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
―그리운 김남주 시인
양 문 규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 전야 추모예술제'에 있던 지난 7월 9일 봉화마을을 찾았습니다. 이날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노무현 추모시집의 헌정식도 있었는데요. 서울생활 이후 만나지 못했던 여러 시인들을 한자리에서 만났지요. 그리고 민예총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 판화가 김준권과 류연복 형들도 만났고요. 우리 모두는 만남의 기쁨보다는 서로가 침묵 속에 눈시울만 적시는 가슴 아픈 날이었습니다. .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오래오래 가슴에 안고 기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노무현 대통령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분이겠지요. 저는 살아오는 동안 운 좋게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사람살이의 아름다운 덕복을 배우게 되었지요. 그런데 낙향 이후 그런 분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으니 배은망덕입니다.
죽는 날까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해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런 사람들로 충만한 삶은 얼마나 행복할 까요. 저에게도 그런 삶이 있었는데요. 그들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중생에게 삶에 양식이 되어 주고 등불이 돼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그 중에 김남주 시인이 있었답니다.
봉화산 부엉이 바위를 지나 정토원을 오르면서 남주 형은 어디에 있을까. 남주 형, 남주 형, 나도 모르게 김남주 시인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만에 부르게 된 이름이겠습니까. 부엉이 바위, 사자 바위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남주 형을 불렀습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89년 여름 민예총 시절로 돌아가는데요. 인사동 뒷골목 어느 허름한 식당이었지요. 신경림, 염무웅 선생님을 비롯한 자리에 전 말석으로 끼어 있었는데요. 우리는 많은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한 식구처럼 가까워졌었지요. 아마도 제가 민예총에서 살림을 살았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고, 또 하나는 형색이 그렇고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그는 절 동생처럼 대해주었고, 나도 그를 형이라 부르며 따르고,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까지 마음을 같이하였답니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전의 마음이여.
―김남주, 「옛 마을을 지나며」 전문
김남주의 시는 시선집 『사랑의 무기』,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농민들에게 바쳐집니다. 그리고 그의 시는 농민들의 자식이고, 동무인 노동자들에게 바쳐집니다. 노동자와 농민과 어깨동무하고 '우리'가 되어, '나쁜 사람들' 노동의 저 자본가들을 향해 전진하는 혁명전사들에게 받쳐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김남주의 시는 철저하게 "노동자 농민의 적에 대한" '사랑의 무기'인 셈입니다.
김남주 시편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시를 들라면 전 주저없이 「옛 마을을 지나며」를 고릅니다. 그는 '조선의 마음'처럼 "찬 서리/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이 시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김남주를 표상합니다. 그가 평생 목이 터지라 외쳐 부르던 노래 민족 해방 ․ 민중 해방도 종국에는 사람살이의 정겨운 마을을 살아내기 위한 것이 아닐는지요. 봉화마을에서 김남주를 다시 떠올리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가 손수 전해 주었던 여러 권의 시집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리고 강대석,『김남주 평전』(2004, 한얼미디어)도 정독하였습니다. 김남주 시집과 평전을 읽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가 이루고자 한 세상은 아직도 너무 멀리 있는데, 우리는 헛되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봉화마을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들에는 개나리꽃 노랗게 만발하고
산자락에는 진달래꽃 붉게붉게 타오르는 곳
그 마을에 가서 나는 살고 싶다
야유회다 뭐다 하이킹다 뭐다 바캉스다 뭐다 하면
그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다가
들놀이 산놀이 가자 바다놀이 가자 하면
어절씨구 좋아라 지화자 좋아라 얼싸안고 춤추는 곳
그 마을에 가서 나는 살고 싶다
없이 산다 해도 나는 좋다 그 마을에 가서
콩알 하나 둘로 쪼개 노나 먹을 수 있다면
자유없이 죽는다 해도 나는 좋다 그 마을에 가서
노동과 그날 그날이 고역의 하루 하루가 아니고
생활의 으뜸가는 기쁨의 강물이라면
이 밤이 다음 날 아침끼니를 걱정하는 근심의 밤이 아니고
동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면
춤과 노래와 술이 한데 어우러져
앞 강물 뒷 강물에서 깊어 간다면
―김남주, 「동산에 둥근 달이」부분
김남주는 독재와 싸우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단된 현실을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며 통일과 관련된 시편들을 생산하였습니다. 「조국은 하나다」, 「나의 칼 나의 피」, 「자유」, 「학살」, 「창살에 해살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등의 시편들은 그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시편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민족 ․ 민중으로 이름을 올리게 해줍니다. 그는 왜 이런 노래들을 만인 앞에서 피를 토하며 노래했을까요. "들에는 개나리꽃 노랗게 만발하고/산자락에는 진달래꽃 붉게붉게 타오르는 곳/그 마을에 가서", "들놀이 산놀이 가자 바다놀이 가자 하면/어절씨구 좋아라 지화자 좋아라 얼싸안고 춤추는 " 마을을 만들기 위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렸왔던 게지요. 그런 세상이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러나 작금의 사회현실은 저 1980년대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지요. 오히려 더 어둡고 암울하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김남주 시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예지에는 너도나도 알지 못하는 시들로 넘쳐나고, 그런 시들이 제일이라고 앞 다투어 칭찬하고, 그래서 세상은 더욱 뿌연 안갯속으로 빠져들어 흑과 백이 분간이 안 되는 게 아니겠어요.
봉화마을을 다녀와서 전 다시 김남주 시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면/춤과 노래와 술이 한데 어우러져/앞 강물 뒷 강물에서 깊어"지는 세상을 꿈꾸어 살아갈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따로 있고 걷어가는 사람 따로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가질 줄 아"는 "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러보며,"살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있어 그런 세상을 같이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시에티카>>(2009, 창간호)
첫댓글 부산에 요산 문학제가 있던 날... 김남주 문학제가 해남에서 있었지요... 그런 세상 만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