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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베드로전서 3강
말씀 : 베드로전서 3:1-22절
요절 : 베드로전서 3: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7절은 가정생활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1-6절의 권면대상은 아내, 7절 한절은 남편입니다. 비율이 너무 맞지 않습니다. 여성들에게만 너무 가혹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들의 영성이 뛰어나서? 아니면 남성중심의 사회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여성들이 초대교회의 주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방문합니다. 고난당하는 위치에 있던 여성이나 노예들이 초대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 이유입니다. 고난이 가진 어둠과 빛의 양면성입니다. 고난은 현실적으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립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마음을 겸손케 하고 예수님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현대 여성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올만한 말씀입니다. ‘남편을 존중하라’라는 정도로 등급을 낮추었다면, 거부감이 덜했을 것입니다. 혹은 ‘아내보다 훌륭한 남편에 대해서는 순종하라’, 그리 말씀했다면 모르겠습니다. 같은 남자이기에 감히 하는 말인데, 철없는 남편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의 지위가 우월하고 아내의 지위가 열등한, 당시 남성중심의 문화를 따르라는 타협의 말씀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살아가는 불신 남편을 배려하라는 성숙의 말씀입니다. 불신 남편은 하나님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는 진리를 모릅니다. 믿는 아내가 수평적인 대화를 요구하며 동등함을 주장하면, 당시 남편들은 충격을 넘어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이 여자가 미쳤나? 이상한 것을 믿더니 이제 남편까지 우습게 여기네’, 남편을 아끼는 진심과 충언을 담았는데도 무시와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특히 권위 문제에 민감합니다. 무시받으면 완전 ‘꼬장모드’에 빠져버립니다. 가정 분란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꼬장부려 상처 주고, 무시와 외면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에 빠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면 남편의 언행이나 월급봉투가 시원치 않을지라도 남편을 높이고 순종하는 아내가 있다면, 남편은 아내를 통해 천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놓지?’ 백마디 전도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두려움과 정결한 행실은 복음을 드러내는 강력한 통로가 됩니다.(2)
구원의 통로가 되려면 내적 싸움, 인격싸움을 해야 합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단장’이란 꾸미는 것 혹은 매력포인트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아내가 세상으로부터 남편과 가정을 지키려면 매력포인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의 매력이 사라지면 남편들은 아주 쉽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남자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했으니 이제 끝,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결혼 이후에도 매력을 잃지 않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화장이나 피부관리도 하고 예쁜 악세사리나 좋은 옷을 걸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단장은 필요 없다?, 흑과 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에 집중해야 하는가? 방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하는 것이 진짜 매력포인트임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온유란 부드러움을, 안정된 심령은 변함없이 지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남편이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지치고 낙심했을 때 혹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부드럽게 대하고 변함없이 지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마음의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에 숨겨진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앞에 보배로운 사람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6)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순종했습니다. 퍼펙트한 남편이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가정생활에 대해서만큼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남편이었습니다. 바로가 아내를 빼앗아갈 때, 입 한번 뻥끗하지 못할 정도로 비겁했습니다. 하갈을 편애하여 여주인을 멸시하게 만드는 철없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남편을 내 주라 칭하며 높였습니다.(6)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으로 동역자를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라 부르고 아울러 사라를 열국의 어머니로 부르신 모습이 그러합니다. 우리 가정들이 배우자를 높이는 일에 아무 두려움이나 놀라움을 갖지 않는 가정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들이 7절을 읽겠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 이는 당시 남성 중심의 문화를 따르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아내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남성 중심의 문화는 거칠고 권위적으로 아내를 대하는 것을 남편의 특권처럼, 많은 여인을 아내 삼는 것을 남자의 능력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내 살 중의 살, 내 뼈 중의 뼈’로 받아들이고 연합하는 것을 결혼의 진리로 가르칩니다.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아는 것’은 연약한 자로 여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남자들이 실제 문제를 만나면 아내보다 연약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이는 바깥에서 만나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쓰는 거친 언어, 거친 태도를 아내에게 쓰지 않는 것입니다. 비싼 고려청자를 대하듯이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배우자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배우자를 아끼고 사랑해야 기도가 막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가정을 지키고 양들과 자녀들을 보호하고 생명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마지막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것이 핵심이다. 더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유별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동정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하고 복수하지 않고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아낄 수 있다면,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불쌍한 처지에 있는데, 누구를 돌아봐?’, 그런 생각일랑 휴지통에 버려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풍요롭고 영광스런 시대를 살면서 이런 권면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발당하고 억울하게 고난받는 상황에서 권면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9) 마귀가 원하는 것은 악으로 악을 부르고 욕으로 욕을 불러 세상을 악과 욕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복을 비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맞서는 것, 선한 싸움입니다. 믿는 자들은 선한 싸움을 위해 부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를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내려오는 복을 이어받을 자들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이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따르기에 힘써야 합니다.(11) 이 말씀은 시편34편 다윗의 시를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왕에게 망명을 갔는데, 왕의 신하들은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용사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늑대를 피해 도망쳤는데,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미친 척 횡설수설하고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연기를 합니다. 블레셋왕은 다윗을 쫓아내었고, 다윗은 그렇게 위기탈출 후에 시편34편을 지었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좋은 날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혀를 잘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악한 말, 교만한 말, 자기를 드러내는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 다윗이야, 너희들, 나 그냥 안죽는다. 함께 죽을 놈부터 먼저 드루와!’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다윗과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화를 부르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살리는 말, 화평을 가져올 수 있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평안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오해 대신 이해, 원망 대신 감사를 일으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원망이나 비방의 말을 하지 않겠다는 내적 기도제목을 붙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기도제목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할수록 ‘원망거리가 내 안에 많다는 사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비겁함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무시로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덧입어야만 원망과 책임을 떠넘기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말씀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긍정과 감사의 말을 하면 할수록 빛이 마음에 임하고 행동까지 달라지고 더 깊은 기도가 나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우리 눈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의인으로 살고자 수고하는 자들을 아시고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우리 눈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악행하는 자들의 가증함을 다 보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상급이 없다고, 혹은 당장 심판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자만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벧후3:8) 주님은 우리의 시간 개념과 다른 세계에서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자주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은 세상을 마치는 그 날 한번이면 족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향해 부지런히 입을 열고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첫 번째 포인트는 ‘열심으로’입니다. ‘열심으로’의 반대는 ‘적당히, 의무감으로, 심정 없이’입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세상이 감동을 받습니다. 열심을 클수록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윤선 사모는 요즘 열심으로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치과건물 1층 토스트집 사장님이 어렵다고 하니까 불쌍히 여겨 토스트를 먹으며 2시간씩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아파트 상가 미용실과 화실 운영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해줍니다. 바이올린 공동 레슨에서 함께 레슨받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믿음을 심었습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입니다. 열심으로 선을 행할지라도 고난 받을 수 있습니다. 심정을 다해 도와주고자 하는데,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 손해 본 사람이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만났다면, 먼저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에 대해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고난은 질문을 동반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심방갔다 오면서 과거 심방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밤중에 춘천 사는 양을 조문하러 운전해서 가는데, 와이퍼가 고장났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왼팔을 창밖으로 내밀어 수동으로 시야를 확보하며 갔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이라면 심방을 취소했을 터인데, 그때는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저희 가정에게만 있는 특별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때는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비전으로 불타오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에너지와 시간을 써버린 것이 옳았는가? 라는 질문을 가끔씩 만납니다. ‘다른 센타가 부흥하고 부지 구입과 건축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들가운데 일어나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청년의 시기를 2부 역사에는 아무 도움 되지 않게 보내버린 것은 아닐까... 차라리 그런 열정으로 부부가 합심하여 돈을 벌었다면, 지금쯤 래미안 라그란데 정도는 입주하지 않았을까?’ 그때의 답으로만 부족하고 지금 소망이 될 수 있는 답을 때마다 준비해야 함을 느낍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살던 자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게 되었으니, 결코 손해보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비밀을 알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기에, 이전의 고난도 값지고 지금의 부르심도 소중합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 있는 것을 인내하고 감당하는 것이 하늘의 상급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게 하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노아시대 8명의 의인들이 다음 시대의 시작이 되었듯이, 지금 몇몇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다음 시대를 향한 위대한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시공간에 갇혀있기에 그 열매를 다 볼 수 없을 뿐, 믿음의 수고를 헛되이 하지 않는 주님을 믿기에 오늘을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답을 붙들고 고난의 때를 온유로 맞이하고 두려움으로 견디고자 합니다. 냉소적인 마음, 완악한 마음을 멀리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16) 비방하는 자가 아닌 선행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자리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고난, 자기 욕심과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좌우편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했던 두 제자의 고난으로 대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반면 두 제자는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난의 잔을 마시고자 했습니다. 의를 위해 받는 고난과 유익을 위해 받는 고난으로 대조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어느 종교의 통찰처럼,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왕이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지속가능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단번’이란 ‘피하고 도망치다가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와 결심으로’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우리를 하나님앞에 인도하기 위해 아무 죄가 없는데도 대신 죽임을 당하는 자리로 향했습니다. 그를 통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십자가 죽음 한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창세 때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난받았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노아시대 예수님은 영으로 불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산 위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예수님의 영, 성령님은 불신의 영들에게 끊임없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방주 짓는 120년동안 주님은 오래 참고 기다렸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예수님의 영이 얼마나 타는듯한 심정으로 세상을 향해 선포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끝내 복종하지 아니했으며,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은 겨우 8명뿐이었습니다. ‘겨우 8명?’, 온 세상을 뒤엎은 수고와 아픔을 생각하면 진짜 보잘 것 없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목자의 고난, 목자의 아픔을 잘 아시는 분이실 것입니다. 다만 한 영혼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기에 견디셨을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노아시대의 홍수는 8명을 향한 세례였습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 죄 씻음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홍수 이후에는 선한 양심을 갖고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시작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 8명을 세우기 위해 온 세상을 물로 씻어내는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신 의미도 그러합니다. 선한 양심을 따라 간구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피는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씻어낼 수 있을만큼 크고도 놀라운 희생입니다.
물론 고난의 끝은 영광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선한 일을 위해 고난받는 자는 영광에 이른다, 그리스도가 보증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선한 일을 위해 힘써 고난받는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봄학기 한 영혼을 구원하고 살리는 고난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