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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Gautama Siddhārtha.
? 인도 코살라 왕국 샤키아 공화국 카필라바스투~? 인도 마가다 왕국 말라 공화국 쿠시나라.
BC 6~4세기경에 활동한 불교의 창시자.
개요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Śā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曆)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항에서는 전설화된 석가모니의 생애를 가능한 한 역사상의 실재인물로 묘사하고, 그가 거의 신적으로 초인화된 인물로 신앙을 갖게 되기까지의 배경과 경과도 취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사상, 즉 가르침에 대해서는 '불교' 항목이나 개별적인 교리 항목으로 넘기고 세부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의 가르침으로 취급할 수 있는 개별항목은 '무상·무아·법·사성제·삼법인·연기·열반·자비·중도·팔정도' 등이다.
BC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안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BC 9세기 무렵까지 베다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이 약화되고 새로운 사고가 양성되어 BC 6세기 무렵에는 새 계급이 출현했다. 비옥한 갠지스 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농산물 등의 물자가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가 성립하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의 발전은 화폐의 유통을 성행하게 했으며, 상공업자들은 각기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沙門: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들은 보통 6사외도(六師外道)로 분류되는데, 그중에도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푸타, 유물론자인 아지타,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 산자야, 도덕부정론자인 푸라나, 결정론자인 마칼리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인데, 현재의 지명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북방이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남으로는 갠지스 강으로 유입하는 많은 지류가 있어서 풍부한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으며, 일종의 공화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다만 남쪽의 대국인 코살라국에 인접한 탓으로 주권은 코살라국에 종속되었지만, 자치권은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석가모니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Maya)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왕이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이 석가족 집단의 우두머리는 라자(raja:왕)라고 불렸지만, 이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의 수장(首長)이라는 직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BC 6세기 혹은 BC 5세기에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약 100년의 시차로 견해가 갈리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고, 특히 남방의 불교도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왕비와 수행원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두 도시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숲은 룸비니라는 지모신(地母神)을 받드는 곳이었으므로 출산의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신의 양팔로부터 발생했다는 〈리그베다 Rigveda〉 이래의 전승과 관련되어,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출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위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탄생 장소는 현재 룸민데이라 불리며 네팔의 영토에 속한다. BC 3세기의 유명한 아소카 왕이 그 탄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가 후대에 그곳에서 발견되어 석가모니의 출생지임이 확인되었다.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후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탓인지 사망했고, 석가모니는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에 의해 양육되었다. 생후 5일째 또는 7일째의 명명식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후대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의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탁월한 수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부족사회에 있었던 동물숭배, 특히 인도에서의 뿌리 깊은 소에 대한 숭배 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은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으므로 정반왕도 이 방면의 대가들을 불렀다. 아시타는 이 아이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든가 아니면 부처(覺者)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성장한 후의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탄생 전설은 석가족의 관심이나 의례를 고대 인도 당시의 표현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 많고, 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해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관해서는 2월 8일, 베사카 달의 후반 8일 혹은 후반 15일 등 여러 전설이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취급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4월 8일이라 하는데, 이는 번역자가 인도의 베사카 달이 음력 4월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일로 믿고 있으나, 남방의 불교도는 베사카 달의 보름날에 탄생·성도·열반이 있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베사카 제(祭)'를 성대히 시행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웨삭제'라고 함).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석가모니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속하는 나라는 예속적인 국가였으며,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는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으므로,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 nikaya〉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 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런 경향을 지니지 않았다. 왕은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Yaśodhara)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는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판별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2가지 혼인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승자가 됨으로써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과 많은 여성들 속에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오히려 당시의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으로 각색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왕인 아버지는 호사와 안락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어도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다음에 소개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障害·惡鬼)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사문유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병·죽음·출가를 배치한 것은 시적 묘사에 지나지 않고,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교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나이에 이른 그가 노인과 병자와 장례식 혹은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이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심리학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현상이라도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람에게 심리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전설에서 늙음·병·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긴 하지만,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로 유도하려는 암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의 젊은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지만,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국에 병합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 상극의 와중에서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정을 버리고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그의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사문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수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수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금욕주의).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수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여,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이 사건은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나무의 신이 나타났다고 믿고서 석가모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것이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있다. 그러나 격렬한 고행으로 쇠약해져 있던 석가모니에게 이 우유죽은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중에 보드가야라고 불린 장소에서 명상에 잠겨, 드디어 "아사타 나무 아래서 깨달음(보리)을 열었다"라고 표현되는 성도(成道)의 날이 도래했다. 경전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악마를 등장시켜 그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는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이 싸움은 신화화된 선과 악의 투쟁, 즉 내적인 갈등이었다. 이 갈등의 극복으로 그는 정각(正覺)을 얻어 비로소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아사타 나무가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심중에는 설법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망설임이 오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망설임과 설법하려는 결의가 경전에서는 인도의 최고신으로 권위있는 범천이 권유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의와 아울러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또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7주간의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추구한 것은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를 거쳐 고행주의자로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양측에 분명히 인생도피의 경향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즉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현실생활에 입각한 입장에서의 해결이 중시되었다. 이는 고행을 칭찬하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종교보다도 좋은 수행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점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스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처음에는 친한 보살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Śāriputta)과 목건련(目犍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시에 그만큼의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석가모니에게 무엇보다도 비극이었던 것은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리불이 돌연히 죽고, 목건련도 바라문에게 맞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 한편 일반 신자들 중에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수다타(Sudatta)가 있었다. 특히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라자그리하에서 만난 석가모니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어 석가모니를 사바티에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수도원, 즉 정사를 세웠다. 이것이 기원정사이다. 이곳은 사실상 석가모니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설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밖에 비사카(Visakha)라는 여인이 기증한 녹모강당(鹿母講堂), 코삼비에 있는 정사로서 흔히 미음(美音)정사라고 번역되는 고시타원, 베살리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 등 많은 정사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왕이나 부유한 상인이 불교 신자로 귀의했던 점이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동시에 신자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석가모니는 어느 사문 지도자보다 일찍이 출가승들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그것을 상가(Samgha)라 한다. 흔히 말하는 승가(僧伽)가 이것이며, 불교의 교단을 가리킨다. 베나레스에서 5명의 수행자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을 때를 승가의 성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승가에는 큰 특색이 있었다. 즉 출가 이전에 속했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하루 또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자를 윗자리[上座]에 앉혔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를 법랍(法臘)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단 내부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교단에서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기존의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인데, 그것이 교단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적극적인 이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승가에서 수행자 개인은 3개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鉢盂]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되었고, 기증된 것은 모두 승가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비가 쏟아지는 계절인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그간의 생활에 대한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드디어 우기가 끝날 때면 포살(布薩 uposatha)을 실행하여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를 실행하고 새로운 의복을 분배했다. 한편 제자 아난의 진력에 의해 여성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라 불리는 불교 신도의 구성이 완결되었다. 사중이란 남성 출가자인 비구(bhikkhu),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bhikkhuni)·우바새(upasaka)·우바이(upasika)라고 재가(在家)의 남녀 신자를 말한다. 높은 이상을 내걸었던 승가의 정신은 인도의 고대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라자그리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 왔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아난아,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의 기원어가 '등'이라는 뜻도 지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설법을 '자등명 법등명'으로 번역했다.
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죽음). 도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가 공양한 음식이 쇠약해 있는 석가모니에게 심한 설사까지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Subhadda)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어떠한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던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라로 달려온 것도 비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 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열반절로 기린다. 흔히 불멸(佛滅)의 연도라고 통칭되는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입멸(入滅) 연도에 대해서는 고래로 수많은 설이 있으나, 그것들은 남전과 북전으로 크게 양분된다. 석가모니의 탄생 연대도 이 입멸 연대로부터 역으로 계산한 것이다.
남전(南傳)에 의한 대표적인 것은 BC 543(또는 544)년 설로서, 현재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지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는 특히 학술적인 근거가 희박하나 오랫 동안 널리 통용되어온 전승이어서, 현재 한국의 불교 종단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채택하고 있다. 북전에 의한 대표적인 설은 중성점기설(衆聖點記說)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매년 율장에 점을 하나씩 계속 찍었다고 중국에 전해진 전설이다. 이에 의하면 입멸 연도는 BC 483년으로 계산된다. 일본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일본 일부에서 승인되기 시작한 것은 BC 386년 또는 BC 383년 설인데, 아소카 왕의 즉위를 불멸 116년이라고 하는 캐시미르 지방의 전승을 유력한 자료로 삼은 계산이다.
한편 아소카 왕의 출현은 불멸 후 218년이 된다고 하는, 스리랑카의 사료(史料)를 토대로 BC 486년이 불멸 연도라고 계산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불전과 논서에서 전하는 아소카 왕의 즉위 연대는 불멸 후 100~160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추정도 단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다만 연대에 무관심했던 인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만큼이나 상세하게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탄할 만하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베살리·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ona)라는 늙은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을 경모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즉 불탑(佛塔)이다.
이 불탑은 후대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가르침을 집성한 결집(結集)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자 제멋대로인 견해를 저마다 그가 설한 것인 양 내놓을 우려가 있음을 염려한 가섭은 제자들 중에서 500명의 정통 비구들을 선발하여,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교외에서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의 결집을 행했다. 아난이 암송하는 경 하나하나를 전원이 찬성함으로써 경장(經藏)이 편찬되고, 우팔리(Upali)가 암송하는 율의 조항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율장(律藏)으로 편찬되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일반적 가르침인 경과 출가자의 교단생활을 규정한 율이 정식으로 제정되었다(→ 결집, 삼장).
그는 위대한 교사요, 사람들의 조련사로서 독특한 명성을 가졌다. 코살라의 왕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던 살인자요, 악한인 앙굴리말라(Angulimala)에 대한 그의 대화와 교화는 그의 위대한 능력과 재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거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서 매혹되었으며, 반대자들은 그가 어떤 '유혹적인 속임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서는 매우 빠르게 개종했다. 이런 사실은 코살라 국왕의 논쟁으로써 석가모니를 꺾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갔던 이들이 결국에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그는 각자의 소질이나 수준에 따라 그들의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았음이 인정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도 먼 거리를 갔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자들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그들의 행복과 진보에 대해서 물었다.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는 매일 환자들의 병실을 방문했다. 언젠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방치한 병든 수행승을 돌보면서, "병든 이를 돌보는 자는 나를 시중 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개혁자로서의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오래 전에 확립되어 고수하고 있던 카스트 제도를 비난했고, 인간의 평등을 인정했다. 또 그는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 진보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형벌을 통해 죄를 억압하려는 것은 헛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므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증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전륜왕사자후경 轉輪王獅子吼經〉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바른 직업에 종사하고 진실을 말하며,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여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신뢰를 얻어 명예와 재산을 획득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을 일방적으로 획득하는 데 그치고 단지 자신의 자본으로 보존해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동시에 타인과 같이 향수케 하여 유효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광야를 여행할 때의 길동무처럼 가난한 가운데서 나눠주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라고 말하여 서로 협조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의 불교도는 국가의 문제에 관해서 국왕은 힘으로써 민중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서, 먼저 출가자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완전한 이상사회를 구축한 연후에, 그 정신적 감화를 통해 일반사회의 개혁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승가를 제정한 정신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국가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의 지도자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몇몇 경전에서 국왕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으며, 바지족의 공화제 정치를 칭찬했다고도 전한다. 불교 교단의 운영 방식에는 당시의 공화정치나 조합을 모방한 점이 있음이 인정된다. 국가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란 진리인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교사였다. 강대한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질서와 계율을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왕으로서도 인민은 물론이고 자신의 왕실에서조차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애정·존경에 기초하여 질서와 계율을 유지시켰다. 그에게는 많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는 신통력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기적). 어느 때 제자들 중의 1명이 대중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꾸짖고서 재가신도들 앞에서 신통을 행하지 말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통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가모니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종합해보면, 그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이성적인 사상체계와 생활방식으로 인간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결심했으며, 그것을 실천했던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위대한 지혜의 소유자요, 위대한 자비의 실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교단 내부의 문제까지도 그의 지시에 따라 해결했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사모하는 귀의자들에게 그의 입멸은 커다란 지표를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으라"라는 유언이 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은 더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인 석가모니 부처가 사모의 정을 품고 있던 제자들에 의해 초인간적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먼저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이미 신격화된 표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서 그는 '부처'로 불리고 '고타마'라는 인간으로서의 성(姓)은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이윽고 부처의 10가지 호칭, 즉 여래10호(如來十號)가 정해진다. 그것은 ① 완전한 인격자인 여래(如來), ② 존경해야 할 사람인 아라한 또는 응공(應供), ③ 바른 깨달음을 연 사람인 정변지(正遍知) 또는 정등각(正等覺), ④ 밝은 지혜와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인 명행족(明行足), ⑤ 행복한 사람인 선서(善逝), ⑥ 세간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인 세간해(世間解), ⑦ 최상의 사람인 무상사(無上士), ⑧ 거친 자를 제어하는 사람인 조어장부(調御丈夫), ⑨ 신들과 인간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 ⑩ 세상에서 존귀한 분인 세존(世尊)이다. 모든 것을 완수하여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부처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되기에 이르는데, 그 특징은 '32 상(相)'과 '80 종호(種好)'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인도인들이 신봉하는 신의 특징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상적인 신체적 특색을 부처에게도 적용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법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므로 그가 아무리 초인적인 취급을 받더라도 석가모니 이외에도 부처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 7인의 부처가 있었다는 과거불(過去佛) 사상이 등장했다. 부처가 신격화됨과 아울러 부처에 대한 신앙도 강조된다. 아소카 왕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 사후의 교단 지도자들은 석가모니 한 사람만이 부처이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아라한과(果)라는 경지를 얻는 것만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여 석가모니와 구별했다. 이로부터 부파 불교의 고정관념이 시작된다. 이것은 현재 남장 상좌부의 기본적 사고의 하나로 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뒤에 탑을 세움으로써 시작된 사리탑 또는 불탑에 대한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의 육신이 남긴 사리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그가 남긴 모든 것에 대한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긴 머리카락이나 가르침에도 신앙의 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경전을 사리탑에 봉안하여 신앙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 자신에게 귀의했겠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 이루어진 귀의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진리인 법이 부처의 입을 통해 설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불멸 이후의 귀의는 법 그 자체에 대한 귀의와 동일시되고, 우주의 진리는 부처 그 자체라고 간주되었다. 불탑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소위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크게 전개되어, 법신·보신·화신이라는 3신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법신(法身)이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부처의 신체라고 간주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진리, 즉 법의 영원성을 자각한 대승불교도가 부처에 대한 귀의를 표명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보신(報身)이란 부처가 되기 위해 과거에 위대한 수행을 완수한 그 보답으로 나타난 부처의 훌륭한 모습을 의미한다. 아촉불이나 아미타불 등의 구체적인 부처들은 보신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그 가능성이 번뇌에 덮여 있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사고의 발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부처가 된다고 설하는 데까지 전개된다. 또 무한한 선행을 거듭 쌓은 결과로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는 사상도 생겼는데,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끝으로 화신(化身) 또는 응신이란 부처가 중생제도를 위해 수많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현실 세계에 내려와 나타내는 신체이다. 여기에도 상좌부 계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입장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보살의 입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양측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숭배하고 있지만, 후자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기본적 명제를 제창하면서 부처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대승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사상적 발전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영원성을 구하고자 노력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전기가 집성된 것은 그가 입멸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산스크리트 계통의 것으로는 〈마하바스투 Mahavastu〉·〈랄리타비스타라 Lalitabistara〉, 마명(馬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슈바고샤(Aśvaghośa)의 〈붓다차리타 Buddhacarita〉가 있다. 중국에서 번역된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60권은 〈마하바스투〉와 유사한 점이 있어서 이의 번역이 〈불본행집경〉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근래에 이러한 견해는 오해라고 밝혀져 있다. 〈랄리타비스타라〉는 〈보요경 普曜經〉 8권과 〈방불대장엄경 方佛大莊嚴經〉 12권에 상당하며, 〈붓다차리타〉는 중국에서 〈불소행찬 佛所行讚〉으로 변역되었다. 산스크리트 원전 없이 한역(漢譯)으로만 전하는 것은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4권, 〈중허마하제경 中許摩詞帝經〉 13권, 〈불본행경 佛本行經〉 7권, 〈중본기경 中本起經〉 2권 등이다. 한편 팔리어로 쓴 전기의 집대성은 〈니다나카타 Nidanakatha〉인데, 이는 그 이전에 성립된 전기들을 하나로 조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느 것이나 후세에 집대성한 것이어서 그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 그 이전의 오래된 자료로는 단편적인 것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팔리어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 〈수타니파타〉, 〈상응부 相應部 Samyutta-nikaya〉의 〈사가타바가 Sagathavagga〉, 그리고 〈비나야 Vinaya〉, 즉 율장을 비롯하여 더욱 발전된 니카야(Nikaya) 종류, 또 한역으로는 〈아함경〉 등이 있다.
鄭承碩 글
소크라테스
BC 470경 아테네~BC 399 아테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개요
BC 5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며 서구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세 인물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가운데서 첫째 인물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 제국을 세운 델로스 동맹의 창설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the Just) 가문의 친구였다. 신비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선조였거나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아버지가 조각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회고록 작가인 키오스의 이온은 전쟁중이던 BC 441~ 439년에 소크라테스가 사모스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와 사귀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르켈라오스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BC 423년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 phaed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기이한 편이었다. 뚱뚱하고 키가 작고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이고 입은 컸다. 마치 주신(酒神) 실레노스 같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가 "내면적으로 매우 훌륭하고", "당대에 가장 곧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테네 국민의 심성도 개선·발전시키는 것이, '신'이 자신에게 부과한 사명이라고 확신했다. 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이론은 주로 플라톤의 대화편과 크세노폰의 〈회고록 Memorabilia〉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길거리와 시장, 특히 김나시온(고대 그리스의 단련장)에서 보낸 듯하다.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의 모임에 종종 참여하기도 했지만, 정치가·시인·예술가의 본분, 옳음과 그름에 대한 생각, 관심거리 등에 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이러한 대화의 목표는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아폴론의 델포이 신전의 유명한 신탁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소크라테스가 동료들에 대한 사명을 의식하기 전에 나온 것으로 지혜에 관심을 가진 집단에서 그가 최고의 명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무지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고 자처했다. 그는 델포이의 신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동료들로 하여금 무지를 깨닫게 하고 영혼의 선(善)을 위한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임무를 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등한시하기보다는 차라리 당장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스스로의 선언을 통해 그 믿음을 증명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그의 옷은 항상 같았다. 그는 신도 신지 않았고 웃옷도 걸치지 않았다. 소피스트인 안티폰은 "그처럼 살아야 한다면 노예조차도 도망가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주제넘게 간섭 잘 하는 인물로 생각했다. 한편 자기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이 되려고 그와 사귀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소크라테스의 원칙에 깊이 공감하고 그 원칙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파산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활동했다. BC 6세기초부터 과감한 우주론적 사변이 성행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사고체계들이 극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합리주의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참된 세계가 감각이 보여주는 세계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학문의 토대를 제거했다. 그의 제자 제논은 수학의 공준(公準)들조차도 서로 모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유능한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생활을 성공적으로 영위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자연과학'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고 당시의 다양한 이론체계들을 익혔다. 이를테면 지구가 평평하다는 밀레토스 학파의 우주론, 지구가 구형(球形)이라는 이탈리아 학파의 이론, '단위'에 관한 제논의 수학적 수수께끼(연속성의 문제) 등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비판적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한때 소크라테스는 '정신'(Nous)이 우주 질서의 원천이라고 보는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을 중시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모든 것은 최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면서 "우주가 합리적인 목적론적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엘레아 학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를 공부하면서 이 철학자가 그 원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으며, 이론체계의 세부내용이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적임을 알게 되었다.
■ 소크라테스의 '가설'
이러한 실망을 겪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 즉 '사실'에 관한 '진술' 또는 '명제'를 고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주제에 관한 만족스러운 '가설' 또는 공준에서 출발해야 하며 그 가설에서 나오는 결과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들이 참이며, 무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지면 '가설'은 잠정적으로 확정된다. 진리에 관한 문제는 최초의 '가설'을 더욱 궁극적인 '가설'의 귀결로 연역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 형상(形相)이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형상이론을 자신의 근본적인 '가설'로 제시한다. '선함'·'아름다움'·'인간' 등과 같이 분명한 외연을 갖는 모든 명사는 감각지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사고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대상을 이데아(Idea) 또는 에이도스(Eidos), 즉 형상(形相 Form)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아름답다'·'선하다'·'인간적이다' 등의 술어로 수식하는 감각이 가능한 사물들은 2차적이고 파생적인 실재를 지닐 뿐이다. 그것들은 형상을 '분유'(分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이것이나 저것이 '된다'.
흔히 19세기 학자들은 이러한 형상론을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플라톤이 고안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즉 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달리 보편자를 특수자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파이돈〉의 이론이 플라톤 이론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소크라테스가 '항상' 되풀이한 것을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낯설지 않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옳지 않다면 플라톤이 어떻게 형상이론이 그토록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플라톤이 〈향연 Symposium〉과 〈국가 Republic〉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저작에서 플라톤은 최고의 형상인 미의 형상 또는 선의 형상이 모든 지적 관조의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어떤 형식으로든 완전하게 나눌 수는 없다.
■ 논리적 방법
논리적 측면에서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에게 '귀납논증'과 '보편적 정의'를 확립한 공을 돌린다(→ 논리학). '보편적 정의'는 보편적으로 의미가 있는 술어, 즉 〈파이돈〉에서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보편자). 이러한 정의는 소크라테스가 실천을 개선하기 위해 도덕적 술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분할과 정의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귀납논증'은 단순하고 두드러진 구체적 사례들을 고찰함으로써 보편적 정의와 같은 정식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귀납은 증명의 방법이 아니라 제안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귀납논증은 제안된 '정의'(定義)의 의미를 분명한 형태로 정신 앞에 드러낸다. 다음으로 그 정의가 정당한지는 그 정의를 채택함으로써 나오는 '귀결들'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에 달려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영역에서 '정의'를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소크라테스는 '자연' 일반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윤리적' 성격과 행위에 관심을 두었다(→ 귀납).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중심문제를 우주론에서 생활의 규칙을 규정하는 것으로, 즉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옮겨놓았다. 〈변명 Apologia〉과 관련해서 볼 때 신이 부여한 임무는 육체나 '재산'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 즉 '가능한 한 개인의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영혼을 신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영혼을 '삶의 호흡'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육체가 소멸될 때 영혼도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본 호메로스나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견해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또 영혼을 육체 속에 거주하는 일종의 이방인으로서 육체가 활동할 때 잠자고, 육체가 잠잘 때 깨어난다'고 보는 오르페우스교에서 유행하던 견해와도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에 의해서 우리는 현명하거나 어리석고, 선하거나 악하다"고 이야기했듯이, BC 4세기경에는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인격, 성격과 지성의 거주지로 여겨졌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이었다(→ 이오니아 학파, 프시케).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직접적으로 영혼의 선함이나 악함에 의존한다. 참된 선, 즉 참된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복을 놓친다. 그들은 실제적인 선 대신에 선하지 않은 대상, 이를테면 무제한의 부나 권력을 선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잘못된 행위는 의도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된 선을 '알고' 다른 것과 혼동하지 않아야 하며, 그래야 강함·건강·부·기회를 잘못 '사용'하지 않는다. 예컨대 죄를 저지르는 것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거나 죽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임을 안다면 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소피스트에 따르면 '선함'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하게 쓰일 수도 악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선에 관한 지식은 나쁘게 쓰일 수 없다. 그 지식을 지닌다는 것은 그 지식이 항상 적절하게 쓰인다는 것을 보증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에 맞서 아테네인·스파르타인·그리스인의 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선이 행복이라는 생각에 근거하여 절대적 도덕을 세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는 정치가가 모든 동료·신민의 영혼을 '돌보고' 그들을 '가능한 한 선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고대 민주주의의 근본 악은 사회가 참된 통찰과 적합한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데서 생겨났다. 그가 보기에 약간의 부문에서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도덕과 정의의 문제에서 한 시민의 의견과 다른 시민의 의견이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도 참된 정치가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의 기호를 자극했을 뿐, '정치체제를 돌보는 의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올바름과 절제', 즉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정치가로 불릴 만하다고 주장했다. 절대적 선에 관한 지식이 국가의 복지와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임을 이해한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확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생활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小)소크라테스 학파로 불리는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이 학파의 주요인물은 아테네의 안티스테네스와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인데, 이들의 사상은 견유학파(犬儒學派)와 메가라 학파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훗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그가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A. E. Taylor 글 | 梁雲悳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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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of Galilee,
Jesus of Nazareth
BC 6경 유대~AD 30경 예루살렘.
20세기 세계 인구의 1/3 이상이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개요
그의 행적과 메시지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에는 신학적 동기와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 자료
나자렛 예수의 생애·사역·죽음은 그가 일으킨 세계적 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로마 제국의 변경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 그의 생애는 짧았고, 동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기록된 말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씌어진 동시대의 기록도 없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교 전통, 특히 마르코·마태오·루가의 복음서 구성을 위해 사용된 자료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후기 교회의 견해와 예수에 대한 신앙을 반영한다.
- 비그리스도교 자료
이 자료들은 빈약하고, 예수의 생애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110년경에 씌어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15장 44쪽)에서 예수 처형에 대한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타키투스는 64년 로마의 화재로 발생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설명하면서, 네로 황제가 자신에 대한 혐의를 없애기 위해 국민들 가운데서 미움을 받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화재의 책임을 씌웠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그 이름(그리스도교도)은 티베리우스 치세 때 총독 본티오 빌라도가 처형한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유대에서 일으킨 '일시적으로 진압된 악성 미신'은 곧 후에 로마에까지 퍼졌다. 타키투스는 예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원래 종교적 칭호는 메시아)에 대해 말한다. 이 구절은 단지 종교운동의 창시자로서 예수의 수치스러운 죽음(십자가 처형)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로마에서의 그 운동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설명해준다.
소아시아의 젊은 통치자 플리니는 트라야누스 황제(AD 111)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묻는데(〈서신〉 10장 96쪽~), 여기서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미신을 믿는 신자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Vita Claudii〉(25장 4쪽, AD 100 이후)에서 "그(클라우디우스)는 크레스투스의 선동으로 계속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깊숙이 유입됨으로써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소란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크레스투스가 그당시 로마에 유대인 선동자로 나타났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자에게 잘못 전해졌거나 저자에 의해 잘못 이해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의 추방칙령(AD 49)은 〈사도행전〉 18장 2절에서도 언급된다. 도미티아누스 궁정에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유대 전쟁(66~70)을 서술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AD 62년에 '야고보, 그리스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유대 고대사 Antiquities〉 20장 200쪽)가 돌에 맞는 것을 언급했다. 그는 처음으로 고유명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번역이라는 것을 알았음). 그러나 그는 '이른바'라는 권위를 손상시키는 제한어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친숙한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덧붙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언급이 후기 그리스도교도가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플라비우스의 증언'(18장 63쪽~)으로 알려진 이러한 구절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그것은 적어도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는(명백히 후대의 가르침인) 몇 가지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대법·전승·〈탈무드〉는 1, 2세기 랍비들의 몇몇 진술만을 고려한다. 그것들은 논쟁과 유대적 변증을 통해 그리스도교 전통과 친숙함을 보여주지만 또한 몇 가지 다른 전설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저작들이 제공하는 예수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판테르라는 사람의 아들(불합리한 어떤 해석들에 따르면)로 태어난 예수(히브리어로 Yeshu)는 마술을 행했고, 현인들을 조롱했으며, 백성들을 유혹하고 선동했고, 5명의 제자들을 그 주위에 모았으며, 유월절 전날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러한 주장들을 윤색한 모음인 〈예수의 생애 Toledot Yeshu〉는 몇 개의 번역판으로 중세 유대인들 사이에 퍼졌다. 이러한 독립적인 보고들에 의하면 고대에는 그리스도교의 적들까지도 예수의 역사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18세기말 불충분한 근거에서 시작되어 19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진행되었다.
- 그리스도교 자료들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증언은 〈신약성서〉에 모아졌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는 역사적 예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다.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저작인 바울로의 서신(AD 50년대)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정보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고(Ⅱ 고린 5:16) 예수의 전기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바울로의 사상과 말씀 선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재림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의미만이 있다. 그는 이 내용을 그가 받아 전해준 전통(Ⅰ 고린 11:23~, 15:3~)으로 규정하거나, 아니면 주어진 전통으로 보여준다(로마 1:3~, 필립 2:6~11).
예수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들은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이다(→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인 제4복음서는 특별한 입장을 보인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와 유사점을 보이기도 하고 그 안의 독립적인 전통들은 역사성을 가지기도 하지만, 요한의 전승은 복음서가 진보된 신학적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적인 관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서가 역사적인 자료로 직접 사용될 수는 없다. 이것은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늦은 100년경에 씌어졌다. 복음서 문학이 여러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정경 외적 전승에서 보여진다. 이 전승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인용 및 다른 자료에서 단편적인 형태로 보존되고, 전설적인 내용과 경향을 담고 있다. 그 예로 1945년 이집트 '나즈함마디'에서 발견된 콥트어 〈토마의 복음서〉(2세기에 영지주의 그리스도인들, 즉 비의적 이원론을 믿는 이단적 신자들에 의해 씌어짐)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정경복음서들에 있는 것과 연관되는 114개의 예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역사적 윤곽을 가지고 있지 않다(예를 들면 수난과 부활절에 대한 내용이 없음). 이 복음서는 천상적 계시의 담지자로서 예수가 제자들의 비밀집단에게 물질세계를 포기하고 그들이 본래 기원한 소멸하지 않는 초월적인 빛의 세계에 참여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토마의 복음서〉는 역사적 예수를 위한 자료로서는 쓸모가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원래 작자미상이다. 불확실한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것들은 예수의 제자들이나 초기 사도들의 동료에 의해 씌어졌다. 복음서들은 70~100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씌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더 오래된 구전 전승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전승의 특성과 구조가 복음서에서 통합되었으며, 복음서들은 명백히 사실·상황·사건들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혹은 전기적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이야기 자체를 재생하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된 역사를 말한다. 예수의 행적을 〈구약성서〉 약속의 성취로 해석하고, 그의 이야기는 죽음(수난과 부활), 신적인 구세주로서의 중요성, 재림에로 나아간다. 복음서의 본문들은 과거의 예수보다는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선포하려고 한다.
〈마르코의 복음서〉·〈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대체로 같은 전승 내용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부분들은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서만 발견되고, 어떤 내용은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에서만 혹은, 〈루가의 복음서〉에서만(〈마르코의 복음서〉에만 있는 것은 많지 않음) 발견된다. 거의 모든 성서 비평학자들에 따르면, 가장 짧은 〈마르코의 복음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이고 다른 두 복음서의 주된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2번째 자료(Q[독일어로 '자료'라는 뜻의 Quelle에서 유래])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Q문서). 이 2번째 자료는 대부분 예수의 말씀들(logia)로 구성되어 있고, 수난 혹은 부활 전승은 포함하지 않는다. 카를 루트비히 슈미트, 마르틴 디벨리우스, 루돌프 불트만은 양식비평(복음서 전승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연구)을 발전시켰는데, 이 비평은 기본적인 전승은 서로 아무 관련도 없고, 날짜·장소·역사적 상황에 관심이 없는 수많은 작은 독립적 단위들(말씀·비유·논쟁·일화·기적담)로 구성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개별적인 단편들을 편집하여 연결시키고, 말씀과 말씀군으로부터 어떤 '담화'를 형성하면서 개별적인 장면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사건들을 연결시킨 사람들이 복음서의 저자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 가장 온건한 수단들, 즉 짧은 도입적 연결구, 상투적이며 일반적인 시간에 대한 지시('다음에','며칠 후'), 막연한 장소에 대한 지시(산·들판·길·집·호수) 등을 사용했다.
복음서들의 양식비평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한 분석은 더 오래된 자료의 탐구를 위한 첫 단계였을 뿐이다. 공관복음서에 들어 있는 구전 전승은 기억하기 쉽도록 내용에 알맞는 고정된 형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예로는 예언적 말씀, 팔복, 화의 선언, 잠언과 유사한 지혜 말씀, 율법에 관한 말씀, 교회 규칙, 대화 등이 있다. 예수의 많은 기적은 그 동기나 특성을 사용해 말해진다.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은 삶을 표현하는 관심과 방식에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며, 부활 이후 교회의 관념과 사고방식의 영향 아래 교회 신앙의 관점으로부터 형성되고 수집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본문을 해석할 때 교회 안에서 그 본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자료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적 개관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시대와 주변세계
- 정치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 민족은 분열되고 무력했다. 고대세계의 대제국들(이집트·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시리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유대는 이미 바빌론 포로시대(BC 586~538)부터 정치적 독립을 잃었고, 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스 시대 초기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BC 3세기)하에, 그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BC 2세기)에, 마지막으로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가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AD 70). 오직 짧은 기간 동안만 유다 나라가 존재했다. 제사장 가족인 마카베오 가문은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후 통치했다(BC 168~165). 그러나 그들의 통치는 내적 분열과 격렬한 왕권쟁탈로 끝나게 되었다.
BC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에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의 영토를 연안도시들과 데카폴리스(중앙 트란스요르단)의 도시연방들을 제외한 유대 지방으로 한정시켰다. 몇 개의 다른 작은 지역들(겐네사렛 호수 북쪽의 갈릴리 내지, 사해 동쪽의 베레아)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졌다. 파르티아가 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것을 이용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BC 44) 이후 변화하는 권력상황에 교묘히 적응하면서, 헤로데 1세(BC 37~2 재위)는 로마의 도움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으며 유대 땅을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확장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통치는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건설계획들을 세우고, 도시들을 설립했으며, 다른 방식들로 헬레니즘화(즉 그리스 문화를 강조하면서)를 촉진했다. 또한 솔로몬 성전을 화려한 양식과 엄청난 규모로 재건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 성전 재건은 BC 20년에 시작해, 티투스가 AD 70년에 파괴하기 몇 년 전인, AD 64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
유대인들은 헤로데의 죽음 이후 헤로데 가문의 통치를 폐지해달라고 로마에 요구했으나, 로마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에게 땅을 분할했다.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인 예루살렘·사마리아·남(南)유대·이두매를 포함한 유대 지방은 헤로데 아르켈라우스(AD 6년 폐위)에게 주어졌다. 그의 영토는 군사·과세·사법 업무를 관할하는 통치자(총독)하에 로마 행정권으로 통합되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믿고 행정과 사법의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유대의 총독'이 된 본티오 빌라도는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다스렸다(AD 26~36). 그는 이 이유로 해임되었고 헤로데의 두 아들의 통치는 더 오래되었는데, 필립보(BC 4~AD 34)는 겐네사렛 호수의 북서쪽 비유대 지역을 다스렸고, 헤로데 안티파스(BC 4~AD 39)는 갈릴리와 변방 베레아를 통치했다.
예수가 자라고 사역한 갈릴리는 다시 유대화되는 과정에 있었지만 외국 이주민들의 정착으로 완전히 특성이 바뀌어 유대인들의 경멸을 받았다. 이 지역의 문화와 문명은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하에 개별 도시들, 대토지 소유자들을 헬레니즘화했지만, 아람어를 쓰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예수 시대에 갈릴리는 유대인들이 로마에 저항하는 중심지로 알려졌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는 주로 비성서적 자료들, 특히 요세푸스의 저작에서 주로 발견되며 단지 몇몇 내용만이 복음서에서 언급된다. 로마 통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일정하지 않다. 제사장들과 귀족들은 순응했지만, 숨어서 저항하거나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다.
- 종교적 상황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여러 집단들로 구성되어 분열된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공관복음서들의 기록에 나타난 바리사이파는 대부분 예수의 적대자들의 표본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 격분하여 그를 감시했고, 처음부터 그를 없애려고 했으나, 거꾸로 그들 자신들이 예수로부터 '자기 의'를 내세우는 위선자들이라고 호되게 공격당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리사이파와의 논쟁들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복음서들에서 '바리사이'는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위선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자료들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① 후기 해설자들은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정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바리사이파는 집단으로 복음서에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연합된 집단이 아니었다. 예수가 바리사이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대한 산발적인 언급들이 있는데(루가 7:36, 11:37, 14:1), 그들이 수난 전승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② 후기 본문들에서 바리사이파는 대부분 예수와 대조되는 자들로 소개된다. 그에 반해 더 오래된 전승은 예수의 적대자들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③ 마태오는 AD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교들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을 반영하는데, 그때 바리사이주의라는 신학적으로 협소한 명칭이 유대교 재건과정에서 나타난다. 이 후기의 모습이 〈탈무드〉 전승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예수 시대에까지 투사될 수는 없다.
마카베오 시대에 생겨난 바리사이파('분리된 자들') 운동은 다양한 계급과 직업을 지닌 평신도로 구성된 종교적 연합을 형성했다. 그 목적은 하느님의 참된 이스라엘을 실현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도 토라(율법)를 엄격히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기도와 금식의 실천, 의식적 성결 등의 개인적인 의식 명령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포함한다. 바리사이파의 경건에서는 또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망, 죽은자의 부활교리, 이교의 세력을 멸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게 될 다윗적인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종교적 상황에서 바리사이파와 예수의 관계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가르침의 내용에서 공통점들도 있다. 예를 들면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마르 12:25~27),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경건에 대한 비판적 진술들이 그것이다. 예수의 많은 말씀은 랍비 전통과 유사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 의와 참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이상을 주장할 때 예수가 거부했다는 것과 그들의 '장로들의 전승'을 하느님의 명령과 대조되는 인간의 전승으로 예수가 인식했다는 것, 세리와 죄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 등을 살펴볼 때 그가 그들을 공격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예수의 견해들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에 대항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유력하지 않았던 바리사이파가 처음부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마르코의 복음서〉3장 6절에서 말하는 것과는 반대임).
예루살렘의 제사장 계급에 속했던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보다 백성들 사이에서 권위가 없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학파로서, 그들은 부가된 '전통들'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새 교리를 거부했다. 사두가이파는 위계적 전통을 중시했으며 정치적 상황에 쉽게 적응했다. 그러나 성전파괴(AD 70) 이전 예수 시대에 미쳤던 그들의 영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바리사이파와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그들은 최고의 종교적·법적 권위인 산헤드린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로마의 통치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파국적 결과와 성전파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율법학자들은 복음서들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모세의 율법에 헌신하는 에즈라 시대(BC 5세기) 이래의 후기 유대교에서 그들은 가장 존경받는 교사계급을 형성했다. 유대 생활의 모든 종교적·도덕적·사회적·법률적 문제들에 대한 율법의 규범적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율법학자는 신학자와 법률가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수 시대의 율법학자 중에는 바리사이인들이나 제사장들 외에도 사두가이인들과 열심당이 있었다. 그들은 보수를 받지 않았고 토라를 설명했으며 일상생활을 위한 지침을 주어야만 했다. 학교에서 오랫동안 세심한 훈련을 받은 그들은 율법학자의 위치에 맞게 학자의 긴 옷을 입고(마르 12:38), 존경스럽게 랍비라고 불렸으며(마태 23:7), 회당에서 명예로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에서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함께 모이는 전형적인 방식은 복음서 저자들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데, 그때 회당에서 가르침을 주관한 자들은 바리사이파였다. 그러나 그 이전인 예수의 시대에는 율법학자들이 더 중요한 집단이었다. 예수가 자주 '랍비'와 '교사'로 불리기는 했지만 그가 이 직업의 구성원이었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발전에서 혁명적 집단인 열심당이 종교적·정치적 운동에 참여한 것은 유대 민족에게는 비극이었다. 바리사이파의 소극적 저항에 더이상 만족하지 않고 그 집단으로부터 많은 지지자들을 모은 열심당은 신정정치의 이상과 율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첫번째 행동은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유대의 인구조사를 명령했을 때 일어났다. 처음에는 산발적인 개별행동에 불과했으나 반란은 곧 확산되어 군대 형태를 갖추었고 마침내 1차 유대인 반란(AD 66~70)을 부추겼다. 성서적·비성서적 자료들은 열심당의 창시자로서 가말라 출신의 갈릴리 율법학자 유다를 거명한다. 예수 시대에는 그 투쟁이 아직 절정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열심당은 로마군을 급습하여 광야에 은신처를 둔 채 게릴라 전을 수행했다. 그에 따라 로마는 예루살렘을 엄격히 통제하고, 많은 순례자들이 도시에 모이는 유대 절기에는 군대를 강화하여, 소요가 예상되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동을 취했다. 이 상황을 통해 예수를 죽음으로 이끈 사건들을 조명할 수 있다. 열심당의 목표는 신정정치의 실현, 약속된 메시아 통치, 이교도 정부의 분쇄 등이었다.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거나 관련된 운동을 창시했다는 주장은 18세기에 대두되어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예수가 로마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그 십자가형은 대부분 반란자에게 행해졌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예수와 함께 처형된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 덕분에 사면받은 바라빠(마르 15:15)와 같이, 이 당시에는 반란자에 대한 관용어인 '강도들'로 언급된다. 이것은 유월절에 열심당의 반란이 계획되었고, 반란은 피로 진압되었으며, 예수가 실제로 이 반란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려고 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인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마르 11)는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된다. 후자는 로마에 동조하는 유력한 제사장 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된다. 또한 예수가 게쎄마니에서 잡혔을 때(마르 14:47) 한 제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연관시킨다. 후기의 그리스도교 전승은 변증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들로 그 사건의 참된 역사적 상태를 인식할 수 없도록 변경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시들은 보존되었는데, 예를 들면 '여우' 헤로데(루가 13:32)와 난폭한 세속 통치자들(루가 22:25)에 대한 예수의 비판적 말씀들, 그의 제자인 시몬이 열심당(루가 6:15, 사도 1:13)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열심당에 속했다는 가정을 지지할 충분한 근거들은 없다. 그가 로마에 의해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열심당원으로 잡혔고 국가의 적으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그가 실제로 열심당원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열심당원이라는 가정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논증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정치적·민족적인 특성이 없고, 어떠한 인간적인 행위도 아닌 하느님 홀로 그의 왕국을 건설하며(마르 4:26~29),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분리주의자 에세네파는 아마도 쿰란(사해의 북서쪽 해안) 종파와 동일한 것으로 본다. 1947년 많은 그들의 사본(사해문서)과 후대의 그들의 거주지가 발견됨으로써 세례 요한과 예수가 이 분파로부터 나왔거나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에 상당히 의존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파는 바리사이파와 같이 BC 2세기에 예루살렘의 관제 제사장들과의 갈등에서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전통을 유지했고, 율법을 강하게 실천했다. 쿰란 종파의 특성으로는 유대의 남은 자들과 함께 외부세계로부터의 수도원적 은둔, '어둠의 자녀들'과 대조하여 '빛의 자녀들'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방식, 엄격한 조직과 훈련, 묵시적 기대(극적이고 변혁적인 사건들과 함께 역사 속에 하느님의 개입을 기대함) 등이다. 사해에서 발견된 새로운 본문들이 복음서의 예수 전승과 개별적인 유사성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쿰란 분파와 세례 요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가 민족 전체에 대해 말한 종말적인 회개의 말씀은(그의 세례는 단 한번 행해진 세례였음) 에세네파의 정기적인 정결예식과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사역 범위, 구원의 말씀, 모든 궤변에서 자유로운 하느님의 뜻 이해, 사랑의 계명, 죄인들 및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과의 교제 등은 에세네파의 견해들과는 정반대이다.
■ 예수의 생애와 사역
- 탄생과 가족
예수의 생애와 그가 활동한 지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단지 윤곽만 파악할 수 있다. 비성서적 자료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 15년(루가 3:1), 즉 AD 28~29년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상당히 정확하게 활동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탄생 시기와 장소는 불확실하다. 〈마태오의 복음서〉 1·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초기시절이 헤로데 1세 때와 정권의 교체기(BC 4)였고,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AD 6) 있었던 유대의 첫번째 인구조사와 연결시킨다. 또한 BC 8년경에 행해진 인구조사에 대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많은 자료는 탄생 연도를 BC 7~6년으로 추정한다(BC와 AD의 사용은 중세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음). 예수의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전승은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구약성서〉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신학적 주제는 그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마태오의 복음서〉 2장에서 베들레헴은 부모가 본래 살던 곳이었으며 그들은 자녀들을 위협하는 위험 때문에 이집트를 갔다가 나자렛으로 옮긴다. 그에 반해 〈루가의 복음서〉 2장에서는 예수의 부모가 실제로 나자렛에 살았으나 예수를 다윗 가족 출생지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잠시 베들레헴에 머문 것으로 나타난다. 두 전승이 각각 고유한 방식대로 그가 탄생한 장소를 지정할지라도 예수의 메시아성이라는 신학적 주제의 전설적 변형으로 판단해야 한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과 〈루가의 복음서〉 3장의 상당히 다른 계보들에서 메시아(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교리를 내포한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계보적 사고를 위한 유일한 〈신약성서〉의 증거이다. 그러나 두 본문은 조화될 수 없다. 그들은 본래 예수의 선조들에 대한 일치된 전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메시아성을 계보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구약성서〉의 70인역(그리스어 번역)을 사용하여 유대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본문들은 역사적인 자료들로서는 무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리)의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동정녀 탄생이라는 후기의 사상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보적 증명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 전승도 역시 오직 두 자료(마태 1, 루가 1)에만 기록되었으며, 본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로, 요한 및 나머지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 생각에 친숙하지 않다. 〈마태오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의 기적적 탄생이 언급되고 〈루가의 복음서〉 1장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되는데, 이 전승은 하느님과 성령의 창조적 능력을 말해주며,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교로부터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이차적으로 〈이사야〉 7장 14절(70인역에서 히브리 단어 alma, 즉 '젊은 여인'이 '처녀'로 번역됨)의 메시아 약속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과 연합되었다. 매우 오래된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 지방의 나자렛인데, 이곳은 그리스 도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대인 거주지였다고 한다(마르 1:24, 10:47, 14:67, 16:6).
예수의 가족으로는 형제 4명과 몇 명의 누이가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언급된다(본문에는 교리적 동기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이복형제나 사촌들로 만들 근거가 없음). 가족의 이름은 어머니 마리아(미리암), 아버지 요셉과 형제들은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이다. 예수의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요수아, 즉 '여호와가 도우신다'의 그리스어 형태이다.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서 예수 혹은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다고 언급한다.
가족의 이후 역사에 대한 몇 개의 단편적인 정보가 있는데, 아마 일찍 죽은 것 같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누이들은 처음에는 그의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마르 3:31~35).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원으로 언급된다(사도 1:14). 그의 형제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유다의 편지〉의 저자가 다른 형제의 이름을 존경하여 이름을 취했던 것처럼, 〈야고보의 편지〉 저자도 야고보의 이름을 취했다. 4세기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Ecclesiastical History〉에 따르면, 갈릴리에 살고 있었던 유다의 손자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윗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로 소환되었으나 정치적인 위험이 없으므로 석방되었다.
예수는 가정과 회당에서 교육받았으며(성서 공부, 율법에 대한 순종, 기도, 메시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한 기대 등) 예루살렘의 순례에 참가했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듯하며, 그가 신학적 교육을 받았음은 그의 가르침과 '랍비'(선생)라는 명예로운 이름에서 밝혀지는데, 그 시대에 랍비라는 칭호는 훈련되어 임명된 율법학자라는 직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초기생활과 내적 발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알려진 것은 〈루가의 복음서〉 2장 40~52절(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에 유일한 설화가 간직되어 있고, 위경들이 전설의 형식으로 예수의 어린시절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 사역
세례 요한의 등장과 행동, 그에게 예수가 세례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역사적 근거이다. 가장 오래된 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동시대적 배경의 서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묘사된다. 그리스도교 구원 역사에서 그의 위치는 선구자 혹은 개척자이거나 〈요한의 복음서〉에서처럼 예수의 증인이다. 요세푸스는 그를 단순히 도덕 교사로, 그의 세례를 단순한 의식적 씻음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회개하라고 하면서 임박한 마지막 심판의 예언자로 광야에 등장했고, 소멸시키는 진노(마태 3:7~, 루가 3:7~)로부터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더 전능하신 분의 불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도록 회개하려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금욕적 유목민 같은 옷, 음식, 제도, 전통적 종교장소, 세속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의 활동장소(유대 광야와 요르단 스텝 지역)는 종말론적 설교의 열정과 인습적 경건에 대한 그의 공격을 예시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이 마지막 날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을 만난다는 오래된 예언자의 약속과 일치한다. 역사적으로 이 모든 모습은 메시아로서 예수에 초점을 맞추는 그리스도교인의 시각에서는 즉각 이해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음서들의 전승은 세례 요한의 역사를 소급하여 해석했다. 예수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가 처음에는 요한의 운동에 속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가 세례받은 내용은 복음서에서 '에피파니(현현) 이야기'로 유형화되었고, 이것을 예수가 메시아로 임명되는 것으로 다룬다(마르 1:9~11). 요한에 의한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은 예수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요한을 예언자들 위에 놓았으며 그를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마태 11:7~11). 그는 자신의 사역에서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징조를 보았고, 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했다(마르 11:27~33). 여기에서 문맥의 경향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언하며 세례 요한을 예수를 섬기는 더 낮은 자로 보려고 한다.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자적 선포와 회개에로의 부름(마태 3:2, 4:17 참조)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 바로, 예수는 성인(루가 3:23)으로서 광야보다는 갈릴리 고향 마을들에서(간헐적으로는 이웃 마을들에서) 독립적인 공적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사역의 실제 영역은 겐네사렛 호수의 북서연안지역(베싸이다·코라진·가파르나움)이었다. 예수는 백성들을 광야로 부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찾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참여했으며, 요한처럼 금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마태 11:18). 그는 유랑하는 설교자로서 그들 가운데서 일했고(마태 8:22), 카리스마적인 기적을 행했으나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준 이미지는 상당히 특이하다. 그는 회당에서뿐만이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호숫가에서, 길에서 가르쳤다. 그를 둘러싼 무리에는 이상한 사람들(여인, 어린이, 불경건하거나 불결한 자로 여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더욱이 그의 가르치는 방식은 놀라웠다. 그는 성서를 잘 알고 존중했으며, 여기저기서 그것들에 호소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성서로부터 끌어낸 것이 아니다. 그대신 그는 하느님의 실재와 그의 뜻의 정당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항상 제시했고, 거룩한 본문과 전승들의 기존 구조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인습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의 전제없이 청중들을 이해시켰다. 그의 은유·비유·잠언은 성서신학의 전통적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신 일상 경험과 청중의 이해에 직접 호소했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고유하고 명백하고 단순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그의 행동 방식과 일치한다. 복음서들은 이것을 많은 분리된 장면에서 묘사한다.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존경받는 자와 버려진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이 모든 만남에서 예수는 선입견에서 떠나 상황을 지배한다. 그는 논쟁에서 그를 어렵게 하려는 적대자들의 시도를 누그러뜨렸고, 그 주위에 모여든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자들과 함께했다.
공관복음서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물론 비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 운동은 아직은 '교회'라고 불려질 수는 없다(이 개념은 후기 전승에서 처음으로 나타남). 그의 말씀과 운동을 확장하기 위해 그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족과 생업의 모든 끈을 결연히 포기하고(마태 10:37~, 마르 8:34~, 루가 14:26~), 그를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마르 1:17, 루가 5:10)가 되려는 그의 제자들을 불렀다. 그의 말씀들은 극단적으로 날카로우며 제자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숨기지 않는다(루가 14:25~33). 그는 출신과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부르며 임명하고, 특별한 사람들로 선택한다. 그들 중에는 어부들(안드레아·베드로·야고보·요한)·세리(마태오)·열심당원(시몬과 가리옷 유다)·농부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12명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제자들을 임명하고 설교하며 귀신을 내쫓는(마르 3:14) 권위를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제자훈련은 랍비들처럼 '훈련'과 함께 끝나는 과도적인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 중 누구도 충분한 공부 후에 '스승'(마태 23:8)의 지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제자들을 부르는 내용들이 일반적으로 후기의 전승에서 그리스도교도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로 유형화되었고, 개별적인 장면들이 이야기의 본 줄기에 첨가되었을지라도 갈릴리에서 예수가 사역하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회상은 분명히 본문들에 보존되어 있다.
갈릴리 기간이 얼마 동안이나 지속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유대와 예루살렘에 가서 수난을 당한 오직 1차례의 여행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그 기간이 1년을 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활동과 예루살렘에서의 그의 수난으로 나누는 편집적 측면과 신학적인 의도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지만, 몇 가지 이유들로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의 구성이 〈요한의 복음서〉의 구성보다 더 선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3번의 유월절 절기를 지냈으며(요한 2:13~23, 6:4, 11:55), 1번의 수코트(초막절, 요한 7:2)와 1번의 하누카(봉헌절, 요한 10:22)를 지냈다고 한다. 이것은 만 2년을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요한이 독립된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복음서 저자의 시간 지적은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이에서 예수의 사역 장면을 구분하는 수단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여기서 중심지는 예루살렘임).
■ 예수의 말씀
- 하느님의 나라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처음 두 복음서들은 이것을 그의 설교의 요약으로 첫부분에 놓았고, 그의 선교의 중심이며 지배적인 주제로 규정했다(마태 4:17, 마르 1:15).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오가 선호했던 하느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곡한 표현)는 그의 '교리 체계'(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개념)의 끝부분이 아니다. 기초가 되는 유대 단어(말쿠타)는 하느님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의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의미는 〈신약성서〉 본문들에 퍼져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는 공간적 의미('……에 들어간다')로도 쓰인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기대는 조상들의 하느님,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한 세상의 창조자, 주님에 대한 〈구약성서〉의 믿음에 기초하여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믿음에 현재 세상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가 통치하여 사악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왕권은 단지 미래에 나타난다는 모순된 경험이 연합되었다. 많은 집단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묵시적 사변 속에 우주적 기대로 확장되었지만, 다윗적 메시아, 즉 민족의 정치적 대망의 형태를 지니기도 했다. 각 경우에 그것은 마지막 날과 연관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표현은 순수하게 종말론적, 즉 미래의 의미를 가지며, 현재 세상의 시대가 끝나고 극복되는, 외부로부터 이 세상에로 갑자기 침투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세상의 종말, 마지막 심판,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주제들은 복음서 전승에 보존된 예수의 말씀들에 꼭 들어 있다. 예수는 결코 하늘나라를 개인적 인간 영혼의 순수한 종교적인 체험으로 바꾸지 않았고, 유대적 종말론적 기대를 세계 내적인 진화적 과정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목표로 보지 않았다. 그의 몇 비유들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예를 들어 씨앗과 추수, 누룩, 겨자씨의 비유). 그러한 경우에서 유기적 과정이라는 근대적 사고가 본문들에 잘못 도입되었다. 그러나 성서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놀라움과 기적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여기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10, 루가 11:2)라고 기도한다. 예수의 팔복과 재난 예언(루가 6:21~26)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가난한 자와 배고픈 자와 애통하는 자는 아직 하늘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하느님의 이름과 뜻이 악용되고, 그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고, 사람들은 파멸시키려는 시험에 의해 위협당하는 매우 곤궁한 상황을 전제한다.
예수의 설교에 따르면, 실현된 종말론(즉 "마지막 때가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영국 성서학자 C.H. 도드의 견해)이라기보다 '실현되는 과정 속에 있는' 종말론(독일 성서학자 요아힘 예레미아스의 견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현재 세계에 빛을 던지고 말씀과 행위를 통한 예수 자신의 사역에서 보여진다. 이 점에서 그의 말씀은 그 시대의 종말론과 다르다. 그는 민족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거나 장려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언한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촉진하려는 열심당의 노력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를 율법의 경건한 준수(바리사이파, 쿰란 분파)로 환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현재 세계의 종말과 새 '에온' 혹은 시대의 여명(루가 12:56)을 자세히 묘사하려는 그 시대의 묵시적 공상가들의 환상적 시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묵시사상). 그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계속하지도 않았다.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벌써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소개하거나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은 실제로는 하느님 자신이 세상을 해방하고 세상에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려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오고 있으나,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중심에 이미 현존한다. 예수의 말씀에서 하느님은 더이상 신성한 영역 안에 존재하는 그 자신의 위엄의 포로가 아니다.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사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의 징조를 세우기 위해 전쟁터로 나아가는 예수의 행동에서 계시된 것처럼, 하느님은 아버지, 돕는 자, 해방자이며 지금 벌써 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시대의 변화가 여기 있으며, 지금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시간이라고 외쳤다(이사 35:5, 마태 11:5). '여기 그리고 지금'은 예수의 말씀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 설교의 중심적인 특성은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죄짓고 버려진 자들에게, 그리고 '경건한 자'의 선입견에 따르면 마지막 구원에서 가업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유가 어떻게 하느님이 그들에게 행하는지에 대해 썼고, 그를 주님과 왕으로 보여준다(마태 18:23~, 20:1~, 루가 15).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이미지들로 하느님의 행위를 말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명백히 예수 전승의 가장 오래된 줄기에 속한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이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했고, 그럼으로써 하늘나라는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경건한 자들을 성나게 했다.
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 안에 예수가 회개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구원의 시간을 놓치지 말도록(루가 14:16~, 13:6~),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마태 13:44~), 어린아이처럼 영접하도록(마르 10:15), 자신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공로로 실현할 수 있다는 자만을 가지지 않도록(마태 13:24~, 마르 4:26~) 모두에게 요청한다. 예수는 또한 지혜롭게 깨어 있고(마태 24:45~, 마르 13:33~, 루가 16:1~, 12:35~) '자기의' 허구를 포기하라고 요청한다. 예수의 설교에서 회개는 필수적인 것, 선결조건,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의 명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움의 결과(마태 4:17)이고 자신을 그의 미래에로 개방하는 것, 뒤로의 운동이 아니라 앞으로의 운동이다. 이렇게 예수는 미래와 현재를 떨어질 수 없게 함께 묶는다. 따라서 하느님의 새로운 세상 이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가야 하는지 묻는 묵시적인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을 묻는 사람은 그가 미래도 현재(즉 이미 밝아오는 구원으로서의 하느님의 미래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빛 안에 있는 자신의 현재)도 적절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구원의 때가 밝아오는 증거로서 '표적들'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마태 12:38~, 마르 8:11). 회개의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백성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적이었듯(루가 11:29~) 예수 자신이 '표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표적은 의미 있는 일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정당한 지시이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메시아성'을 가르침의 주제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그의 말씀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론의 특징을 가진 요한의 '나는……이다'라는 어투가 공관복음 전승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예수가 결정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적 예언자와 카리스마적인 기적행위자로서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결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하느님의 뜻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은 그 자체가 활동하는 힘으로 보인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게 하는 힘과 도전의 장이 된다.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올지 그 시간을 계산하는 노력을 예수는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그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도록 요구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종말론과 윤리학의 관련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그의 계명들은 어디에서도 예언자적 말씀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예수가 그것들을 하늘의 상급이나 마지막 심판 때의 저주와 연결시킬 때조차도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마태 24:24~, 루가 19:11~). 하느님의 뜻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 이런 이유로 예수의 요구들을 '중간 윤리', 즉 하느님 나라의 신속한 도래와 시대의 변화를 동반하는 우주적 파국 가운데 놓여 있는 세계 상황에서 예외적인 율법들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는 그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논증을 소멸하는 질서로부터 끌어내지 않고, 오히려 현존하는 세계, 〈구약성서〉의 계명들, 창조,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경험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십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공개된 혹은 숨겨진 근거가 되며,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구약성서〉의 율법 전통의 특성에 상응하여 그는 단일한 말씀과 개인적 명령에 연관된 해석에서 하느님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들을 체계적인 '도덕적 가르침'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매우 다른 종류의 계명들을 구체적인 예로, 즉 동료에 대한 행동(살인과 분노, 간음과 이혼, 맹세들, 보복,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의식적 계명(안식일·기도·금식·모독에 관하여), 다른 예식 의무를 설명했다. 예수는 항상 이 계명들의 근원으로 나아갔고, 율법의 문자적인 의미에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정한 뜻을 율법 안에서 밝혔다. 예수가 율법을 존중했지만,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근원이 아니며,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중재하는 절대적인 권위도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는 더이상 거룩한 문자와 전통에 위장되지 않는 하느님의 실재와 또한 유사하게 위장되지 않은 사람의 실재 사이에 대면하게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경건한 일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과 바리사이파와 같이(루가 18:11~) 그것들을 계속 쌓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을 더이상 속일 수 없다. 하느님이 인간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며 분열되지 않은 인간 자체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한 고전적 구절은 산상수훈(마태 5:21~48)과는 정반대이다. 하느님의 요구는 단순한 법률적 행동에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요사상은 '이것뿐 아니라 저것도……'이다. 제정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분노, 음탕한 눈, 법적 이혼, 보복, 원수를 배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
이러한 극단적 요구들은 역설적으로 과도한 요구들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해방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러한 요구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된다. 여기에는 일상생활에서 백성들의 자연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실천이 포함된다. 둘째로, 그 요구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에게 행했고 행하고 있고 행할 것과, 무제한적인 하느님의 가능성에 대해 거듭 지적한다. 믿음(마르 9:23~)·기도(마태 6:1~, 루가 11:1~)·염려(마태 6:25~)에 대한 예수의 말씀들은 이에 대한 예들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결단하기를 요청하는 곳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벌써 결정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가 요구하는 무제한적인 용서의 동기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에게 보여준(마태 18:23~)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있다. 예수는 그의 요구들이 수행 가능한지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한다. 한편 예수는 '상급'에 대한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이 물질적인 상은 아니고(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완성이다(마태 25:14~).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지불을 주장하고 청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다(루가 17:10).
가까이 있는 하느님은 더이상 인간을 전통적 범주로 등급을 매기거나 분류하지 않고, 긴급하고 중요한 도래로 이끈다. 예수가 얼마나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가는 그의 사랑의 계명에서 보여지는데, 그는 그것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욕받으면서도 실천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더 좋은 의'는 사랑이다(마태 5:20). 예수는 〈구약성서〉의 2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받아들였는데(레위 19:18, 신명 5), 이것은 유대교에서도 모든 율법의 요약이다. 그러나 예수의 설교의 특징은 일관되게 모든 다른 율법(안식일 계명)을 가장 중요한 기준(마르 2:27, 3:4)에 종속시켰다는 것, 이웃사랑을 원수사랑에로 확장하여 고양시켰다는 것(루가 6:27~), 계명을 추상적인 관념이나 일반적인 인류애가 아닌 항상 사건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근대 도덕철학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의 구분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단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확실히 예수는 세계와 민족의 새질서를 계획하지 않았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주인과 노예,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항해 싸우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행을 위해 어떤 지침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팔레스타인 유대 시골 상황, 즉 마땅히 되어야 할 세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었다. 그의 말씀·비유·교훈은 얼마나 그가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평가했으며 , 얼마나 명백하게 그것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주어진 세계에서 하느님 본래의 뜻과 그의 밝아오는 나라에 적합하게 행동할 것을 요청한다(마태 6:24, 루가 16:9~). 그러나 예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적으로 규정된 시설을 사용해서도 안 되었고, 세상의 관습적 행동양식을 따라서도 안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산상수훈에 의해 다스려질 수는 없다는 주장은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보복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사랑의 계명은 있는 그대로 법적으로 실행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그의 재산을 나누어야 되는 사람을 안내하는 데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만 결정해야 하며 일반적 사회질서를 위해 악을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실천 불가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비평에 강한 추진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사랑의 계명에 따라 율법을 설명하고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 적용하면서 표면적으로 정당한 기준을 속빈 관습이라고 폭로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권집단의 자기중심성에 대항하고, 차별대우를 받는 자(이방인·사마리아인·세리·창녀)와 함께한다. 그의 계명의 정당성과 긴급성이 묵시적 근거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예수는 백성들에게 근접한 하느님 나라에 상응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선포는 예수 자신의 선교와 밀접하다(루가 11:32~). 그가 그의 선교 사실을 그리스도론적 칭호들로써 표현했는지,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그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마태 9:36, 15:24). 전체적으로 그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에게 한정되었다. 몇몇의 중요한 단어와 장면만이 하느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백성 안에 비유대인을 포함시키려 한다(마태 8:11~). 그러나 예수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조직하지 않았고(마태 10:5~), 보편적인 '교회'도 조직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고백한(마태 16:17~) 것은 후기 교회의 산물이며, 그 상황과 교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갈릴리에서 운동을 일으켰고, 그의 추종자들 모두는 아니지만 그의 방랑과 사역을 함께할 제자집단을 만들었다. 후기 전승은 소수의 제자집단만을 사도들과 동일시했다(Ⅰ 고린 15:5~).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한다. 만약 예수가 이 제자들을 스스로 임명했다면, 그는 그것으로 전(全)이스라엘에 그의 종말론적 주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19:28)·〈루가의 복음서〉(22:30)에 의하면(그것은 후기까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 같음), 그는 그들에게 새 시대의 완전한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재판하는 직임을 수여했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예수의 결정은 그의 이야기에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사건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의 많은 일치점에도 불구하고 수난 전승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 따라서 수난 전승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관점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천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와 하느님의 아들로 선언하려는 것이며, 〈구약성서〉 예언자들과 〈시편〉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본문에서 끌어낼 수 있다.
예수는 아마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밝아오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그는 자신과 유대 통치자들과의 깊은 갈등을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성전정화 이야기는 예수가 이 갈등을 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유형화한 후기 전승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의 유일한 동기로 거기서 죽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시 부활하려는 의도를 든다(마르 8:31, 9:31, 10:32∼).
예수 수난의 외면적 과정을 구성하는 가장 좋은 실마리는 그의 십자가 처형이다. 그것은 그가 형을 선고받았고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기록은 그가 금요일에 죽었다는 데 일치한다(마태 27:62, 마르 15:42, 루가 23:54, 요한 19:31).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날은 니산 월(3/4월) 15일(유월절 첫째날)이었다. 그러나 요한에 따르면, 그것은 전날(유월절 양이 도살되고 축제가 시작되는 저녁)이었으며, 예수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고 그 이전의 것이었다(→ 최후의 만찬). 이러한 날짜매김에는 각각 신학적 의도가 들어 있다. 즉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로 표현되어야 한다든지(공관복음서), 예수 자신은 양들이 도살되는 시간에 죽은 참 유월절 양으로 보여야 한다는(요한) 것 등이다. 역사적으로 요한의 날짜매김이 신빙성이 있으며, 니산 월 14일(4. 7)이 예수가 죽은 날로 간주되어야 한다.
복음서들이 사건의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따르면, 예수는 실제로 최고 유대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마르 14:55~). 한편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고 그를 석방하려는 헛된 노력들을 했으나 결국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마르 15:22~). 이 내용에 대한 역사적인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첫째, 마르코와 마태오에 따르면 유대 최고법정은 예수가 성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사이에 체포된 후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으며 그에게 신성모독자로 사형선고를 내렸다(마르 14:64). 그후 그들은 또 한 차례 예수를 신문하여 빌라도에게 이른 아침 넘겨주기로 결정했다(마르 15:1). 루가는 오직 한 차례의 신문만 기록하면서 아침에 했다고 전한다(루가 22:66). 그러나 그는 예수의 형선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루가 22:71).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대제사장 가야파와 안나스가 예수의 신문에 관여한다(요한 18:13~). 둘째, 모든 복음서 내용에 대해서 어떤 증언이 제자들에게 정확한 보도를 주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셋째, 유대 산헤드린의 사법권이 논쟁이 된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유대 정부는 사형을 선언해야 하는 경우와 심각한 종교적 모독(신성모독)의 경우에 돌로 치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이런 종류의 재판은 축제기간중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표현에 대한 가장 강한 반론은 그것이 유대적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방식(즉 성서적 증거와 예수의 메시아성 및 하느님의 아들됨에 대한 그리스도교도의 신앙고백의 근거)에서 유형화된다는 것이다. "네가 축복받은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마르 14: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적 관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은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칭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유대주의를 지닌 후기 교회에 대한 논쟁을 반영한다. 또한 복음서들은 유대인들을 희생하여 빌라도를 면죄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비성서적 자료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자료는 예수가 반란자로 체포되었고, 비공식적으로 신문당했으며, 그 당시에 예루살렘 사회에서 유력했던 산헤드린의 친로마 제사장들과 사두가이인들에 의해 정치적 반란의 지도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졌다고 말한다. 성전정화와 성전파괴에 대한 예수의 예언적 묵시적 말씀(마르 14:58, 요한 2:19, 사도 6:14 참조)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당시 정치적 영향력이 없었던 바리사이인들이 그 음모에 연관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수난 설화에서 제사장·장로·율법학자들과 같이 분리된 집단으로 언급되지도 않는다.
수난 이야기에서 다른 장면들을 여기서 분리하여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수 수난의 신학적인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상당히 교화적이고 예배의식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예수 죽음에 대한 성서의 표현들은(특히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데서) 서로 다르다. 예수가 〈시편〉 22편의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외치고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오직 〈마태오의 복음서〉·〈마르코의 복음서〉뿐이다. 회개하는 도둑과 반항하는 도둑 사이의 구별은 오직 〈루가의 복음서〉에서만 나타난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루가의 복음서〉에서는 "아버지,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로,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다 이루었다"로 다르게 나타난다. 각각의 이 내용들은 로마 백부장의 증언, 즉 "진정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마르 15:39)처럼 예수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다.
■ 예수 이야기와 예수에 대한 신앙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그의 선교와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했는가? 다시 말해 그는 실패하여 과거에 묻혔는가?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가 되었는가? 예수의 유대인 적대자들에게와 같이 빌라도와 로마인들에게는 더이상 아무 문제도 없었고 결정은 내려졌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고, 그들의 희망은 참담하게 어긋났다(루가 24:13~). 〈신약성서〉 본문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대답은 예수가 죽은 이후 부활한 예수의 현현(Ⅰ 고린 15:3~)과 성령 안의 그에 대한 현존체험에서 주어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에 대한 모든 실천적·신학적 표명은 부활 체험으로부터 자랐다.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증언과 공동체가 있던 어디에서나 그들은 부활한 주님을 믿고 인식하는 데 연합했다(Ⅰ 고린 15:11).
이 믿음이 표현하는 형식과 이념은 다양하다. 가장 오래된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그가 신적 주권을 갖게 됨을 의미했고, 복음서에서 다양하게 연관시키듯이 빈 무덤 발견 전승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부활한 사람이 40일간 땅에서 걸어다녔고 그후 하늘에 올랐다는 이론은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된다(1:3). 그래서 부활의 메시지의 분명한 성격과 부활 내용의 애매한 성격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문제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복음서 전승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것 없이는 예수의 단 하나의 말씀과 행동, 그의 수난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약성서〉 전승은 과거의 모습으로서의 예수의 기억을 보존하거나 단지 예수가 누구였는가를 말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현재 누구인가를 선포하고자 한다.
많은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이 예수의 메시아 의식, 즉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메시아' 같은 특수한 칭호와 연결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믿음도 오직 같은 방식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묘사하며, 유사한 종류의 수많은 다른 칭호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 질문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은 예수가 메시아였고 '지금도 메시아'라는 사실에 관심이 있었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그의 '의식'과 내적 발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예수의 세례·시험·형상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체험된 기록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에게 하나 또는 몇 개의 그러한 칭호들을 적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칭호들이 그의 설교와 사역에 상당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예수가 그의 선교와 활동을 고유한 방식으로 하느님 나라의 여명에 연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자기 이해를 전통적 칭호를 통해 표현했다는 것은 다른(그리고 의심스러운) 문제이다.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서는 3가지 관찰이 중요하다. 첫째, 공관복음의 진정한 본문들에서, 예수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그의 가르침의 특수한 주제로 삼거나 그의 지위인식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후기 교회의 신앙이 그리스도론적 본문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예수를 메시아, 다윗의 자손,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 주님이라고 말하는 본문 어디에서나, 그가 이러한 칭호들을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사용했다는 어떤 지시도 없다.
예수가 어떤 전통적 칭호들을 자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당시 청중들은 오직 정치적 혹은 민족적 의미에서 메시아 또는 다윗의 자손을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예수의 의도와 충돌한다. 또한 배타적 칭호인 하느님의 아들은 비유대교적인 헬레니즘 세계에서 설교하는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후기 청중들에게는 이해되었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결론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에게만 사용하는 (신적) '주'라는 표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가 자신을 일컬은,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한 문장(마르 10:45)만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 그리스도 교회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는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문제로 좁혀진다. 이 개념은 주권의 칭호이다. 이것은 유대 묵시사상에서 나오는데, 평범한 인간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끝날에 구름을 타고 올(다니 7:13~) 세상 심판자의 신화적 모습을 의미한다. 예수의 초기 말씀(마태 24:27, 마르 13:26, 14:62)은 사람의 아들을 종말론적·미래적 의미에서 항상 3인칭으로 말하지만, 어떤 본문들은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마르 8:38, 루가 9:26, 12:8~). 2개의 다른 말씀군(群)은 그를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그의 수난·죽음·부활만을 말하며(마르 8:31, 9:31, 10:33~), 다른 하나는 땅에서의 권위있는 사역과 방랑에 대해 말한다(마태 8:20, 11:19, 마르 2:10~28). 둘 다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의 유대인 청중은 이 말씀들에서 묵시적인 사람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사역과 죽음을 회고해볼 때 완전히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두 말씀군은 오직 후기 교회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초기 말씀군만이 아마도 진정한 것으로 중요하다. 만약 예수가 앞으로 올 사람의 아들에 대해 말했다면, 그 말은 그에 대한 제자들의 충성이 마지막 심판 때 인정되고 확인될 것이라는 약속을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묵시적 언어와 개념으로 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상적 인격과 심판자의 모습과의 관계는 반성의 주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 전승은 수정의 과정을 통해 없어졌고, 후기 교회의 신앙이 전통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구원에 대한 부활 이후의 말씀에서, 종말론적 '여기 그리고 지금'은 뗄 수 없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속하고 그 안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었다. 불신앙과 의심에 직면하여,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설명을 단지 일어났던 대로 제공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결정적·구속적·궁극적인 행위와 말씀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해석했다. 신앙으로 예수에게 부여된 주권에 대한 모든 칭호들은 시대의 전환점, 구원의 개시, 하느님의 가까이 있음과 현존이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복음서 전승은 역사적 예수를 신화적 그리스도로 대치하지 않았고, 예수의 말씀·사역·방식(주권과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칭호가 없음)에서 비밀히 암시된 그리스도론을 명시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전승에 적합한 질문은 발전과정 속에서 나자렛 예수에게 무엇이 일어났었는가가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왜 그를 확고히 붙잡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질문과 복음서들의 대답을 수용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이것은 역사적 탐구의 한계를 넘어선다.
복음서들이 씌어지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말을 했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성찰이 후기에 복음서의 단순한 말씀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초기 그리스도교도 공동체는 처음부터 증언과 예배에 참가했으며, 그 증언·예배의 형식이 복음서에 있는 설화 형식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에 대한 복음서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숙고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별이 없다는 것과 전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후자에 의해서라는 주장이 정당하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의 신앙이 구현되어 있는 〈신약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이 신앙은 짧은 신앙고백이나 신조들 속에 구현되었지만, 본래의 완전한 형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약성서〉의 여러 책들 안에 있는 신앙고백들과 신조들의 단편이고,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문서들에서 취한 것들이며,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전례에 내포되어 있는 후기 형태의 신앙고백과 신조들의 단편이다. 사도신경은 그러한 후기 형태이며, 그 기원은 아마도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사도신경은 초기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후기의 표현들이 구성되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다양한 표현과 형식 가운데서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에 관해 믿었던 요점을 사도신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조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배행위의 일부였으며 무엇을 믿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서두에 "나는(또는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할 때, 그 선언이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 단순히 관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진술은 그리스도는 마땅히 예배받을 대상이며, 따라서 그는 하느님과 동급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의 바울로의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력을 3단계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만물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한 그의 선재(先在), 성육신과 겸허(히브 5:7), 부활로 시작하여 영원히 계속되는 그의 영화가 그것이다(→ 바울로의 서신).
아마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진술은 〈요한의 복음서〉 서문일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의 성육신으로 동일시되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했고, 말씀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존재했다. 이 교리의 근거자료들은 필로나 팔레스타인 랍비들의 유대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에서 왔다. 그 자료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요한의 로고스 교리는 로고스를 특수한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신약성서〉의 다른 저작들도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첫 장도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선재했던 자이며, 따라서 시간과 탁월성에 있어서 창조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구별되는 독특한 자로 말한다.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의 '앞서'라는 말은 분명히 그의 시간적 선재성과 우월한 존엄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선재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단어와 개념을 발견하기 이전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예배드리고 있었다.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6~11절은 아마도 그런 예배에서 사용된 찬송으로부터 인용된 듯하다. 신학적인 성찰은 만일 이 예배가 합당하다면 그는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 예수 그리스도
신조의 본문이 만들어졌을 때 이것은 구세주에 대한 통상적인 지칭이었다. 본래 '예수'는 그의 이름으로 '야훼가 구원한다' 또는 '야훼가 구원할 것이다'(마태 1:21)를 의미한다. 반면 '그리스도'는 '메시아' 칭호에 대한 그리스어 번역이었다. 〈신약성서〉의 어떤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칭호로 사용했지만(루가 24:26, Ⅱ 요한 7), 그 칭호가 매우 일찍부터 고유명사가 되었음을 바울로의 용례로부터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이방인들은 그것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였고,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사도 11:26).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라는 단어는 주님의 지상 경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례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도 예수라는 이름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약성서〉 내의 본문의 변형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가 거의 병용되었다. 현대에 와서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관습적으로 예민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직 일부 집단들에서만 그러했다. 많은 교회의 신학자들과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문구들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칭호에 대한 〈구약성서〉의 의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칭호가 어떻게 다른 형태가 되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이며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의 진술이 그 예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그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몇몇 경우 복음서의 용법이 이스라엘과 참 신자의 특권으로서 신의 아들됨의 의미를 반영한다. 그러나 바울로와 같은 복음 전도자들은 이 명칭으로 어떤 특별한 영예를 의미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예를 예수의 세례 이야기(마태 3:17) 및 변형(마태 17:5)과 연결시켰으며, 바울로는 부활 믿음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서〉의 '하느님의 아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선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후기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에 선재의 의미를 가미하게 된 것은 삼위일체 교리였는데, 여기서 '아들'은 영원한 2번째 위격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다(마태 28:19). 복음서들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적용시킨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욕적이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다신교의 시도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에 맞서 사도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신앙고백했다. '하느님의 아들'은 영원자는 아들을 가질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관념과 정반대되는 것이며, '독생자'는 신의 출산에 대한 그리스 신화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 주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 4절에서 처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표현은 사도교회가 예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루가는 그 칭호를 크리스마스 천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루가 2:11). '주'(키리오스)라는 칭호가 1세기 동안 사용된 방식으로부터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사용했던 그 칭호의 몇 가지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우주에 많은 신적인 그리고 주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주(Ⅰ 고린 8:5~6)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로마의 카이사르가 그를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유형화되었듯이 모든 사람의 주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라는 것(묵시 17:14)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불렀던 〈구약성서〉의 계약의 하느님, 야훼가 새 계약을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로마 10:1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과 같이 키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가 대항했던 2가지 부류의 청중들에게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때때로 이 명칭은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와 같이 부활하고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나타냈으나, 〈구약성서〉를 반영하는 문장들에서 때때로 우선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은 선재였다(마태 22:44). 점차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주'라는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 성육신과 겸허
-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신조의 더 이른 형태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라고 읽혀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 혹은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듯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요한 1:14). 선재와 성육신은 서로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그가 인간이 되심을 말할 때 그의 선재를 전제하며 그를 선재하는 자로 말할 때에는 육신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보증하는 그녀의 기능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조는 또한 인성의 초자연적 기원을 의도했다. 바울로와 요한은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사야〉 7장 14절에 근거한 예수의 동정녀 잉태에 대한 가르침은 1세기에는 널리 퍼져 있어서 〈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 신조는 〈루가의 복음서〉 1장 35절의 의역이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예수의 세례 및 부활과도 관련되었다.
- 본티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이 신조의 특징은 복음서의 중요한 부분인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의 이야기가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조와 〈신약성서〉의 편지들, 특히 바울로의 편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유사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분량이 수난 이야기에 할애되었다는 사실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조차 그가 말하고 행한 다른 어떤 것들보다 며칠간의 예수의 삶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의 원인은 〈신약성서〉와 신조의 바탕에 깔려 있는 신앙인데, 그것은 곧 예수의 수난·죽음·부활 사건이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신앙이다. 복음서에서 이 사건들은 절정을 이룬다. 편지들은 그 사건들을 초기 교회의 구체적 상황들에 적용시켰다. 바울로가 십자가(필립 2:6~11)와 '그(예수)가 배반당하신 밤'(Ⅰ 고린 11:23)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서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성주간(聖週間)이라고 불려온 것과 이와 연관된 사건들을 교회가 기념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예술의 일부는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또다른 일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헌신적인 삶에서 수난사건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종교예술). 십자가는 어떻게 인류의 구원에 영향을 끼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성서〉와 초기 교회의 대답은 다양한 은유들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느님에게 희생으로 드렸고, 그의 생명은 많은 사람을 위한 속죄양이었으며, 그의 죽음은 인류를 살렸다(→ 십자가형). 그의 고난은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을 위한 모범이었으며, 그는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는 제2의 아담이었다. 그의 죽음은 하느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사의 주요한 대속(代贖) 이론을 예시한다. 〈신약성서〉는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Ⅱ 고린 5:19)라는 내용을 상징하기 위해 이 은유들을 사용했다.
- 그는 지옥에 내려가시며
이 구절은 아마도 마지막으로 신조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었다. 〈신약성서〉 안에서 이 신조의 근거는 갇혀 있는 영들에게 그리스도가 설교했다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3장 18~20절의 내용이다. 본래 지옥으로 내려감은 아마 그리스도의 죽음, 즉 그가 지하의 죽은자의 거처에 들어갔을 때와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신조에 들어오기 이전에, 하강은 서방 가톨릭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림보(limbo patrum)로 불리는 지하세계로부터 〈구약성서〉의 신실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몇몇 교부들은 지옥으로 내려감을 지옥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선언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요성이 계속 증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내려감의 교리는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설교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 되지는 못했다.
■ 영화
-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할 내용으로 삼지 않았고, 그것을 단언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부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를 말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3종류의 확증을 위한 근거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로마 1:4)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방식이었다. 부활은 또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소망의 근거였다(Ⅰ 데살 4: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생명"(로마 6:4)을 나타내며, "천상의 것들을 추구"(골로 3:1)하라는 훈계의 근거였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의심 없이 표현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에 나오는 바울로의 논쟁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중에 부활을 합리화하려는 노력들뿐만 아니라 의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과 복음서와 바울로 편지 간의 차이점들은 부활의 내용에 대해 다양한 전승이 시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점들은 다양한 전승들 속에서 얼마나 부활 신앙이 보편적이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승천 이야기는 특별히 〈루가의 복음서〉·〈사도행전〉에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승천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0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는 바울로가 부활을 승천과 동일시했다고 주장한다. 성부의 우편 착석은 분명히 〈시편〉 110편 1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인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위치로 그리스도가 고양(또는 선재교리에 대한 확증)된 것을 의미한다. 승천과 착석은 부활과 재림의 중간 시기 동안 성부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현존방식이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8~16절에 의하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또다른 그리스도 교리, 즉 그리스도가 아직도 그의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와 함께 현존하고 있다는 믿음과 일치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사실 이것은 승천 교리를 부활 교리와 조화시켜 말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재림교리로서 그리스도론 부분을 결론짓는다. 초림은 육체로 온 것이고, 재림은 영광 가운데 오는 것이다. 기존 교회에서 이 교리의 역할에 관한 논쟁이 많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예수가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잘못 기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로가 종말을 세상 끝날로 지연·조정하려고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으며, 〈요한의 복음서〉 는 더 진보된 단계로 본다. 예수가 보았듯이 종말의 임박성이 인간 역사의 지속적인 국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그 임박성의 진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지속적 현존에 대한 믿음은 사도교회의 전망에 속했고, 이것이 사도신경이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5장 51~52절과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 4장 15~17절의 요약이다.
그리스도의 영화에 대한 신앙고백을 완성하기 위해 니케아 신조는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에 대한 그의 완전한 통치의 실현이라는 선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았고 믿었던 것에 기초한 사도교회의 기대였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정통 그리스도교의 주된 노선은 〈신약성서〉와 고대 신조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것이 교리로서 정식화되었을 때 그리스도교 신조가 되었다(→ 도그마, 독트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처음 4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 즉 그와 성부와의 관계, 신성과 인성의 관계의 정식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로마 가톨릭교). 그러한 정식화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믿고 고백하던 것을 위협하는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 생겼기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와 이에 대항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부분이다.
■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초기 이단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인격과 사명을 오해하는 자들과 싸워야 했다. 〈신약성서〉와 교회의 초기 신앙고백은 그러한 오해를 지적하고 그것에 응답했다. 비유대 세계로부터 지지자들을 모은 그리스도 운동인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를 설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오해는 그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관심에서 일부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보통 사람인 나자렛 예수가 세례의 순간에, 또는 부활 이후에 하느님의 양자로 채택되었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양자론이다(→ 역동적 단일신론). 영지주의자들은 본래 악한 것으로 여겨졌던 물질세계와의 관계에서 그를 보호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를 가현적이고 실제가 아닌 몸만을 가졌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가현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은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다루었다. 어떤 초기 견해들은 성부와의 동일성을 너무 의도적으로 주장하여 위격의 구별이 상실되었고, 그는 단순히 하느님의 한 현시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자기 현시의 '양태'로 보기 때문에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양태론자'라고 불리거나 초기 주창자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주의자'라고 불렸다(→ 양태론적 단일신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다른 해석들은 극단적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게 성부와 그의 위격을 구분하여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켰다. 로고스 교리의 초기 대표자들은 종속론자들이어서 로고스 개념 자체가 어떤 분파에서는 의심스럽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성부와의 하나됨과 성부로부터의 구별에 대한 교리를 정교하게 표현할 개념의 틀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상에 나타나서 사람들을 하느님과 재연합시켰던 신은 하늘과 땅을 주관하는 최고 신과 동일한가? 혹은 그는 반신인가?"라는 질문(아돌프 폰 하르나크)에 대답해야만 했다.
- 니케아 공의회
위의 물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들을 통해 교회에 제기되었다. 그는 로고스가 피조물 중에 처음이고, 하느님에 의해 대리자 또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어, 하느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따라서 하느님보다 열등하고 사람보다는 우월하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지만 하느님은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위협하는 아리우스주의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회심(回心)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에서 제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했다. 참석한 주교들의 개인적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으나, 주된 의견은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된 젊은 사제 아타나시우스가 주창한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만들어지지 않고 낳아졌으며' 따라서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였다고 결정했다(→ 니케아 신조). 또한 그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 to patri)이라고 결정되었다.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종속론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니케아 공의회와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양태론과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한 것은 성부가 아니고 성령도 아니며 오직 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성삼위일체의 위격들에 대한 더 분명한 용어가 필요했으며, 그런 필요에 따라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대해 더 명료한 진술이 가능하게 되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논쟁들을 종결지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쟁거리를 각 분파에게 주었다. 교리적 논쟁은 니케아에서 시작된 황제의 정치적 개입과 서로 숙적관계에 있는 주교 및 신학자들에 의해 복잡해졌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논쟁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진술이 나왔는데, 이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를 적절히 구별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난에 대해 니케아 신조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4세기 중반 니케아 정통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이 발전시킨 용어들을 명백히 공식화했다. 즉 하나의 본질, 3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eis)인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구별되지만 그들의 영원성과 능력에 있어서는 동등하다. 양태론이라는 의심을 야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교리로 하느님의 통일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교회가 직면했던 두 논제 중 처음 것, 즉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제공했으며, 2번째 논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명료화하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여기서는 정통주의 집단들로부터 몇 개의 극단적인 입장들을 배제하고 4세기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명확하게 진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계속된 토론과정을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토론거리를 제공했는데, 왜냐하면 5세기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에서 성부·성자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인성과의 관계를 유비(類比)로써 서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는 '본성'(physis)이었다. 하나의 본질에는 3가지 위격이 있었다(4세기 논쟁의 결과였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하나는 신적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두 본성이 있었다. 이 두 본성간의 관계에 대해 5세기 신학자들은 논쟁했다.
- 당파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반세기 동안 몇 개의 주요강조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서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특징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대적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흡수시킨다고 비난했다. 한편 안티오크에서 사용한 사상과 언어 양식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반대자들은 안티오크 학파가 개별적인 성격을 주장하는 두 인격들로 나누었다고 주장했다. 서방신학은 이러한 두 대안들과 같이 추상적이지 않았다. 이 신학의 주된 강조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실제적 관심에 있었으며, 이러한 관심을 희생하지 않고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4세기가 지나서도 황제는 항상 화해하는 행위에 참여했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나라들은 콘스탄티노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결정은 정치적 상황에 의한 결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세기 공의회의 결정은 그들의 정치적인 상황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교회의 규범으로 여겨졌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와의 갈등은 네스토리우스가 '하느님의 어머니' 혹은 더욱 문자적으로 '하느님을 낳은 자'(Theotokos)라는 명칭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사용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녀는 오직 '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주장했을 때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이러한 주장에서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구분한 안티오크 학파의 주장이 모든 교회로 흘러들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위격을 나누고 있다고 비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위격을 완전히 연합시켰는데, 그들의 입장은 키릴루스의 유명한 구절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으로 표현된다. 이 구절로 보아 키릴루스가 의미하는 바는 성육신 이전에는 오직 한 본성인 신성이 있었고, 성육신 이후에는 한 인격 안에 분리될 수 없이 연합된 두 본성이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본성은 결코 독립된 실존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성육신 이후에도 '성육신한 로고스의 한 본성'이 있었다고 키릴루스가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었지만 그는 정교한 표현으로 이 내용을 피했다. 431년의 에페소스 공의회는 각 계파에서 몇 사람씩 모여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러나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는 실제적인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칼케돈 공의회의 해결
해결의 기초는 로마의 교황 레오 1세의 교서에서 조문화되었듯이,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에 대한 서방의 이해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우리는 모두 일치하여 가르친다……하나이며, 동일한 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 완전하고 인성도 완전하며……혼합되거나 변질되거나 나뉘거나 혹은 분리되지 않는 두 본성을 지니며, 본성들 사이의 구분은 결코 연합을 통해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각 본성의 특성이 보존되고 한 인격과 존재로 협력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문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가 강조하는 것들이 표현되었는데, 인격의 통일성과 본성들의 구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그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교리에 대한 기본적 진술이 되었다. 서방교회측은 그리스도의 사역교리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동방교회측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는 칼케돈 공의회 이전의 논쟁들을 계속했다(→ 동방정교회, 비잔틴 제국).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칼케돈을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충돌했다.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한 논쟁은 칼케돈의 해석을 명료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결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극단들은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이 정죄되었듯이 정죄되었다.
이러한 모든 신학적 토론에서 나오는 것은 위격의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성과 인성과의 일치성을 확언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해석이었다. 흥미롭게도 교회의 전례는 교회의 신학자들이 진술의 명료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을 때 이 해석을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교회의 전례 초기부터 현존했었던 것에 대해 재진술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조문화한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처음부터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회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역교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남아 있었다. 토론이 주로 동방에서 진행되어왔던 반면, 질문에 대한 가장 상세한 대답을 제공한 곳은 서방교회였다.
■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
- 중세
이 문제에 대한 서방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변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의미를 깊이 인식했으며, 신적 은총의 의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느님이 어떻게 비천한 자를 높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본성과 하느님의 영적 본성의 연결이었고, 인류가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이었다. 그것은 옛 인성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새로운 인성의 기반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방식들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구속을 위한 성육신의 중요성을 묘사하려고 했다.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런 강조를, 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창조적이며 독창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결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화해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적절한 언어를 찾았던 안셀무스와 종교개혁자들의 서방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형성되는 동안 화해를 서술하는 많은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성서적 말씀 속에 어떤 선례를 가지고 있었다. 화해에 대한 가장 뛰어난 묘사들 중 하나는 속죄에 대한 성서적 은유와 연결된 것이었다. 사탄은 인류를 그 죄와 타락성에서 포획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마귀에게 지불된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사탄과의 죽음의 싸움으로 나아갔다.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그리스도가 적에게 항복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부활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에게 영원성을 가져다주었다. 〈구약성서〉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하느님의 분노를 멈추게 하는 수단으로써 하느님에게 바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가 나온다. 성 안셀무스의 사상에서 가장 잘 발전했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위해 주어진 대리만족이라는 사상이 나온다. 교부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고난을 참을 수 있는지를 배우라고 훈계한다. 그들은 또한 얼마나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예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와 같이 교회의 전통 안에도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과 하느님을 재연합시키는 기적을 표현하려는 많은 언어방식들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표현방식에 공통적인 것은, 재연합은 하느님의 행위였다는 것과 그 행위에 인간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론들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 때문에 너무 '객관적'이 되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과 마귀 사이의 거래에서 저당물로 보였다. 다른 이론들은 인간의 관련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너무 '주관적'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구속의 전 영역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그의 책 〈왜 하느님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에서 많은 이론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대속교리로 만들었는데, 이 교리에 따르면 죄는 하느님의 영예에 대한 침해였다(→ 속죄). 인간이 그 침해에 대한 대가로 하느님을 만족하게 하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인간이 오래 살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참 인간이며 완전한 가치를 가졌던 유일한 생명은 인류 전체를 위해 하느님의 침해된 영예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하느님이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참 인간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사람들에게 유효할 수 있었고, 참 신이었으므로 그의 생애와 죽음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와 죽음의 열매들을 수용함으로써 인류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약간의 변형을 거친 안셀무스의 대속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정통 개신교 이념들의 기초를 형성하면서, 라틴 교회의 신학에 전승되었다. 십자가는 대속의 만족교리에 의해 강화되고 서방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사역을 설명하는 전통적 방식들을 수정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에 스콜라 신학이 공헌한 것은 신학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는 때때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에게서 가장 완전한 표현과 교리적 견해의 충분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는 인간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며, 그를 통해 삼위일체와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데 필요했던 사다리를 신비주의자에게 제공해주었다. 이것은 몇몇 그리스 교부들의 신비적 신학에서 예기된 것이었다. 동시에 그 교리는 신비주의가 과도한 범신론으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더불어 신앙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며 숭배의 지속적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중세의 공헌은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와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인간적 생애를 더욱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형제단은 사변적이고 명상적인 신비주의로부터 구별되기 위해 실천적·윤리적인 신비적 헌신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주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산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참 인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이 인성을 단순한 교리적 개념으로 환원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 새로운 인식은 비잔틴 성상에서 유형화된 그리스도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조토 같은 화가들이 예수를 묘사하기 시작했던 방식에 반영되었다고 헨리 토드와 그밖의 몇몇 사람들은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보수적이었다. 정통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그리스도론을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를 은총에 의한 의인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루터는 죄를 의지의 노예상태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리로써의 대속이라는 교부적 은유를 재생시켰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 대한 찬송들은 썼지만 사순절에 대한 찬송들은 쓰지 않았다. '오직 은총으로'와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종교개혁 이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속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만들었지만, 성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루터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내세운 성찬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 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그 교리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 논쟁이 진전됨에 따라 루터는 신성의 편재성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교통하고, 그러므로 신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에서나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해석했다.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론을 거부했지만, 고대 그리스도론이 성서적 증언에 일치한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낳아진 참 하느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참 인간"이라는 루터의 구절이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신학 안에 들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중요성을 증명해준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서술의 몇몇 측면을 종합했는데, 그것은 칼뱅에 의해 체계화되고,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예언자·제사장·왕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로 발전했다. 이것들은 〈구약성서〉의 완성을 상징했고, 교회의 계속되는 삶의 한 측면을 표현했다.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말씀사역에서 그의 예언적 직능을 계속 수행하면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을 완성했다.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해 중재자로서 기능을 계속함과 동시에 제사장이면서 제물이 됨으로써 〈구약성서〉의 희생제를 종식시켰다.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가 임명한 자들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통치하는 분이었다. 개신교도들은 그들의 신학적·윤리적 또는 전례적 입장에 따라 서로를 구분했다. 그러나 삼중직을 통해 개신교 신학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론들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적·교부적 묘사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교리를 신학적으로 조문화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그리스도론 논쟁
20세기 중반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는 종교개혁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고대의 교리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과 현대신학 사이에는 모든 개신교 교파와 신학자들의 시각을 변경시킨 그리스도론 논쟁이 끼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로마 가톨릭의 신학 사이의 간격보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현대 개신교 신학 사이의 간격이 더 크다.
- 논쟁의 기원들
종교개혁 시대에 정통교리에 대한 가장 초기의 비판은 '종교개혁의 좌파'인 미겔 세르베투스(1511~53)와 소키누스주의자들로부터 나왔다. 이 비판은 교리 안의 비성서적 개념과 단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은 도덕적 모범으로서 예수의 참 인성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부르려 했으며,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예수에게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등의 모순을 나타낸다. 가톨릭에 대한 종교개혁의 저항을 정통 교리에 대한 저항의 기초로 사용하려는 경향은 계몽주의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이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때문에 16세기에는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후대의 비평은 종교개혁자들이 의도했던 것의 일관된 적용이라는 근거에서, 두 본성교리에 대항하여 '개신교 원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와 교리문답 교육은 정통주의 교리에 대한 계속적 지원을 보장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리만족에 의한 대속교리가 루터 교회와 개혁교회의 찬송과 교리문답에서처럼 널리 충분하게 표현된 곳은 없다. 개신교 경건주의 시대에 이러한 정통주의 가르침은 예수의 인성에 대한 점증되는 강조와 결합되었고, 그 시대의 찬송가에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정통주의 이념을 비평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알베르 슈바이처는 H. S. 라이마루스(1694~1768)의 연구로부터 비평적 태도가 발전했다고 보지만, 라이마루스는 예수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다루었던 계몽주의 방식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성서의 책들은 다른 책들처럼 연구되어야 했고, 예수의 생애는 복음서들의 증언을 비평적으로 조사하고 숙고함으로써 그려져야 했다. 계몽주의는 복음서 기록들의 상대적 신뢰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의 생애에 대한 현대적 관심을 처음으로 일깨웠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계몽주의 비평의 대상은 두 본성교리가 아니고 대리적 대속교리라고 주장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적 이념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지 않고, 기적,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포기했다. 그리스도교리사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 대해 역사적 연구를 시도했으며, 이것을 그리스도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삼았다는 사실에 있다.
- 19세기
비록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주의 가르침을 단절하는 시작이었지만, 19세기에 와서는 많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신학자 및 학자, 한동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현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D.F. 슈트라우스의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The〉(1835)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 Life of Jesus〉(1863)는 정통 그리스도론에 대한 그들의 거부에 영향을 끼쳤다. 슈트라우스의 연구는 우리가 복음서들 안에 가지고 있는 상(像)의 기초인(그가 '신화들'이라 부르는)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반면 르낭은 상황과 연관된 예수의 내부적·심리적 삶을 연구하여 예수의 경력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두 책은 널리 읽혀졌고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를 위한 자료들이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연구되어야만 한다는 계몽주의의 주장을 따랐고, 그들이 제시한 것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기 형태였다. 슈트라우스, 르낭과 더불어 19세기에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책들이 과잉 출판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의 문제에 대한 각기 새로운 가설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의 재건을 함축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이러한 연구의 근본적 전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분이었다. 또다른 구분방식은 '예수의 종교'를 '예수에 대한 종교'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을 최상으로 인식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교회의 교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형이상학적 진술 때문에 이 인식을 오해했고, 그래서 그 말씀의 본래적 단순성을 왜곡시켰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서들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역사성을 의문시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역사문제에 대한 19세기 학문의 일반적 관심으로부터 성장했지만, 또한 그것은 신학자들의 종교적·윤리적 전제들을 반영했다. 그들 중 다수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불변적인 것인가를 평가하는 데서는 칸트의 도덕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예수의 본래 말씀을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해석과 연관시키는 방법에서는 헤겔의 역사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세기 과학과 연관된 진화론과 자연적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들은 성서의 기적들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1931) 등의 교리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교리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본질, 즉 하느님의 아버지됨과 사람의 형제됨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그 개념과 용어에서 고대 그리스도론이 비그리스도교 자료에 의존되어 있다고 증명했다.
- 20세기
20세기초 〈신약성서〉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관여했는데, 결국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즉 예수는 그의 죽음 이후 곧 도래할 시대의 종말을 기대했었고, 복음서에 있는 그의 가르침들은 종말 이전의 짧은 기간 동안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중간 윤리'였다는 것이다. 현대생활에 이 가르침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위험한 현대화로 비판받았다. 예수의 말씀 안에 있는 '철저한 종말론'의 주제는 요하네스 폰 바이스(1863~1914)에 의해 주장되었고, 알베르 슈바이처의 저작들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복음서들의 구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 나왔다. 이 이론은 보통 양식비평(Formgeschichte)으로 불린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전전승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복음서 설화들의 양식(비유·말씀·기적이야기·수난내용)을 강조한다. 초기 학자들은 복음서에 전해진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성에 관심을 집중했지만, 이 새로운 이론으로 복음서 기록들의 후기적 요소들로부터 진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비록 이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구분을 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했지만, 양식비평의 연구는 철저한 종말론이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보편적 윤리를 성문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전기적(傳記的) 의미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양식비평의 지지자들은 예수 생애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틴 디벨리우스와 루돌프 불트만 같은 사람들은 그러한 회의주의를 수긍하지 않았다.
〈신약성서〉 연구에서 이러한 경향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초기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어떤 개신교 교회들은 고대 교회의 신조들을 계속 답습했으나, 〈신약성서〉 문헌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이 신조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회들의 투쟁은 몇몇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고대 교리의 능력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했다. 그들 중 몇몇은 교리를 덜 엄격하게 다루려고 했지만 그들조차도 위격·본질·본성의 정태적 범주들로 그 교리들을 조문화하는 것은, 존재상태보다는 행위와 사건을 강조하는 성서적 사고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개혁교회 전통의 카를 바르트, 성공회 전통의 라이오넬 손턴, 루터교 전통의 카를 하임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하려고 노력했던 신학자들이다. 교회의 교리에 대한 지지를 전혀 포기하지 않으면서, 카를 아담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 교리를 현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형식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보다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많은 개신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함으로써 예언자적 직무 이상의 것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사장적 직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속의 은유를 그의 대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재해석했던 구스타프 아울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의 개신교 신학은 새롭게 얻은 통찰력을 그리스도의 위격교리에 맞추기 위해 대속교리를 찾고 있었다.
따라서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연합·분열되는 요소가 되어왔다. 모든 그리스도교도는 그들의 충성을 다양한 교리적·전례적 방식으로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에 대한 충성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공식적 진술은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를 분열시켰던 원인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연관된 역사적·비평적 탐구의 결과였다. 그들의 공식적 진술과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그런 탐구를 어느 한도까지 허락할 지는 각각 다르지만, 20세기 후반기에는 그런 탐구를 용납할 것을 시사했다. 다른 한편 1907~10년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한 현대주의의 배척은 비판적 탐구방법을 신학적으로 사용할 때 이단이 되는 확실한 경계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로마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상당히 비평적인 문헌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비평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G. Bornkamm J.J. Pelikan 글 | 尹哲昊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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