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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특별한 이유없이 마날리를 가게 되었다 15년째 단골로 머물고 있었던 바시쉿 강가 게스트하우스는 외국인 부부가 렌트를 하여 서양식으로 화장실 달고 바꿔 하루 400루피를 받고 있었다 소를 키우던 옆집 할매도 건물을 올려 찻집을 만들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강줄기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수풀림이 보이고 여전히 사과 과수원에서는 사과가 익어가고, 스파이더맨을 꿈꾸며 손을 뻗어 사과 하나를 따 먹고 싶었던 여행객들에게 여전히 그렇게 세상만사 무상함을 도처에서 눈으로 각인시키고 있었다. Kunzum la 이 길을 세번째 오른다 오를때마다 쉬 할곳이 없었고, 경건하지 못하게 룽따(깃발)가 펄럭이고 쵸르텐(탑)이 늘어선 이곳에서 올때마다 갈때마다 쉬~~를 한다 카자(스피띠 수도)를 앞두고 계곡을 끼고 있는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관세음보살 상. 이유야 어쩌되었든 경이롭지 않은가!
키 사원에서 바라본 맞은편 마을과 스피띠 벨리 강줄기와 논.
여름이면 이 작은 땅덩이를 두고 농사를 짓는다. 누가 처음 이세상에 땅금을 그었을까? 누구 누구네 집..누구 누구네 땅....경기도, 서울, 한국, 북한, 일본....뭐 우주밖을 튀어나가 지구를 한 번쯤 본다 여전히 돌고 있다. 초당 28초라고 했던가...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자전 속도,,,,갑자기 이 경치가 어지럽다. 키 사원 옥상에서 바라본 맞은편 전경 (마을 이름은 잊었슴) 칼라차크라 엠블렘.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당신이 깨친 경지를 알 수가 없을 것 같아 열반에 들고자 하나 천신이 내려와 법을 청한다...누군가는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이가 있을 거라고,,,그래서 세상에 법이 전해지고 되었다는...그 법륜의 상징이다. 2017년 달라이라마 성하께서 주최하는 칼라차크라라 보드가야서 있었고 십만명의 불자들이 운집했는데 ㅠ.ㅠ. 저는 여러 여건으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천년 고찰의 ki. 곰파. 그 날은 "참" 이라고 하는 "가면 무도회" 가 있었다. 스님들이 가면을 쓰고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농경제라고 하면 될까? 가면의 의미는 일체의 악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가면 무도회..."참" 이라는 티베트 말이 있다
구경나온 구경꾼에게 버터차와 이런 발레(빵)를 주셨다. 기름기가 좀 많았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찌짬 마을을 가기위해 당나귀를 반나절에 100루피로 빌렸다 새벽 4시 마날리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나를 쫓아 스피띠까지 동행했던 현숙이는 용케도 어디서 이 나귀를 빌려왔다. 작은 체구에 비해 나귀는 힘겨워 하지 않았다는게 현숙이의 주장이고 지금은 내 유발상좌가 되어 영국에서 사회 간접 봉사를 위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으며 그날의 인연이 되어 열심히 수행도 하고 있는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이 된 것을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싶다 kiber 마을 한 귀퉁이에 할매가 짬빠(미숫가루)를 볶고 있다. 한 줌 얻어 찌짬가는 내내 우리는 이 보리를 씹어 먹었다. 어린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이제는 세상 사람이 아닌 우리 어매가 하루종일 불을 지펴 만들어 주시던 엿도 생각나고, 뭐.. 인종이 같아서 일까..........내 어릴적 동네 골목이 오버랩되어 왔다. 반 나절 나귀주인인 현숙이가 나귀를 타고 가고 있다..
인디아나존스 영화에나 나올 이런 바구니를 타고 협곡을 건너다
그때 한 옆으로 다리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다리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 생활은 편하지겠지만, 추억을 더듬고 앗싸한 것들을 좋아라 하는 여행자들은 이제 더 이상의 어드번체를 꿈꾸기는 세상어디에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최근 다녀온 사람의 사진으로 볼때 다리는 완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2018년 현재) 지대가 높다보니 꽃들이 크게는 자라지 못하고 있지만 설산을 앞두고 나귀는 풀을 뜯고 꽃들은 산 자락 바닥에 너브러져 있었다. 찌짬마을집 내에는 이런 소똥 난로가 있었다.
이것으로 버터티를 만들어 준....우리의 일일가이드...... 무엇이 아쉬운지 자꾸 하루를 머물다 가라는 말에도 우린 그 날 보슬보슬 내리는 보리밭 사잇길 빗 줄기를 적시며 다시 kiber로 돌아왔다. 4200m 마을 kiber 마을.
이곳도 자꾸 숙소가 생기고 있다. 사진엔 없지만 물을 뎁혀 주는 자연식 온수기가 인상이었던 곳.. 랑룽마을에 뜨고 있는 달, 별...그리고 찾아오는 어둠.
어디에나 화장실 찾기는 김종욱 찾기보다 어렵다. 학교옆 물이흐르는 작은 도랑을 찾아 일을 보다가 바라본 하늘....찍어놓고 보니 줌이 맞지 않았네. 완두콩 밭 요즘 라닥은 어떤지 몰라도 몇 년만에 다시온 스피띠 모든 지엮은 예전에 농작하던 보릿농사를 버리고 80&정도 완두콩으로 바꾸었다. 완두콩이 보릿농사보담은 수확이 훨씬 좋다는 이야기다. 수확기엔 델리에서 트럭으로 와서 공판제로 완두콩을 거두어 간다고 한다. 아랫지역에서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완두콩이 이곳과 킬롱지역에서 온다고 한다. 델리에서 공부를 할 때 7,8월이면 시선한 완두콩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라닥이나 라홀 스피띠 먼 지역에서 온 것인 줄 모르고 먹었다. 그 완두콩을 바라보는 내 심정이 참으로 묘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다고 인생을 불명예로 마감한 서정주 선생을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저런 상념들이 나를 이끌어 갔던 기억이 새롭다. 당카르 마을
버스같은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나무 같은 것도 아예 있지도 않는 이곳을 다행히 농사용 트럭을 얻어타고 당카르가는 길목에서 두어시간이면 된다는 그 곳에서 5시간을 걸었다. 나무가 없으니 그늘이 없었다. 하늘이 맑으니 아예 구름같은 것은 꿈꾸기도 어려웠다. 큰 바위 그늘에 누워 그냥 길 바닦에 쓰러져 누웠다가 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현지인을 만나 물을 얻어 마시고 힘을 내어 걷다가 걷다가 고갯길을 오르니 이런 마을이 있었다 당카르...................................................동네 한 바퀴 돌기가 서울 돈암동에서 종로까지 가는것보다 어려웠다. 가는길이었을까? 오는길 이었을까? 그게 가는 길이었든 오는 길 이었든.........길 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갈때는 없었던 이런 간이 식당이 돌아 올때는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다 덕분에 메기라면(카레라면)도 먹을 수 있었고, 짜이도 마실 수 있었다. 이 어려운 곳 까지 와서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 땡큐.. 랄리 마을 따보 마을에서 한 5km 인 이곳을 산책했다. 산책하기엔 왕복 십킬로가 넘는 거리였지만 할 일이 없는 여행자가 하루 소풍하기엔 헐렁헐렁... 여행자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이곳은 찻집도, 간이 식당같은 것은 없었다. 배가 고팠다. 길거리에서 초대를 받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배고픈 이방인에게 밥과 차와 간식을 나눠 준 릴리마을 주민분..에게 살면서 난 빚을 진 셈이다. 언젠가 이곳도 다시 가야 할 곳으로 기억해 둔다. 그때에도 나를 먹여준 그분들이 건강하게 해 맑게 살고 계시기를 빚 갚음으로 기도해 본다. (기적처럼 나중에 달람살라 노블링카 자락에서 수행을 할 적 이 따보 사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방을 얻어 수행을 했는데 대부분 유학온 마을 아이들이 이 랄리마을 아이들 이었슴. 부모를 떠나 멀리 유학온 아이들을 위해 난 비가오면 내 방 베란다 휏대에 빨래를 너는 아이들 교복과 옷가지를 챙겨 다림질을 해주고 찢어진 것은 꿰매주고 떠나올 때 기숙사에 저렴했지만 정수기 한 대 놓고 왔으니 랄리마을 점심값은 했지 싶다) tabo 곰파...
달라이라마께서 살고 싶다고 하신 그 절이다. 한국 어느 종파에서 이곳에 후원을 해서 젊은 스님들을 위한 현대식 학교를 지어 놓으셨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씩 떨어진다는 이곳...................시멘트 건물에서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후에 달람살라 노블링카 자락에서 이 따보사원이 운영하는 기숙사에 방 하나를 얻어 개인 수행을 하게 되었으며 겨울이면 잠시 추위를 피해 이곳으로 내려와 계시는 댓방스님과 인연이 되어(지금은 열반하심) 따보사원 달라이라마 방을 꾸미는 데 쓰이는 금가루를 티베트 탱화를 그리는 내 조카스님이 공양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연이라 하겠다. 다시 스피띠를 가게 되면 또 다른 감회가 있지 않을까 싶다.)
랄리와 따보 마을 중간 어디쯤...... 이곳에서 잠시 쉬다가 도반의 최신형? 물병을 잃어버리는 탓에 한 이틀 정신머리 없다고 혼난 생각이..... 찌짬마을 가는 길 중간 어디쯤 청 보리가 푸른 하늘 바람에 살랑이고 있다. 지금은 보덕이가 된 현숙이와 달람살라 사라대학에서 이름은 잊은 선배를 만나 찌짬마을로 가는 구릉을 넘어가는 광경 인디애나존스가 부럽지 않았다. 랑룽 민박집 화장실. 조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ㅎ.ㅎ 생각보다 간격이 넓음. 랑룽 마을 사원에 있는 불상.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모두 입체적으로 조각 되어 있었다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서 위에 색체를 입힌것으로 천년이 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대로였다. 불교미술에 조예가 없음을 한탄하며.... 랑룽마을을 떠나오며.
이곳이 로탕패스 너머 스피띠와 라닥으로 갈라지는 길이다 예전에 예전에 한개였던 휴게소 간이 매점이 여러개로 늘었다.
스피띠로 가기전 이런 래프팅도 해 보았다. 눈~~~~물이라 그런지 꽤 추웠다. 한국 래프팅보담은 물살이 쎄서 훨 재밌다. 이때 함께 했던 한국인 가족도 이제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이들은 그 사이 훌쩍 커 버려 나와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ㅠ.ㅠ.) 마날리엔 이런 수풀 자연림도 있다. 마날리 올드 마켙에 있는 순대집... 기름을 넣고 튀기는 수준이라...ㅎ.ㅎ..맛있다고 한다. 스피띠 가는 길엔 이런 길도 넘어갑니다. 이런 양치기를 만나기도 하지요.
사족: 이른 새벽 부지런한 택시를 만나 바쉬싯에서 버스정류장에 나오니 장거리 버스들이 갈 곳을 향해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로컬버스를 선택했기 때문에 예약도 없고 확인도 안 된 버스를 찾다가 카자에서 온 택시기사를 만났다. 일인당 400루피에 가격을 정한다. 로컬버스 보다야 약간 비싸지만 횡재했다 이 아침에. 기사 짜이 한 잔 사주고 중간자리 3사람을 다시금 확인하고 출발~~~(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현숙이는 내내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더니 경치를 뒤로 하고 내내 잠만잤다: 가고 오는 경치가 이 길의 묘미를 몰랐던 현숙이는 오는 내내 잠만 잔 그 때를 후회했다 한다. ㅎ.ㅎ.)
카자에서 5년전쯤 만났던 노총각 롯데는 나를 기억해 주었다. (해태, 롯데 무던히도 이름가지고 놀리기도 많이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발음은 "로되" 어쨌는 나는 그를 여전히 롯데라고 부른다.
그이 초대를 받아 저녁먹고 그가 운영하는 여행사에 가끔 놀러가 쓸데없는 농담이나 주고받고 그렇게 떠나온 스피띠, 떠나와서 전화 한 번 해 준적이 없었는데 그는 나를 친구라고 내 일행까지 모두 그가 운영하는 호텔에 무료로 숙박을 시켜 주었다. 사는게 뭐 있냐고,,,돈 뭐 대수냐고, 먹고 쓸 만큼은 벌고 있다던 롯데가 올해에는 제발 장가 가기를..........가끔 술에 취하면 내게 전화를 해서 혀 꼬부라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 놓는 그런 롯데가 있는 스피띠...... 지나고 보면 늘 그리운 것은 사람이 있는 곳인 것 같다. 인복이 좋은 것인지 많은 여행지 마다 좋은 친구가 있다.
얼마전 롯데에게 전화가 왔다. 올해에는 카자에 올거냐구....
산자락에 엎드려 피고 있는 꽃도 보고 싶고 그 자락에 넘나드는 바람을 타고 살아가는 사람도 보고 싶고, 낯 선 이 여행자를 친구 삼아준 그 롯데도 보고 싶지만, 글쎄 일상이란게 늘 나를 잡는다. 심 호흡을 한 번 해 본다.
사진이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맑은 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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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사형님 장례를 치루로 왔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생사의 이치를 눈으로 보고 오면 좀 더 삶이 경건해 지곤 하네요.
좀 더 감사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삶을 대하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화장실 찾기는 김종욱 찾기보다 어렵다" ㅎㅎ
누구든 찾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거군요
인도라는 곳이 그렇습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열악한 환경이 화장실인데..특히 산악지대는 사방이 오픈 화장실이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