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5년12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마리 장 귀스타브 블랑"(Marie-Jean-Gustave Blanc(한국식 이름:백규삼) 主敎가 大邱本堂을 新設하고
初代本堂 主任으로 프랑스의 "바오로 로베르 아킬레"(Paul Robert Achille: 김보록) 神父를 임명하였다.
"로베르" 神父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신나무골"에서 3년간 은신하여 傳敎하였다.
1888년후에 신앙의 자유가 넓게 허용되자 그해 겨울, "로베르" 神父는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대구시 서구 상리동)로 옮겨 3년 간 은신하여 전교하였다.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喪服으로 변장하고 信者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영구적인 本堂을 설치할 부지를 물색하던 중
1897년 3월 "로베르"神父는 현재의 桂山洞 聖堂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하였다.

옛 계산동 聖堂. 우측이 聖堂이고 좌측이 해성재(海星齋) 건물일듯하다.(자료사진)
"로베르"(김보록)神父는 동산 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信者들 특히 老人層 信者들은 現 桂山洞 聖堂 자리가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구릉 지대이며, 허허벌판에 聖堂을 짓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大邱 市內에서 제일 低地帶에 聖堂이 위치하게 되었다.
계산동에 정착한 "로베르"(김보록)神父는 1899년 이른 봄 한식(韓式)으로 지은 十字形 기와집 聖堂과
信者 敎育館으로 사용될 해성재(海星齋) 건물 등을 건축했다.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초청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大邱 桂山洞 聖堂은 순수한 韓式으로 만들어 지고,
1899년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봉헌하는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러나 이聖堂은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인 1900년 2월 4일 밤 8시경에 화재가 나서 전소되고 만다.

"바오로 로베르 아킬레"(Paul Robert Achille: 김보록) 神父님의 像.
그때의 화제 상황을 "로베르"(김보록) 신부님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 다음과 같이 보냈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틀담(성모 마리아)의 "루르드 聖堂"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화 하였다.
지난 2월 4일, 5일 밤 사이 나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즉시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까 聖堂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른 뛰어가 聖堂 옆문을 박차고 聖歌臺 席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발을 들여놓자 불길이 번져 황급히 물러나 마당 밖으로 나와 쓰러졌다.
얼굴은 반쯤 화상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잠시 후 信者들과 地域 住民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朝鮮 軍隊와 日本 軍隊도 달려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聖堂 內部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근처에 있는 집은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聖殿은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14m 떨어져 있는 해성재(海星齋)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聖水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은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러들었다.
화재는 地震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지난 2월 4일 오후 8시에 大邱에서는 매우 강력한 地震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祭臺 위에 세워 둔 촛대가 地震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25년전 敎難에 휩싸인 朝鮮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는 작지만 아담한 聖堂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祭衣도 日常服도 生活 必需品도 없으며, 고해를 듣기 위한 영대와 중백의 조차도 없다.
1천명이 넘는 信者들이 주일날 미사에 참석하는 데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두 번째 聖堂을 짓기 위한 建立 基金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假 建物이라도 세워야겠다.
十字形 木造 聖堂은 이미 너무 협소해서 더 크게 石材로 지을 것이다.
信者들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믿음의 자비를 구하면서 나는 다시 聖殿建立 寄金을 募金하는 司祭가 되어야겠다.

本堂 設立 후 14년 만에 지은 聖堂이 화재로 燒失되자 화재가 발생 한 지 1주일이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聖殿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로베르"(김보록) 神父는 벽돌로 聖堂 再建計劃을 세우고 직접 設計하여 현재의 "桂山洞 聖堂"을 1901년에 착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축조의 경험자가 없어 中國(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 와서 일을 시켰다.
12使徒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는
프랑스에서 주문하여, 착공한지 1년만인 1902년 5월에 洋式聖堂을 준공하였다.

1903년 11월 1일, (聖人의 날) 대축일에 "뮈텔"(Mutel) 主敎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는 찾아 보기 어려운 정면 雙塔의 고딕聖堂이다.
2개의 鐘塔에 달 鐘도 축성되는 예식이 있었다.
두 개의 鐘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鐘의 名稱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의 鐘"과 "젤마나의 鐘"으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 지방에서는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이 聖堂에서 故 김수환(金壽煥) 樞機卿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미사시간 바로 전이다.
아름다운 스테인드 그라스를 제대로 못 보고 나와야 했다.

"루르드의 성모님"을 모신 祭臺.


성당의 옆 모습.
우측에 있는 큰 감나무는 성당을 지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계산성당을 후문쪽으로 나와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면 큰 사거리가 나온다.
이길 건너에 관덕정이 있다.
우리가 내려온 골목길에 "서상돈"의 古宅이 있지만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다.

"관덕정"(觀德亭)은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으며 1749년(영조 25) 慶尙道 觀察使 겸 大邱都護府使 "민백상"(閔百祥)이 건립한 건물로,
별무사(別武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는 도시(都試)를 실시하는 도시청(都試廳)으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觀德亭 마당 가운데에서도 ‘관덕정 마루’로 불리던 아미산(峨媚山) 등성이는 쓸모없는 땅으로,
朝鮮時代에 重罪人을 斬首刑으로 處刑하는 刑場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815년(純祖 15) 乙亥迫害 이후로 天主敎 信者 25명이 이곳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처형되었다.
을해박해 때 "靑松", "眞寶", "安東", "英陽"에서 체포된 "김종한" 등 7명이 1816년 관덕정에서 참수되었고,
1827년(純祖 27) 丁亥迫害 때 尙州 地方에서 붙잡힌 "박사의" 등 3명과
1839년(憲宗 5)) 己亥迫害 때 金海 地方에서 체포된 "박대식"이 1839년 觀德亭에서 참수되었다.
아울러 丙寅迫害 때인 1866년(高宗 3)부터 1868년(高宗 5)까지 金海, 密陽 등지에서 붙잡힌 信者 14명이 觀德亭에서 참수되었다.
이처럼 觀德亭에서 순교한 信者들 가운데 "이윤일"이 1968년에 시복(諡福)되고,
1984년 시성(諡聖)되었으며, "김종한" 등 11명이 2014년 시복(諡福)되었다.

또한 이곳은 동학(東學)의 敎祖 최제우(崔濟愚)가 1864년(高宗 1)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고,
日帝 강점기 때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義兵들이 日帝에 의해 총살을 당한 장소이기도하다.
이후 觀德亭이 도시청(都試廳)의 기능을 상실하자 1906년 大邱의 유지들이 의연금을 모아
觀德亭을 수리해 師範學校를 開校했으나 日帝의 방해로 곧 문을 닫았다.
觀德亭 마당은 1917년부터 南門市場으로 바뀌었다가,
1937년 南門市場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간 뒤 다른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解放 후 觀德亭은 헐려서 사라졌다.

이후 天主敎 大邱大敎區에서 1984년 韓國 天主敎 傳來 2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觀德亭殉敎記念館의 建立을 추진하여 순교 터로 고증된 땅 512.40㎢를 확보한 다음,
1985년 착공하여 1990년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옥 누각 형식의 건물을 완공해 1991년 5월에 개관식을 가졌다.

관덕정 입구에 있는 옛 형구.

입구에 있는 복자 기념비.

聖 이윤일의 像.





흥선 대원군의 척화비.

옛 감옥과 형구를 재현해 놓았다.


순교하신 분들의 이름들,,,

성당 내부.

聖人의 유해를 모신 祭臺.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이곳도 방문한 때가 미사시간이고 늦어서 모두 들러볼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