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DRK PURUS`AH DARSHANAM` SHAKTISHCA.
푸류샤는 바라봄 자체(witness)이고 프라크르티는 바라보는 행위(the act of witnessing)이다.
drk = 바라봄
darshanam = 바라보는, 목격하는 행위
ca = 그리고
Shaktishca = 그리고 샥띠
지고의 목격자,Supreme Witnessing Entity인 푸류샤는 단지 지켜보고 있다. 창조물에 있는 표현이나 행위에 조금이라도 섞이거나 영향받지 않는다. “보는 자”인 뿌류샤는 관찰하는 주체이고, 프라크르티와 그 창조물들은 보고 있는 행위이며, 관찰되는 대상물이다. 모든 행동과 드러난 너머에는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는, 모든 것에 스며있는 존재가 틀림없이 있늘 것이다. 이 존재는 “무한한 감응(omni-telepathy)”인 푸류샤(1-1참조)이며, 계속 변하며 진동하는 우주의 궁극적 피난처이다. 푸류샤 자신은 행위하지 않으나 프라크르티를 다스리므로, 모든 행위를 지켜보며 이끈다. 그분이 물질 창조에서 탁월한,efficient 원인이다.(1-2참조) 그분이 설계하고, 그 설계가 이행되는지, 또한 창조가 이루어지는지를 바라본다.
이 바라봄은 또한 개별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개인이 외부 세상을 지각할 때, 외부 세상으로부터의 진동이 객관적 마음 부분, 즉 치타를 진동하고 마음은 객관적 형태를 취한다. 그래서 외부 세상이 지각되는 것은 치타 때문이다. 즉 그것은 치타가 외부 세상을 바라보는“입증자(substantiation)”이고, 또 목격자(witness)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타 혼자서는 지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치타를 바라보고 대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다른 부분인, 아함 즉 에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함은 치타의 입증자이고, 또 바라봄이다. 그러나 아함도 계속 변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이지가 않다. 자기-존재감, “나”라는 느낌이 없으면, 거기에는 보는 것을 행하는 “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함의 존재에는 또한 “나”라는 느낌인 마하트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보는 행위에 매여 있지 않은 마음의 어떤 부분이 그 행위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마하트도 또한 절대적이지가 않다. 결국 자기 존재감인 마하트를 실체화하는 부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존재인가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존재한다”를 아는, 이 부분이 아트만이다. 이 아트만이 궁극적 실체이며, 항상 변하는 모든 존재가 쉴 수 있는, 불변한 절대적 근거이자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관찰자이다. 그러므로 아트만은 파라마트만처럼, 푸류샤와 똑같다. 그것은 개인 안에 있는 개체의식,unit conciousness이다.
그러므로 치타는 아함에 의존하고, 아함은 마하트에 의지하며, 마하트는 아트만에 의지한다. 아트만은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개체 존재 내에 있는 푸류샤인 아트만은 여러 마음 층(프라크르티의 창조)의 궁극적 목격자이다. 모든 것이 뿌류샤의 목격,witness-ship의 대상이자 그분 시각,sight의 대상이 된다. 만약 원래의 주체로 돌아가거나, 이 창조물에 가장 최고의 진동 영역으로 간다면, 결국 모든 것이 반영되는 거울,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아트만에 도달하게 된다. 거울 없이는 어떠한 반사도 없다.
언젠가 위대한 성인인 라마크리슈나가 제자들 모두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아무도 없는 숲에 가서 지팡이를 부러뜨려서 집으로 되돌아오라고 말하였다. 그날 밤 오직 한 사람, 비베카난다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팡이를 깨트리라는 스승의 일을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비베카난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며칠 후에 옷도 지저분하고 피로한 채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지팡이도 부러뜨리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는 라마크리슈나에게 말하였다. “저는 걷고 또 걸었지요. 아무리 찾았으나 완전히 나 혼자인 장소는 결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느 곳이나 신이 쳐다보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저는 지팡이를 깨지 못했습니다.”라마크리슈나는 굉장히 기뻐하며 그를 축복하였다. 그만이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