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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l')Epistémologie 개념1002인식론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7-88.(P.304)
과학들에서 실행되는 인식의 방법에 대한 연구.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그를 이어서 마르부르크학파의 코헨(Hermann Cohen 1842-1918)은 근대 인식론을 세우고, 또 뉴턴의 물리학으로부터 원리들과 방법들을 구출해 내었다. 여러 과학들의 이론은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의 인식문제(Das Erkenntnisproblem in der Philosophie und Wissenschaft der neueren Zeit. t.1. 1906 t.2 1907, Erkenntnisproblem: Probleme de la connaissance dans la philosophie et la science moderne)에서 완성되었고, 또한 브룅슈비크(Léon Brunschvicg 1869-1944)에 의해서 또한 비유망(Jules Vuillemin, 1920-2001)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브룅슈비크는 수학 철학의 제 단계(Etapes de la philosophie mathématique, 1912)에서 수학적 사유에서 형식을, 특히 개념적 사유의 무한한 창조적 성격을 구출해내었다. 비유망은 카바이에스(Jean Cavaillès 1903-1944)의 작업들에서 공리학과 대수학의 형식주의에 영향을 받아, 대수학의 철학(Philosophie de l'algèbre, 1962)에서 수학적 분석의 여러 방법들의 역사를 추적하였다.
그러나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그래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인식론자이며, 새로운 과학정신(Nouvel Esprit scientifique, 1934)에서 나타나듯이 근대과학의 이론가이다. 그는 합리적 사유, 즉 체계적 노력이 경험과 접촉을 앞선다고 제시하며, 그러나 경험은 여전히 모든 합리적 체계화 작업을 터뜨리게 한다. 이러한 것은 응용 합리주의(Rationalisme appliqué, 1949)의 의미이다.
인식론은 대체로 우리에게 인식의 두 가지 근본적 형태를 구별하게 해준다. 1o 이 인식들은 발생에 관한 한 “감각론자”(sensualistes), 방법에 관한 한 “경험론자”(empiristes), 근거에 관한 한 “실재론자”(réaliste)이다. 2o [대립되는 다른 한편에서] 그 각각의 인식들은 “합리론자”(rationaliste), “주지론자”(intellectualiste), “관념론자”(idéaliste)이다. [일반적으로 합리론과 경험론, 감각론과 주지론으로 대입시키는 점에 비추어, 2o의 서술은 순서가 바뀐 것 같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철학을 인식론에 환원시키는 것은 19세기 말에 “과학주의”(scientisme)로, 즉 ‘과학이 우리에게 절대를 인식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절대적 믿음’으로 특징 지웠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과학에 관한 반성이고, 인식론은 과학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유효한 방법을 구출하고자 애쓴다. 이 보편적 방법이란 여러 과학들에서 행해지는 모든 조작들을 통일하고 단순화하는 것이다. (43NKB)
판단중지 (l')épochè, gr. ἐποχή 검사, 멈춤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8.(P.304)
그리스어 에포케(ἐποχή)란 의심(doute)을 뜻한다. 판단 중지란 사물의 현존(존재)에 관해 지니고 있는 모든 판단을 멈춤(suspension)을 말한다.
에포케(l'épochè)란 의식의 현상들을 연구하기 위하여 후설의 현상학에서 권장되었다. 그 판단중지는 예를 들어, 우리에게 다양한 종교들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허락한다. 판단 중지를 통하여, 각 종교들이 각자의 계시에 진실한 실재성이 있다고 하는 상대적 가치들에 대해 판단을 독립적으로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예로는, 의사가 “그 목소리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들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환자에게 판단중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환자는 의사에게 “내가 목소리들을 들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대답한다. 현상학자로서는 [그 목소리의] 모든 현존(existence 존재)의 문제와 무관하게 이 현상의 의미를 연구할 것이다. (43VMH)
모호함 l'équivo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8.(P.304)
논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사유의 표현 속에서정확성과 명석함이 모자라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사태로 말미암아 두 가지 또는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여지를 남긴다.
모호(模糊)함이란 사유 속에서(dans la pensée) 명석함의 부족을 지칭하는 데 있다면, “애매(曖昧)함”이란 단어 속에서(dans les mots) 명석함의 부족을 지칭한다. 이러한 귀결로서, 모호함이란 매우 자주 서툰(maladresse) 것, 다시 말하자면 비의지적 작용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에 반해 애매함이란 매우 자주 간교한(ruse) 것, 다시 말하자면 의지적 작용처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모호함”은 산만해지는(se dissiper) 것인데 비해, 애매함은 고발되는 하는(se dénoncer)것이다.
철학에서, 하나의 개념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취급 될 수 있을 때, “애매성”(amphibologie)라 말한다. 칸트는 반성의 개념들의 애매성(amphibologie)에 대해 말한다. [그에 의하면] 반성의 개념들이 단순 개념들로든지 세계의 대상으로든지 간주 될 수 있는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사과 한 개라는 대상에도 일이라는 단순 추상관념에도 쓰인다. 게다가 이상한 종교인은 거기다가 ‘하나’님자를 부쳐서 온갖 (미친)환상을 다 불어넣는다.] 그 애매성(l'amphibologie)은 모호성(l'équivocité)과 구별된다. 즉 애매성에서는 의미의 성질이 명시적이고 표출적인 데 비하여, 모호성에서는 의미의 성질이 함축적이고 감춰져 있다. (43VMH)
에라스무스 Erasme lat.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9-1536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8.(P.304)
홀란드 인문주의자이며 철학자이다 .
에라스무스는 1469년경에 홀란드 로테르담(Rotterdam)에서 태어났으며, 1536년(67살)에 스위스 발(Bâle, all, Basel, it, Basilea)에서 죽었다.
그는 혼인 외의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 즉 “사랑하는”(Aimable)이라 불리도록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장학금을 얻어서 파리에 공부하러 갔다. 그는 광기의 찬미(L'Eloge de la Folie, 1511)를 1502년(33살)에 영국에서 구성하고 1511년(42살)에 파리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1521년부터 스위스 발에 정주 하였고,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율리우스 2세(Jules II, en lat. Julius II, 1443-1513, 재위 1503-1513)교황과 클레멘스 7세(Clement VII, en latin Clemens VII, 1478-1534, 재위 1523-1534)교황 등과 서신 왕래를 하였다. 그리고 강연집(Colloques)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인문주의(humanisme)과 개신교(protestantisme)라는 새로운 관념들에 호기심 많았던 그는 기 관념들의 장점들과 한계들을 동시에 표시하고자 고심하였다. 장점을 드러낸 것은 그로 인해 전통의 참여자들을 소외시키는 것이고, 한계를 표시한 것은 종교개혁의 참여자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근대인으로서 그는 관용 정신의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43VMH)
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ène 기원전 284-기원전192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8.(P.304)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이다.
에라토스테네스(Ἐρατοσθένης)는 기원전 284년 북아프리카(현, 리비아)의 퀴레네(Cyrène)에서 태어나, 192(92살)에 (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었다.
그는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여 규정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는 이집트 남쪽 800km에 있는 시엔느(Syène)(현 아수완 Assouan)에서는 태양이 여름 하지인 날에 수직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햇 빛살은 가장 깊은 우물들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한 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오벨리스크의 그림자가 약 7도의 각을 이루었다. 그러면 그것은 원주의 1/50의 원주이다. 두 도시의 거리가 5천 스타드(약 800km)이다. 그러면 지구의 둘레의 값은 약 2만5천 스타드, 즉 약 4만km라는 것이다. (43VMH)
에로스 (l')Eros Ἔ(ἔ)ρως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8.(P.304)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에서 사랑의 신성을 의미한다. 플라톤에서는 정신적 열망(l'ardeur spirituelle)과 본능(l'instinct)의 이중 상징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신적 열망이란 신적 사랑으로, 즉 상위의 에로스(Eros supérieur)로 인도하는 것이고, 본능이란 이것 없이는 인간 종이 사그라들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위의 사랑(Eros inférieur)을 의미한다. [전자의 사랑은 오성적(정신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고, 후자의 사랑은 생명(영혼)의 활기로서 이것이 없으면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을 의미한다. - 발작의 작품을 인용한 프로이트의 생각도 후자의 에로스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신화 속에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강조하는데, 에로스는 포로스(Poros, 부자 la richesse)와 페니아(Penia, 가난 la pauvreté)의 아들이다. 그 사랑의 신은 그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욕망 한다는 점에서 가난하다. 이런 측면에서 사랑의 역동성(le dynamique)을 설명한다. 그러나 사랑은 또한 행복의 풍요이며 내적 충만의 [욕망]이다. 이러한 풍요(richesse)와 빈곤(dénuement)의 이중성은 심리학적으로 사랑을 매우 잘 특징지운 것이다. (43ULI)
방황 (l')errance 유랑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9.(P.304)
절대적 진리에 관하여 착각과 불확실성 속에서 있어서 영속적인 오류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약속의 땅 밖에서 “유랑하는 유태인”(Juif errant)의 무한정한 행진을 상기하게 한다. 또 이 용어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따르면,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철학적 반성의 영속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반성은 현전하는 하나의 형식처럼 그 자체적으로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형식 하에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려 애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헤겔은 플라톤과 달리, 진리의 끊임없는 생성을 믿어서 절대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의 지적 유랑은 헤겔의 방식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것이 오해이다. 들뢰즈가 보았듯이 차이들에 의한 영원한 세분화에 의해, 각 계열들 사이에 놀이(le jeu)가 있을 것이다.] (43VMI)
오류 (l')erreur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9.(P.304)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속고 있는[오류에 빠지는] 행동을 말한다.
오류는 구체적 표상에 대한 개관적 가치를 믿는 부당한 믿음 속에 있다. 소위 말하는 감관들의 오류(l'erreur des sens)로서, 예를 들면, 시각적 착각이 이에 속한다. 또는 추상적 표상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추론의 오류(l'erreur de raisonnement)로서 성급한 일반화, 생략법, 모호함, 애매성 등이 있다.
도덕적 도식에서 보면, 오류의 기원들은 다수이다. 즉 편견, 습관, 방법의 부재 등이다. 따라서 오류는 틀림(la faute, 결점)의 이름을 지닌다. 다른 한편, 철학은 형이상학적 질서에서 나온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오류는 인간에게 즉 인간 조건에게 매여있지 않는가? 인간이 진리의 탐구에서, 그는 현상들 다시 말하면 오류들 이외에 다른 것에 도대체 도달할 수 있을까? 신학은 절대적 인식이라는 신적 특권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부정한다. 고전 심리학은 똑같은 의미에서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인간의 지각들과 개념들에게 상대적이고 실천적이고 임시적인 진리 이외 다른 진리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즉 무한정하게 검토하는 것을 면할 수 없고, 그래서 다시 문제삼는다(remise en question)는 것이다.
철학의 측면에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의 대화편들 즉 테아에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이래로,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윤리학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 제3부 「초월적 변증론(Dialectique transcendantale)」을 거쳐서, 또 후기 칸트주의자들 즉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등의 변증법을 거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작품 진리의 본질(Essence de la vérité, 1931-1932)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오류가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의 자연적 상태인 것이고, 오류의 형이상학적 기원은 인간의 자유 속에 있는 것이며, 인간은 반성의 작업 속에 자유롭게 참여함으로써만이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가 말하기를 “철학은 오류를 조금 조금씩 물리치는 데 있다. 아마도 이 비판의 끝에 이르러서 우리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43VMI)
종말론 (l')eschatolog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89.(P.304)
인간의 마지막 종말에 대한 학설이다. [ἐσχατάω 끝에 이르다 ἔσχατος 가정 끝, 최종, 마지막.]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1. 하나는 인간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다루는 학설이며, 개인적 종말론(l'eschatologie individuelle)이라 한다. 2. 다른 하나는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의 종말을 다루는 학설이며, 집단적 종말론(l'eschatologie collective)라 한다. 종말론은 유대-크리스트 전통에서는 최후의 심판으로 소개된다. 최후의 심판은 시대의 종말에 일어날 것이라 한다. (43WKF)
노예의 도덕 (la) morale des esclaves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89-90.(P.304)
이것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도덕학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La Généalogie de la morale, 1887)에서 만들어낸 표현이다. 이것은 겸손(l'humilité)과 체념(résignation)을 고양시키려는 복음(l'Evangile)의 도덕을 지칭하기 위해 쓴 용어이며. 뽐내기(l'orgueil)와 힘의 숭배를 고양시키려는 주인의 도덕(la morale des maîtres)에 반대된다. (43WKF) [예수의 삶은 사실인데, 크리스토스를 상징으로 만들어 하늘로 올린 사도는 바울이었다.(43WKF)]
공간 (l')espa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0.(P.304)
동질적이고 무한한 장소. 거기에서 감각적 대상들이 위치해 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 공간(l'espace)와 부피(l'étendue, 너비)의 개념을 구별한다. 공간은 삼차원이고 너비는 이차원이다. 너비는 표면(une surface)인데 비하여, 공간은 체적(un volume)이다. 라이프니츠와 칸트는 공간을 불가분의 “직관”의 사실로서 간주하는 반면에, 너비는 무한정하게 나눌 수 있는 물질적 표면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간의 개념은 질적 개념이며, 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비하여, 반대로 너비는 측정할 수 있고 또 정확히 대상들 사이의 연관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베르그송의 강의록에 따르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l'espace)과 부피(l'étendue)의 개념과 반대로 풀이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공간은 정신의 기호로서 비실재성의 개념이며, 데카르트의 너비는 타고난 개념으로 우리 속에서 부풀어지는 실재성의 개념이다. 전자의 공간은 정신에 의해 구성한 직관개념인데 비해 후자의 부피는 본성의 일반관념으로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경험총체의 개념이이다. 절대공간은 추상성인데 비해, 부피의 무한정은 구체성이다.] (43RMB)
정신 (l')esprit <-개념0612영혼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0.(P.304)
지적인 삶의 원리, 즉 지성(intelligence)이다.
정신(esprit)의 개념은 영혼(âme)의 개념보다 더 정확하다. 영혼은 생명의 원리와 사유의 원리를 동시에 지적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17세기에 동물정령(esprits animaux)에 대해 말했는데, 이 동물정령은 데카르트에 있어서는 오늘날 신경 충동(influx nerveux, 神經衝動, influx=流體)라 불리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의 개념은 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인 의식의 개념보다 더 넓다. 이 개념은 반성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정신은 모든 발견의 원리이다. 그것은 능력(faculté)이니라 작용(acte)이다. 그것[정신]이 있는[존재하는] 어떤 영역 안에서 어떤 것을 우리가 효과적으로 이해할 때마다, 우리는 이 작용에 대해 직관을 지닌다.
정신은 물질에 대립된다. 유심론(spiritualisme)은 한 학설로서, 이 학설은 물질이 표상할 수 없는 에너지의 형식으로, 즉 본성상 정신적 형식으로 귀착한다고 여긴다 - 라이프니츠(Leibniz). 유심론은 유물론과 대립된다. 유물론에 따르면, 레닌(Lénine 1870-1924)이 말하듯이, “정신은 물질의 가장 높은 생산물이다.” (39WLA)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0.(P.304)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Baron de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1748년(59살)에 출판한 저술이다. 중요한 서문과 31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법률들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과 법률과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즉, 법률이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란, 정부, 군사력, 법제, 정치, 수입, 기후, 풍습(moeurs, 관습), 상업, 화폐, 인구, 종교 등을 말한다. 몽테스키외의 방법은 아주 새롭고 근대적이다. 그 방법은 실재적인 것의 분석을 통해서, 입법권들의 원천을 재발견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그가 세 가지 정부의 토대들을 규정할 때, 이 과학적 방법은 정신의 일반적 원리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도태들이란, 민주정치에서 덕성(vertu), 군주정치에서 명예(honneur), 전제정치에서 공포(crainte)이다. 그가 선호한 것은 영국의 정치체(régime)로 가는 것이었으며, 그 영국에서는 세 가지 권력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또 질서와 자유는 가장 잘 조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의 장점은 공법(le droit public)을 일상화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원리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법학(le droit, 민권)을 근대 과학으로 정초하는 것이었으며, 결국에는 입법권들을 보편성과 보편성의 가치에 대한 반성에 종속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또한 칸트와 피히테 이후에 오늘날 법철학(la philosophie du droit)이라 부르는 것은 기초하고자 하였다. (43WKF)
수상록(Essais 1580-1588)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0.(P.304)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가 1580년에서 1588년(55살)까지 출판한 작품이다. 그 작품은 1580년(47살)에 긴 유럽의 유럽에서 돌아와서, 그가 잘 살아온 것인지를 점검할 생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목록을 작성하는데 몰두한 50대 한 인간의 작품이다. 이것은 우연(hasard)에 이끌려진 자기 분석이며, “증명하기”(démontrer)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하는 즐거움을 위해서이며,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고유한 본성의 모순들을 조금씩 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에, 스승들의 가르침이나 독서에서 배운 도덕 격률들, 그가 여행에서 겪었던 모든 나라의 풍습들 등 이러한 것들에 대한 아주 깊은 모순들의 감정을 덧보태었다. 따라서 그는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금언으로 정식화된 회의주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의심의 태도는 인간을 향한 어떤 불신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관대함으로 길을 열 것이고, 또 우리들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삶의 기술을 알릴 것이다.
이 무기력한 수상록의 결산표(bilan)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적어도 몽테뉴가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는, 그것은 소크라테스 격률에 따라 “자기 스스로 알게 하는”(se connaître lui-même)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고,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인간 조건”(l'humaine condition)을 깨닫게 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43WKF),
본질 (l')essen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1.(P.304)
사물의 고유한 본성, 즉 구성하는 특성들의 일체를 의미한다.
본질의 개념은 첫째 의미에서 우발(accident)의 의미와 대립된다. 이것은 실재성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 즉 사물의 본질적 특성(caractère)을 의미한다. 예들 들어, 정의(正義, justice)란 본질상 엄격한 것이며, 그것은 정의상(定義上, par définition)으로 엄격한 것이다. 만일 정의가 자비로운(charitable)한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정의는 더 이상 아닐 것이다. 둘째 의미에서 본질 또는 본성 또는 존재의 특성은 현존 즉 존재의 사실(fait 사태)에 대립된다. 이 둘째의 대립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Thomas Aquinas 1227-1274)를 참조할 수 있고, 아퀴나스가 형이상학(la métaphysique)과 존재론(l'ontologie) 사이에 구별을 확립한 것에 관련 있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세계와 신의 특성 또는 본성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며, 존재론은 현존의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 이 둘째 대립은 특히 실존주의 철학에서 유행하고 있다. 이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그의 현존(son existence)과 대립시킨다. 이 철학에서 인간의 본질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닐 수 있는 관념이며, 그의 현존이란 자유의 자유로운 창발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인간에서 “현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썼을 때, 그는 인간의 삶이 미리 규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의지적 결단의 정도에 따라 우리의 현존이 영속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43WKF)
감성 (l')esthéti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1.(P.304)
그리스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 αἴσθησις)로부터 나온 말로 느끼는 능력(faculté de sentir)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감성이 번역에 알맞고]. 우리들 안에서 생겨나게 하는 아름다움(le beau)와 감정(le sentiment)을 다루는 학문을 의미한다[이런 의미에서 미학이라는 번역이 알맞다]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는 감관에 의한 지각, 지각될 수 있는것.]
감성(또는 미학)의 문제들은 두 개의 표제(la rubrique)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창조의 감성과 미적 지각의 감성이다. 만일 형이상학이 원칙적으로 창조의 현상에 관심 있다면, 수리오(Etienne Souriau 1892-1979)의 철학적 창출(L'instauration philosophique, 1939에서 말했듯이 형이상학이 인간의 능력들(pouvoirs)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면, 소위 말하는 감성론은, 특히 칸트 이래로 주로 지각의 이론으로서, 취향의 판단 즉 즐거움의 감정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한다. 참조: 뒤프렌(Mikel Louis Dufrenne, 1910-1995)의 미적 체험의 현상학(Phénomenologie de l'expérience esthétique, 2권, 1953)을 보라. 예술적 작품은 가장 완전한 하나의 표현 형식이며, 특히 인간적인 면에서 말로 하는 표현보다 더 깊은 것이다. 관람자의 편에서 예술 작품은 감정의 질서(l'ordre, 영역) 속에 참여를 호소하며, 몇 몇 현대 미학자들은 작품들의 법칙들 또는 “범주들”을 분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적 감정의 분석도 또한 인간의 인식을 깊이 파고드는 방법의 하나일 수 있으리라. 참조: 추상, 추상예술, 예술(l'art), 미술(le beaux-art), 창조. (43WKE)
국가주의 (l')état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1.(P.304)
사회적 체계의 하나이며, 이것은 국가의 속성들 가장 확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직접적 개입을 의미한다.
이 주장자들은 오로지 사적 이익들만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화에 의하여 생산에 기여하는 도약을 가치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반대자들은 생산 영역에 간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간섭(l'intrusion)이란 자유와 책임성과 같은 개인적 창의성과 인간적 몇몇 가치들의 기를 꺾거나 심지어는 폐기하려 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실행된 국가주의는 19세기말에 미국 사회에 의해 예시된 경제적 자유주의와 대립되며, 즉 헤겔이 “시민사회”(la société civile)라 불렀던 것에 대해 대립된다. 미국 사회의 경우에, 국가는 사적 이익들에 봉사하는 것이었고, 국가의 행위는 사적 이익들의, 즉 기업합병과 대기업들의 성과(la résultante)로 귀착된다.
현시점에 이르러, 세계의 모든 주요 국가들에서 국가주의는 경제 계획을 가능하게 하고, 또 국가의 수준에서 모든 사적 에너지들 사이의 질서를 배치하게 하는 방향으로 간다. 따라서 국가주의는 개인적 자유를 보존하려 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조화를 이루려 하고, 또 노동자들과 기업들에게 결과와 수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개인적 에너지를 자극하게 한다. (43WKE)
영원 (l')éternité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1.(P.304)
[그리스어 명사 아이온(αἰών)은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며, 특히 플라톤에서 형용사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는 ‘영원한’으로 쓰였다. 영원(l'éternité)은 라틴어 아에테르니타스(aeternitas)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 바깥에 있는 것의 특성을 의미한다.
영원성(l'éternité)은 불멸성(l'immortalité)와 구별된다. 불멸성은 죽음 저넘어 무한정한 영속성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영혼의 불멸성, 작품의 불후성(不朽性) 등으로 쓰인다. 영원성의 감정은 우리에게 어떤 특권적인 순간들로 주어진다. 말하자면 사랑, 모험, 일반적으로 행복 등은, 인간이 현재 총체적으로 살면서 과거와 미래를 망각할 때, 주어진다.
스토아 철학자들, 또한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와 1804년[지식학(Wissenschaftslehre, La Théorie de la science, 1794, 1801, 1804)이래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같은 철학자들에 따르면, 철학적 반성만이 우리를 이러한 지복(béatitude)의 상태, 즉 영원의 감정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43WKE)
윤리 (l')éthiqu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그리스어 에토스(ēthos, ἦθος)에서 나왔으며, 습속(les moeurs, 풍습, 예절)를 의미한다. 윤리학이란 도덕학(la morale)의 원리들에 대한 학문이다.
“도덕학”이란 삶의 특별한 행동들을 하는데 있어서 원리들을 보다 특별하게 적용하는 것을 지칭한다. 참조 도덕(학)(la morale). (43WKE)
윤리학(L'Ethique, démontrée selon la méthode géométrique 1677)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마흔 다섯 살에 생을 마감한 네델란드에 거주한 유태인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그 해 1677년(45살) 윤리학 즉 원제목 “기하학적으로 증명된 윤리학”이란 중요 작품을 썼다.
이 난해한 작품은 기하학의 논문들처럼 정의, 공리, 명제, 증명, 부명제 등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게다가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발생적 기하학”(la géométrie génétique)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절대성(l'absoluité) 속에서 현존은 이성에 의해 침투할 수 있는 합리적 사실이라는 원리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은 인간 사유의 분석에 의해 우리에게 절대적 현존을 생각할 수 있도록 고양하고, 또 우리의 모든 정념들을 극복함으로써 우리 속에서 절대적 현존을 실현하고, 나아가, 바로 그 자체를 실현함으로써 우리를 가장 순수한 행복 즉 지복(la béatitude)에 이르게 하고자 한다. 그가 구별한 세 종류의 인식, 즉 감각적 인식, 개념적 인식, 직관적 인식(즉 최고의 합리성, la rationalité supérieure)은 매우 잘 알려졌다.
윤리학은 칸트의 “비판서”와 더불어 독일 형이상학에 매우 깊은 감명과 영향을 주었다. 즉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형이상학은 현재 철학의 시대를 규정한다.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는 라뇨(Jules Lagneau 1851-1894), 브룅슈비크(Léon Brunschvicg 1869-1944), 게루(Marcial Gueroult 1891-1978) 등에 의해 주석을 붙이게 자극을 주었다.
[베르그송은 라뇨의 스피노자 해석과 연구에 주목하였다. 라뇨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알랭(Alain, 본명 Emile-Auguste Chartier, 1868-1951)은 라뇨의 추억(Souvenirs concernant J. Lagneau, 1925)를 썼고 또한 알랭은 라뇨의 영향으로 스피노자에 관한 책도 썼다.] (42OKE)
민족학 (l')ethnolog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그리스어 에트노(ethno)와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이며, 에트노(ethno)란 민족(peuple)을 의미하며, 로고스(logos)는 지식을 의미한다.
사회의 진화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민족학은 신화들과 종교들의 연구로부터 진행되었다. 그리올(Marcel Griaule, 1898-1956)과 렌하르(Maurice Leenhardt, 1878-1954)가 연구자이다. 소위 말하는 품행들(moeurs)의 연구로부터 진행하기도 한다. 레비스토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가 대표자이다.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구조들로부터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르와 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이 있다. 언어의 형태로부터 연구한 이들도 있다. 오드리꾸르(André-Georges Haudricourt, 1911-1996)가 있다.
오늘날 이 학문은 사회 인류학과 협력하고 있다. (43QMJ)
원인학 (l')étiologi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에티올로지란 그리스어 아이티아(aitia, αἰτια)는 원인(cause)을 의미하며 로고스(logos λόγος) 즉 지식 학문(savoir)와 합성어이다. 원인학이란 원인에 대한 학문이다. 이 용어는 특히 의학에서 자주 사용한다. (43WLC)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 1943) 책해0904사르트존재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1943년(38살)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사르트르의 이론의 원리들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인간의 현존[실존]은 현존의 다양한 문제들과 현존의 계속적인 단계들 속에서 연구된다. 인간은 무와 존재의 중간 길(mi-chemin)에 있다. 한편 인간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시하는 무(無)로부터 나왔다. [영혼이 밖에서 온 것도 아니고, 또한 창조주의 선물도 아니라는 점에서, 영혼의 존재가 저 세상에 있다고 믿는 유심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이고,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불안 속에서 존재를 열망한다. 왜냐하면 그 불안은 달아나는 실재성 속에서 또한 영속적인 움직임 상태 속에 [인간을] 점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용어상으로 키에르케골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르트르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흐름 속에 빠져서 헤매는 인간이 존재라는 대상(표상, 상징)을 구축하여 불안 속에서 벗어나려고 존재를 상정한다는 설명하려 했다면, 소크라테스적인 영혼의 날개를 생각하는 것이 된다. - 베르그송의 견해를 수용한다면, 흐름은 불안이 아니라 존재에 대처하는 자유의 축적이며 경험의 축적이다. 존재는 자유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임시적이고 열려진 합의이다. 자아는 대상에 대한 불안(l'angoisse)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합의에 대한 실현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회한에 가깝다. 권능의 실현의 노력이 회한을 환희로 바꾸어 갈 것이다.]
이 작품은 매우 까다로운(ardu) 스타일로 된 것이다. 이것은 자각의 [내면의] 깊은 욕망에 대한 대답이며, 또한 실존주의의 형이상학적 토대들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형이상학적 토대들이란 “존재의 통현상성”(la transphénoménalité)과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42OKE)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Etre et Temps, 1927)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이 작품은 1927년(38살)에 쓴 하이덱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작품이다. 그의 목표는 존재의 의미(le sens de l'être) 즉 존재론(l'ontologie)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 존재론에 이르기 위하여 현상학적 분석 이용하였고, 다시 말하면 세계에 현전하는 우리 현존재(Dasein, l'être-là)의 여러 양상들을 서술하였다.
실존의 기원적 정서(le sentiment)는 우리 스스로를 “죽음을 향한 존재”(l'être pour-la-mort)로서 이해하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 느껴진 것일 것이다. 자신의 현존재(Dasein, l'être-là)를 반성하는 인간은, 과거에 관한 그 무엇 때문에, 자기 탄생의 우연성에 부딪히게 되고, 그리고 또한, 미래로 향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가항력(l'inéluctabilité)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인간 조건의 “유한성”(finitude)에 대해 진지한 정서가 생겨나게 된다. (42OKE)
오이켄 Rudolf Eucken 1846-1926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독일 철학자이다.
루돌프 오이켄은 1846년 독일 오스트프리스란트(Ostfriesland)의 아우리히(Aurich)에서 태어나 1926년(80살)에 튀링엔(Thüringen)의 예나(Jena)에서 죽었다.
그는 자연주의 사상에 반대하여 관념론의 반작용을 일으킨 철학자이다. 그는 우리시대의 근본개념의 역사와 비판(Geschichte und Kritik der Grundbegriffe der Gegenwart, 1878; Histoire et Critique des principes fondamentaux de notre époche), 종교에서 진리 내용(Der Wahrheitsgehalt der Religion, 1901; Part de vérité contenue dans la religion)을 썼다. 그는 1908년 노벨 문학상을 탔다. (43WLC) [문학자가 아닌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은 오이켄과 베르그송이다.]
유클리드 Euclide le Socratique 기원전 450경-기원전 380경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2.(P.304)
그리스 철학자이며, 메가라(Mégare)학파의 창시자이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약 450년경에 시실리의 메가라(Mégare)에서 태어나 약 380년 경(70살 경)에 죽었다.
그는 처음에 파르메니데스(Parménide 기원전 540경-450경) 제자였다가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Socrate, 기원전 469-399)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세운 학파에는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도 자주 드나들었다. “관념”(les idées) 이론의 기원에는 유클리드가 있으며, 플라톤은 그것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에게서 잠재성과 현실태의 논리를 구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43WLC)
행복주의 (l')eudémon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92-93.(P.304)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몬(eudaimōn εὐδαίμων)은 행복(heureux)를 뜻한다. 즉 에우(eu, εὐ)은 잘(bien)을 뜻하며, 다이몬(daimōn)은 재능(genie)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이어야 한다.
행복주의는 헤도니즘(hédonisme 쾌락주의)와 구별된다. 쾌락주의는 행복을 무매개적 즐거움만을 고려할 뿐이다. 행복주의는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발전되며, 이 학파는 지적 즐거움을 최고 높은 행복이라 본다. 이 행복주의는 칸트 도덕론의 엄격주의(rigorisme)에 대립된다. 칸트에서 예를 들면 진실한 도덕적 선은 “행복하다”(être heureux)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받을 만하다(mériter le bonheur)데 있다. (43WLC)
우생학 (l')eugénique ou (l')eugén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3.(P.304)
인간 종의 유전적 성질(la qualité génétique)의 보존에 유리한 조건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용어와 과학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고대에서 스파르타의 관습에서는 이미 잘 부합되지 못하는 어린이를 제거해 왔다. 19세기에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은 “자연선택”(selection naturelle) 즉 자연 우생학(eugénique naturelle)의 논리적 귀결로서 의지적 우생학(une eugénique volotaire)의 주장자였다. 우생학은 확고한 생물학적 기초에 근거한다. 그러나 대부분에서 “불임”(stérilisation, 거세)에 근거하는 우생학의 실제적 실현은 어렵다. 우생학은 집단적 수준에서 확장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우생학적 안락사(euthanasie eugénique)라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찌(Nazi) 정권의 시례로 유명해진 이 우생학적 안락사는 국제적 관심의 뉘렘베르크 재판(1945-1946)에서 정식적으로 단죄되었다. (43WLC)
안락사 (l')euthanasie 참조: 존엄사 εὐθάνασία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93-94.(P.304)
이 용어는 그리스어 에우(eu, εὐ)은 잘(bien)을 뜻하며, 타나토스(thanatos θάνατος)는 죽음(mort)을 뜻하다.
몇몇 철학과 종교에서 희망없는 질병이나 임종고통을 단축하기 위하여 고통없는 죽음을 인정하는 방법을 말한다.
심지어 이 “행복한 죽음”(mort heureuse)은 플라톤의 국가(Politeia)편에서 사회적 수준에서 권하고 있다. 즉 “신체가 건강하지 못한 시민들의 경우에,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고려장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 이것은 스토아학파에 맞을 것 같다] 현대시대는 덜 냉소적이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반대로 영국 철학자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가 “안락사” 개념을 만들었으며, 게다가 스스로 임종고통의 완화를 주장하는 자로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시대에 양심은 주저한다. 심지어 그 사람이 희생자에게 자비로운 판단을 하고, 또 그 희생자가 명백하게 그에게 그것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타인의 생명에 위해(危害)를 가할 권리를 가지는가? 연민(pitité)의 의무인가 또는 신앙심(piété)의 의무인가? 16세기 프랑스 의사 빠레(Ambroise Paré, 1510-1590)는 신앙의 변함없는 관점을 정의하면서, “신만이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라”고 썼다.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서 법의 관점도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경우 가운데,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의 의회는 안락사를 단죄하고 있다. (43WLC) [벨기에와 네델란드에서 어떤 조건하에서 허용된다. 혼수상태의 환자에게 실행하는 안락사는 존엄사의 권리(le droit de mourir dans la dignité)와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스토아학파 세네카의 자살은 존엄사에 가깝다.(43WLC)]
도피 (l')évasion 회피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4.(P.304)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 특히 일상생활에서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동.
근대 심리학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었다기보다, 도피는 인간정신의 건전한 반작용으로 간주된다. 순간적인 일탈로서, 도피는 각성몽 또는 몽상에 의해, 놀이나 허구에 의해 특히 잠에서 표출된다. 이와 반대로, 책임져야 할 것에 관하여 또는 실재성에 관하여 결정적으로 항상 거부하는 태도로 간주되는 것이 있다. 이런 경우에 도피는 실재적인 것 앞에서 달아남(fuite)의 형식을 취할 것이다. 이것은 병리적 특성(즉 정신 분열증, schizophrénie)을 띠는 데까지 나갈 수 있다. 참조: 여가(loisir) (43WLC)
[여기서 일상의 일탈을 긍정적 의미로, 그리소 현실에서 일(활동)로부터 도망을 부정적 의미로 쓴다. 전자가 휴가와 여가일 것이고(수다를 포함하여), 후자가 기피, 도망이며, 자아의 정신분열증현상이라 하다. / 들뢰즈가 실제성(리비도)으로부터 현실의 표면으로 생성을 탈주(분열자 schizo)라고 한 것은 리비도의 과잉이며 의식의 자기생성으로서 계열이 분화에 따른 분열이다. 이 분열은 의식일체에서 보아 과거와 단절도 부분화도 아니고, 대상x의 확장이며 새로운 생성이다. 이 새로운 생성에 탈주(계열의 세분화, 즉 창조적 도약)를 긍정으로 보았다. (43WLC)]
명증 (l')éviden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4.(P.304)
명석(claire) 판명(distincte)한 관념의 특성(caractère)을 의미한다.
어떤 관념이 명증하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긍정을 이끌어내는 특성(proporiété)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에 따르면, 명증이란 관념의 객관적인 성질(qualité)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Gottfrid Leibniz, 1646-1716)에서 명증은 오히려 관념들 사이의 “관계”(relation)의 성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수학적 연산의 명증”에 대하여 말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래로 사람들은 명증(l'évidence)과 확신(la certitude)를 대립시킨다. 전자는 객관적이고 후자는 진리의 인상 또는 주관적 감정을 지칭한다. 주관적으로 확실한(certain)한 것을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명증하게 한다는 것, 그것은 담론과 증명들의 작업전체이다. (43WLC)
창조적진화 L'Evolusion créatrice 1907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4.(P.304)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1907년 출판한 작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장 깊은[심층] 의식, 즉 내적 지속 의식은 밑바탕에서 보편적 삶의 감정 또는 “생명도약”의 감정이라고 제시했다.
이 역동적 권능은 [본능을 통하여] 방향을 잡은 것은, 우리의 본능이 지성의 포괄보다 더 멀리 압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생명 도약은 정신적 본성의 창조적 용솟음과 닮았다. [우리가 보기에 생명도약은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치솟음과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을 이분은 자연 뒤에 정신적(spirituelle)이란 단어를 붙여서 곡해하게 만들었다. 베르그송을 유심론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도약 못하고 하강하는 것은 물질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진화의 철학은 생명으로부터 지성과 물질의 생성을 제시한다. [정확하게는 벯송 이 지성성과 물질성을 설명한다. ]
이 작품에는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철학사의 독창적 진술로서 끝맺는다. [이 책 제4장은 스펜서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철학사를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생성의 철학이다. - 여기서 베르그송은 들뢰즈에 앞서서 “생성”의 철학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초대한다. 즉 지속이 구성하는 근본적 실재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존재”(l'Etre)의 문제를 이해하게 한다. [베르그송이 새로운 형이상학자라 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보다 대존재(자연, 생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플라톤 이래로 후설에 이르기까지는 사물(정확하게 물체)과 물체들의 총체로서 존재(l'être)를 형이상학으로 착각한 형이상학을 하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사물의 총체적 시각은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43WKI)
진화론 l'évolution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4.(P.304)
이 이론에 따르면, 동물의 여러 종들이 진화의 단순한 운동에 의해 변행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이론은 라마르크와 다윈에 의해 제기되어 19세기 말에 주장되었다. 이 이론은 오늘날에는 그 다지 신용할 만한 것이 아니다. 종들 사이에는 인류학와 고생물학이 거의 채울 수 없는 공백들이 존속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진화일반을 대신에 종들의 평행론을 인정한다. 이 평행론은 종들 사이에 접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한 몇 가지 한계를 지니며 서로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한다.
개체와 종들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진보한 가설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의 영향을 주장하는 “라마르크주의”, 자연 선택을 주장하는 “다윈주의”, 유전형질의 갑작스런 변화에 의한 새로운 종의 창조를 주장하는 “돌연변이설”(le mutationisme), 획득형질의 유전을 부정하고 유전자와 염색체의 변형의 수준에서 진화를 분석하는 “신다윈주의”, [자연 속에 내재하는 생명작용과 환경변화의 상호관계에서 설명하려는 ‘신라마르크주의’ 또는 ‘베르그송주의’, 공진화를 받아들이는 들뢰즈의 생성론] 등이 있다. (43WLC)
그림 설명:
휘라콘테리움(또는 에오히푸스)로부터 말(cheval, 馬)로 진화
De l'hyracontherium (ou eohippus) au cheval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5.(P.304)
신생대 제3기 2. 시신세(始新世, l'écocène) hyracothérium
6천5백만년전-4천만년전 / 38.1cm 시기 / 다리뼈(garrot)높이
신생대 제3기 3. 점신세(漸新世, l'oligocène) mésohippus
4천만년전-2천5백만년전 / 52cm
신생대 제3기 4. 중신세(中新世, le miocène) mérychippus
2천5백만년전-1천만년전 / 88.9cm
신생대 제3기 5. 선신기(鮮新期 le pliocène) dinohippus
1천만년전-1백만년전 / 113cm
신생대 제4기 홍적세(洪積世, le pléistocène) Equus
1백만년전-8150년 /142.2cm (43WLC)
현존(또는 실존) (l')existen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6.(P.304)
라틴어 엑스(ex)는 밖으로(au-dehors)의 뜻하며, 시스테레(sistere)는 유지하다(se tenir)를 뜻한다. 즉 현존은 나타나게 하는 것, 밖으로 표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또는 실존)은 살아있는(영혼있는) 존재의 고유한 것이며, 사물의 단순한 존재(l'être)와 대립된다. 실존주의자의 철학에서 “현존하다”(Exiter)는 것, 이것은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여하는 것, 투여들(projets 기투 企投)을 행하는 것, 항상 새로운 행동 속으로 스스로를 자기 상태로부터 떼어놓은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현존(실존)의 근본적인 특성인 자유가 스스로 체험된다. 자기를 넘어섬(dépassement)은 미래를 향해서 효과가 있을(s'effectuer) 수 있고, 그리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따르면, 이 넘어섬이 불안 속에서 죽음에 대해 의식하는 데로 이끈다. [아마도 실존주의에서 프랑스철학과 독일철학의 차이로서, 프랑스에서는 미래를(죽음을 말하지 않고)향한 자유, 독일에서는 죽음의 극복(벗어남)을 말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넘어섬이 과거를 향하여 똑같이 효과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즉 우리의 우연(contingence)과 우리의 인위성(facticité)으로부터 우리를 의식하게 이끈다.
진솔한 현존은 두 가지 투여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현존은 우리의 절대적 유한성의 의식이며, 우리는 한편으로 “세계 속에 던져 졌”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죽음의 운수를 타고 났”기 때문이다. [이 두 표현은 하이데거 것인데, 들뢰즈는 이미 세계 속에 있다고 할 것이고, 죽음은 아직 알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미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정신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esprit, 1807)에서 현존(l'existence)과 생명(la vie)라는 두 개의 개념을 구별했다. 현존은 생명의 의식이며 다시 말하면 삶에 죽음의식을 보탠 것이고, 생명은 유기체의 의식이다. 현존만이 인간의 고유함이다. [헤겔은 생명을 유기체에 한정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베르그송은 생명의 바다에 현존이 떠있는 섬으로 보았다.] (43WLD)
실존주의 [현존주의] (l')existentialism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96.(P.304)
구체적 실재성[현실성]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 참여한 개인의 수준에서 파악된 인간의 현존(l'existence de l'homme)을 대상으로 삼는 철학적 이론을 말한다.
이 “관점들 파악의 각도”(l'angle de prise de vues)는 데카르트적 철학의 각도에, 보다 일반적으로 모든 합리주의적 체계들의 각도에도 대각선적으로 대립된다. 이것은 이성과 관념들의 철학에 반대하는 인간의 철학에 대한 반동이다. 인간은 출발점에서 이미 주어진 존재로 그리고 이성이 부여된 존재(l'être)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무(le néant)일이며,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합리(absurd)이며, 다시 말해서 의미작용 전부가 박탈되어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존재(être)이기에 앞서서 현존한다(exister).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유명한 정식으로 표현하면, “현존은 본질을 앞선다.” 따라서 인간 자신은 자신의 고유한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하고 또 자신의 삶 속에서 합리적 존재(un être raisonnable)를 생성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존재]일 뿐이다. 다른 말로하면 존재한다(être)는 자유로운 참여에 의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이 자유를 거부한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절대자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 지워 졌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불안이 나온다. 이 불안에 의해 인간은 자신이 나오게 된 무(無)를 새삼 느끼고, 동시에 자신을 존재(l'être)에 도달하게 할 선택의 불확실성을 예감한다(pressentir). [미래에 비추어 자신이라는 과거는 무이며, 미래에 참여하여 존재에 다가가는 것은 선택에서 불확실하다. 이 불확실한 현존이 인간이다..]
역사적으로 “실존주의”라는 용어는 1927년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Etre et Temps, 1927)에서 만들어졌으며,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실존의 철학(Philosophie de l'existence, 1938)에서 다시 쓰였다. 프랑스에서 이 학설의 주요 대표자로는 마르셀(Gabrel Marcel 1889-1973)과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그리고 특히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있다.
사람들은 실존주의 철학에서 통상적으로 두 가지 흐름을 구별한다. 하나는 크리스트교적 실존주의와 다른 하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전자에는 야스퍼스와 마르셀이, 후자에는 사르트르와 까뮈(Albert Camus, 1913-1960)가 속한다. 결국 이런 구별은 아주 피상적이며, 실존주의 모든 형식들을 감쌀 수 없다. 사람들은 보다 정확하게 현존적 철학(philosophie existentielle)과 현존재적 철학(philosophie existentiale)을 구별한다. 전자는 세계와 역사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는 데 열중하여, 인간의 22가지 태도를 묘사하는데 관심을 지니며, 야스퍼스와 메를로퐁티가 이에 속한다. 후자는 인간의 존재(Etre), 즉 현존재(le Dasein, l'être-là)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이해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하이데거와 존재와 무를 쓴 사르트르가 이에 속한다. 따라서 전자는 현존의 경험적 서술이며, 후자는 현존의 근본적 의미를 찾는 형이상학이다. 참조: 불합리, 불안, 참여, 본질, 키에르케고르, 파스칼. (43WLE) [현존적 철학(philosophie existentielle)과 현존재적 철학(philosophie existentiale)를 공현존철학과 통현존철학으로 수정하고 싶다. 공현존이란 용어는 공시적 또는 사회적 현존 철학을 의미하며, 통현존 철학은 통시적 또는 인간 종적인 현존 철학을 의미한다. (43WMA)]
실존(현존)주의자 (l')existentialist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96-97.(P.304)
실존주의의 참여자들을 말한다.
언어학적 도식 위에서, 이 단어는, 이차 세계 대전 이후에 길거리에 나서는 인간들, 즉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지칭되는 용어이다. 이 젊은이들은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의 구역에서 살아가는 데 어떤 불쾌함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다른 시기에도 그리고 틀림없이 언어의 남용에 의하여도, 무위도식하거나 방탕한 사람들을 에피규로스주의자로 취급하지 않았는가? 이들이 현자 에피큐로스와 더 이상의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는 넓은 공적인 수준에서 보아 게르만 지방에서 20세기에 생겨난 사유의 양식이 [프랑스로] 스며들어올 수 있었던 힘을 측정하게 해준다. 그리고 동시대의 몇몇 프랑스 대학인들도 철학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청중을 평가했었다. (43WMA)
공현존(철학) existentiel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p. 97-98.(P.304)
현존의 감정에 속하는 것.
공현존 철학(philosophie existentielle)은, 마치 매우 다양한 상황들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현존의 감정에 대한 심리학적 도덕적 서술이다. (이것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의 경우이다.) 여기서 다양한 상황들이란 고통, 전투, 잘못, 심지어는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들 말한다. 공현존 철학은 통현존철학(philosophie existentiale)과 구별된다. 후자는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현존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들의 형이상학적 분석이다. 본질적 요소들이란 자유, 방황(errance)으로서 비-지식(non-savoir), 우리들 현재의 우연(contingence) 등이다. 따라서 공현존 철학은 특별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고, 통현존 철학은 인간현존 전체의 보편적 특성들을 분석한다. (43WMA)
경험 (l')expérienc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8. (P.304)
라틴어 엑스페리레(experire), 즉 체험하다(éprouver)에서 나온 용어이다.
1.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찰에 의해서 획득된 인식이다. 록크(John Locke, 1632-1704)와 흄(David Hume, 1711-1776)에서처럼, 경험으로부터, 경험 만으로부터, 경험주의는 인간의 모든 인식이 온다고 한다. 이런 학설에 대립되는 것은 고전적 합리주의, 즉 데카르트와 칸트의 학설이다. 이다. 이 학설에서 감각적 경험은 필수불가결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 못하며, 또 사유(思惟)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유는 우리에게 구체적 경험을 이해하게 하고 또 배열하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경험(l'expérience)을 이성(la raison)에 대립시키고 또 생득적인 모든 것에 대립시킨다. 킨다.
2. 도덕적 도식에서, 개인 또는 인류의 삶의 긴 과정에서 구성된 획득된 것들의 총합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을 갖는 자는 살았다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 역사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경험으로부터 정보를 끌어낼 수 있고, 또 그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하듯이, “신중한 충고”를 줄줄 아는 “현자”(sage)이다. 지행이라는 것[합일의 노력]은 인간들의 경험과 인식에 기초하고 있어서, 삶을 “성공하게 할” 수 있는 “기교”(l'habilité)를 우리 속에서 발전시키게 해준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도덕은 전체적으로 경험에 독립적이다. 도덕은 모든 경험에 독립적인 감정에 근거하며, 칸트의 견해처럼 우리행동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개별적 환경들이 어떠하던 간에, 절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런 품행을 이끌도록 명령한다. [따라서] 공적인 사무들에서 또는 정치에서 경험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도덕에서 경험주의는 없다. (43WMA)
실험 (l')expérimentation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8. (P.304)
개연성과 가설을 증명하기 위하여, 관찰에 도전하게 하는 과학적 방법.
관찰은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증거로 삼은 현상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이에 비해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가 말하듯이 “실험은 의지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험은 완전하게 제한된 조건에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43WMA)
황홀 (l')extase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9. (P.304)
그리스어 엑스타시스(ekstasis)는 자기 바깥에서 있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런 운동에 의해, 우리의 정신이 우리 자신 바깥으로 나가서, 보편적이고 상위의 실재성에 참여하는 것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플라톤주의, 특히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는 이 운동(엑스타시스)에서 한 실현(l'acte)을 보았었는데, 그 실현을 통하여 영혼이 신 속에서 무화되었다(s'anéantir). [여기서 ‘무화되다’는 것은 자연 전체 속으로 귀화하여 개인의 인격이 흩어져 무시되고 종전체의 의식만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자연주의자 또는 스피노자, 베르그송으로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황홀경(l'extase positive)과 소극적 황홀경(l'extase négative)을 구별한다. 전자에 따르면 영혼은 신 안에서 또는 자연 속에서 현실화되고 개화되며, 후자에 따르면 영혼은 신 속에서 무화된다. [우리는 전자의 실현화를 몰아경(en-tase)라고, 후자의 단순히 자아를 잃어버리고 파랭이들처럼 영원(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무아경(ex-tase)라 불렀다.]
신학의 경우에는 자연적 황홀, 악마적 황홀, 신적 황홀을 구별하며, 이들에 맞게 동반하는 각각의 방식에 따라, 즉 무기력(la lassitude), 무질서(le désordre, [질서와 양면성]), 환희(la joi, [창조와 동의어])에 따라서 저 구별이 인식될 수 있다.
심리 생리학에서는 위 세 가지를 오직 하나로 귀착시키고, 그 영역을 황홀경에 빠진 행실(comportement extatique)의 분석에 한정한다. 즉 시선의 고정(fixité)은 강도있는 고취의 일반 상태와 대비된다. 그 때의 고취 상태란 주체가 다른 존재들에 보다 일반적으로는 외적 세계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inaccessibilité)에 있음을 나타낸다.
현대철학에서 특히 실존주의에서 새로운 의미에서 “밖에서 국면”(extase)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국면”이란 현존 밖으로 벗어나는데 - 밖으로 “달아나는” 국면(extase évasive 달아나는 국면) -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현존의 작용 자체와 동일시한다. 즉 현존(existence)는 라틴어로 엑스-시스테레(ex-sistere)란 ‘자기 밖으로’(sortir de soi)를 의미한다. 현존이란 바깥에서 스스로를 표출하는데 있다. 보다 일반적으로 행위 하는 것,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하여 자기 존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 이것은 토대적 국면(extase fondative)인데 인간 현존의 근본적 성격을 지칭한다는 정도에서이다. [“밖에서(밖으로 달아나는) 국면”이란, 밖에 있다는 것조차, 나의 밖에 있지만 자연 속에, 즉 본성 속에 있는 것이다. 즉 한 인격은 세계라는 대상에 대해 대자이지만, 자신의 신체가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자아는 자연의 일부로서 즉자(an sich)이자 동시에 대자이다. 즉 인격은 그래서 “내자”(in sich)이다. 실존주의에서 현존은 현재를 벗어나는 것도 밖으로 달아나는 것도 아니라, 베르그송의 표현으로는 현존의 확장이라고 해서야 맞을 것이다. 달아나다 벗어난다는 자아와 세계의 대립관계이고, 베르그송의 확장은 자연의 자기 확장 즉 즉자의 자기원인이며 자기 확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입장인 인식론을 토대로 해서는, 본능(신체 기억)이 지성보다 더 많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43WKI)]
[실존주의 철학에서 ex-tase는 단순히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우리나라 탈주해석과 유사하다. 현재의 밖으로 막연히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현실을 벗어나는 쪽을 의미했다. 그러나 베그르송과 들뢰즈의 생성은 자기 탈바꿈과 같은 연속적 허물벗기의 자기 밖으로이다. 자기를 버리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기 확장이다. 이것이 도덕감정, 미적감정, 환희감정이다. 이를 제대로 본 사람은 루소였다. - 실존의 바깥으로 행위는 자기의 새로운 창조로 받아들여야, 사르트르도 프랑스철학의 범주에 남을 수 있다.(43WKI)]
외향적 extraverti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hilosophie, Larousse, 1988, p. 98. (P.304)
스스로를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경향을 지닌 자,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잘 하는 경향이 있는 자, 자기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자의 성격을 일컫는다.
외향성(l'extraversion)은 심리학적 균형에 필연적이다. 그러나 외향성이 과도하면, 자기로 회귀와 모든 반성이 잘 안되고, 게다가 지성의 발달도 제한된다. 반대: 내성적(introverti) 참조: 성격. (43WMA)
시스테레(sistere) tran. 1. faire se tenir, placer, poser, mettre, établir. 2. faire comparaître devant le tribunal à une date fixée 3. arrêter. 4. affermir, consolider.
int. 1. se poser, se placer, se tenir, 2. comparaître devant le tribunal, 3. s'arrêter, 4. tenir bon, tenir fer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