고, 그리고 그녀에게 일반적으로 모든 자기 제자들의 필수품을 공급하도록 장려했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 에피쿠로스학파의 연구소들은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에서, 즉 람프사크에서, 뮈틸레네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이집트에서도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연구소 연구자들은 그 스승이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
이 학파의 소(小)학당들에게서 우리는 아마도 직접적인 자료들만을 얻는다. 이 자료들에 의해 우리는 체계의 요약을 포함하는 에피쿠로스의 세 가지 기획-편지들을 알게 되는데, 하나는 자연에 관하여 헤로도토스(Hérodote, Ἡρόδοτος, s.d. [전3세기경])에게 보낸 편지, 다른 하나는 기상학들에 관한 퓌토클레스(Pythoclès, Πυθοκλής, s.d.)에게 보낸 편지, 셋째로 도덕에 관한 메노이케우스(Ménécée, Μενοικεύς, s.d.)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런 편지들은 그의 중요 제자들, 헤르마르코스와 메트로도로스와 더불어 구체적인 집필들일 수 있는데, 이미 상실했던 몇몇 저술들의 경우도 있다. 편지 이외에 중요 사상들(Pensées principales)이 있는데, 이 저술에서는 에피쿠로스가 자기 체계를 요약한 40편이 들어 있다. 그리고 거기에 1888년에 발견된 81편들을 보태야 한다.
그는 허약한 건강과 세련된 심장을 지닌 인간이다. 그의 적들은 그를 방탕한 자로서 표상하였는데, 그는 즐거움[쾌락]의 도덕론을 이런 용어들로 설교했다: “생활을 안락하게 하는 것은 필수품들도, 여성들의 환대도, 사치스런 식탁들도 아니다. 모든 욕망과 모든 혐오 원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고 영혼들을 혼란하게 하는 견해들을 몰아내는 것은 검소한 사상이다.”고 썼다.
사람들은 얼마나 그가 초기 제자들에 의해 숭배 받았는지를 안다. 또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싯구들을 아는데, 그 싯구에는, 그가 죽은 지 200년이나 이상 지난 이후에도, 루크레티우스((Lucrèce, 전98-55)가 그의 천재성에 존경을 표하였다.
“그는 한 신이었다. 맞어, 신이었어. 삶의 방식을 발견한 첫째 신이야. 삶의 방식을 사람들은 이제 지혜라고 부른다. 그는 그의 기예(son art)에 의해 우리가 이런 폭풍과 저런 밤중을 피하게 했으며, 우리들의 삶을 아주 조용하고 매우 빛나는 일생을 세상에서 지내게 하지”
영혼의 고요와 정신의 빛, 이 두 논제들은 서로 뗄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의 내밀한 연결은 에피쿠로스주의 독창성을 만들었다. 영혼의 고요는 우주의 일반 이론, 즉 원자론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을 뿐이며, 이 이론만이 모든 근심과 걱정의 원인을 사라지게 한다.
제2절 에피쿠로스의 경전 (La canonique épicurienne, 298)
키케로가 말하기를, “에피쿠로스는 매우 탁월한 말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과 합일로 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철학은 신중하고 구별된 명증들에 의해 진행하는 철학들 중의 하나이며, 이런 명증들의 각각은 그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의 첫 부분이 경전(la canonique)이다. 경전은 진리의 기준들과 규범들에 관한 것이며, 스토아학파의 논리학과는 전혀 유비되지 않는다. 이 경전은 단지 다양한 명증들의 열거일 뿐이다: 정념 또는 수동적 감화(πάθος), 감각작용, 선개념(πρόληψις, 앞선 용어), 그리고 넷째 기준이 있다. 디오게네스는 이 넷째 기준을 에피쿠로스 제자들에게만 부여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종종 스승 자신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넷째는 한눈에 파악 또는 반성의 직관(φανταστικὴ ἐπιβολὴ τῆς διανοίας)이다.
첫째 명증은 정념(la passion)의 명증인데, 말하자면 즐거움(쾌락)과 고통의 명증이다. 아리스티포스(Aristipp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356)는 또한 이것으로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약간 다르다. 단지 아리스티포스에게서는 수동적 상태가 지각 가능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의 원인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없다. 반대로 에피쿠로스(Épicure, Ἐπίκουρος, 전342-전270)에게서는 명증이 기준의 원인에 근거한다. 즐거움은 안락한 즐거움의 원인을, 고통은 힘든 고통의 원인을, 필연적으로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감각작용(la sensation)을 가지고서 진리의 둘째 기준을 만들면서, 에피쿠로스는 아리스티포스와는 아주 다른 것을 말하고자 원한다. 에피쿠로스에 있어서, 수동적인 상태인 각 감각작용은 우리에게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모든 감각작용들은 동등하게 변화를 하고, 그리고 대상들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정확하게 있다. 감각작용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정보들을, 단지 우리 스스로 파악하는 조건에서,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수동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감각작용들은 외적 영향에게 보탤 것도 뺄 것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감각 작용들보다 이런 감각작용들을 의심할 이유도 전혀 없다. “감각작용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지각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학인들에게 감관들과 착각들에 모순들을 반대한다면, - 착각들은 독단론에 대한 반대자들의 통상적 논증이었는데 – 에피쿠로스 학인들은 어떻게 오류가 표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덧붙여진 판단 안에 있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탑이 멀리서보면 둥글고, 가까이서보면 각이 있다. 사람들이 탑을 둥글게 보는 데서 속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탑에 가까이 갔음에도 탑이 둥글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믿는 데서 속고 있다. 모순은 표상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거기에 덧붙인 판단들 사이에 있다. 무매개적 명증을 신뢰함, 이유가 덧붙인 모든 것들에 대해 불신을 동반하는 신뢰, 그러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인식이론의 표시이다.
이 반대자들의 통상적 전략은 독단론을 주관주의로 환원하려 시도하는데 있었는데, 주관주의를 무매개적인 인상들로 한정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항상 스스로를 방어했다. 이런 방어는 에피쿠로스의 직계 제자인 콜로테스(전320경- 268)의 저술의 주제였던 것 같다. 이 저술은 「다른 철학자들의 다른 학설들에 따라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 자체이다」이다. 플뤼타르코스(Plutarque, Πλούταρχος, 46-125경)의 반박문으로 알려진 논문(「콜로테스에 반대하여」)에서, 그 에피쿠로스학자(콜로테스)는 감각적 인식을 잡종 인식처럼 생각했다고 하여 계속하여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전460경-370경)를 공격하였고, 사물들의 다곱성(multiplicité, 다양성)을 부정했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를 공격하였고, 사물들 사이에서 본성상 차이들의 실재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엠페도클레스(Empédocle, 전490경-430경)를 공격했고, 소크라테스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찾으려하면서 인간이란 용어만큼이 분명한 용어들을 관해서 주저했다는 이유로 소크라테스(Socrate, 전470/469-전399)를 공격했고, 감각적 사물들에 실체성을 거부했기에 플라톤(Platon, 전428-전348)을 공격했고, ‘아무것 아닌 것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해 질 수 없다’라는 메가라학파의 오래된 논증의 주제를 주장한다고 하여 메가라학파의 스틸폰(Stilpon, 전360경—280경)을 공격했고, 우리의 표상들이 우리를 실재성들로 이끌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 퀴레네 학자들과 아르케실라오스(Arcésilas, Ἀρκεσίλαος, 전315경-241경)를 공격했다. 그리고 플뤼타르코스는, 에피쿠로스학자들을 자신들이 반박하고자 원했던 자들과 비교하는 것 이외 다른 응답의 방법을 갖지 않고서, 에피쿠로스의 원전들 자체로부터 감각작용들의 상대성에 대한 자백을 끌어낸다.
감각작용과 정념 이외 다른 명증성들도 있다. 모든 질문은, 제기되고 이해되기 위하여, 우리가 요구된 사물의 용어[개념]들을 미리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신들은 현존하는가? 앞서가는 동물이 소인가 또는 말인가? 모든 질문들은, 우리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기에 이르는 현실적인 감각적 인상에 앞서서, 우리가 신들, 소, 말 등등의 용어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즉 영혼에 내재하는 앞선 용어들(prénotions, 선용어)이 있고, 그럼에도 이 선용어들은 이전 감각작용들로부터 유래하며, 스토아학파의 공통용어들처럼 다소 임의적인 변증론의 결실들이 전혀 아니다. 이런 기원 덕분에(사람들이 신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기원인데, 예를 들어 신들의 용어는 매우 실재적인 이미지들로부터 생겨났으며, 우리는 수면 중에 이런 이미지들을 갖는다), 선용어는 상상적인 사물의 용어들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현존하는 사물의 용어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ène Laërce, 3세기경)는 이 용어를 지각작용 또는 올바른 견해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 선용어는 명증한 현존의 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선용어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과거 경험의 결과인데, 그 과거 경험은 현실적 경험보다 적지 않게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과거 경험을 현실적 경험을 가지고 대치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선용어는 현실적 경험을 넘어서는 판단들 또는 신념들을 우리에게 허락해 준다. 내가 저기에 보고 있는 이 사람은 플라톤이다. 이 동물은 소이다 등등. 그러나 이런 신념들은 굳건한 판단들이 되려면, 이 신념들 자체들이 무매개적 감각적 명증성에 귀착하는 경우이고, 또한 내가 더 가까이 가서 그 사람 또는 그 동물을 보았을 때 확증(la confirmation, ἐπιμαρτύρησις)이 서는 경우에서 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그를 알다시피, 감각적 사물들에 근거한 명증들에 이를 뿐만이 아니라, 또한 보이지 않는 사물들(ἄδηλα)에 관하여도 명중들에 이른다. 보이지 않은 사물들이란 빈 것, 원자들 또는 무한한 세계들과 같은 것들이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 경전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다음 두 가지를 궁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 그는 즐거움에 대한 도덕론자이며, 쾌락은 의지의 목적이며, 그 목적은 어떠한 합리적 구축 없이도 무매개적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말하자면 무매개적 인상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합리적 구축에 관한 원자론적 자연학의 개혁가이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 묻지 않는가: 두 가지 동기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런데 단지 어떤 길에 의해 (어떤 균열에 의해) 순수 이유 또는 순수 사유에 의해 인식이 도입될 수 있는가?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명증에 의한 신념의 확증 이외에도, 다음의 경우를 구별한다. 그 경우에서, 확증이 되지 않았음에도, 확증이 약화되지 않는다. “미확정-아님(non-infirmation; οὐκ ἀντιμαρτύρησις)이란 보이지 않은 사물에 근거하는 견해를 명증하게 나타나게 하는 어떤 것에 묶여 있는 귀결적인 연결이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는 볼 수 없는 것으로서 빈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리고 운동이라는 명증한 것에 의해서 빈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빈 것이 없다면, 더 이상 운동이 없음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전체가 가득 차 있다면, 왜냐하면 운동하는 물체가 스스로 이전되는 장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아는 바대로, 루크레티우스(Lucrèce, 전98-55)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볼 수 없는 물체들에 대해 현존을 증명한다고 하는 것은 무매개적 경험의 증거에 의해서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바람의 힘, 감관들에 인상을 주는 향기들과 소리들, 습함과 건조함, 대상들의 느린 마모와 느린 증가, 이 모든 사실들은 그러한 볼 수 없는 작은 입자들의 현존을 함축한다. 이런 귀결과 함축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우리의 원전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확정-아님의 표현 자체로부터, 에피쿠로스는 드러난 경험에 의해 모순되지 않은 사물들의 개념작업에 만족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새로운 우주, 원자로 된 우주는 합리적이고 잘 연결된 전체를 형성하고, 이 전체의 원리들은 볼 수 있는 현상들의 세부 사항에게, 천체의 현상들도 또는 생명적 현상들도 마찬가지로, 설명으로 사용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자기 제자들에게 정신 앞서서 “일체의 관점(vue d’ensemble)”을 먼저 가질 것을 권고한다. 일체의 관점은 “사람들이 잘 파악했을 때와 사람들이 기억 속에 사물들의 일체의 묘사를 간직할 때, 세부 사항을 발견할” 기회를 허용한다. 일체 관점의 필연성은 주제들 중의 한 주제인데, 이 주제는 가장 빈번하게 루크레티우스의 시 속에 다시 등장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다양한 요소들에 기인하는 것을 잘 알아챌 때, 어떻게 세부적인 기후 현상들이 형성하는지를 사유의 눈으로 보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체 관점이, 보증되기 위해서, 우리가 인식에서 배웠던 명증들과 구별되는 명증한 기원이 필수적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여기서 드러난 사물들과 연결에서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을 그 자체로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만일 원자들이 어떠한 정신의 시선으로도(injectus animi = ἐπιβολή) 파악될 수 없다고 너가 생각한다면, 너는 큰 오류 속에 있을 것이다.” 또는 “세계의 장벽 바깥에서 무한 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정신이다. 무한 속에서 지성은 자기 시선[관점]을 펼치기를 원하고, 또한 무한 속에서 정신의 시선은(jactus animi) 스스로 자유롭게 난다.” 이때에 사람들은 자연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넷째 기준을 이해한다. 디오게네스에 의해 인용된 이 기준은 정신적이고 반성적인 직관(φανταστικὴ ἐπιβολὴ τῆς διανοίας)이다. 이 직관은 우주를 하나의 일체로 보고 감관들의 단순한 직관을 넘어서면서, 우리에게 원자들의 우주적 메카니즘의 광경에 참석하게 한다. 이것은 감각작용의 명증과는 다른 명증이며, 그러나 또한 감각작용 만큼이나 무매개적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루크레티우스 작품의 각 페이지에서 느끼는 정신적 명석과 만족의 감정을 동반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경전은 자연[본성]상 환원할 수 없으며 구별되는 명증성들을 잘 나열하고 있고, 그러나 이 모든 명증성들은 겉보기[현상]들을 넘어서고 실재성에 도달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56QKF)
III. 에피쿠로스의 자연학 (La physique épicurienne, 302)
어떤 조건에서 어떤 형식 하에서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자연학을 존경하여 끌어들었는가? 우리는 데모크리토스의 자연학과 더불어,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는 이오니아의 오래된 이미지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것인데, 특히 세계들의 실재성의 이미지들과 무한의 이미지들을 볼 것이고, 그 무한 속에 이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길어 올렸다. 확실히 이미지들과 더불어 그리고 이미지들에 의해 우리는 또한 이오니아인의 자유로운 정신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오니아인의 정신은 신학적 합리주의와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그 신학적 합리주의를 시실리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이 책 65쪽), 스토아학자들은 이제 그 합리주의의 대표자들이다.
사람들은 의심 없이 어떤 통로를 통하여 그(에피쿠로스)에게 데모크리토스의 체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데모크리토스 학파인 나오시파네스(Nausiphane de Téos, Ναυσιφάνης; 전325경 활동)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나오시파네스를 형식적으로 스승으로서 부인했던 것을 떠나서, 또한 데모크리토스에게도 나시오파네스에게도 조롱거리를 삼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활기 있게 했던 정신이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충분히 안다. 에피쿠로스에게 실증과학은, 즉 수학, 천문학, 음악은 전반적으로 거의 낯선 학문이었다. 또한 자연학은 그에게서 목표 자체가 전혀 아니었다. “만일 별똥별들에 대한 두려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것이라는 걱정, 마찬가지로 고통들과 욕망들의 한계에 대한 무지가 우리들의 삶에 방해하러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연학을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실용주의의 정신 상태에 닮은 어떠한 것도 에피쿠로스에게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원자론적 자연학은 그 자체로 명증성이 있고, 그 자연학의 정리들에 대한 증명은 자연학이 도덕적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결과들과는 독립적이다. 스토아학파의의 자연과 같은 자연학,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와 같은 기술자 등은 도덕적 또는 형이상학적 신념들 없이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신념들의 한 측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설은 심지어 의미도 없다. 반대로 에피쿠로스의 입자적인 자연학은, 루크레티우스의 싯구의 구석구석에 박혀있는데, 모든 도덕적 함의[함축]로부터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연학은, 인간 정신이 – 다음 용어를 말할 수 있다면 -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로부터 똑같이 멀어진 우주의 통찰로 향하여 방향 잡을 때마다, 다시 나타날 것이다. 통속인[평민]이 스스로 싫어하는 자연학에서(retroque vogus abhorret ab hac), 왜냐하면 자연학은 자신의 열망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오니아의 낡은 실증주의를, 대 그리스에서 나온 합리주의에 매우 반대되며 또한 편견들로 된 아주 경멸스런 실증주의를, 인정했다. 그 실증주의는 모든 민중적인 신념들에 자리를 내줄 준비가 항상 되어 있고 또 세상으로 하여금 인간을 위한 그리고 신을 위한 극장처럼 만들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은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의 전체를 읽을 수 있는데, 그 편지에서 에피쿠로스는 한 제자를 위하여 학설의 중요점들을 요약했다. 사람들이 그 학설을, 즐거움을 자신의 도덕론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것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항상 현재로서 지녀야 했다. 이것에 관해 잘 강조해보자. 도덕론이 부정적인 것을 갖고 있어서, 원자론적 자연학은 민중적 신념들의 대부분을 주정하는 데로 이끈다. 이와 반대로 스토아학파의 자연학은 신념들을 정당화하고자 시도했다: 인간들을 위한 신들의 섭리, 그 섭리와 더불어 운명과 예언과 예상을 믿는 신념, 신체가 영혼과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신체 밖에서 영혼의 삶에 관한 다소 신중한 모든 신화들과 더불어 영혼의 불멸성 등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이 신념들이 인간에게서 불안과 혼란의 이유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자연학은 영혼의 혼란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학은 즐김주의(hédonisme)로 전혀 인도하지 않는다. 만일 평정(ataraxie, ἀταραξία)이 에피쿠로스에게서 즐거운 삶의 요소들 중의 하나 일 수 있다면, 자연학이 이런 삶에 기여한다고 단지 말해야 한다. 그런데 따라서 도덕론자의 선입견들에서 자연학의 위치가 정당화된다. 그러나 자연학은 내속적인 합리성 덕분에 그리고 자연학이 자연학 자기 만에 의해 요구하는 지적인 가치 덕분에, 정확하게 이런 지위를 차지한다. (304)
이오니아학파에서 우주론의 공리는 전체의 보존이었다. 어느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태어날 수 없다. 어느 것도 전체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러나 전체로부터 순간적으로 된 부분 또는 측면처럼 오로지 생각되어진 세계 또는 우주의 보존은 없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주의자들의 합리적 우주론의 공리는, 전 우주와 동일한 세계의 보존이며, 그 자체로 자족적인 완전한 통일성이다. 그리고 스토아학자들은 겉으로 세계의 파괴를 인정할 뿐이다. 왜냐하면 감정의 격돌[대변혁]에서도 현존하기를 계속하는 것은 동일한 개체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반대로 이오니아학파에서 출발한다. 전체라는 것, 그것은 빈 것의 무한정한 크기 속에 무한한 원자들이다. 하나의 세계는 무한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한 몫(une portion)이며, 순간적으로 어떤 질서를 간직한다. 이때부터 합리주의자가 세계에게 부여하는 특성들을 그 세계가 소유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우선 세계가 단일성이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왜냐하면 세계는 사용 가능한 무한한 원자들로 되어 있고, 따라서 무한한 세계들이 있다; 게다가 세계가 자기 자체에게 만족해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는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며, 원자들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계들이 하나의 유일한 전형일 어떠한 이유도 없으며, 예를 들어 세계들은 동일한 형태이어야 할, 그리고 동일한 종들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포함해야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반대로 이것들[종들]의 매우 다른 것들이[차이가] 있는 것은 이 종들이 형성되는 데 다양한 씨앗들에 기인하는 차이이다. (304)
에피쿠로스에 의해 재론된 이오니아 우주론의 많은 주제들은, 사람들이 우주론을 주목하듯이, 원자론적 자연학과는 독립적이다. 그러나 원자들의 현존이라는 특별한 주제는 원자론 일반에 묶여있다. 보이는 모든 물체는 원자들로 형성되었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어느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갈 수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자들은 분할 할 수 없는 덩어리들로 되어 있고, 너무나 작아서 볼 수 없으며, 물체들은 원자들로 합성되어(se composer) 있으며, 물체들은 원자들로 분해된다. 원자들은 자기들의 기능에 의해 영원하며 불변한 고체들인데, 왜냐하면 원자들은 발생[생성]에서 고정된 출발점으로 쓰이고, 붕괴에서 고정된 한계로 쓰인다. 게다가 현상들은, 즉 바람의 힘과 같은, 또는 널리 퍼지는 향기와 소리처럼, 증발, 느린 마모와 느린 증가 등은 물체들의 현존을 (미확정-아님의 절차에 의해) 증거한다. 물질의 연속성은 겉보기에 감관들에 의해 확인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말하자면 멀리서 보여진 양들 무리들(양떼)은 하나의 움직이지 않은 흰 점처럼 나타난다. (305)
에피쿠로스에서 원자의 본성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특히 현대 원자론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관점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즉 원자의 본성(자연)은 그것의 기능에 의해 규정되고, 그 기능은 혼성된 다양한 것을 것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어떤 원자들을 가지고서 아무 것이나 만들 수 있는 것은 에피쿠로스 자연학에 깔려있는 원리이다. 주어진 한 종류의 존재는 동등하게 주어진 종의 원자들을 요구한다. 원자들은 단위들 자체 사이에 완전히 동일한 단위들(des unités)이 아니라서. 원자들 사이에 다양한 혼성된 것들은 동일한 단위들의 연결과 접합이 양식으로부터만 올 것이다; 실재로 영혼, 신, 인간 신체 등을 형성하기 위하여. 각각 다른 종류의 원자들이 필요하다. 루크레티우스가 원자들의 현존에 부여한 증거들 중의 하나는 이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I, 160-175). 그가 말하기를, 시간을 가로지르는 종들의 고정성은 자연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 귀결로서, 요소들은 각각 종으로부터 개체들을 혼성하는데 소용이 있고, 그 요소들 또한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원자론적 정신[루크레티우스]이, 마치 원자론을 사유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닫힌 것들에 대한 안정적 (아리스토텔레의)분류 작업의 생각과 달리가기는커녕, 반대로 그 정신은 그것[분류작업]으로부터 논증을 끌어낸다. 그리고 원자들의 종들로 분류작업은 감각적 사물들의 분류작업을 소형으로 재생산한다. 또한 원자들은 혼성체들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씨아들(σπέρμάτα, semina rerum)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가 혼성 된의 성질들이 설명되는 것을 곧 볼 수 있는 것은, 원자들의 혼성잡업 양태에 의해서라기보다 오히려 혼성하는 원자들의 형식에 의해서이다. (305)
따라서 아마도 원자는 최소치로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모든 최소치들은 동등하고 형태가 없기에), 정확하게 분할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자를 수 없는 크기로서 정의되다. 사람들이 보았던 대로, 에피쿠로스는 원자들로 결론을 내기 위하여, 무한 분할불가능성으로부터 논증을 끌어내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또한 이 무한분할불가능성을 인정했으나, 무한분할불가능은 그에게 원자들로가 아니라 서로들 사이에 완전히 동일한 최소치들로 결론 내게 했다. 실재적 최소치들은 볼수 있는 최소치들과 유비로서, 말하자면 눈이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차원과 유비로서 생각되었다. 마치 시각적 장(場)이 볼 수 있는 최소치들로 혼성되어 있고, 이 최소치들은 척도 있는 단위들로 사용되는 것처럼, 이렇게 실재적 크기는 실재적 최소치로 만들어지고, 그리고 그 실재적 크기가 최소치들의 다소를 포함함에 따라서, 그 크기는 다소의 크기가 된다. 아마도 에피쿠로스에게서 이런 최소치의 이론은 운동에 관한 엘레아학파의 제논(Zénon d'Élée, 490경-430경)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쓰인다. 한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운동점은 무한한 위치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은 유한한 수의 도약에 의해 최소치들의 유한한 수만을 지나간다. (306)
원자는 그 자체가 고려해야할 성질들이 주어져 있기에, 변하지 않는 크기와 변하지 않는 형태를 가져야만 한다. 말하자면 상대적으로 고정된 자리를 차지한 최소치들로 혼성되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런 크기는 원자를 볼 수 있게 하는 데까지 결코 이르지 못한다. 형태들의 다양성에 관하여, 그 다양성은 혼성된 것들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만큼 많으나 더 많은 것은 아니다. 또한 원자들의 종류의 수는 파악하기 불가능하다(ἀπερίληπτον). 왜냐하면 우리의 유일한 세계에서 우리는 존재들의 종들 전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세계는 무한하지 않다.
이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운동의 원인을 설명해야 한다. 이오니아학파의 가설에 따르면, 영원한 운동의 원인은 무한한 빈 것 속에 흩어진 원자들의 무한성을 활성화한다. 여기서 운동적 사유 또는 데미우르고스처럼 합리적 우주론들의 원리와 같은 조직화의 초월적 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합리적 우주론들은 이것들의 작용이 영원할때라고 할지라도 그 작용을 시작과 끝을 갖는 주기적인 운동들에 의해 번역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원자들의 본성에 매인 내재적이고 영속적인 운동의 원인이다. 이런 원인은 중량(la pesenteur)이며, 이 중량은 모든 형태들과 모든 무게(le poids)를 지닌 모든 원자들에서 똑같은 방향으로(위에서 아래로) 또 같은 속도로 운동을 생산한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운동들이 동일한 운동들인지를 설명할 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보를 메아리의 반향처럼 수용한다. 이것은 속도의 차이들이 단지 운동체들이 가로지르는 환경들의 저항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빈 것은 전혀 저항을 제공하지 않고, 모든 속도들은 동일하다. 게다가 이런 보편적 중량을 각 원자의 고유한 무게와 구별해야 하는데, 그 중량은 원자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낮은 곳으로 향하여 변함없이 일률적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그 원자들의 고유한 무게는 다소 큰 힘들 속에 개입하며, 그 힘을 가지고 원자는 다른 원자들 위로 솟아오른다. (307)
크기, 형태, 중량, 이러한 것들은 원자의 각 덩어리에 내속하는 3가지 성질들이다. 그러나 이런 성질들은 원자들이 왜 조립되는지를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행하게 떨어지고 동일한 속도를 가지고 있는, 원자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은, 모든 충돌들과, 계속되는 되솟아남들과 엉킴들과 더불어, 이들 중의 몇몇이 자기들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다면 생산될 수 없다. 이런 이탈(cette déviation, 빗나감)은 한 순간에 완전히 비결정적인 장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이탈은 원인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이탈은 극히 작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그러한 것이 유명한 원자들의 빗금운동(déclinaison, παρέγκλισις, clinamen)이다. 이 빗금운동은 에피쿠로스 반대자들에 조롱거리로 많이 자극되었다. 빗금운동은, 사실들을 자기 이론의 틀 안에서 알지 못하는 난처한 자연학자가 마치 엄지손가락을 튕기는 전형처럼[사실을 왜곡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논평하였듯이, 데모크리토스의 전유산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307)
이 빗금운동은 이점에 에피쿠로스학자들을 난처하게 하였는가? 우리는 에피쿠로스사상의 특별한 리듬을 상기하자. 그는 자기 철학의 중요한 주제들 중의 각각을 고유하고 구별된 자신의 명증성과 더불어 도입하는데, 이 주제들을 공통의 기원으로부터 이탈하는데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피쿠로스학자들은, 자신들이 성공하지 못했을지라도, 빗금운동을 적어도 마치 이런 류의 명증처럼 소개하고자 애썼으나, 기초적이고 감각적인 명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빗금운동의 경사는 우리 감관들이 지각할 수 있는 경사보다 하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보이지 않는 사물에 속하는 이러한 명증들 중의 한 명증이며, 겉보기로는 이 명증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우 분명한 현상을 확증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현상이다.
사람들은 신체의 자연적 운동과 영혼에 의해 창조된 운동 사이에 대립을 노력 속에서 직접저그로 느낀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로운 의지의 운동과 외적 충동으로 파생된 운동 사이에 대비를 무매개적으로 의식한다. 그런데 만일 빗금운동이 마치 영혼처럼 한 혼성체로 현존한다면, 명증이 그런 것을 증명하듯이, 빗금운동은 혼성하는 원자들 속에서 현존해야만 한다. (307)
사람들은, 모든 사건들의 필연성의 원리가 없다면, 에피쿠로스 학자들에게 무엇을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상으로(공짜로) 빌려준 것이 원리이다. 필연성, 사람들이 이 시대에 그것을 이해하는대로, 그것은 스토아학자들의 운명(le destin)이다. 말하자면 운동들 속에서 규정된 질서이며, 우주로 하여금 합리적이고 신성한 사유의 증거로 만드는 규정된 질서이다. 이렇게 이해된 필연성은 에피쿠로스 사상에서 가능한 것인 만큼 대립되기도 한다. 그가 말하기를 “자연학자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보다, 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은, 운명이 연약한 자들에게 옮겨놓은 증오를 사람들이 알 때, 말하는 것 전부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떻게 에피쿠로스가, 빗금운동의 확정과 보편적 중량의 확정 사이에 있는, 명백한 모순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감추기도 할 수 있었는지를 안다. (308)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사물들의 현실적 질서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생산되었던 수천 조합의 하나이다. “수많은 요소들은, 무한한 시간 이래로 받아들인 충돌의 충력과 요소들의 고유한 무게의 충력으로, 수천 방식으로 서로 모이고, 또한 요소들 그 자체사이에 형성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을 시도 한다. 그런 결과로 요소들이 모든 종류들의 통합과 운동을 가지고 행한 시험에 의해서, 요소들은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갑작스레 일체들로 모여지기에 이른다. 이 일체들은 큰 덩어리들의, 즉 땅, 바다, 하늘, 살아있는 존재들의 기원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안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가 에피쿠로스 사상을 재생산하였는데, 에피쿠로스에게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통일성과 자치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섭리적인 기원의 도움 없이도 우주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주는 결실을 맺지 못한 수많은 시도 이후에 나온 하나의 성공물이다. 또한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메카니즘이 근대 메카니즘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생산된 조합에서 운동 법칙들의 결과를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세계를 생산하기 위하여 필요한 물질과 원자들로 된 모든 것이 우연히(par hasard) 모여져 있었다고 가정하면, 무질서 속에 포함된 여러 존재들이 어떻게 점진적 진화에 의해 어느 날에 끌려 나오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설명에서는 게다가 원리의 통일성이 전혀 없다.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의 5권의 시로부터 몇 구들을 읽을 수 있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시에서 하늘과 땅의 형성작용을 다루면서, 거기서는 원자들의 학설에 최소한의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이 천체와 지상의 현상들에게 부여하는 낡은 설명들 중에서 유용한 것을 수집하였다. 사람들이 데모크리토스와 더불어 황도 위에 태양의 운동을, 태양의 운동이 천체의 소용돌이 운동과 함께 하는 고착된 것[항성]들 보다 덜 빠르게 휩쓸어 간다는 사실에 의해, 또는 세계의 축의 [양]극단들로부터 오는 또한 태양을 하나의 또는 다른 하나의 적도회귀선을 향해 추적하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설명하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필요로 한 것은, 불의 덩어리에게 지성적 영혼을 거부하는 것인데, 지성적 영혼이 불덩어리를 인도하고 천구의 사물들을 이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새로운 태양이 매일 아침에 창조된다는 고대의 가정을 가능한 것처럼 소개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기하학적 천문학의 이편에 있다. 그 천문학은 천체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하늘을, 또한 땅으로부터도 다른 본성의 하늘을 구성했다. (309)
사람들은 에피쿠로스가 설명의 세부에 집착한 것에 약간의 중요성을 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일체를 한눈에 볼 필요가 있는데,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에서 (X 35) 그러나 그 만큼의 개별적 시각들은 아니다. 사물들의 일체의 시각이 보여준 것을 자기의 기억 속에 유지해야 한다. 그러한 것이 세부 사항을 발견하게 해줄 것인데,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잘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사람들이 일체들을 기억하고 있기 위해서이다.”고 한다. 좀 더 나아가 보면(X, 79), 그는 천문학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연구했던 자들 사이에서, 또한 별들이 지고 뜨는 것과 일식들과 유사한 것들을 아는 자들 사이에서 더욱 교육적인 대립들의 한 대립을 만든다. “그럼에도 이들은 천체의 모든 사물들에 대해 동일한 걱정을 간직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것들의 본성과 그것들의 중요한 이유들이 어떤 것들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대기현상들의 원인에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세부사항 전체를 옆으로 젖혀놓아야 한다. 원인은 기후현상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실재적 원인일 필요가 없다. 동일한 사실이 여러 원인들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원인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일식은 달의 개입에 의해 생산될 수 있고, 그러나 또한 다른 면에서 볼 수 없는 물체의 개입에 의해, 또는 태양의 순간적인 소멸에 의해 생산될 수 있다. 어느 것도 이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평범한 하나가 우리에게 일식의 불안을 걷어내기에 충분하다. (309)
사람들은 또 한 번 이런 설명들이 천문학에 전혀 연결되지도 않고, 연결 할 필요도 없다. 이오니아 자연학 전체가 되돌아온다. 또한 이런 자연학은, 사람들이 회상하고 있듯이, 동물들의 아주 실증적인 역사를 그리고 인간 이성과 기술들과 도시들의 점진적 발전의 역사를 묘사한다. 이 역사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고 보호받는 인간을 보여주는 신화적 역사[이야기]에 대립되어, 역사는 동물성에서 도시의 삶에로 느린 이행에서 인간적인 노력의 역사를 강조하며, 게다가 진실한 진보도, 한 도시가 다른 한 도시에게 우월성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자들은 인류의 실증적 역사를 자연적으로 첨부 하며, 이 역사는 루크레티우스의 5권 마지막에 대상이었다. 에피쿠로스는 확실히 비슷한 어떤 것을 고려했는데, 그 때에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서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 인간적 본성을 교육시켰고 강제했던 것은 사물들 자체들이고, 그리고 이성은 그 다음으로 자신이 사물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에 정확성을 만들기를 해왔다.” 예를 들어 언어는 우선은 인간에게서 정념들과 표상들을 동반하는 목소리의 발설들로 이루어진다. 더 나중에 각 인민은 대상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 인민에 알맞은 목소리의 발설들을 이용하기에 이른다. 언어처럼 정의도 또한 인간적 제도이다. “상호 간에 해치지 않기 위하여 협약을 행할 수 없는 동물들 사이에는 정의도 불의도 없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협약들을 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민족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310)
에피쿠로스의 세계는 있다고 하더라도 덜 체계적인 것들 중의 하나이다. 반면에 스토아학자들에게서 개별적인 삶들은 보편적 삶의 측면들 또흔 형식들이고, 심리학은 우주론에 밀접하게 의존되어 있다. 반대로 영혼이 없는 에피쿠로스의 세계는 개별적 영혼을 생산할 수 없고,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영혼[자기 영혼]만을 안다. 만일 영혼들이 세계 안에 발견된다면, 그것은 영혼들을 혼성하는 원자들의 뜻밖의(fortuite) 만남에 의해서 이다. 이로부터 특이성이 나오는데,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특이성을 영혼의 본성으로 다루었고(루크레티우스, 3권), 그러고 나서 세계와 생명체들의 형성작업에 대해 말하며(5권), 그리고 인간 본성의 연구는 이 특이성을 볼 수 있는 어떤 관계도 없이 구별된 두 부분으로, 즉 심리학과 인류의 역사로 나누어 보게 된다. (310)
에피쿠로스의 심리학에 대한 큰 관심이, 영혼의 합리적 연구가 숙명에 관한 모든 신화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고, 그리고 신화들과 더불어 인간들에 있어서 불행과 동요의 중요한 원인들의 하나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신체와 더불어 형성되고, 신체와 더불어 사라지는 영혼은 미래를 궁리 하지 않으며, 미래는 영혼을 전혀 쳐다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영원한 삶에 대해 “불멸적인 죽음”에 대한, 즉 우리가 [과거에] 있었지도 않았고 또 [미래에] 더 이상 있지 못하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성찰을 대립시키다. (311)
심리학은 에피쿠로스에 의해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약간 모호하고 일반적인 용어들로 제시되었다. 영혼은 열기로 섞여 있는 숨결과 비슷한 물체인데, 그럼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숨결과 열기보다 훨씬 더 섬세하다. 이 혼합물에서 영혼의 모든 권능들이, 즉 영혼의 감화작용들, 영혼의 운동들, 영혼의 사유들 또한 영혼의 생명적 권능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감각작용이 있기 위하여 영혼은 신체와 연결되어야 한다. 영혼이 자신의 느끼는 능력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신체이다. 이 둘의 결집체가 파괴되면, 영혼은 흩어진다. 영혼의 복잡하고 세부적인 이론이 에피쿠로스 자신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아는 것이 해결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 이론을 루크레티우스가 제시했고, 콜로테스에 반대하여에서 플뤼타르코스가 그리고 학설사(doxographie)에서 아에티우스(Aétius, 후1세기-2세기)가 에피쿠로스 학자들에게 보고하였다. 아마도 플뤼타르코스에 원전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더운 숨결에 생명적 성질들과는 다른 것을 부여하기에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다 넓은 이론에 인도되었다. 판단, 추억, 사랑과 증오, 그러한 모든 것은 더운 숨결에 부여될 수 없고, 원자들의 특별한 종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런 귀결로, 영혼은 원자들의 다른 네 종의 모임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즉 숨결의 원자들, 공기의 원자들, 열기의 원자들, 마지막으로 이름이 없는 넷째 종류가 있다. 이는 사유의 활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충분히 큰 섬세성과 운동성으로 된 물체이다. 플뤼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름 모를 넷째 실체의 도입은 “부끄러운 무지의 고백”이라 하고, 에피쿠로스 방식에서는 적절하다. 각 현상에 그의 설명이 있다. 살아있는 신체는 더운 물체이며 때로는 스스로 움직이고 때로는 스스로 멈춘다. 이 신체의 개별성들 중의 각각은 영혼을 혼성하는 실체들 중의 한 실체로부터 온다. 운동은 숨결로부터, 정지는 공기로부터, 열은 열기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 세 실체들의 다양한 비례가, 사자의 과감함과 양의 순진함이라는, 기질들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사유의 그런대로 명증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래도 넷째 실체가 필요하다. (312)
동일한 류적인 고찰이 있을 것 같다. 이런 고찰이 루크레티우스(또는 그의 모델)를 을 또한 다른 구별을, 즉 정신(l’esprit, animus)과 영혼(l’âme, anima)의 구별을 인정하는 데로 이끈다. 인간은 신체와는 완전히 따로인 사유들, 추론들, 의지들, 환희들과 증오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체 전체를 관통하여 퍼져있는 실체에게 이 현상들을 부여할 수 없다. 이 현상들을 사람들이 심장 속에 위치시킬 정신(animus)에게 연관시켜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두려움이나 또는 환희의 운동들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신을 신체의 모든 부분들 속에 흩어져 있는 영혼(anima)으로부터 구별할 것이다. (312)
이런 새로운 구별과 네 개 실체의 구별 사이에 연관은 분명하지 않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을 어느 곳에서도 지적하지 않았다. 어째거나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행하는 대로 정신(animus)을 넷째 실체에, 즉 이름지어지 않은 거에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넷째 실체는 스토아학자들에 따르면 영혼 속에 중요한 부분이 소유하는 대략의 역할을 정신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이것은 위계질서에 의한 일종의 통일성을 영혼에게 일치시키는 것이리라. 이 통일성은 더욱이 에피쿠로스의 의도에 반대인 것 전부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이름없는 실체의 중요한 기능에도 반대일 것이며, 이름없는 실체는 “사지 속에 감각적 운동들 퍼지게하는” 것이다.(III, 245)” 혈관과 살 가운데 섞여 있으면 신체의 일체에 의해 이렇게 유지되는 넷째 실체의 원자들은, 루크레티우스가 감각을 일으키는 운동(motus sensifer)이라 부르는 이런 종류의 지엽적 진동을 생산한다. 이 감각운동 덕분에 진동된 유기체의 일부는 자극물들에 감각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작용이 자극하는 것이 느껴지는 장소 자체에서 생산된다는 것은 에피쿠로스학자들의 중요한 독단이다. 그리고 그 학자들은 스토아학자들처럼, 자극작용이 우선 주도권 부분에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312)
이론 전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던 대로, 어느 정도로는 실체와 영혼의 능력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능력들에게, 신체 속에서 그것들의 현전과는 다른 지속가능한 연결을 창조하게 하며, 또한 죽음 후에 이렇게 영혼의 해체를 필수적이게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의 해체를 아주 다양한 논증들에 의해 증명한다. (312)
감각작용 에 관한 감각할 수 있는 작용의 양태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영혼의 문제 연결되어 있다. 에피쿠로스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편지」(X, 46-53) 속에서 영혼에게 첫째 도식의 지위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자연학의 일반적 정리들 다음에 에피쿠로스가 접근하는 첫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는 이 문제에 4권 전체를 할당하였다. 이런 관심의 비밀은 언제나 그렇듯이 실천적 관심이다. 그러면 꿈에서 본 광경들(visions, 심상들)에서 무서운 기호작용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데, 인간들은 이 광경들을 신에 의해 보내진 전조들(présages)로 만들거나 또는 인간들은 광경들에서 죽은 자들의 그것들에서 두려움을 주는 유령들을 본다. 이러한 공포들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심상에 대한 합리적 이론을 대립시킨다. 대상들의 표면으로부터 끊임없이 모방물들(les simulacres, εἴδωλα)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모방물들은 일종의 매우 얇은 막과 같으며, 속도 있는 움직임으로 활성화되어 있고, 공기를 통하여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미세하며, 또한 모방체들이 줄곧 뿜어낸다. 이 모방물들은, 눈과 마주치면서, 광경을 생산한다. 그런데 꿈의 이미지와 상상작용의 이미지들은 다른 본성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도 또한 대상들로부터 뿜어내는 모방물들이다. 그것들(대상의 시뮬라크르들)은 광경의 시뮬라크르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훨씬 더 미세하다. 감각기관을 관통하기 때문에, 시뮬라크르들은 직접적으로 정신에 도달한다. 따라서 상상작용은 시각[감각기관]과 달리 기능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왜냐하면 우리들이 의지에 따라 이미지를 재현하는 주인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실재로는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나타나려면, 정신이 끊임없이 수 천 개의 시뮬라크르들을 뛰쳐나가게 하는 것이고, 그 많은 시뮬라크르들 중에서 정신이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시뮬라크르들 만이 정신에게 각인한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시뮬라크르들은 서로 이전하면서 형태들 변형시키고, 그것들은 닳아서 소모되면서 부분들을 상실하거나 또는 서로들 사이에 융합된다. 그런 이유로 또한 네모난 탑의 시뮬라크르는 우리에게 둥글게 보이게 한다. 그러한 이유로 또한 우리는 꿈에서 매우 낯선 괴물들을 본다. 대상들에 대한 자연적이고 안심하는 설명이만, 그 대상들은 우리를 무섭게 전율하게 한다. 이런 광경[시각]의 이론은, 또한 청각과 후각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방출(l’émission)의 이론이며, 이 이론은 스토아학파들의 이론과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룬다. 도처에서 스토아학자들은 대상과 감관들 사이에 이어진 숨결들에 대해, 환경을 관통하는 힘들의 이동들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운동과 충동에 대해 말할 뿐이다. (313)
에피쿠로스는 신들의 현존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존의] 명증을 부정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꿈속에서 심지어 각성 시에도 신들이 시뮬라크르들을 본다. 신들의 현존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은 보편적으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이 신들로부터 선용어(prénotions, 앞선 용어)를 갖는다. 불변하는 평화 속에서 완전하게 행복한 삶을 사는 존재들이 문제거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런 선용어에 우리는 견해들을 보탠다. 우리는 신들이 인간사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또 그들은 전조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미신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또는 그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그들에게 희생제물을 게다가 가끔은 인간 희생제물을 바친다. 그런데 이런 신념들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신념들은 우리들의 선용어들과 모순되게 말하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행복하고 고요한 존재에게는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걱정들과 감정들이 있을 수 없다. 자연학 전체가 증명하기를, 세계도 세계의 부분도 심지어 인류의 역사도 우리를 마치 신의 원인에게로 처럼 신에게로 이끈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는 사물들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가지고 덧붙여 말하는데, 완전한 존재들의 의미에게 매우 불완전하고 비천한 세계를 부여하는 것이 불경건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들에게, 마치 영혼에게처럼, 우주론적이고 자연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순수 물질로 이루어져있고, 세계들의 간격들 사이에 충돌들로부터 숨어서 살아가는, 파괴들이라는 원인들로부터 보호받기 때문에 부패할 수 없는, 신들은 완전하게 고요하고 해복한 삶을 이끈다. 이런 삶이 관조와 성찰은 현자에게 알맞은 유일한 경건함이며, 아마도 영웅들의 숭배와 연관 없지 않은 일종의 순화된 이교도(paganisme)이다.(314)
III. 에피쿠로스의 도덕론 (La morale épicurienne, 314)
에피쿠로스의 도덕론에 관한 중요한 기원은 짧은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La Lettre à Ménécée)」 이외에 없다. 사람들은 이 편지를 키케로의 저술 목적들(Des fins)」의 첫 권의 진술에 의해 보충할 수 있다. 키케로는 자기와 동시대 에피쿠로스 학자들, 제논(Zénon de Sidon, 전155경-75경)과 필로데모스(Philodème, Φιλόδημος 전110경-전40경) 의 저술들과 강의들에게서 도덕론을 빌려왔다.
편지는 체계적인 진술이라기보다 주제들의 일체를 드러낸다. 주제란 “에피쿠로스학자는 인간들 가운데 신으로 살기 위해 밤낮으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편지 속에는 사유의 두 동기가 있는데, 이 둘의 일치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즉 한편으로 목적은 즐거움(열락, 說樂)이다. 왜냐하면 인간처럼 동물들도,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적으로 즐거움을 찾고 고통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도 일종의 명증이 있으며, 명증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또 명증은 증명없이도 통과한다. 다른 한편 현자는 혼란의 부재(ataraxie, ἀταραξία, 평정)에, 고요함에, 영혼의 평화에, 도달하는 자이다. 영혼의 평화를 사람들은 욕망들의 동요를, 또한 중생에게 덮치는 불안들을, 제거하면서 얻는다. 현자는 약간 높은 지적인 정적의 경지를 얻는다. 이런 지적 경지는 이오니아인들로부터 나온 분명한 통찰 덕분에, 종교들과 신화들의 비극적인 세계를 거부했다. 신들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망들을 자제하는 현자는 행복에 도달한다. (315)
그러나 이런 평정은 목적(une fin, τέλος)으로서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에피쿠로스가 인정했던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le plaisir)이다. 따라서 평정은, 이것이 이 목적에 종속되는 만큼만 평가할 만하다. 이 평정이 즐거움의 생산자일 때만 가치 있는 것이다. (315)
사상의 두 동기들 사이의 관계는 정말이지 에피쿠로스 도덕론의 문제 전체이다. 사람들은 이 관계가 파악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 매우 일찍부터 그의 반대자들은, 좋은 편이든 나쁜 편이든, 에피쿠로스학자들에게서 과도하게 욕망들에 끌린, 즉 사르단나팔로스(Sardanapalos 전685경–전627년)의 생애에 방탕함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제시하기 위해, 이 동기들 중의 첫째 동기를 문헌으로 다룬다. 반대자들은 정원의 친구들의 내밀한 삶을, 그들의 추문을 고발하기 위하여 자세히 탐색하였다. 다른 한편, 더 잘 조사해 보았건데, 사람들은 그의 교훈들의 도덕적 고상함을 인정할 수 있었고, 그리고 사람들은 스토아학파의 세네카Seneca, 전4년-후65)가 이들을 위한 찬미를 안다. 세네카는 그의 글을 얼마간 인용하였으며, 심지어 네오플라톤주의 학자인 포르피리오스(Porphyre de Tyr, 234–310경)도 인용하고 있다. 게다가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에 대항하여 그자신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우리가, 즐거움이 목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방탕자들이나 향락자들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가 이론적으로 쾌락주의자(hédoniste)이며 동시에 실천적으로 절도 있고 고결하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할지라도,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키케로의 항구적인 비판이기도 한데) 그를 모순된다고 고발하기에, 그리고 그의 성격과 품성보다 그의 지성과 그의 정신의 예리함을 더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315)
그의 학설도 사정은 마찬가지인가, 그리고 더 낳은 가치가 있었는가? 에피쿠로스는 즐거움을 퀴레네학자들과 아주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이전에 관해서 그들과 열려진 논쟁을 벌였다. 첫째로 에피쿠로스는 단지 즐거움만을, 즉 사람들이 명증하게 느끼는 즐거움만을, 신체적 즐거움만을 인정했다. 그는 그 즐거움을 살의 즐거움과 배의 즐거움이라 불렀다. 그가 말하기를 “만일 내가 취향의 즐거움들, 사랑의 즐거움들, 소리의 즐거움들, 볼 수 있는 형태들의 즐거움을 제거한다면, 나는 좋은 것(le bien, 착함)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귀레네학자들이 인정하는, 소위 말하는, 정신의 즐거움을 제거했다. 틀림없이 영혼에 속하는 환희가 있다. 그러나 환희는 신체의 즐거움에 대한 추억이거 예상참여일 뿐이다. 어떠한 환희도 우정으로부터 오지 않으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친구는 안전의 약속과 고통에 반대하는 일종의 보증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적 환희는 원자론자의 환희이며, 원자론자의 이론은 신체적 고통들에서 오는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다. 신체적 고통들은 거짓 신념들에 따르면, 우리에게 죽음 후에 예상하는 것이다. (316)
둘째로 배의 즐거움은 퀴레네학자들이 그것을 상상하는 대로 운동과 동요가 아니다. 인간이, 그의 생애의 초기에 그리고 그의 성향들이 타락되지 않았을 때, 그가 필요 또는 고통을, 배고픔 또는 목마름을 다시 느낄 때만 즐거움을 찾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고통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않는다. 그 귀결로서 즐거움의 가장 높은 정도는, 마치 자연에 의해 규정되었던 대로, 고통의 제거일 뿐이다. 일단 고통이 제거되면, 그 즐거움은 변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주 다른 음식들로 자기의 배고픔을 평온하게 할 수 있다. 배고픔의 평온함은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즐거움으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즐거움과 고통 사이에 무차별적 상태는 없다. 그러한 것이 에피쿠로스의 최고의 선이다. 이것을 작가이며 크리스트교인 락탄스(Lactance, 250-325)는 의사에게 치료를 기다리는 병자의 이상이라고 선언했다. (316)
사실상, 신체적 즐거움의 매우 예기치 않은 이런 개념작업은 우리가 아는 에피쿠로스의 미묘한 건강상태와 더불어 연관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진실한 즐거움이 휴식상태의 즐거움(καταστηματική ἡδονή)이라고 말했을 때, 따라서 틀림없이 이런 신체의 평형적인 행복(σαρκός εὐστάθεια)을 이해해야 하고, 충분한 자연적인 필요들에 대한 안심과 건강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상 자체는 우리들에게 행동의 규칙을 지적해 준다.
에피쿠로스가 말하기를 “모든 즐거움은 그것의 고유한 본성(nature 자연)에 의해 선(le bien, 착하다)이다. 그러나 모든 즐거움이 의지에 의해 선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악(le mal, 잘못이다)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의지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이렇게, 아마도 의도를 가지고, “선은 항상 의지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스토아주의의 근본적 원리에 반대로 갈 것이다. 만일 반대자들이 그에게 제공한 제약 없는 이런 허가를 인정한다면, 이런 공통 용어가 쾌락주의(hédonisme)를 전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위 말하는 공통 감각(상식)의 원리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서 아마도 퀴레네학파를 따라간다. 그는 목적을 구별하는데, 무매개적 성향의 대상과 반성적 의지의 대상을 구별하고, 이는 마치 이 두 대상들은 즐거움들의 일체를 만드는 행복으로부터 목적 또는 즐거움을 구별하였던 것과 같다. 성향은 우리를 즐거움에로 가게 한다. 반성은 경험의 도움을 받아 각 즐거움의 귀결들을 무게를 재야한다. 이때에 우리는 수고의 초과량에서 얻는 즐거움들을 내버리는데, 이는 마치 우리가 보다 큰 즐거움을 끌어내고자 괴로움들(souffrances)을 감당하는 것과 같다. (317)
반성적 사유는 또한 욕망들을 고요하게 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개입한다. 욕망들은 만족하기에 불가능한 것이기에, 새로운 고통들을 생장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가장 높은 정도의 즐거움은 고통의 제거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욕망들에 대한 여러 범주들을 결정할 수 있다. [우선] 자연적이고 필연적 욕망들이 있는데, 그것들의 만족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한 것은 먹고 마시는 욕망이다. [둘]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 아닌 욕망들이 있는데, 이 욕망들은 필요에 따라 만족이 변하는 대상들과 연관이 있으며,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을 먹는 욕망인데, 그것에 대한 만족은 가설상 즐거움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셋] 자연적이지도 필수적이지도 않지만 빈 것이 아닌 욕망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왕관을 쓰는 또는 조각상으로 남는 욕망과 같은 것이다. 현자는 가장 높은 정도의 즐거움이 욕망들 중의 첫째 종류의 만족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 현자는 “작은 빵과 적은 물로 쥬피터와 지복(félicité)를 경쟁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은 현자를 외적 상황들로부터 약간 독립적이게 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필요들은 매우 적은 것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사람들이 아는 바대로, 자기 규칙을 발견하고, 욕망에 대립되는 의지 속에는 없지만 즐거움 자체 속에 있는 자기 경계도 발견한다. 즐거움은 마치 욕망이 즐거움이어야만 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317)
그러나 에피쿠로스학자가 고통, 즉 순수수동(정념)이 모든 예견과 모든 의지의 바깥에서 인간에게 도달한다고 잘못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행복에서 선(善)이 계속적인 인상들의 우연(le hasard)에 의존하는데, 우리가 어떠한 의지도 선에 대립시킬 수 없음에도, 어떻게 현자의 행복을 변질하지 않고서 유지할 것인가? 답은 우선 다음과 같은 경구들에 의해서 이다: “강한 고통은 짧은데, 길어진 고통은 약하다.” 그러나 현실적 고통을 과거 즐거움들과 미래의 즐거움들의 예상참여의 재현을 통해서 균형을 이룬다. 과거 즐거움의 재현은 그 자체 즐거움이며, 그러한 것은 반대자들이 매우 신랄하게 이의제기 했던 에피쿠로스의 전제이다. 플뤼타르크는 과거 즐거움의 추억이 우리의 현실적 고뇌(peine)를 악화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그럼에도 아마도 추억들과 희망들의 삶은 늙고 병든 에피쿠로스에게 고요함을 가져다 준 삶일 것 같다. 죽는다는 점에 관하여 그는 이도메네우스(Idoménée, 전325경-270)에게 이렇게 편지 썼다: “나는 나의 삶의 행복한 날의 마지막에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나의 질병들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나 그 질병들이 더 이상 심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에 나는 환희를 대립시키는데, 그 환희는 과거 우리들의 토론들의 추억 덕분에 나의 영혼 속에 있다.” 에피쿠로스가 우리에게 초대한 이런 종류의 상상 훈련에 의해서, 현자는 영속적인 환희들을 스스로 창조했으며, 이런 환희들 가운데 첫째 서열에 우정의 환희를 놓았음에 틀림없다. (318)
반대로 고뇌들의 추억과 특히 고뇌들의 근심(appréhension) 또는 불안 등은 그것들 자체로 현재적인 고뇌이다. 사람들은 에피쿠로스가, 인간들 사이에 가장 큰 잘못을 생겨나게 하는 이런 불안들의 – 신들에 대한 불안과 죽음의 불안과 같은 - 고뇌들에 대해 어떻게 투쟁하였는지를 안다. 축복받은 신들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듯이, 만일 영혼이 죽는다하더라도 죽음도 더 이상 두려워할 것 없다. 왜냐하면, 그러면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가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겪기 위하여 느꼈어야 했을 것이리라. 에피쿠로스의 이런 태도를 잘 평가하기 위하여, 그가 죽음을 잘못들 중에서 가장 큰 잘못으로서 불안해하는 자들에 대해 투쟁해야 했으며, 또한 죽음을 자신들의 맹세라 불렀던, 또한 시인 테오그니스(Théognis, 전570-485)처럼 생각했던, 비관주의자들에 대해 투쟁해야만 했다. 테오그니스는 “최상의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러나 적어도 일단 태어났다면 아케론(Achérin)의 문들을 가능한 한 빨리 통과하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무(le néant)는 욕망되지도 않아야하고, 불안하지도 않아야 한다. (318).
사람들은 에피쿠로스 도덕론이 일련의 비결들이자 수련연습들이라고 본다. 이것들은 우리 사상을 횡설수설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자연에 의한 고정된 경계들 저편으로 우리를 희생하도록 끌고 가는 것을 막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구별했던 사유의 두 동기들 사이에 있는 내재적 연결들을 본다. 만일 즐거움의 탐구가 마치 해야만 하는 것처럼 정의된다면, 그 탐구는 이런 모든 사유의 수련들을, 욕망들의 자연적 경계에 관한 성찰을, 즐거움의 계산을, 즐거움들의 소극적인 측면이 어느 면에서는 영혼의 평정이라 할지라도 과거 또는 미래의 즐거움들의 재현을 포함한다. (318)
이런 수련에서 즐거운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덕목들이 생겨난다. 특히 신중함, 즉 “철학자체보다 값비싼” 신중함이 생겨난다. 신중함은 우리가 서술했던 우리의 모든 덕목들은, 신중함처럼, 고뇌들로부터 우리를 보장하기 위한 안전의 수단들일 뿐이다. 특히 그 중에 정의가 있는데, “정의의 가장 큰 결과물이 평정(l’ataraxia)이다” 신중함은 긍정적인 협약들로 이루어진다. 이 협약들에 의해 인간들은 상호간에 서로 해치지 않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물론 우리들 각각은 불의에 대항하여 개인적으로 보호받기 위하여 법률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만일 이익이 있어서 그것을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면, 각각은 법률들을 침해하는데 어떠한 거리낌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사회에 관한 자기 견해에서 소피스트들의 협약주의(le conventionalisme) 전체를 결국 인정한다. 그럼에도 스토아학자들의 세계시민주의(le cosmopolitisme)로는 전혀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풀뤼타르코스에서 콜로테스가 국가를 옹호하기 위하여 퀴니코스학자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단지 강한 정부가 개인들을 위한 보증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방식에서 일종의 자연권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연권은, 인간들 사이에 서로 서로 헤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인간들에게 쓸모 있다는 것의 표현이다.” 그래도 진실로는 정의가 나라들에 상대적이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는, 만일 그가 정치적 생활에 참여하기를 완전하게 스스로 거절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외가 없는 한에서 “은둔해서 살기”로 애썼고, 개별적으로 단순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힘썼다. (319) (20:08, 56P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