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평산신씨 영해파(영해신씨)로 불리어진 현재의 평산신씨 판사공파는 족보에(1764년 영조갑신보)에 신현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도 족보가 여럿 있었는데 (갑자보,병신보) 상고할길이 없고 우리는 신숭겸의 후손이라고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960년도에 영해신씨는 평산신씨로 복귀하였으나 평산신씨 대동보규에 의하여 고려말 조선초 선조님을 기준으로 각 파를 나누어 장절공의 13세 신현을 파조로 하지 않고 15세 신득청을 파조로 평산신씨 판사공파로 분파되었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려말 선초의 수난사를 연구해본다면 화해사전의 진위를 알것이다.
눈물로 눈물로 지내온 600년 역사...... 여러 문중의 기득권때문에 말살되어서는 안된다.
* 평산신씨 최초의 족보(병자보)는 1636년에 쓰여졌고 1세에서 10세까지 외대로 계대를 있고 있어 형제들을 다 수록하지 못한채 간행되었기 때문에 전체를 다 수록하지 못한 족보인것이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영해신씨)는 려말 선초에 난을 피하여 경북 영덕으로 내려와 평산신씨 족보에 기록되지 못한채 그들만의 계대를 이루어 왔으나 판사공파 최초의 족보(1764)에 우리는 신숭겸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다 . 그리고 후에 화동인물총기와 화해사전이라는 책의 발견으로 완전히 평산신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근세에 와서 평산신씨 대종중에서 합보를 하자고 하여 합보하였으나 일부파의(은산백파)계대가 연결되지 않는 문제와 판사공파의 중시조 휘 신현께서 12세 중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장가를 간 이유로 정실부인이 아닌 둘째부인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합보를 하면서 둘째 부인인 진씨 부인을 족보에 삭제하고 중명의 세째 아들로 등재시켜 형을 동생으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영해신씨)는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의 후예로서 세족의 집안을 이루어 갔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을 외치며 판사공파 파조께서는 동해바다로 투신자결하였고
사인공 자성의 직언으로 신임지화의 난을 당하여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원주로 정선으로 멀리 충남 보령까지 도망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크게 벼슬한 사람도 없는 서인으로 전략을 하였지만
다시 고향인 영덕, 청송으로 돌아와 나라가 어려울때는 의병으로 독립운동가로 또는 농부로 생을 이어온것이다.
대종중에 어떤 파에서 실권을 잡느냐에 따라 제자가 쓴 화해사전이라는 판사공파의 중시조의 전기를내용에 없는 것까지 끼어넣어 터무니없이 번역하여 화해사전을 위서로 만드는 화해사전변무총록과 권력의 힘에 의해 받아낸 여러 사학자들의 서명된 종이 몇장 위서감정서로 화해사전이 위서이고
논할 가치가 없는 가짜책이라고 역사가들의 연구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화해사전은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필사본이 전해지는 관계로 원본 필사시 필사자의 견해에 의해
잘못 기록되는 부분도 있다. 화해사전에 나오는 역대전리가를 후세에 나타나는 국어라 하여 위서라고 하는 학자들도 상당수 있다.
19개파중 3만도 안되는 소수파의 가슴아픈 사연
승자의 역사도 역사이고 패자의 역사도 승자의 역사 못지않게 우리의 귀중한 역사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일방의 애기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된다.
평산신씨 판사공파의 역사,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신현의 선견지명, 화동인물총기, 화해사전, 대제학 신백청의 탑하혼육, 판사공파 원주이거 사실, 사인공 자성의 부관참시, 원주파, 정선파, 보령파 분파 사유등 눈물로 지내온 판사공파의 내력을 알아본다면 정말로 화해사전이 위서인가를 알 것이다
첫댓글 오무등님의 열정과 진솔함은 우리 문중에 있어 참으로 보배와 같습니다.
화해사전, 화동인물총기 등을 읽으면 알러지를 앓을 화해사전변무록 신앙파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할 겁니다. 상산김씨족보나 밀약박씨문집 정재일고 등 다른 문중의 자료를 외면하면서까지 "인조 고려사"에 매달릴지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