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원수사랑’ 예수와 ‘적자생존’ 다윈, 과연 동행 가능할까
크리스찬 투데이 입력 : 2013.09.03 16:46
[조덕영 박사의 서평] 「예수와 다윈의 동행(사이언스북스)」
▲조덕영 박사.
‘과학적 창조론’과 ‘자연적 진화론’ 아닌, 복음적 ‘제3의 길’ 함께 고민을
성경과 기독교의 복음은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왔을까? 기원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진화론은 그 만남부터 시작하여 남다른 관계를 가져왔다. 문제는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 출간된 이후 이 문제는 늘 그리 간단치 않은 궤적을 그려왔다는 점이다.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것은, 미국 장로교의 대표적 신학교였던 프린스턴 신학의 두 신학자에게서도 나타났다.
다윈의 시대를 산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다윈의 책이 출간된 이후 진화론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핫지는 1874년 출간한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를 통해 진화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핫지는 다윈 진화론의 특징으로 진화 또는 모든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가 하나 또는 아주 적은 수의 원시 균류(primordial living germs)로부터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가정과, 이 진화가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에 의해 일어났으며 결국 다윈의 이론은 자연선택이 초자연적 지성의 설계(design)없이 비지성적인 물리적 원인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았다.
핫지는 우주의 창조와 섭리 과정에서 지성적 설계를 배제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른 창조 가능성을 부정하게 되므로, 목적론적 설명이 배제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 개념이 초자연적 설계나 목적의 원리를 방법론적으로 배제하게 되면 결국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학과 결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핫지가 볼 때, 다윈 자신이 노골적으로 무신론자임을 주장한 적은 없으나,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비판했으나 핫지는 성경과 과학이 원칙적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핫지는 당연히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믿는 사람이었다. 핫지의 생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질서를 다루는 하등 학문인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당연히 모순이나 충돌할 필요가 없는 관계였다. 즉 핫지는 과학을 무조건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providence)를 무시하는 자연주의(naturalism)를 이론의 방법으로 삼는 과학의 이론만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핫지의 뒤를 이은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는 달랐다. 워필드는 기독교가 진화론도 수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칼빈주의자였던 워필드는 칼빈(1509-1564)도 자신처럼 진화론자로 보았다, 역사학자 마크 놀이 칼빈을 진화론자로 칭한 것도 결국 워필드의 견해로부터 기인한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비약이 심한 주장으로 보인다. 칼빈의 시대는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이슈가 된 시대가 아니었다. 당연히 칼빈의 어떤 주석에도 진화론은 등장하지 않으며, 칼빈 당시 두드러진 과학의 이론도 아니었던 진화론에 대해 칼빈이 결코 언급할 리 없었다. 워필드는 다윈이 기독교를 거부한 이유는 사변과 가설에 너무 편견이 동원되어 생각의 위축을 가져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워필드가 보기에 진화론은 맞았으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세련되게 정리하여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도록 제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신재식 교수, 워필드처럼 ‘성경과 진화론’ 모순 없다 보는 듯
‘성경 문자적 집착’ 화근 됐듯이, ‘맹목적 진화론 수용’도 문제
이 두 신학자의 견해는 기독교 안에서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에 「예수와 다윈의 동행: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한다」를 펴낸 신재식 교수(호남신대, 조직신학)는 바로 조금 더 워필드의 편에 섰다고 보면 된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며 종교와 과학,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해 온 신재식 교수는 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과학, 진화론의 성과를 읽고 받아들여 종교, 그리스도교 신학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현대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진단한다. 초자연적 인격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배제한 채, 우주와 생명의 진화와 현재를 설명해 온 대폭발 우주론과 다윈주의적 진화 생물학의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신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 속에서 “신학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 상황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워져야 했다”고 전제하며 “과거의 지식에 근거한 신학이나 설교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오해와 불신과 적대감”만을 낳으며 “한국교회 전체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할 것”이라 분석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춘”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비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라고 일갈한다.
신 교수는 “종교의 유통기한”은 이제 끝났다며 종교의 한계와 과학의 부상을 주장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와, 종교 역시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며 종교학이라는 섬세한 메스를 든 한신대 김윤성 교수와 함께 21세기 종교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고,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진화 생물학자들의 종교 분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종교 전쟁: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사이언스북스, 2009년)」를 출간한 바 있다.
그가 2009년 3월부터 ‘기독교사상’에 연재해 온 글들을 보강하여 엮은 「예수와 다윈의 동행」은 바로 이 「종교 전쟁」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 전쟁」 속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다듬고, 그 주장과 통찰의 역사적, 구체적 근거들을 한데 엮으며,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다윈의 동행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창조과학 운동 같은 반진화론 운동이 “종교 언어와 과학 언어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하고 평가하는 오류”에 빠져 있었다고 지적하고 “진화론을 선택하는 순간 신앙이 배제된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과학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과학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반진화론 운동의 기독교인들이 범한 ‘문자주의적’ 오류를 다시 범하는 것이라고 또다른 극단을 경계하고 있다. 즉 저자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과학의 설명만이 유일하고, 우월하며,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다른 설명을 배격하는 “환원주의이며 독단주의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신 교수는 책 후반부에서 “과학이 사물과 생명에 대한 여러 설명 중에 강력하고 유효한 것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과학의 특권을 주장하는 무신론적 지연주의 진화론자인 도킨스를 비판한다. 성서적 문자주의를 버려야 하는 것처럼 과학적 문자주의 역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신학자로서 양 극단이 가지는 위험성을 분명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종의 기원」을’이 가능하다고 보는 면에서 그는 여전히 워필드처럼 성경과 진화론은 모순이 없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문자적 집착이 큰 화근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세속의 진화론도 자연주의 속에서 너무 오염되어 버렸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보는 것도 경계해야 하나, 세속 과학에 편승하여 신앙을 계몽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 교수도 지적한 것처럼 양 극단은 늘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신학이 가지는 치명적 결함은 너무 현학적이 되려는 유혹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탁월한 학문이라도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학문은 탄력을 상실하게 되고 대중들의 흥미를 빼앗아버린다. 특히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신학은 늘 어떻게 그 난해함을 극복하고 복음과 학문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가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신앙과 과학의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잘 진화된’ 예루살렘 아닌 ‘자연 도태된’ 갈릴리와 사람들과
동행하신 예수, ‘적자생존’의 진화론과 묶어놓으려 하면 어색
칼빈이 탁월한 점은 신학을 신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독자들의 눈높이에 적응하려고 했던 그의 간결하고 용이한(brevitas et facilitas) 방법론 때문이었다. 저자는 과학적 진술을 항상 낯설어하고 따분해하는 준비되지 못한 조국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면서 함께 끝까지 동행하려고 경어체를 구사하며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신 교수 뿐 아니라 학자라면 누구나 이 문제는 독자들과 어떻게 동행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모든 저자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든 신학자들은 늘 예수 그리스도의 수사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이 아닌 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갈릴리 사람들과 함께했고, 또한 그들 편이었다. 예수는 ‘잘 진화된’ 제도권의 예루살렘이 아닌, ‘자연 도태된’ 변방의 갈릴리 지역사람들과 동행했다. 늘 약자의 편에 섰던 예수께서 과연 강하고 적응하는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 원칙의 진화론을 과연 편들었을까? 이같은 예수의 삶의 궤적은 과학적 진술을 떠나 예수와 진화론을 하나로 묶으려는 것을 여전히 어색하게 만든다.
“복음주의는 과학의 문제에 있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한 의사요 탁월한 설교자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의 진술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진화론은 과학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까지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종교인들에게 까지 자신의 승리의 월계관을 내밀고 있다. 기독교도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질서를 연구하는 하등 학문인 과학을 전혀 부정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혀 둔다.
하지만 신앙은 다르다. 세속적 자연주의 진화론의 무비판적 수용이 또다른 극단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과학적 창조론과 자연주의 진화론이 아닌 복음과 함께하는 제3의 길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