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언술의 원리
묘사와 표현
산문과 묘사
자신의 의견이나 사물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에는 문자로 이를 기록하여 나타내거나 말과 행동으로 보이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말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상대가 있을 경우, 그것도 순간적인 것이다. 요즘은 통신수단이 발달하여 말과 행동을 원거리에서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상대가 멀리 있거나 오래도록 그 의견을 유지하고자 할 경우, 문자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 문자야말로 사상, 감정을 시공을 초월하여 주고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소통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을 문자로 소통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말을 문자로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언술(言術, utterance)이라고 한다.
진술이니 기술이니 서술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언술할 경우 언술 목적이나 성격에 따라 언술의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문제나 대상을 독자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설명(exposition)적인 언술이 필요할 것이고 좀더 조리 있게 주장하거나 설득하고자 할 때는 논증(argument)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또한 어떤 사건, 즉 일의 발단 전개 결말의 과정을 언술하고자 할 경우는 서사(narrayion)적인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경우는 묘사(description)이라는 언술 형식을 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는 이러한 서술 방법 중 당연히 묘사의 밥법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묘사란 사물의 현상을 관찰하여 그 인상을 감각적으로 언술하는 양식이다. 여기서 현상이란 사물의 형태, 색채, 감촉, 향기, 소리, 다른 사물과의 관계 장소 등 주로 감각적이고 표현적인 인상을 말한다. 물론 인상이란 객관적일 수도 있고, 주관적일 수도 있다. 인식의 정도, 관찰의 각도, 관심 등에 따라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다.
⓵ 비가 유리창을 적시고 있다.
⓶ 빗방울이 유리창을 흔들어대고 있다.
⓷ 빗방울은 유리창에 날벌레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르르 뒹굴고 홈 이 지고 한다.
⓵은 비교적 사실적인 문장이다. ⓶는 비가 유리창을 흔들어댄다는 표현을 통해 그 묘사가 좀 구체적이다. ⓷은 묘사가 세부적이고 비유적이어서 훨씬 실감나는 언술이 되었다. 묘사에는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가 있다. 설명적 묘사는 어떤 사실을 정보전달의 차원에서 언술하는 것이다. 암시적 묘사는 인상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언술을 요구한다. 주관적인 묘사와 객관적인 묘사도 있을 수 있다.
⓵ 만추는 햇살이 만든다. 햇볕이 나면 퓰과 나무가 활짝 꽃 피며 웃다가 해만 구 름에 가리면 금방 시무룩하니 몸을 움츠린다.
코를 찌르던 여름의 풀 냄새는 없고, 산에는 마른 풀 향기가 희미하게 떠돈다. 잎 이 성긴 나무들이 서 있는, 아무도 없는 과수원에 들어선다, 한쪽 양지바른 풀밭,버 려진 묘 위에 털썩 드러누우니, 참 억새며 다 자란 풀들이 눈 앞을 가리고 해를 비 춰 반짝인다. 눈을 감고 사지를 뻗으면 한가한 즐거움이 나른하게 몸에 와서 잠 긴다. 나는 마른 풀에 볼을 비비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진동기 「가을 풀」에서
⓶ 사십이 가까운 처녀인 그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 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훌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맘대로 쪽지거나 들어 올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겨 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 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 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악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놀랠 때에는 기숙사생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 격하고 매서웠다.
-현진건 「B 사감과 러브레터」에서
⓵의 인용문은 수필문의 하나다. 가을의 독특한 풀 냄새를 자신이 경험한 주관적 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⓶의 인용문은 소설문의 하나다. 주인공에 대한 인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설명적 묘사와 암시적 묘사가 엄격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묘사나 객관적 묘사도 그렇다. 그리고 묘사는 언술하고자 하는 대상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매우 효과적인 서술임에 틀림없다.
첫댓글
이 내용만으로도 시나 소설의 격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교수님ᆢ
묘사의 방법을 예문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술의 형식이 뛰어나셔서 우교수님 인기가 좋으신가 봅니다
글쎄요.
강의 자료를 올려 본 겁니다.
몇 번 숙독하시면 시창작에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심오深奧한 글에 머무르다 갑니다.
건안建安하시고 건필健筆하세요.
자상하게 일러주신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