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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제2차 세계 대전(Second World War, 1939년~1945년) 下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에 추축국이 일으켜 1945년까지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벌어진 두 번째로 일어난 세계 대전이다. 인류사 최대의 전쟁이자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이다. 세계 패권의 중심이 서유럽에서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간 계기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은 이 시기부터 하락세에 들어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도 컸으며, 근대를 무덤으로 보내 버린 대사건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수많은 국가의 정치나 정책이 바뀌었고 나라나 정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유럽 일대에 전역이 주로 국한된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정말로 전 세계가 전장이 되었다.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동아시아, 오세아니아(호주)의 국가가 개입하였고 아메리카 대륙도 미국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는 해안가나 주요 항로가 추축국 잠수함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렸다.
추축국의 파시즘적인 통치나 대량 학살과 같은 전쟁 범죄들로 인해, 논란의 소지가 많았던 다른 수많은 전쟁들과 다르게 추축국을 일방적으로 비난해도 괜찮다고 인식하는 전쟁이란 점도 특기할만 하다. 물론 연합국이라고 결코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후 UN이 설립되었으며 보편적인 인권과 자유에 대한 운동이 대두되었고, 과정은 험난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게 되었다.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핵무기가 실전투입된 전쟁이기도 하다.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중국과 일본 제국은 따로 미리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이 두 국가의 관계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관계로 확대되었다.
추축국의 최초 침공 피해국
독일군의 폴란드 기습 침공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 되었다. 폴란드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어놓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두 국가는 상호방위조약에 규정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독일에 맞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본국 혹은 종주국의 전쟁 수행 합류
영국이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자 영국의 식민지들 그리고 자치령들과 영국을 본국으로 생각하고 있던 영연방 국가들 또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됐다. 이후 이들은 영연방군이라 불리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남아메리카 전선에서 나치 독일, 이탈리아, 일본 제국 등 추축국에 맞서 전투를 벌이는 주력을 맡게 된다.
스위스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 점령해서 이득보는 것이라곤 이탈리아 북부와의 교통 정도인데 의외로 병력이 많아 알프스 등지에서 버틸 경우 예상되는 피해가 컸다. 항복 직전이 되면 사회 인프라까지 자신의 손으로 다 붕괴시키겠다는데 그냥 두는 편이 돈세탁 등으로 쓸모가 많아서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이후 꾸준히 국토 사수에 성공, 영세 중립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아예 전투가 없던 것은 아니고, 스위스 영공을 침입한 독일 공군과 스위스 공군이 몇차례 소규모 공중전을 벌인 적이 있다. 연합군의 경우 스위스의 중립을 보장해주긴 했지만 독일을 폭격하려던 폭격기가 스위스 도시를 오폭한 사례가 소수 있다. 결국 스위스는 이러한 자국 영공에 들어온 연합국과 추축국 항공기를 가리지 않고 나포하는 강공책을 내놓았다.
스페인국
당시 프랑코 정권은 내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덕을 많이 봤지만, 역시 내전의 후유증으로 어느 한쪽 줄에 설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에 독일 공군 원수란 작자가 스페인 내전 중에 벌인 개짓 덕분에 추축국에 가입할 이유를 상실했다. 독일의 압박에 의해 의용군 1개 사단과 청색 비행중대를 동부전선에 파병했고 상당한 활약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의용군이었을 뿐이다. 나중에는 은근슬쩍 연합군 편을 들어서 히틀러가 분노하기도 했다. 일본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1945년 4월에 단교했다. 이미 전황이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서 그 쪽 눈치를 본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도라
현재도 그랬지만 당시에도 스페인과 프랑스의 보호령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이 중립을 지키자 스페인에 묻어가기 식으로 중립국이 되었다.
포르투갈 제2공화국
역시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안토니우 살라자르 독재정권이었으며, 지리적으로 스페인에 둘러싸여서 스페인에 묻어간 셈이다. 연합국과는 해상통로로 연결되고, 추축국과는 스페인을 거쳐서 육로로 연결되므로 전쟁 기간 내내 양측의 스파이 활동이 성행했다. 다만 파시즘 국가는 아니어서 전쟁 중반 이후에는 아소르스 제도 등의 주요 거점을 연합국에게 개방해서 사실상 연합국이 된다. 사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이 몰락하고 영국이 힘을 가진 뒤부터 전통적인 영국의 동맹국이었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전쟁 때 틸지트 조약 후 전 유럽이 나폴레옹의 동맹이나 밑에 있을 때 영국편에 서서 프랑스와 싸운 단 하나의 국가가 바로 포르투갈이다. 또 호주를 주축으로한 연합군이 식민지 티모르를 점령하고 또 다시 추축국인 일본 제국이 포르투갈에게 선전포고를 때리고, 식민지인 티모르를 침략, 점령하였으나, 용케도 중립을 지켰다.
스웨덴
형식적으론 중립국인데 나치 독일의 편의를 굉장히 많이 봐줬다. 당장 독일의 철광석 수요의 상당부분을 스웨덴이 메꿔줄 지경이었다. 이웃국가 중 노르웨이-덴마크는 독일에 점령, 핀란드는 추축동맹에 가담하여 독일에 의해 국토가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독일이 단번에 밀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노르웨이는 스웨덴이 길을 비키지 않겠다면 공격하겠다는 독일의 협박에 밀려서 길을 내줘 점령당했는데 이 때문에 안 그래도 깊었던 노르웨이의 반스웨덴 감정이 더 심해졌다.
아일랜드
과거 아일랜드를 식민지배했던 영국 때문에 독일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옆에 있어서 영국의 견제가 심했으며, 미국과 영국간의 통상항로 중간에 버티고 선 관계로 전략적인 요충지에 있는데다가 독일이 아일랜드를 점거하려는 계획을 만들다가 몇 번 들켜버리자 아예 미군이 아일랜드를 무혈침공해서 사실상 연합국의 점령지로 바꿔버린다. 그 외에 아일랜드인이 개인적으로 영국군 등 연합군 측에 참전한 사례도 있었다.
리히텐슈타인
이쪽은 스위스에 묻어간 식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사실상 스위스의 보호령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왕국
이란이 소련과 영국에게 사실상 분할점령되면서 일종의 완충지대로 중립국임을 인정받았다. 물론 유사시 연합국이 진주할 수 있었긴 하지만 이 지역이 원래부터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집단적으로 반항하는 곳이었으므로 긴급사태가 터지지 않는 한 사실상 방치하는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티베트
1912년 사실상 독립하긴 했지만, 국제적으로 미승인국 취급을 받았고, 딱히 추축국이나 연합국의 위협을 받지도 않아서 중립 상태를 유지했다. 일본과의 사이에 중국이 있고, 중국의 상황이 어수선한데다 사실상 당시의 중화민국은 티베트를 건드릴 생각 없이 엄연히 다른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었기에 청나라의 붕괴 이후 중국과는 이웃한 다른 국가로 존재하며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종전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해와 점령당하게 된다.
바티칸 시국
건드리면 지옥간다나치 독일이 점령을 시도하며 대치한적 있으나, 교황이 근위대에게 화기가 아닌 미늘창만 들게하며 비폭력적으로 나왔고, 전세계 가톨릭 교도들의 반발을 걱정해 포기하였다.
예멘 왕국
영국령이던 아덴을 비롯한 예멘 남부를 되찾기 위해 1936년,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전쟁 기간 동안엔 중립을 지켰다.
6.4. 중립이었지만 추축국에게 점령된 국가
1940년 4월까지 중립을 유지했으나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그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침공했다. 지리적으로 연합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고 독일의 군사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며 군사력 격차도 심했기에 침공 당일 새벽, 덴마크 정부는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국 영토에 독일군 주둔과 군시설 사용을 허가하였고, 독일의 보호령이 된다. 덕분에 덴마크는 독일군 점령지이면서도 어느정도 개입은 받지만 그래도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정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하지만 독일에 전황이 불리해지는 1943년 후반부터 독일은 덴마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직할령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고, 수탈이 강화되었다. 이를 교훈삼아 덴마크는 대전 종식 후 NATO에 가입한다.
모나코
작은 국가이고 사방이 추축국(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이였기에 비시 프랑스 정부에 지원금을 대주는 등 추축국에 호의적이였으나 1943년 이탈리아군이 침공하여 괴뢰 정권이 설립된다. 동년 9월 이탈리아의 철수 이후에는 독일이 점령한다.
중립이었지만 연합국에게 점령된 국가
이란 제국
1941년 초까지 정부는 중립을 유지했으나 정부와 별개로 국민여론은 영국과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친독정서가 상당했다. 한편,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의 전황 악화에 이에 호응하는 이라크의 반영 폭동으로 중동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소련은 독소전쟁 발발 후 영국으로부터의 군수물자 지원루트 확보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페르시아 침공이 개시, 이란은 항복하고 국왕이 퇴위당했으며 대전 기간동안 영소군의 점령을 받게 된다.
아이슬란드 왕국
1940년, 사실상 종주국인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아이슬란드에도 나치 독일의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한 영국이 무혈 침공했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2차 대전 말기 까지 영국/미국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합국이나 추축국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참고로 1944년엔 히틀러가 자신의 뜻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에 분노해 아이슬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시키는것을 승인했다.
포르투갈령 티모르
1941년,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유는 일본 제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였다. 포르투갈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이후 1942년 2월 일본 제국이 티모르를 점령하고 1945년 패망 직전 까지 통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연합국 지위 여부
대한제국은 추축국인 일본 제국에 의해 이미 1910년에 병합 당한 상태였으며,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한반도에는 별도의 자주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던,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는 일본 본토와 일본군을 위해, 물자 및 인력을 적극적으로 반출하고 지원했다. 사족으로 대한제국의 황태자가 공식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 직위에 있었다.
연합국이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진주만 공습으로부터 3일 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정식으로 대추축국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극히 제한적인 활동만 펼쳤기 때문에 참전국 및 승전국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 당시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으로 보는것 자체가 말이안된다.
연합국이 맞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연합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이후 중일 전쟁 동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통한 방식으로 대일항쟁을 시작하는 한편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1941년에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추축국인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또한 단순히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극히 제한적인 활동만 펼쳤고 타국으로부터 승인을 못받았다는 주장에도 무리가 있는데 임시정부는 1944년에는 버마 전선에서 영국군의 요청으로 임팔 전투(태평양 전선)에 광복군 요원을 투입하여 직접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하고 타 국가 정부로부터 1921년 중화민국의 승인을 받고 중화민국 이외에도 1944년에는 소련으로부터, 다음 해 1945년에는 프랑스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몇 정부로부터, 특히 주요 연합국 5개국 중 3개국인 중화민국, 소련, 프랑스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또한 단순한 게릴라 전술과 파괴 공작의 비정규전만 한 것이 아니고 중국 국민당군과 함께 정규전으로 대규모의 전투 또한 치러냈으며 다수의 광복군 군인들이 파병의 형식으로 중국 국부군에 배속되어 전투기 조종사, 전차 운용병, 항해사관 자격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연합국이 맞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7. 전쟁 범죄
전체 사상자 7500만명 중 5000만명 이상이 민간인 사망자로, 분당 13명이 죽어갔으며, 그 절대다수가 추축군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다. 유럽-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주로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의해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계획적, 조직적인 인종 청소가 이루어졌고, 동아시아-동남아시아,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 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로 대표되는 집단 강간 등이 두드러진다. 점령지의 인구를 전쟁에 강제 동원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추축군만이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서, 연합군도 전선에서의 포로 사살이나 민간인 약탈 및 강간 또는 살인이 자행되었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민간 시설에 대한 전략 폭격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전쟁이기도 하다. 충칭 대공습, 드레스덴 폭격 등.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라는게 있고 추축국이 저지른 만행이 워낙 심하다보니 연합군 병사 개개인의 잘못은 주목받기가 힘들다.
추축군의 전쟁범죄 성격에 대한 논쟁
나치 독일과 일본·이탈리아의 전쟁범죄 성격이 같냐는 점에서 논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연구와 관련된 학자를 기준으로 추가바람
• 나치독일과 일본·이탈리아가 달랐다는 측
2차 대전은 단순히 영토와 자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어느 집단이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하고 어느 집단이 승리자에 의해 '열등'으로 낙인찍혀 영원히 소멸당할지는 놓고 싸운 전쟁이었다.
(중략)
1939년에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과 일본이 중국에서 1931년과 1937년에 벌인 전쟁, 그리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서 1935~36년 사이에 벌인 전쟁과도 다르다. 비록 당사자들에게, 특히 중국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매우 잔혹한 전쟁이었지만 이 전쟁들은 예전 전쟁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두 단계에 걸쳐 벌인 침략은 19세기 끝 무렵부터 벌어진 식민지 확장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본은 비록 중국을 희생양 삼아 영토와 자원을 늘리려 했으나 중국, 그리고 중국인의 완전한 소멸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과 정복 역시 스페인과 포르투칼,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벨기에, 독일인들이 벌이던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막바지에 이탈리아가 끼어든 결과일 뿐이다. 때문에 이 책은 동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전쟁이 아닌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하려 한다. 일련의 다른 전쟁들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전쟁에 녹아들었지만 그 발단은 전혀 달랐으며 만약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계속 독립된 전쟁으로 남았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2차 세계대전사 1, 길찾기, 일러두기 부분,
• 나치독일과 일본·이탈리아가 다르지않다다는 측
2차 세계대전 관련 학자를 근거로 추가바람
물론 이 논쟁은 성격이 다르다는 거지 선악의 수준이 다르다는 논쟁이 아님을 명심하자.
8. 전후 상황
8.1. 연합국
연합국은 매우 많지만 일단 전쟁 중 파시스트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박터지게 싸웠던 소련(현 러시아),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 미국, 중화민국, 중국 공산당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소련은 미국과 함께 본격적인 강대국의 대열에 오르긴 했으나, 전쟁 간 가장 많은 독일군을 상대하고, 서방 연합국의 직접적 병력 투입이 없는 상태에서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어 타 참전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치의 인명적, 물질적 손실을 입었다. 이 수치는 관점에 따라 세계대전이라고 칭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무려 약 2천 700만명이란 희생자를 낳았다. 실제로, 냉전 이후 전개로 인해 축소된 면이 적지 않으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종식에 소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영국은 승전 이후 전후 복구와 재건에 힘썼다. 타 유럽 국가보다 영국 본토와 영국민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제 1차 세계 대전에 이은 또다른 괴멸적 전쟁으로 영국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영국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원칙에 따라 복지국가론에 따라 국가를 재건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복지국가 개념이 실현됐다. 또한 이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식민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영연방이라는 국제 기구로 재편하게 된다. 이 영연방을 통해 영국은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과거 피식민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의 전후 복구는 이 영연방 각국의 지원과 협력, 영연방 경제 연합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 시기 영연방 각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부족한 일손을 채웠다. 이런 영연방이라는 기구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려, 그리고 영국 문화의 소프트 파워 덕에 영국이 초강대국에서 물러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장이 된 자신들의 국토를 수습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다. 과거의 정치적인 영향력 덕분에 영국과 함께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는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는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했고, 식민지 정책에서 무리수를 둔 측면이 크다.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수에즈 전쟁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고, 식민제국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욕심에 알제리와 베트남을 침공해 식민지 전쟁을 벌였지만 이 전쟁의 실패들로 인해 프랑스는 연쇄적인 식민지에서의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드골주의와 사민주의의 극렬한 좌우대립과 허무주의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도 프랑스 특유의 보편적 복지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전후 경제 복구와 유럽의 평화 체제 정착,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느꼈다. 이 때문에 훗날 유럽 연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최초의 유럽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날 독일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두 주축이 된다.
폴란드는 이후 소련군과 그에 협력한 폴란드 공산당에게 넘어가 소련의 괴뢰국화 된다.소련과 폴란드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웠던 망명정부 및 폴란드 국내군 소속 장교들을 서방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시키는 희대의 병크를 일으키고 만다. 이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를 위시한 소련의 간섭을 겪다가 이에 반발한 고무우카가 집권하고 또 이에 반발한 세력으로 인해 쫓겨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으로 마침내 1989년 공산당 독재가 종식된다. 폴란드는 냉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NATO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등 서방 세계로 화려하게 다시 돌아온다.
체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뮌헨 협정으로 독일에게 빼앗긴 국권을 나치가 패망함으로써 되찾았으나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과 소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체코 공산당에 의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공산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개혁파 세력들이 집권하여 이후 체코 내부에서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이 체코에 대한 군사개입을 일으켜 반정부 세력들을 진압하였고 둡체크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던 체코 공산당내 보수파 세력들이 소련의 군사 개입을 등에 업고 둡체크를 몰아내면서 실패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정부 운동 진압 이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등이 이끄는 반 공산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어졌고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바람을 틈타 벨벳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마침내 야케스 공산당 서기장이 퇴진하고 이후 실시된 민주 다당제 대선에서 반공 운동 지도자였던 하벨이 당선되면서 마침내 공산당 독재 체제가 종식되었다.
네덜란드는 추축국에서 해방된 이후 연합국 자격을 얻었지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자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물간 식민주의 대신 새로운 신예인 인도네시아를 자국의 동맹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던 미국과 영국, 소련등 전승국들의 압박으로 금방 데꿀멍하고 독립시켜줘야 했다. 이후엔 수리남과 같은 해외 식민지가 모조리 잘려나가고 아루바 등 소수만 남긴 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하고 현재는 조용히 살고있는 중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사건 이후 전쟁 중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참전하여 승전 이후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떠르고 전쟁의 혜택을 단단하게 누렸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 체제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힘쓰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군사는 물론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와 정치적 대립을 시작였고, 이를 냉전이라고 부른다. 이 극심한 대립은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되면서 종식되었다. 물론 소련 붕괴 이후 부활한 러시아는 부흥한 중국과 함께 미국을 견제하는 중. 그리고 사실 미국은 독일계 백인들이 주류 세력 중 하나인 사회였으나 이들은 양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름과 성을 바꾸고 독일인임을 숨기는 식으로 행동했고, 미국 내의 독일계 세력은 수면 밑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중화민국은 일본 제국 대신 아시아의 주도 국가로 자리매김할 뻔 했으나 겨우내 봉합했던 국공내전이 금세 또 재발발하여 공산혁명으로 기존의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하면서 철수한 뒤 빈 자리를 채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바로 미국과 소련 양쪽에 밉보여 1970년대까지 고립된다. 그 동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제사해 운동같은 충격과 공포의 OME급 사건을 겪다가 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자리를 또 다시 채운 후 야심차게 등장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은 사실상 허울뿐인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이후 천안문 사태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경제성장, 우주개발에 성공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아 구 제국주의 시절의 치욕을 씻는 등 겨우 20세기를 좋게 맞이하고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된다.
승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5개국은 UN 상임이사국으로써 현재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8.2. 추축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했고, 추축국들이 현대는 물론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심각한 수준의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추축국의 상당수는 기존 정부가 붕괴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특히 추축국 삼인방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연합군이 영토 전체를 점령하는 등 일시적으로 국가가 소멸한 후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수준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UN의 규칙 중에 옛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남아있을 정도다.
1943년 조기에 항복한 추축국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 후에 신정부가 들어서서 연합군에 가담하였고, 무솔리니가 북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정부와 독일군을 상대로 1945년 5월까지 전투를 벌였다. 1946년에 들어서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유지했던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 공화정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전환하고 전범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1936년에 탈퇴했던 국제연맹의 후신 UN에도 1955년에 공식 가입하였다. 추축국 3대 국가 중 피해는 제일 적은 편이다.
독일은 1945년 5월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칼 되니츠가 후임자가 된 다음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군이 베를린을 정복하며 전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니츠 정부가 해산 당하면서 국가가 일시적으로 소멸했다.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연합통치를 받으며, 동부 독일쪽 영토를 많이 잃어서 독일 민족 국가 중 역사상 가장 작은 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국토는 동서로 분단되어 이른바 서쪽에는 서독이, 동쪽에는 동독 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으며 이후에 베를린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0년 10월 드디어 재통일을 이루었다. 이후에는 전범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서 옛 나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전범들을 잇따라 체포하는 등 전범시절 청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전쟁 때 침략했던 국가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했다. 그리고 독일이 동유럽에 독일인을 이주시키고 전쟁범죄를 일으킨 것의 반동으로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가 일어났고,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폼메른 등 폴란드와 소련에 합병된 구 독일령의 독일계 주민들이 대량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쫓겨나 실향민들이 되었다.
일본 제국은 위의 두 국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옥쇄를 결의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와 손실이 예상되자 덴노의 명의로 전쟁의 종식을 고하였다. 일본은 최소한 중일전쟁 이전에 넓힌 영토만큼은 보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50년 넘게 보유하여 실질적으로 반쯤 본토 취급하던 조선과 대만, 본토 일부였던 사할린 남부까지 전부 날아갔다. 1945년 미 군정은 천황제 지속을 승인했고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경제적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급격한 경제발전과 50년이 넘게 자민당이 득세를 하면서 일본에서는 전범세력들의 후손들이 민주적으로 정치권력의 주류가 되었고, 과거사 청산 및 단절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체 우익화 되었다. 따라서 한일기본조약 등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하고 호소카와, 무라야마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를 통해 공식적인 사과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무색하게도 정치인들의 과거 전쟁 범죄에 반성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독도, 쿠릴 열도, 센카쿠 등 영토분쟁으로 러시아,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대립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전쟁을 치룬 중국과의 갈등이 가장 심한데 과거에는 냉전 때문이었지만 현재는 보통 국가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군사력을 경계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9. 기타
모호하게 전쟁이 종결되어 불안불안했던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간기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누가 봐도 대립구도가 명확했고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 앞으로의 역사와 세계질서를 완전히 결정짓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미친 영향이 워낙 커서 영향을 안 받은 곳이 없다. 그나마 아메리카 대륙은 별 일 없었지만 다른 온갖 대륙은 전장이 되었다. 독일은 유럽에, 일본은 아시아(+오세아니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 전장을 만들었고, 대서양이나 태평양 역시 전쟁터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일들이 전후 세계를 많이 바꿔놓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때문에 국가 자체가 잠깐 멸망해버린 경험을 한 국가도 많고, 아예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정권이 세워지거나 혹은 세계 각국의 정치, 사회 부분에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긍정적인 영향도 없지는 않다.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만이 아닌 전 국민이 겪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전쟁이란 게 인류 전쟁사의 온갖 기록을 다 갈아치울만한 거대한 전쟁이었기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에 비해 터부시당하게 되었고 전쟁 발발의 과정이 된 뮌헨 협정이 재조명되어 국제관계에서 독재 국가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거절하고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인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식민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독점하는 국제동맹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비좁은, 그래서 생활의 필수적 자원들 조차 너무 부족한 우리의 제국,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개간되고 관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획없이 이것을 해낼수 없습니다. 도이칠란트, 지크 하일!"
- 아돌프 히틀러
"전 세계를 향해 단언컨대 1918년 11월은 결코 독일 역사에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언제라도 내 목숨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칠 각오가 되어 있듯이 국민들도 그래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아돌프 히틀러, 1939년 9월 1일 오전 10시, 라이히스탁에서의 개전 연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55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 명령 암호.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 파울 요제프 괴벨스, 그의 일기장
"세계의 역사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께서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아리아인이라 기록되신다면 그의 선택된, 충성스러운 기사단인 우리들은 영웅의 신화가 될 것이다."
- 하인리히 힘러, 1943년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친위대 대원들에게 한 연설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 카를 되니츠
"우리는 사악한 세력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폭력과 불신과 불의와 억압과 박해이고 그것과 맞섬으로써 정의가 지켜질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 네빌 체임벌린, 1939년 9월 3일의 대독일 선전포고 연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써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전시 수상 취임 연설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7월 3일의 라디오 연설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일격은 베르사유의 추악한 산물에 종지부를 찍었다."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폴란드 멸망 후
"중화민족뿐만이 아닌 인류의 번영을 위해, 설령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우리는 소중한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때에 왔습니다."
- 1943년 미 의회, 쑹메이링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을 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이 하고 떨쳐 일어나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 쇼와 덴노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 중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와 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말라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어제 밤 일본군은 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어제 밤 일본군은 괌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어제 밤 일본군은 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어제 밤 일본군은 웨이크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 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Hostilities exist.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So help us God.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의 의회 연설.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 서문.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여. 나는 미국을 공정하게 평한다. 5만명의 병사들이 전쟁터로 향한다. 미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위대함을 위해서 말이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유럽으로 파견되는 미군 수송선에서 쓴 편지에서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커티스 르메이, 일본 본토 공습을 기획하면서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일본의 도시란 이런 모양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 65호나 63호 너트나 다른 잡동사니를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키타가와 씨가 그걸 정리해다가 공장으로 가져가는 거다.)
- 커티스 르메이가 도쿄 대공습 직전 도쿄 상공에서 민간인에 대한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던 부하들을 향해서
"그리고 나는 외치고 싶었다. 러시아, 벨로루시, 폴란드의 땅 속에 누워 있는 이들, 우리가 거쳐온 전장에서 영원히 잠든 이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동지들, 우리가 해냈소!"
- 베를린 전투에서 인용된 한 소련군 참전용사의 어록
"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
-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들이 사형되기 전 한 말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카미카제 징집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의 항복 조인식 후 미주리호 갑판에서의 연설
"나는 이 전쟁이 전세계의 인류와 전 중국의 동포, 그리고 세계문명국가가 참가한 최후의 전쟁이 되기를 믿는 바입니다."
- 장제스. 1945년 8월 15일 승전기념 연설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것이며, 우리의 바다와 해양에서 싸울것이고, 우리는 자신감과 함께 자라나는 공군의 힘으로 하늘에서 싸울것입니다,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땅을 지킬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해안에서 싸울것이며,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대지와 도시의 거리에서 싸우고, 우리의 언덕에서 싸울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1939년 전시총리로 임명받고 국민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한 연설에서
"파리는 상처입었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 샤를 드 골 자유 프랑스 장군.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연설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axis)"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
- 베니토 무솔리니, 1936년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지 않으면 진정한 우스타샤가 아니다."
- 안테 파벨리치, 우스타샤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내일 당신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