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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권. [고대] 그리스 시대, Période Hellénique 35
4A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논리학)과 형이상학(자연배후학)
4B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과 자연학
4C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과 정치학
제5절. 실체의 방법 V. La méthode de la substance 173
사물들의 실질들 또는 본질들이 사물들의 바깥에서 실현되는 영원한 실체라는 학설을 물리치면서도,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질들이 있다는 것 전부를 부정한다고 우기지는 않았다. 실질이란 사물 그 자체 속에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실질은 소크라테스와 칼리아스(Καλλίας, 전5세기경 아테네 정치가)안에 있다. 이러한 국면들 중의 하나로서, 형이상학은 이 실질들을 속성들의 나머지로부터 따로 떼어놓게 해주는 규칙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문제의 자연에 의해서, 거기에는 증명작업의 질료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실질을 증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이 영역에서는, 경험에 호소하든지 견해에 호소하든지, 빈번한 호출이 나오는데, 이 호출은 변증법적 방법의 기호(le signe)이다. (173)
일반적인 방식에서 만일 문제 거리인 실체가 우리 자신이라면, 본질로부터 음악가로서 속성들을, 즉 흰옷을 걸치고 있는 것, 경험적으로 습득된 것, 또 그와 같은 것으로 우리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 등을 제거하는 것은 쉽다. 그래도 정의에 속하는 특성들이 잔여로서 남아있다. “본질은 정의로 될 모든 사물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사물들 속에 부차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아직은 다른 사물들 속에 한정적인 것을 가정하는 정의와, 소위 말하는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정의를 구별해 내야 한다. 전자의 정의는 파생된 사물들과 실체가 아닌 것을 의미하며, 후자의 정의는 다른 사물에 연관이 없는 본질의 정의를 의미한다. 이 처럼 둘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짝수는 수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코에서 곡선이 들려진 것을 의미하는 들창코가 코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처럼. 본질 또는 실질은, 본질이 실체에 속하듯이 원초적으로가 아니라 부차적으로만 사물들에 속할 뿐이다.. (174)
이렇게 장애물이 제거된 지평에는 중요한 난점이 남는다. 무엇이 정의에 의해 표현된 본질의 단위(l'unité 통일성)를, 그 통일성 없이는 실체일 수 없는데, 이루는가? 인간의 정의가 두발 달린 동물이라면, 무엇이 다음과 같은 정의를 하게 하는가? 즉 두발 동물은 유일한 본질을 지칭하며 두 항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하는 반면에, 흰 동물은 본질과 성질의 구성물이게 하는가? 문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원자론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대로 요소들의 단순한 병치에 의해 사람들이 존재의 본질을 얻을 수 있는지를, 또는 본질은 하나의 진실한 단위를 갖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응답하기 위하여 존재의 물질적 부분들과 존재의 형상 또는 본질의 부분들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리하여 원의 물질적 부분들은 선분들이고, 원은 그 선분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형상적인 부분들, 그것은 류(평면도형)와 류를 정의하는 차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은 물질적 부분들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원은 물질적 부분들 보다 앞서 있는데, 왜냐하면 반원의 개념은 원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직각의 물질적 부분인 예각은 논리적으로 직각 다음에 있는데, 왜냐하면 예각은 직각보다 작은 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손은 살아있는 신체의 본질에 앞서가 아니라 다음에 있으며, 왜냐하면 그 손은 손만으로서 신체와 따로 현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상 사람들은 본질적인 부분들을 물질적인 부분들과 항상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살과 뼈들이 인간의 본질을 일부를 이루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은 물질적 부분들 속에 있는 나머지 전부를 거부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형상적 본질을 수들로 환원하기 위하여 이런 난점을 이용했다. (174)
그러나 이렇게 가정된 방식으로 구별이 이루어지면, 우선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존재의 단위는 물질적 부분들의 연접 또는 병치로부터 나오지 못한다. 왜냐하면 부분들은 존재 다음에 있기 때문이며, 그러나 류와 차이[종차]라는 논리적 구성물들의 통합 양식(le mode d'union)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주어에 통합되는 속성에게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주어가 속성에 참여하든지(인간의 희다) 또는 속성이 주어 속에서 내용이든지(수 2는 짝수이다) 이다. 그러나 차이는 두 방식들 중의 어느 방식의 류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차이들이, 전체가 류의 통일성(단위) 속에 환원됨이 없이도, 류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인가? 류와 차이 사이에 아주 다르지만, 보다 내밀한 통합 양식이 있다. 즉 동물과 두발은 두 개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지칭한다. 우선 동물로서 그 존재는 상대적으로 비규정적인 것으로 보이며(말하자면 물질 또는 잠재태 존재), 그러고 나서 두발로서 존재는 상대적으로 규정적이다(말하자면, 형상 또는 현실태 존재). 따라서 정의는 하나인 진술이고 또한 하나인 존재를 진술한다. 우선 존재를 류에 의해서 불완전하게 규정하고(그 동물은 잠재태로서 두 발이며), 그러고 나서 종차에 의해서, 즉 두발에 의해서 완전하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낯선 부분들 사이에 서로 서로 최소한의 병치도 없다. 사람들은 동물과 두 발에 대해 말하면서 차이 있는 두 사물에 대해 말하지 않으나, 우선은 비규정적인 그러고 나서 규정적인 동일한 존재에 대해 말한다. (175)
그러나 그 웅답이 유효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완전하고 현실적인 용어는 인간이라는 구성물들에 앞서 현존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물이라는 용어는 인간과 같은 그러한 완전한 용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규정적인 것으로서 고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하는 습관이 있는 것처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아마도 플라톤의 분할의 방법과 더불어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해야 한다. 플라톤의 그 방법은 류로부터 출발하면서 종들을 종합적으로 구축하려 하고, 이리하여 잠재태의 존재를 현실태의 존재로 나가는 방법인데 비하여, 다른 방식이란 분석적 방식으로 현실태에서 잠재태로 가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의 단위[통일성]는 개념들의 발생적이고 구축적인 방법을 거부하는 대가로 구매된 것이다. 본질은, 마치 음절이 철자에 의해 구성되는 것처럼, 요소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단순하고 불가분이다(사람들이 보았듯이, 정의의 분석이란 진실한 해체작업이 아니다). 그런데 “단순한 항들에 있어서는 탐구할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 또는 적어도 탐구란 다른 종류의 것이다”. (176)
나누어질 수 있는 항들을 파악하는 데 무매개적인 지적 직관이외 다른 수단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직관을 사유(la pensée, 노에시스 νόησις)라 불렀고, 그리고 이 직관과 본질 사이의 관계는 시각과 색깔의 관계와 같다. 직관은 자기 대상에 관해 실수 할 수 없듯이, 각 감각도 자신의 고유한 감성에 관해 실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유들을 구성할 때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일종의 무매개적 접촉에 의해 단순 항들을 사유할 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지적 직관이란 플라톤에서처럼 우리에게 감각적 사물들을 넘어서게 하는 긴 변증법적 운동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자. 그 사유는 감각적 사물들 속에 있으며, 마치 본질이 사물에 내재하듯이 그 사유는 감각에 내재한다. “보편자에 대해 감각적 지각작용이 있다. 예를 들어 칼리아스로서 인간에 대한 감각적 지각작용이 있지, 단지 칼리아스에 대한 감각적 지각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귀납법을 사용하는 사유는 보편자를 생산한다. 따라서 사유는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기는커녕, 본질을 인식하기 위하여 감각적인 것으로 향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본질들을 분간하기 위한 방법도 없고, 방법이 있을 수도 없다. 단지 사유 속에 일반적 믿음이가 본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8NLI)
제6절. 질료와 형상: 잠재태와 현실태 VI. Matiere et forme; puissance et acte 176
이제 남은 것은 본질(l'essence, 우시아 οὐσία)는 진실로 존재인 한에서 존재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최상의 원리를 참조하지 않고, 진실로 근본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문제의 범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주의자들 가까이에서 발견했던 것만큼이나, 자연학자들 또는 신학자들 가까이에서도 발견했던 저항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자들에게서는 본질들의 발생적 구축이 근본적인 문제였고, 후자들은 이들 나름으로 다양성을 존재들로부터 연역한다고 고집했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부정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적 사유의 방향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적 사유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보았던 발생적 설명의 모든 시도들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점에서 관해서 그의 학설을 파악하는 것이 특별하게 중요하다. (177)
아리스토텔레스는, 증명할 수 없는 원리들에 근거하는 주제의 본성 자체 때문에, 이 학설에서 비유적이고, 직관적이고, 귀납적인 나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증명적이지만 엄격함이 없다. 존재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존재의 류들의 그 위에 위치하는 형이상학적 용어들은 정의를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용어들의 의미는 단지 비유에 의해서만 암시될 수 있을 뿐이다. (177)
이런 논증작업은 이렇게 형식화 될 수 있다. 만일 본질(형상, 실질)이 제일 원리이라면, 그것은 현실태이고, 현실태는 항상 잠재태에 앞선다. (177)
현실태(ἐνέργεια, l'acte)란 무엇인가? 현실태와 잠재태의 관계는 마치 깨어있는 인간과 잠자는 인간의 관계와 같다. 즉 보고 있는 자와 눈을 감고 있는 자와 관계, 조각상과 청동과 관계, 완성된 것과 완성되지 않은 것과 관계이다. 각 쌍의 둘째 항들은 첫째 항들의 각각에게는 잠재태이다. 감겨진 눈을 가지고 있는 자는 잠재적으로 보는 자이고, 청동은 잠재적으로 조각상이다. 만일 어떤 조건들이 실현된다면, 눈이라는 것은 볼 것이라는 것, 청동이라는 것은 조각상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보는 자와 조각상은 소위 말해서 현실태로서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의 현실태는 각각 시각(la vision)과 조각상의 형상(la forme)이다. 시각은 하나의 현실태이며, 이것은 시각이 일어나는 시간 전체 동안에는 한결같이 동등하게 시각으로 있다는 의미에서 이다. 생명, 행복, 지적 직관은 동일한 이유에서 현실태들이고, 반면에 매 순간마다 다른 단계로 행진하고 있는 걸음은 현실태가 아니라 오히려 행동 또는 운동이다. 현실태(ἐνέργεια)는 현실태로서 존재의 작업(l'oeuvre) 또는 기능(la fonction, ἔργον)이다. 예를 들면 시각은 눈의 기능이다. 현실태는 또한 완전태(ἐντελέχεια)이며, 다시 말하면 최종적이고 완성된 상태이며, 가능한 실현화의 한계를 표시한다. 분명한 것은 잠재태의 용어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그 용어가 현실태로서 존재에 완전히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생성될 수 있는 것에 의해서만이 잠재태로서 존재가 있는 그대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현실태는 참조의 중심이며, 이 중심을 통해서 잠재태로서 존재들이 지위를 갖게 되고 배열된다. (177)
그런데 “본질 또는 형상은 현실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탁월한 현실태이다. 왜냐하면 실질(la quiddité)은 그 무엇이 태어나면서 사라질 때까지 주어진 존재에 속하는 무엇이며, 총체적으로 보아 진보도 없고 결손도 없는 무엇이다. 실질은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인간이 아니다. 이 변질하지 않은 영속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토 티 엔 에이나이(τὸ τί ἦν εἶναι)’라는 표현을 본질로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그 이루어진 사실을 ‘그것이 있었던 것인 것으로 계속해서 있는 존재’로서 사용한다. 이 본질, 즉 형상으로부터 생성은 없다. 공의 형태인 청동 공의 형상은 사람들이 청동 공을 제작할 때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공의 형상과 청동의 통합이다. 이처럼 태어남 또는 생성은 형상에다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존재와 통합에 있다. 이 잠재태로서 존재는 형상을 받아들인 후에 현실태로서 존재가 되며, 소위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ὕλη, une matière)이라 부르는 것이다. 질료는 형상이 나타날 수 있도록 실현되어야 할 조건들 일체이다. 잠재태로서 상자, 또는 동일자로 귀착하는 그 무엇, 즉 상자의 질료, 그것은 나무이다.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명제는 존재의 비현존을 정해지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다. 모든 현실적 존재, 즉 이 나무, 이 인간 등은 그것이 현존하는 한에서 유일한 본질이다. 이 유일한 본질은 이것(이 나무)을 가지고 ‘현실태로서 존재’(un être en acte, τόδε τι)를 만드는 것이다. 현존하지 않는 것, 그것은 전설의 일각수처럼 전혀 있지 않는 것이다. (178)
이제(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리가 여기서 나온다), 현실태는 3가지 의미에서 잠재태에 앞서 있다. 앞서(antérieur)라는 단어의 3가지 의미는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실체적으로 이다. 논리적으로,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잠재태로서 존재의 개념은, 그 존재가 잠재태로서 말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현실태로서 존재’의 개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왜냐하면 현실태로서 존재는 잠재태로서 존재로부터 유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잠재태로서 음악가는 그가 현실로서 음악가의 교육을 받았을 경우에만 현실태로서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인간을 생성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마지막으로 실체적으로, 왜냐하면 [아직] 씨앗인 잠재태로서 인간은 어른으로서 그리고 현실태로서 인간의 본질을 전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78)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선배들에게 이야기한 대부분의 반대는, 아마도 바탕에서 일어난 유일한 반대는, 공준의 진리를 오해한 것이다. 선배들이란 어둠에서 모든 것을 태어나게 했었던 신학자들에서부터 가장 비규정적인 최고 류들들에서 존재들의 진리를 태어나게 하고자 원했던 플라톤에 이르기까지이다. 이 모든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칠 줄 모르고 이것을 반복했는데, 그 이유로는 이것이 증거로 될 수 없지만,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면 현존은 전반적으로 규정된 현실적인 실체들의 형식으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세계 속에 현존할 수 있는 비규정성 또는 질료는 절대적으로도 자체적으로도 비규정성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단지 완전한 형식들에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179). (48NMA) (57VKE)
제7절. 자연학: 원인들, 운동, 시간, 장소, 빈 것 - VII. Physique: Les causes, le mouvement, le temps, le lieu, le vide 179
따라서 현실태,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의 작용하는 기능, 바로 이러한 것은 각 경우에서 설명의 마지막 원리이다. 눈이 설명될 수 있는 것도, 눈의 소재들이 시각을 위하여 선택되고 배치될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제시하고 난 다음에일 것이다. 동물이 설명되는 것도, 사람들이 생명기능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조합된 기관들 모두를 제시한 다음일 것이다. 도시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인간 활동들을 제시하고 난 다음일 것인데, 그 인간 활동들이란 도시의 재료들로 쓰이는 것으로, 편하고 좋고 행복한 삶을 위해 조합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대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선택된 재료들이 어떤 기능을 위하여 조직화되어 있는지를 제시하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기능의 틀들을 묘사하게 하고, 그것의 정신을 지적하게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 틀들을 채우려는 경험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점에서 무한한 수정작업들에 종속되는 백과전서적이고 [부분들의] 집합적 작업이다. 또한 틀들이 완고한 것만큼이나, 그만큼 여기에 개입하는 질료도 다양하고 여러 형태이다. (179)
이 백과전서에서 안내자를 얻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격률을 굳건하게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으로 진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초기 인식들인 모호하고 혼재된 집합들로부터, 우리들에게서가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초기 인식들인 세부적이고 구별된 인식들로 진행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그의 우주와 동일한 리듬을 갖는다. 그 과학은 비규정적인 것에서 규정된 것으로 이행이다. 이 이행의 조작자(l'opérateur, 실행자)는 현실태로서 사유이며, 예를 들어 기하학적 도형 속에서,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선들을, 또 공준을 증명하는데 사용할 선들을 현실화할 줄 아는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심층에서 진행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확장되는 것이고 활짝 펼쳐지는 것이다. (180)
기능들, 현실태들, 또는 본질들의 탐구는 절대적으로 물질적 조건들 위에서 경험적 탐구들의 연대이다. 이 조건들 속에서 기능들이 실현될 수 있다. 이 탐구들은 자연적으로 무제한적이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업들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한다. 일반적인 자연학은, 자연적 존재들 일반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존재들을 실현하려는 운동의 메카니즘을 파악한 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의 연구는, 생명적 기능들 일반이 즉 생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수천가지 유기적 조합들을 묘사한 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이 조합들이 생명존재에게 스스로를 실현하도록 해 준다. 형상은 항상 이렇게 질료와 떼어낼 수 없으며, 현실태로서 존재는 잠재태로서 존재와 떼어낼 수 없다. (180)
자연학의 근본적 용어들은 이런 통합에 연관이 있다. 원인들의 이론이 이 질문에 응답한다. 무엇이 다음 사실을 만드는가? 즉 그러저러한 주체가 그러저러한 형상을 얻고, 환자가 회복하고, 청동이 조각상이 되고 하는 사실 말이다. 사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이냐에 대해 질료인이 응답이다. 여기 청동 또는 환자가 있다. 형상, 전형, 본질이라는 형상인은 의사의 정신 속에서 건강의 관념이며 조각가의 정신 속에서 조각상의 관념이다. 그러면 운동인은 의사 또는 조각가이다. 목적인, 다시 말하면 마지막 또는 완성된 상태란 잠재태로서 존재가 현실태로 있게 되는 것이다. 청동이 변하여 이루어지는 조각상 형상, 유기체가 변하여 되는 건강의 관념이 그것이다(자연학, II, 3). (180)
자연(la nature)은 또한 소위말해서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질료와 어떤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한편으로 조각상 또는 침대와 같은 예술들의 생산물들을 생각해보면, 다른 한편으로 돌 또는 사람과 같은 자연적 존재들을 생각해보면, 후자들이 그것들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그 자체 속에 가지고 있는데 반해, 전자들에서는 이 원리가 그것들과는 낯선 존재들에게, 즉 조각가 또는 목수장이에게 있다. 자연의 경우에서 우리는 내재적 활동의 힘에 관여한다(“씨앗은 기예적 작품을 생산 한다”). 이에 비해 예술의 경우에서, 활동적 힘은 사유에 있으며, 그 힘은 한번 만들어진 작품을 내버려둔다. 이 양자를 구별하는 것, 그것은 따라서 형상과 질료의 연관이며, 전자는 내재적 연관이고 후자는 외재적 관계이다. (181)
형상과 질료의 연관을 고려해 보면, 소위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운[운수](la chance)와 자발성(la spontanéité)이라는 두 개념들은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 자연학자들에 대한 비판은 이 두 개념을 향한 모든 가치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대중적이고 직접적인 이 용어들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원인의 부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들의 행복 또는 불행을 위해 작용하는 원인들이다. 아고라 광장으로 가는 도중인 사람이 그가 생각지도 않았던 채무자를 만날 운이 있고, 그리고 이리하여 그 빚을 받을 운도 있어서, 그 사람이 그 운수는 완전히 실재적인 원인이라고 근거를 가지고서 믿는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것을 모든 관계로서 고려한다는 조건에 맞추어보면, 그 원인은 실재적이며, 마찬가지로 운은 목적에 맞게 이루어진 현실태와 연관해서만 정의 될 수 있다. 그런데 운이 있다고 할 때, 그 운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다른 한편] 채무자편에서는 시장에 가려고 하는데, 마치 빚을 갚으러 갔던 것처럼 자신의 빚을 갚는다. 따라서 운은 의도 또는 의지와 같은 제일 원인이 아니다. 그 운은 오히려 우발적 원인이다. 즉 현실태에서 보면 그 다행한 또는 불행한 사건은 결과이며 그 현실태는 그 사건을 생산하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우발적 원인이다. 그러나 또한 그 결과는 의지를 위한 하나의 목적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 운이 연속으로 일어나리라는 것은 드문 사실이며, 반면에 정해진 원인들에 의해 생산된 사실들은 항상 또는 적어도 대부분의 시기에 생산되는 사실들이다. 자발성이란 운과 동일한 자연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자발성의 영역은 훨씬 더 넓다. 자발성이 자연적 목적성에 해당한다면 운수는 의지의 의도적 목적들에 해당한다. 부서질 삼각발이 좌석으로 쓰일 방식으로 배치되었다면, 사람들은 그 삼각발이 자발적으로 부서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원인들을[오랜 자연적 마모와 같은 원인, 자연적 파손] 부정하는 것은 그것으로 지성과 자연보다 앞선 초기 원인들로 삼는 것은 만큼이나 큰 오류이다. (181)
결국, 형상과 질료의 연결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으로부터(du mouvement)[κίνησις] 이루려는 생각을 지배한다. 그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단어는 규정된 존재들의 상태 변화를 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엽적 운동(le mouvement local)은 주어진 시간 안에 거쳐 가는 공간이 전혀 아니다. 그가 정의한 대로, 모든 운동은 다른 운동과 정확한 연관을 갖는다. 오히려 그것은 뛰고, 걷고, 기고, 날고 등의 살아있는 존재의 운동 또는 돌의 운동, 세계의 중심으로 향하는 운동, 별의 운동, 원운동 등이다. 거기에는 양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공간의 운동들이 있다(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실체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운동들은 많은 척도에서 그 운동들을 소유하는 주체의 자연에 의존한다. 그러나 또한 지엽적 운동들과 다른 종류의 상태들의 변화가 있다. 질적 변화 즉 변질은 정열을 표현하거나 질병이 들었을 때 피부가 드러내는 색깔의 변화와 같은 것이다. 증가 또는 축소가 되는 양적인 변화도 있다. 예를 들어 꼬마가 어른으로서 그의 키에 도달할 때까지 자라거나, 환자가 쇠약하여 야위어간다. (182)
따라서 모든 운동은 최초의 상태와 정지에 이르는 최종 상태 사이에 제한되어 있다. 이때 최초의 상태에서 내포된 가능성들 모두 또는 부분들이 전개된다. 이로부터 유명한 정식이 도래한다. “운동은 가능한 한에서 가능적인 것의 현실태이다”. 그것은 어린애가 자란다는 것은 그렇게 자란 키로 살아간다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 한에서 그는 어른의 키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이 실현되면, 운동은 그친다. 따라서 운동은 형상과 질료의 연관에서만, 현실적인 것(l'actuel)과 가상적인 것(le virtuel)의 연관에서만 의미있다. (182)
운동은, 그것이 향하는 최종 상태에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지칭된다. 검게 됨이란 검은 것으로 향하는 변질이다. 그러나 운동이 최종 상태의 반대자인 초기상태에서 또는 이 상태와 반대 상태 사이의 매개에 의해서 출발한다는 관점을 잃지 않아야 한다. 만일 하나의 사물이 검게 물들어간다면, 초기에 그 사물은 흰색이었거나 적어도 회색이었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물이 점점 자란다면, 그것은 그 사물이 이전에 작았다는 것이다. 만일 돌이 아래로 향하여 떨어진다면, 그 돌이 예전에는 높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운동은, 높음에서 낮음으로, 흰 것에서 검은 것으로 반대 항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운동은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초기 상태와 최종 상태는 반대 항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동일한 류 속에 있다. 한 색깔에서 다른 색깔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관계하는 운동만 있다. 따라서 반대 항들이 인정하는 존재의 류들이 있는 만큼이나 많은 운동의 최고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범주들 가운데, 질, 양, 장소의 범주들이 이 경우에 속한다. 여기서, 세 류적 운동들이 나온다. 변질, 증가와 축소, 지엽적 이동운동. 운동들의 세 가지 류는 공통의 류에 환원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또한 이들이 파생되어 나온 존재의 류들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런 류들 각각에서 운동이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어떤 질의 박탈이며 도착점으로 삼은 것은 어떤 질의 점유이다. 운동은 흰 것이 아닌 것으로부터 흰 것으로, 음악가가 아닌 자로부터 음악가로 나아간다. 다른 한편 박탈과 점유는 생성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주체에게, 예를 들어 한 인간에게 당연히 속한다( 자연학, I, 7).
이 세 가지 류에 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까지 배제했던 넷째 류를 우선 보탠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 다시 말하면 한 실체의 탄생과 죽음이다. 이러한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이행은 운동이라 부르지 않아야 한다. 그 이유로 우선 어느 실체도 반대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 이행은 갑작스럽고,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생성은 틀림없이 그 종(種) 전체의 운동들에 앞서 진행되었는데, 그 종은 물질을 변형시켰기에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것이 조각상의 예비적 작업과 같다. 심지어 과학자의 중요 목적은 이 변형과정의 연구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의 생성이란 개론에서는 과학자는 무엇보다도 형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씨앗의 변모들을 연구한다. 그러나 일련의 변모를 생성 자체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변모는 진실한 운동을 의미하며, 생성자체는 생장으로 향했던 이 운동들이 끌고 간 최종 상태와 일치해야하고 또 한 순간에도 분할할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183)
운동이론의 의도들은 사람들이 그리스 철학의 앞선 발전을 생각한다면 알아채기 쉽다. 특히 이 운동은 흐름, 무한정, 무제한이며, 개념적 사유에 항거하는 요소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런 것을 타자 또는 불균등이라 불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태들을 생겨나게 하기도 하고 쓸어가기도 하는 이 보편적 흐름[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은 모든 과학과 모든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 흐름은 “이곳에서 달아나게”하고 있을 뿐이었고, 과학을 초월적 세계 속에서[절대공간에서] 탐구하고자 할 뿐이었다. 잠재태로서 존재들을 절대적 실재성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이미지를 대신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대체 한다. 그의 이미지에 따르면, 잠재태로서 존재는 현실태로서 존재에 매우 상대적이다. 보편적 흐름은 결코 없다. 운동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그 운동들의 각각은 초기 상태와 최종 상태에 의해 간결한 방식으로 제한된다. 실체적인 형상들의 흐름도 없다. 목적인으로써 실체적 형상은 그 형상자체를 수용한 물질을 이끌어 갔던 모양변화작업들의 계열을 지도하여 이끈다. 따라서 그 실체적 형상은 안정적이고 동일하게 남아있다. 과학은 이 안정적 개념들과 더불어 운동하는 사물들 그 자체에 침투한다. (18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운동에는 공통하는 성질들이 남아있다. 이 성질들 전체는 무한성을 유지한다. 그것은 연속적인 것이고, 시간과 장소에서도 아마도 심지어는 빈 것에서도 현존하는 사실이다. 연속적인 터전들(milieux)의 종류들, 시간, 장소, 빈 것, 등은, 형상에 무차별적이고 또 형상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인 비존재들을 도입하지 않는가? 바로 그러한 것이 문제가 스스로 표현되는 그런 방식이다. 어떻게 그 자체들로서 독립성을 요청하는 터전들이 형상에 또는 본질에 상대적이 되는가? 또는 시작에서 생겨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수학적 이론으로부터 어떻게 장소와 지속의 자연학적 이론에 귀착하는가? 그 이론은 존재의 본질에다가 그것의 장소와 지속을 묶어 놓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존재의 색깔과 도형이 장소와 지속에 결속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이론은 장소의 용어에서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터전의 직관이 아니라 물체들이 점유한 장소들의 비교에서 생겨난 일반적 용어를 보게 하는데 말이다. (184)
무한, 장소, 빈 것, 시간, 연속의 표상들 속에서는 실체의 형이상학과 대항하여 반대작업들의 광맥이 있었다. 우선 무한히 크다 라는 이오니아학파의 오래된 표상이 있다; 여기에서는 셀 수 없고 또 끊임없이 탄생하는 세계들이 그 세계들의 새로운 물질을 끝없이 길어 올릴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무한에 대한 보다 정제된 플라톤의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큼과 작음의 무한한 이항관계에서 독립적인 절대자를 본다. 이 절대자는 온일자(l'Un)과 조합되어서 본질들을 형성했다. 영원한 본질들로부터 독립적이면서 공간 또는 장소에 아주 친근한 관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본질들의 이미지들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데모크리토스가 허공에게 부여했던 독립적인 실재성 있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본질없는 실체의 괴물 같은 성질이 되었다; 플라톤의 이론에서도 일시적인 모든 사물들에 대해 진솔한 실재성을 부정하고 애썼던 영원에 대한 시간 이미지가 있다; 결국 우주 속에서 유일한 운동만을 보기에 이르는 연속성의 이론이 있다; 자 이 모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실체라는 그의 용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에게는 용어들 그 자체들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기보다 이 용어들을 그의 존재 이론과 일치하게 하는 방식을 정교하게 하거나 또는 일치가 불가능하다면 이 용어들을 부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185)
이처럼 그가 행했던 유일한 논증은 분리되어있고 절대적인 실재성으로서 무한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에 반대하는 것이듯이, 마찬가지로 류의 실재성 전체가 실체이며, 출발에서부터 실체는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한은 분할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 무한은 실체의 속성일 뿐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무한이 실체의 통일성과 개별성을 해치지 않고서 그 실체의 한 속성이 될 수 있는지, 그러한 것이 이론 전체를 지배하는 질문이다. 우선 무한히 큰 감각적 물체는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물체가 정의상으로 표면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체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구조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물체가 조성되었다면, 무한한 요소들 자체들로만 조성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한한 요소를 가정하면, 물체는 무한한 요소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흡수될 것이기 때문이고, 그 무한한 요소에게 그 요소들의 무한한 ‘큼’은 무한과 동등한 잠재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물체의 요소들은 모두 무한하게 된다. 그러나 요소들이 각각 전 공간을 차지하고 상호침투 할 때, 그것은 불합리이다. 그러나 물체는 더 이상 단순한 물체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변화는 반대들 사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변화에 대해 그것이 동질적이라고도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한 동질성이란 장소의 구별, 즉 높음과 낮음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귀결로서,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으로, 한 물체가 자기의 고유한 장소를 다시 얻게되는 경향이외 다른 이유가 없는, 자연적 국지적 운동도 제거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질적이라고도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것이 조성되는 요소들은 모두 무한이 되기 때문에, 따라서 모든 장소들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소들은 각자가 자기의 고유한 장소를 갖는 경우에만 이질적일 수 있다. (185)
그러므로 무한히 큰 물체는 없다. 사람들이 무한성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불합리에 빠지지 않고서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은 끝없이 과거 속에서도 미래 속에서도 연장된다. 수들의 연속은 무제한적이다(보태기에서 무한하다). 기하학적 큼이란 무한히 나눌 수 있다(나누기에서 무한하다). 그러나 불가분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예를 들어 마지막 경우에서, 큼의 절반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절반의 절반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항상 가능하다. 사람들이 다루는 큼이란 항상 유한하지만 매번 다른[차이 나는] 크기이다. 시간의 무한도 수들의 연속의 무한도 마찬가지다. 이 무한은 현실적으로 무한 수에 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멈추게 될 수 보다 더 큰 수를 항상 취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보태기에서 무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누기에서 무한과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미 파악한 큼보다 그 바깥의 큼을 항상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미 말했듯이, 무한이란 것이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무엇이기는 커녕, 그것은 그 바깥에 항상 어떤 것으로 있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무한이 현실태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로 있다는 것에 귀착한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한 내용에 대해 소크라테스 앞 시대의 상상으로부터 철학을 해방시켰다. 그 시대에서 무한한 내용은 항상 세계를 다시 새롭게 하는 근원일 것이라 여겼다. 무한과 무제한은 유한과 완성에 상대적인 항목들이다. 후자들에서 전자들은 질료로서 있으며, 후자들와 연관해서 전자들이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것이고 무제한인 것이 내용도 있고 정의도 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자연학, III, 6). (186)
그러나 이 해방은 어떤 대가를 치루는가? 사람들은 생성의 무제한적 풍부성을 동시에 부정하려고 애썼던가? 그런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했던 바가 아니다. 그의 제한된 세계에서 한정된 실체들로 이루어진 생성(le devenir)은 다써버릴 수 없는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한 사정은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발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 만일 어떤 의미에서, 생성이 비존재로부터 존재로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가는 것이라면, 항상 생성은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 존재로부터 존재로 가는 것이다. 한 요소는 다른 요소로 태어나는 한에서 파괴될 수 없다. 생성이 자신의 고유한 새로움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지 무한에서가 아니다(자연학, III, 8 처음에) (186)
장소의 이론(자연학, IV, 1-5)은 또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실체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일 국지적 운동이, 즉 장소의 변화가 없다면, 그에게 장소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매우 깊이 있게 통찰했다. 이 경우에 장소는 색깔과 동일한 자격으로 물체의 속성이 되리라. 그러나 장소의 변화가 있다. “공기가 있었던 거기에, 이제 물이 있다”. 따라서 공기가 휩쓸어가지 못한 단 하나의 속성, 공기가 물에게 양보한 그 속성, 영원한 실체를 형성하는 것처럼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그 속성은 무엇인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처럼 그것을 가지고 사물들의 무차별적 수용체로 만드는 것, 그것은 모호한 실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물체에 의해 채워진 내적 공간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물체의 차원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물체와 더불어 위치이전 되는 것이 되어, 그러한 것은 불합리하다. 이렇게 제기되는 역설적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소를 따로 떼어다 둔다고 하더라도, 장소를 가지고 속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장소를 물체에 묶어두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한 물체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 물체에 속하는 표면을 생각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 표면을, 그 물체의 터전에 속하는 제한적인 표면과 직접적 접촉으로, 그것들의 모든 점들에 의해 직접적인 접촉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한적인 표면, 즉 즉 물체가 담기게 되는 일종의 항아리는 물체의 장소이다. 이리하여 천구의 장소는 천구가 감싸게 되는 보다 더 큰 공의 내적인 표면이다. 물체의 장소는 적어도 특별한 장소이며, 따라서 “장소를 포함하는 물체의 극단”이다. 이러한 결과로 “장소란 사물과 동시에 현존한다. 왜냐하면 그 한계들(les limites)은 한계성(la limité)과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소는 자기 속에 있는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포함하는 그것에 속한다. 만일 장소가 움직이지 않고 또 사물들이 장소를 변하게 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내용물들인 사물들이 있다. 그런데 장소란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체적 실재성과 연관이 있다. 이제 형이상학에게서 모든 위험은 분쇄되었다. (187)
또한 빈 것(허공)의 용어도, 원자론자들이 그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만큼이나 위험하다. 원자론자는 빈 것을 자연학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연학자에게 때로는 빈 것을 인정하도록 촉구하고, 때로는 충만 속에서는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를 응축과 희박이라는 운동처럼 분명한 현상들을 부정하도록 촉구한다. 그러한 것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대꾸하는 것을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공격한다. 그는 스스로를 반대자들의 입장에 서서, 우리에게 알려진 사물들의 자연적 구조가 빈 것의 현존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선 우리는 방향이 정해진 국지적 운동들만을, 즉 자연적 운동들 또는 거친 운동들만을 인식한다. 자연적 운동들이란 물체가 자기의 고유한 장소로, 즉 물체가 무겁거나 가볍거나에 따라서 높음 또는 낮음으로 향하는 운동들이며, 그런데 일단 도달되면 스스로 멈추는 운동들이다. 그리고 타율적 운동들이란, 물체를 그것의 고유한 장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운동들이며, 작용인이 작용을 그만두자마자 그만두는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은 초기상태와 최종상태 사이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빈 것 속에서는 그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체가 빈 것 속에서 어떤 곳에서도 멈추지 않거나 또는 무한히 계속해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 불합리한 귀결이 얼마나 관성의 원리에 대한 조잡한 진술인지를 아는 것이 교훈적이다. 이 관성의 원리란 그 다음 차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뒤집는 것이다. 과학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은 다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운동체를 자연적 모든 속성들로부터 독립적으로 간주하게 하는 권리는 갖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을 가지고 성질의 한 측면 또는 한 귀결로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거기에서 그것은 불합리하다. 빈 것 속에서 물체는 자연적 성질들이 없는 하나의 물체이리라. 그리고 그것의 운동은 임의적일 뿐이리라. 그런데 아직도 더 중요한 불합리가 있다. 빈 것에서 움직였던 운동체는 무한 속도로 활성화되어야 하리라. 근대인에서 보면, 주어진 속도는 주어진 질량의 한 순간에 작용하는 주어진 힘에 해당한다. 만일 이 속도가 변하면, 그것은 다른 힘들이 운동체에 적용된 경우이며, 예를 들어 터전에서 유출된 저항의 힘들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정확한 동역학을 생각했으리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있어서 힘이란 본질적으로 저항을 극복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예인선의 힘인데, 그 힘이 배를 끈다. 속도는 힘에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선 움직이지 않은 배가 어떤 노력의 정도에서부터만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경험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용 중인 노력은 배에 어떠한 속도로도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노력을 그치자마자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을 새롭게 하는 적용에서 의해서만, 운동체는 계속해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속도는 극복한 저항에 의존한다. 저항이 축소한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속도는 증가한다. 저항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면 속도는 무한하게 된다. 사람들이 견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미치는 힘이 계속되는 것이다. 어떤 터전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노력하는 물체는, 이 물체가 통과하고자 하는 터전의 저항이 줄어드는 정도에서, 증가하는 속도를 갖고 있다. 만일 이 저항이 전혀 없다면, 속도는 무한하다. 그런데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빈 것의 경우이다. (188)
빈 것을 옹호하는 자들이 반대했던 난점들이 남는다. 운동을 위해서 충만에 참여자들은 플라톤이 이미 지적했듯이, 고리로 된 운동들의 이론에 의해서 난관에서 벗어날 것이다. 각 운동체는 다른 운동체의 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고, 원의 모든 부분들이 한꺼번에 이동한다. 그것은 빈 것 없이도 가능하다. 응축과 희박에서 그들은 인정하기를, 예를 들어 물의 공기로 변화에 의해 체적의 증가에는 공기의 물로 변화에 의해 동일한 감소에 해당한고 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우주의 총 체적은 동일한 체 남아있다고 한다. (189)
만일 시간이 본질적으로 낮들과 밤들의 연속이고 일반적으로는 주기들의 연속이라 한다면, 시간은 천체의 주기적인 운동들에 연결되어 있고, 플라톤이 말했듯이 시간은 천체와 더불어 태어난다. 이것은 시간의 분명한 용어를 보증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에 앞선 원초적 시간의 우주발생론적 이미지를, 즉 고대의 모호한 이미지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후자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자연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 전자에 관해서 그는 아마도 시간이 운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은 운동의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증거로서 보여주는데, 예를 들어 잠자는 상태에서 그리고 영혼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변화를 더 이상 지각하지 못하게 되자마자 우리는 시간을 더 이상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시간이 천체의 운동에만 의존한다는 오류를 범했다. 시간을 하루, 즉 여러 날과 여러 시간 등과 동일시하는 것, 그것은 시간을 우리가 측정하는 척도의 단위와 혼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을 그가 측정하는 운동들 바깥에서 시간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가지고 세어가는 수를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그 수에 의해서 시간을 센다. 그 수는 결과적으로 천체의 운동들에 매여있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실제로는 우리가 셈을 하는 사물이며, 이미 센 수이다. 그 시간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각 운동으로 있다. 왜냐하면 각 운동은 그것의 지속을 가지고 있으며, 지속에 속하는 한 속성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 선 것과 뒤에 오는 것에 따른 운동의 수이며”, 다시 말하면 주어진 한 순간에, 과거의 마지막이며 미래의 처음인 현재 순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앞서 있는 것처럼 그리고 뒤에 오는 것처럼 셀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천체의 공전 운동들의 수단으로 센다. 마치 우리가 한 팔꿈치(약 50cm)를 수단으로 사물의 길이를 세듯이. (189)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력들은 운동, 무한, 장소, 시간의 개념들을 변형하기 위하여 방향을 잡는다. 이것들을 실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면서 그는 옛 물리학자의 정신을 거부했고, 사유의 운동을 창시하였는데, 사람들을 그 사유의 남용들과 위험들을 보게 될 것이다. (190) (48NMI)
제8절 자연학과 천문학 VIII. Physique et astronomie 190
이러한 정신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이 이미지를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의 기하학자인 천문학자들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잘 파악하기 위하여, 천문학자들에 의해 창조된 우주의 수학적 표상과 자연학자들의 표상 사이에 있었던 대비를 고려해야만 한다. 그것은 완전한 불일치였다. 한편으로는 대기현상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하늘이 있다. 이것은 대기현상들처럼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끊임없이 하는 생성 속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유일하며 영원한 운동이다. 우주의 현실적 상태는 이 운동의 여러 국면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우주적 운동주의(un mobilisme universel)의 경향은 운동 이외에 어떠한 것도 영속성으로 있는 것이 없다. 다른 한편, 플라톤과 에우독소스(Εὔδοξος 전408?-355?)의 천문학은 감각적 하늘을 영원한 기하학적 구조의 하늘로 대체했다. 이 구조의 하늘은 등속 운동으로 각각이 활성화되어 있는 원들 또는 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천문학은 구별되고 환원할 수 없는 운동들의 현존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공들 각각이 별들의 운동과 독립적으로 고유한 운동으로 활성화되어 있는 경우에만,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문학은 여러 천체의 사물들에 대한 거의 완전한 가지성(인식가능성)과 달 아래 있는 사물들의 끊임없는 변화 사이에서 대립을 밝혀 놓았다. (190)
그러나 이 새로운 천문학은 플라톤에서 단순한 가설로서 소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천문학은 사실상 매우 오래된 종교적 사상을 합리적으로 회복시키고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연학은 그 사상에 대해 부정적이고, 기원전 4세기에 이오니아인들의 마지막 표상들은 그 사상에 대해 엄청난 반대에 열을 올렸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종교적 가치의 대립의 사상인데, 하늘은 신적인 존재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 자체로서는 본성상으로 신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천문학은 그 자체 속에 종교적 확신의 열기를 포함한다. 플라톤이 법률편에서 이 천문학 위에 시민들에게 부여하는 종교를 세웠다. 이 때문에 영혼[우주 영혼], 또는 그 자체로 움직이는 운동은, 즉 모든 다른 운동의 시발점인 운동은 그의 눈에는 세계의 새로운 체계의 필연적인 가정이었다. 이 영혼은 자기의 고유한 운동들에 의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모든 사물들을 이끄는 데, 여기에서 운동의 이름들은 그 운동들 각각들에 대해 검토하고 숙고 하고자 한다. (19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관념들의 운동을 따랐으나, 운동을 변형하였다. 그는 에우독소스의 천문학을 수용하였으나, 그는 그 천문학의 자연적 이법들을 탐구했다. 그는 천문학과 신학의 긴밀한 통합을 수용했다. 그리고 그가 정립한 것은 진실로 천체 신학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움직이는 운동 대신에 즉 [우주영혼]영혼 대신에, 지성의 본성에 맞는 움직이지 않은 원동자로 대체했다. (191)
그 첫째 관점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운동의 원초적 특성에 대해, 다시 말하면 공의 가장 큰 원에 따르는 별의 등속운동의 특성에 대해, 자연적 근거들을 확립하고자 애썼다. 이 [등속]운동은 자연학자들이 다른 운동들 속에서 헛되이 찾고자 애썼던 조건을, 즉 영구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것이다. 자연학자들은 이 영속성을 질적 변질의 운동에 부여하는 오류를 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류적 운동들은 필연적으로 최초 상태와 최종 상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 이 운동들은 하나의 반대자에서 다른 반대자로, 예를 들어 더움에서 차거움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동들은 필연적으로 국지적 운동 또는 운송의 이후이다. 이 때문에 변질이란 수동자가 능동자의 효과를 감당하는 경우에만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식량은 살아있는 존재의 영향으로 동화[소화]작용에 의해 살로 변형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이 일어나기 위하여 우선 수동자는 국지적 운동에 의해 능동자의 접촉으로 옮겨져야 한다. 다른 한편 국지적 운동을 생산하는 한 존재에게서 수용능력은 능동자에게는 완전성의 표시이다. 식물에 비해 동물의 우월성은, 그 동물이 완전히 완성된 형태로 있을 때만 소유하는 수용능력에 있다. 그런데 그 완전함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함보다 앞선다. 그러나 국지적 운동들 중에서 모든 것들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운동들은 두 종류로 되어 있다. 직선운동들과 원운동들이다. 직선운동들의 전형적 예는 내려가는 무게와 올라가는 불의 운동이다. 그런데, 직선운동들은 계속될 수 없다. 세계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들은 최초 상태와 최종 상태 사이에서, 서로서로 반대로, 즉 높음과 낮음,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높음은 낮음으로 그리고 낮음에서 높음으로 무한히 계속해서 멈춤 없이 움직이는 운동체를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우선 이 운동이 유일한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높음으로 향하는 운동은 낮음으로 향하는 운동에 반대이기 때문에, 그 운동은 방향의 여러 변화들이 있는 만큼이나 운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그것은 멈춤없는 운동이 아니다. 실제로는 운동체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멈춤이 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높음을 향한 운동의 최종 순간은 낮음을 향한 운동의 최초 순간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
그 운동은 한 방향으로 향하는 원운동과 아주 다르다. 최초점은 또한 그 자체가 향한 최종점이다. 더군다나 그 궤적의 모든 점은 기꺼이 시초, 중간, 마지막으로써 생각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각 찰나마다 그것이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운동이다. 이로부터 이 원운동은 근대인의 귀에는 아주 낯설게 들리는 결론이 나온다. 즉 원운동은 동시에 “단순하고 충만한” 유일한 운동이다. 왜냐하면, 직선운동이 단순한 방향을, 예를 들어 낮은 쪽으로 향하는 단순한 방향을 갖는다면, 그것은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운동이 반대 방향의 운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충만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운동체는 연속적으로 여러 다른 방향들을 따르기 때문이다. (192)
이 운동학이 근대 사상에서는 훨씬 더 나중에 분별될 것이지만, 그 운동역학은 운동의 개념작업에서 근대사상의 뿌리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운동이 연속적인 각 순간에 속하는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의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 안에서 운동이 전반적으로 실현된 것에 의해서이다. 예를 들어 높음으로 향하는 직선운동은 즉 가벼움의 자연적 운동은, 불이 자기 고유한 장소를 되찾듯이 이처럼 자기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은 프로타고라스(전490경-420경)가 말했던 그 준-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실체의 속성이며, 운동이 자연적 또는 의지적일 때, 실체 그 자체 안에서 자기 이유를 가져야만 한다. 마치 경기장에서 선수의 운동은 자기 의지로 상을 타고자 하는 자기 이유를 갖는 것처럼, 불의 운동은 더 높은 지역들 안에서 자연적 자기 장소를 차지하는 불의 자연[본성] 속에서 자기 이유를 갖는다. 이처럼, 원운동은 천체라는 실체의 본성 속에서 자기 조건을 갖는다. 그 실체는 제5의 본질이며, 4개의 요소와 다르며, 그것은 본질적 성질은 스스로 규칙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원운동의 단순성은 그것의 궤적의 단성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출하는 의도의 통일성에서 나온다. 즉 단순성이란 목적의 통일성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의미이며, 운동 그 자체 속에서 이루어진 복잡성에 견주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3)
따라서 여기에서 어떤 의미에서 원운동이 단일하고 단순하고 연속적인 운동일 수 있는지, 그리고 옛 자연학자들이 추구했던 영속적인 운동을 실현하는 유일한 운동일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영속적인 운동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운동 없이는 시간이 없으며, 시간은 운동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은 시작하지도 않았고, 다시 말하면 그 시간이 시간의 초기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현재 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경계라는 자격으로만 현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체의 원운동은 영속적이고 필연적 운동이며 시작도 끝도 없다. 원운동은 이 반대자들 사이에서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원운동은 시초 운동이 없다. 원운동은 우주 발생론이 아니다. 그래서 천체 사물들의 질서에서 시간적 기원은 없다. 이 천문학자의 도식들은 실재성이 되었다. 이리하여 관찰과 분석에 근거했던 수학적 천문학은 독단적 자연학으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천체 자연은 신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하늘의 실체는 스스로 원운동을 할 수 있는 잠재태을 가지고 있다. 이 잠재태가 하늘의 질료이며, 위치적 또는 장소적 질료이며, 다시 말하면, 장소를 변하게 하는 단순 가능성이며, 변질도 없고 어떤 다른 종류의 변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던 대로, 영원히 실현되어야 하는 이 가능성을 누가 현실태로 이행하게 하는가? 즉 누가 그 운동자인가(le moteur)? (193) (48OKA) (57VKJ)
제9절 신학 IX. Théologie 193
플라톤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운동들 사이의 대조의 개념을 간직했다. 한편으로 자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운동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마치 불이 올라가고 돌은 떨어지고, 살아있는 존재는 자신의 욕망에 맞추어 움직이고 멈추고, 하늘은 지칠 줄 모르고 과정을 달리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 밀고 당기는 것에 기인하는 운동들이 있다. 이 운동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제1의 류적 운동들의 독창적이고 원초적인 성격과 제2의 류적 운동들의 파생된 성격을 주장하는 것이다. 전자의 운동들은 사실상 제일 운동들에 연관해서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운동들은 제일 운동들에 반대되어 있기 때문인데, 원칙적으로 무게있는 물체는 낮음 쪽으로 향하는 자발적인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점에서 반대되기 때문이다. 역학은 소위 말해서, 인간의 용도에 맞게 자연에 반대로 강압적인 운동을 산출하기 위하여 지렛대, 저울, 쐐기 등과 같은 기계들의 제작의 기술이다. 이어서 원자론자들처럼 제1류의 운동들에 대해 역학자의 설명을 찾는 것은 모순되고 온전한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통지각작용으로서 경험은 이 주제에 타당한 이유를 제공하지만, 오랫동안 데모크리토스의 천재적 직관의 발전에는 대립되었다. 이 직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 전부가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194)
따라서 원초적 운동들은 물체가 전혀 아닌 운동자들을 갖는다. 그 운동자의 작용은 기계적이 아니다. 그것은 플라톤주의자들에게는 영혼들로부터, 다시 말하면 자체적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운동들로부터 온다. 법률편 플라톤주의와 에피노미스편의 플라톤주의는 진실로 영혼주의(l'animisme)의 회복이다. 영혼이라는 자발적인 힘은 동물에게 현존할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다. 이 우주의 자발적인 힘은 천체들의 운동들에서부터 요소들의 변화에까지 최소한의 세부사항들을 인도한다. 이러한 혼동에 반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항의했다. 플라톤주의가 통일성과 연속성을 찾으려했던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구별하여 위계질서를 만들었다. 자기의 고유한 장소를 차지하는 요소의 운동, 살아있는 존재의 운동, 천체들의 운동은 동일한 종류의 운동자들에 의해 산출되지 않는다. 떨어지는 돌의 운동은 생명적 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돌의 운동은 시작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끝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장애물의 제거에 의해, 외적 상황의 연속에 의해 생산된다. 이 장애물은 운동이 자기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도 한다. 그리고 운동은 이 장소에 도달했을때 멈추기도 한다. 반대로, 동물의 국지적 운동은 표상과 욕망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이 운동이 욕망에 부합하는 것만큼이나 운동의 기계적 조건들과 동물의 유기체적 구성은 욕망을 허용한다. 따라서 동물에게서는 그의 욕망에게 따라서 초발적인 힘과 멈추는 힘이 동시에 있다. 반면에 요소는 그 차체로서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스스로 멈출 수도 없다. 마지막으로 천체들의 운동은 동물의 운동과 비교할 수 없다. (195)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마도 부당하게 위작으로 알려진 한 저술에서, 그 당시 운동들 사이에서 확립하려고 애썼던 비유를 비판했다. 사람들이 주목하기를, 동물의 운동들은 동물의 내부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분들을, 즉 고정점들(접속점들)을 가정했으며, 그 점들 주위에 뼈의 분절들이 돌고 있고, 더욱이 동물의 외부에는 고정된 평면이, 즉 그 동물이 지지점으로 이용하는 땅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주에서는 극점들(les pôles, 특이점들)이 그것의 주위에 하늘을 운행하게 하는 고정점들[항성들]을 구성했을 것이며, 그리고 하늘을 그 위에 구르게 하는 땅도 구성했을 것이다. 이런 비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간 것이며, 하늘의 운동자가 생명 있는 존재의 운동자와 동일한 본성이라는, 다시 말하면 영혼의 본성이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결론을 피하고, 비유의 약점을 제시한다. 이런 이유로 돌고 있는 천구 안에서 움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극점들은 자연적 실재성이 없는 단순한 수학적 점들일 뿐이다. 게다가 만일 사람들이 땅과 하늘의 연관을 땅과 동물의 연관에 동화시킨다면, 땅은 우주 밖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과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서 살아있는 유기체와 닮은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195)
이리하여 요소의 자연적 원동자, 동물의 원동자, 천체들의 원동자는 본성상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공통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 자체로는 부동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원리도 또한 하나의 운동일 수 있다는 플라톤의 생각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절대적인 일반적 방식으로 한 운동자는 그것인 한에서 움직여 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체가 잠재태로서 있는 것과 같이 그 운동자는 현실태로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열이라는 것은 그것이 덥혀지고 있는 한에서 열이다. 학자라는 것 그가 가르치는 한에서 학자라는 것이다. 만일 운동자가 플라톤이 바랐던 대로 움직여지는 것이라면, 그 운동자는 학자이며 동시에 학자가 아닌 것과 또 열과 열아님과 동일한 연관 속에 있게 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 자체 스스로 움직이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하지 않고,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라는 것과 이 원동자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부분이라는 것 으로[부동의 원동자로서] 필연적으로 이중화되어 있을 것이다. (195)
운동들의 계층들(자연적, 생명적, 천체적) 각각은 우리들을 부동의 원동자로부터 구별된 한 계층으로, 즉 자연, 표상적 영혼, 하늘의 운동자 등으로 되돌려 보낸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자들 중에는 아주 큰 수가 하나 있고, 그리고 그것은 구별된 운동들이 많이 있는 만큼, 적어도 연쇄적 운동들로부터 구별된 계열들의 운동도 많이 있다. 부동의 원동자라는 용어는 깊이에서 형상이란 용어 또는 현실태로서 존재라는 용어와 완전히 일치한다. 원동자는 현실태 존재이며, 그것이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할 수 있는 운동체와 만남인 한에서 이다. 움직이는 작용의 전형은 자신의 환자를 낫게 하는 의사[의술]의 전형이며, 조작하는 조각술의 전형이며, 물질이 운동자 속에서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형상을 받아들이게 허용하게 되는 방식으로 운동들을 명령할 수 있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 작용이 운동하게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운동은 운동자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자마자 멈춘다. 마치 군대가 더 이상 명령이 없게 되자마자 질서 없이 되는 것과 같다. 그 운동은 운동에게 전달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결코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운동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만을 지니고 있다. (197)
이제 남은 것은 부동의 원동자들 가운데서 천체들의 운동자의 개별성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하늘의 운동이 연속적이고 등속적인 것처럼, 그 운동에는 그것의 작용은 변질하지 않는, 영원한 현실태 운동자가 필요하며, 따라서 불가분의 운동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누어질 수 있는 운동자는 유한한 시간의 마지막에 필연적으로 자기 작동을 소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체들 중에 영원하고 불가분적인 운동자에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특성들로부터 출발하면서,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로부터 이 운동자가 항상 현실태의 지성[누스]이라는 생각을 도출했는가? - 이 지성이 목적 없는 자기 대상인 영원하고 완전한 살아있는 존재를 관조하면서 - 그리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운동자가 신이라는 생각을 도출했는가? 매개적인 생각은 현실태로서 존재의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천체들의 운동자는 항상 현실태이다. 그런데 충분하게 현실태인 존재는 사고(une pensée, νόησις)일 수 밖에 없다. 그 존재에서는 잠새성의, 가능한 발전의, 물질의, 모자람 등의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현실태를 상상한 것은 우리 속에 가장 신적이고 가장 안락한 상태가 있다는 것에 따른 것인데, 그것은 진리에 도달해서 그것[신]에 대한 부동의 결정적인 인식을 갖는 과학자의 관조의 상태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영속적이며 전체적으로서, 물체적 생명(la vie, 삶)의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 한 상태를 가정한다면, 그 상태가 인간에서 있어서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신체에 연결된 것으로서 상태인데, 우리는 스스로 이 순수 현실태, 즉 지성의 현실태를 표상한다. 이 현실태는 신의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삶)이며, 신 그자체이다. 따라서 신에는(en Dieu) 지적 작용들의 어떤 흔적도 없다. 지적 작용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어떤 변화를 가정하는데, 감각, 이미지, 탐구하는 반성, 추론적 사유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게다가 신에는 생장적 기능들도 없다. 이 기능들은 생물체의 삶에 연관이 있다. 신은 하나의 영혼도 아니고, 하나의 생명적 원리도 아니고, 오히려 지적 사유이다. (197)
그러나 지성이 항상 잠재성을 포함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우리 인간 지성은 사유하는 단순한 역량일 뿐이다. 현실태로 되기 위하여, 우리 지성은 감각적 사물의 작용에서만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감각작용처럼 대략 지성적인 것의 영향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신이 지성이라면, 지성적인 것[인식가능한 것]이, 신이 그것 덕분에 사유하게 되니, 신보다 우월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로 우리는 천체들의 운동자 그 위에 플라톤의 가지적 모든 세계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데미우르고스가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모델로서 관조하는 세계가 된다. 그런데 만일 사유하기를 그칠 수 있다면, 우리는 천체들의 운동자의 영원한 현실태가 타협되었다는 것을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이렇게 해결했다. 신은 보다 상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신은 자기 자신과는 다른 지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신은 그 자신 스스로 사유한다. 그는 사유의 사유이다”. 오직 이러할 경우에만, 그만이 그 자신으로 충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것은 순수하게 언어적 해결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잘 알았다. 인간에게서 조차 모든 지식은, 그것이 감각작용, 반성 또는 사유 등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자신의 인식을 동반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 없이는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식의 중요 대상은 자기 인식이 아니다. 그 대상은 지성으로부터도 감각작용으로부터도 구별되는 인식할 수 있는 것 또는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서는 부속물인 그 무엇이 신에서는 중요한 것, 오히려 유일한 것이 된다. 신은 자기 사유의 대상들을 자기 밖에서 탐색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오직 이러할 경우에만, 이 사유는 완성될 수 있고 시종일관 완전할 수 있다. 이 독립적인 상태로 향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고양된 과학들이 행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학과 같은 이론 적 과학에서 대상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갖는 사유와 동일하다. 그 사유는 대상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고찰 한다. 사유는 대상 이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대상 앞서서 있는 것도 아니다. 사유가 사유 대상과 동일하다. (198)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정점에 있다. 신학은 천체들의 운동자의 문제와 실체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 우선 천체들의 운동자의 문제를 해결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운동들의 완전한 등속운동은 신적인 불변질성에 의해 설명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성이 운동적이라는 것은 자연적이며, 다시 말하면 움직이는 사물들이, 자신에게 가능한 만큼만, 이 불변질성을 모방하는 것도 자연적이다. 신이 하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마치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다. 이 등속 운동의 조건은, 변질할 수 없는 제5원소 또는 에테르이며, 단지 원운동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건의 타당성은 목적이 될 운동 속에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해 이 조건이 현존한다. 또한 신은 세계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다. 그는 세계를 인식조자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단지 그 자신이 열망하는 목적이다. (198)
[다음으로] 또한 신학은 실체의 문제를 해결한다. 플라톤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리되어 있는 비형체적인 실체를 인정한다. 그것은 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데아들과 아주 다르다는 의미에서 이다.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신이 이데아들처럼 모든 사물들의 실체가 전혀 아니며, 게다가 신은 과학의 대상도 아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말할 수 있다면, 신은 탁월한 실체이며, 마치 신이 탁월한 과학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신이 탁월한 실체인 이유는 그것이 현재 있는 무엇인 것이, 즉 그의 본질이, 효과적으로 실현된 실체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바깥에서 그 지지대를 찾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이다. 이점에서 다른 실체적 형상들은, 만일 그 형상들이 현실화의 조건들을 자기 밖에서 또는 질료 속에서 발견하는 경우에만, 효과적으로 실체들이 될 수 있다. 조각상은 대리석 덕분으로 실재성이 될 수 있고, 인간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진 유기체화 된 물체 덕분으로 실재성이 될 수 있다. 이로써 한 존재의 본질인 실체적 형상은 아직 자기 본래의 실체가 아니다. 그 실체는 오히려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것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순수 현실태인 신 속에서 난점은 사라진다. 사유에는 사유 그 자체이외 다른 조건들이 없다. 사유에는 질료가 없다. 자기 본질과 동일한 이 영원한 실체는 전형이며, 형상과 질료의 조합에 의해 태어나서 덧없이 지나가는 실체들이 이것을 모방하려고 애쓰고, 그러나 영원한 실체는 덧없는 실체들을 전혀 대체하지 못한다. 신은 또한 탁월한 과학이나, 그러나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과학이다. 인간이 찾는 과학은 세계 속에서 대상들이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서 신학의 지위가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학설에서 이데아들의 세계의 지위와 차이가 있는지를 본다. (199)
이 학설의 지위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 학설이 그의 사유의 발전과정에서 감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극히 유보적이었다. “생겨나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존재들은 아마도 값지고 또 신적인 것인데,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의 것을 인식하는 것이 존재들이며…; 존재들이 갖는 값어치와 더불어, 이것들과 가장 가벼운 접촉도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의 인식보다 더 마음에 드는데, 이는 마치 사랑받는 대상의 최소한 부분을 보는 것이, 많은 다른 존재들을 정확하게 아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들에 근접하는 것, 즉 우리들과 자연적으로 근친성이 있기에, 바로 이러한 것은 신적 사물들의 과학과 바꿀 수 있는 장점들이다.” 옛 플라톤주의자의 특징적인 어투들에서 보면, 그가 정확한 과학의 대상을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초감각적인 것 속에서가 아니다. 신학은 인간이 파악하는 범위들 그 위에 있다. 이로부터 그는 유일신주의와 다신론주의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주저가 있다. 그는 확실하게 유일신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주의 조직화란 통일성이 우주의 목적인의 통일성에만 속하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교도 유일신앙의 영속적인 원문이 될 호메로스(Homère, Ὅμηρος, 전9세기)의 싯구를 인용하면서 그의 신학을 끝맺는다. 즉, “여러 스승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은 천체들의 운동자이며, 부동의 원동자이다. 따라서 신의 효과는 항상 마땅히 동일자이다. 그런데 천문학은 우리에게 수많은 중심구들의 현존을 폭로하며, 그것들의 각각은 다른 구들의 운동과 독립적으로 고유한 운동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들은 그만큼 많이 구별된 운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요구하며, 이 원리들이 다신론주의로 인도한다. (199)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의 실재적인 지위가 나온다. 신을 그 자체로서 인식은 그의 목표가 전혀 아니다. 그 인식은 도덕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신은 마치 세계의 통일성의 생산자로서 오로지 우주적 기능에서 고려된 것이다. 이 통일성은 신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허락한다. 이 부동의 원동자와 덧없이 변화하는 작용들에 속하는 다른 부동의 원동자들 사이에는, - 이 후자들의 예로서는 영혼들, 자연, 일반적으로 형상들 - 위계가 있다. 하부 운동들의 각각의 작용은 자발적이 아니고 자기 멋대로 이지만 제일원동자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규정된다. 그리고 천체들의 운동에 의해 땅에까지 전해지는 질서에 따라 규정된다. 자연적 사물들의 과학은 무엇보다도 이 위계질서를 분간하는데 있다. 그 위계의 각 항은 자기보다 열등한 항들을 명령하는 목적인이다. 하늘의 운동은 자체의 원운동과 등속운동에 의해 신적 불변성을 모방한다. 마찬가지로 달의 그 아래에는 생성들과 소멸들을 항상 그 자체로 향해 돌게 하는 목적없는 원은, 물질이 그것을 허용하는 한에서, 하늘의 운동을 모방한다. “모든 자연적 존재들에는 이렇게 신적인 어떤 것이 들어있다.” 신학이 제한 부분들 속에서 작업하는 부분적인 목적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을 규칙적이게 하는 보편적 목적인도 있다는 것을 보증한다. “인간은 인간을 생산한다. 그러나 또한 태양도 또한 태양을 생산하게 한다.” (200) (48OKF) (19:37, 57VK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