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골목길 뛰어다니며 부르던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하는 동요가 생각난다. 오랜만에 설빔으로 받은 신발은 길들지 않아 거칠게 뒤꿈치를 파고들고 물집이 잡힌다. 그래도 헌 신발에 구멍 뚫려 눈 녹은 물이 양말을 적시는 불쾌감보다 참을 만했다.
오래된 물건을 칭하는 고물이란 단어는 쓸 수 없는 물건을 박대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새것이 흔치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던 지난날 이야기다. 새것이 좋다는 믿음으로 후대에 좋은 것만 전해 주려 부족한 생활을 견뎌온 세대가 가지는 뱃심 같은 오기가 있다. 옛것을 구박하고, 새것이 좋다고 버티면서도 지나간 사물에 대한 연민을 간헐적으로 느낀다. 그렇다고 인사동 길을 걸으며 골동품을 뒤적일 정도로 오래된 물건에 향수를 갈구하는 낭만과 학구적 열정은 갖추지 못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의 선 위에 가늘게나마 매듭진 인연을 끊어내기 서운할 뿐이다.
새로운 것이 좋은 이유는 세세한 토를 덧붙이기 민망하다. 새것은 발전된 시설에서 생산된 것이고 경험과 소비자의 취향 그리고 비평을 보듬어 진일보된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광고는 종전에 사용하던 용품을 대체하는 정도를 넘어 호기심과 편리함이 마음을 잡는다. 선택의 여지없이 새로운 것에 끌려도 어느 때부터인가 더벅머리 댕기 치레하듯 기억 속 버려진 소품들이 그리워진다. 작은 도구도 편리한 신상품에 자리를 비워주기 전까지 애지중지 한 것이다. 유독 사물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다. 기억과 함께 방치한 잡동사니는 물론이고, 줄기에 덩굴 꼬인 듯 아픈 만남이 얽히고설킨 인연조차 그립다.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연줄은 나무속 깊게 박힌 옹이 같다. 쓸모 있는 목재가 되기 위해 목수는 땀 흘려야 하고 얽힌 인연을 풀기 위한 애절함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옹이가 클수록 목재가 갖는 무늬는 돋보이듯 기억 속 상흔이 깊을수록 감내한 인내는 뿌듯하다. 지난날 한마디 허튼 농으로 가슴에 든 상처도 지나 보면 나를 위해 남겨진 문양이 되어 드러난다. 새사람을 보기 위해 오랜 벗을 멀리하는 우둔한 행동이 빈번하게 보이는 각박한 사회다. 속 좁은 뒤웅박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우매함과 다를 바 없다. 지난 내 행보에 걸음 폭 맞추어 따라오고 힘들 때 물 한 모금 나누어 주던 군상들이 고맙다. 나와 더불어 움직이며 손 내밀어 준 이웃이다. 혹여 길목을 막고 발걸음을 늦추게 했던 말썽꾼도 오늘이 있도록 도와준 역할이 있었다. 한 치 앞도 예견 못하기에 지난날에 연민이 깊을 수 있다. 돌아보면 추억만 가득하고 다시 갈 수 없기에 모든 이가 어질게 보인다.
단풍이 지는 계절이 되면 산에 올라 낙엽을 밟곤 한다. 발목이 잠기도록 떨어진 잎들은 나무가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며 자신을 덜어낸 결과다. 새로운 잎이 봄에 솟아 청초해 보이듯 한 해를 마감하는 만산홍엽도 본연의 멋이 있어 좋다. 지각없는 나무도 덜어낸 욕심을 부질없이 간직하는 철없는 마음을 탓한다. 자신의 눈동자를 스스로 닦기는 쉽지 않기에 눈물을 흘려야 된다. 울음을 토하며 떨어지는 눈물로 닦은 눈동자는 영롱하다. 맑은 눈으로 주위를 보면 지나간 시간이 보인다. 가슴 푸근하게 저장된 오래된 기억을 회상한다.
오래된 향나무 연필이 점점 짧아져 깎을 때 칼이 들어갈 여분이 별로 없다. 다른 필기도구가 많아도 연필을 아끼는 이유는 나무 향이 좋아서다. 손가락 사이에 힘주어 잡으면 눌린 마디에 솔향이 밴다. 잠시 잡은 몽당연필이 손안에 진한 향기를 남긴다. 살면서 나를 스쳐 가고 머물렀던 모든 추억의 향기가 나에게 배어 있다. 깊은 들숨으로 흩어진 향을 가슴속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 연필이 오래 묵어 향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비늘 털어내듯 흑연을 한 조각씩 깎아 종이에 써 내려가는 과정에 내가 이야기하려 했던 혹은 쓰려고 했던 많은 이야기를 연필은 기억할 것이다. 길게 심을 드러내던 연필이 짧아지면 아까움에 글 쓸 때 누르는 힘을 줄인다. 한 번도 포장 밖으로 나와 보지 않은 새것이 그득해도 애용하던 필기구를 내던지기 거북하다.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아낄 때 나온다. 새로운 이질감이 잦아들고 익숙한 편함이 오기까지 나 스스로를 길들이는 시간이 제법 길 것이다. 조그만 몽당연필이 자기만 써 달라며 벌이는 투정도 원만히 받아들여야 한다.
재방송이 없던 때가 있었다. 인기 있는 연속극을 볼 때면 모두 조용히 집중력을 높여야 했다. 이제는 연속극을 재방송하기도 하고 몇 편씩 한꺼번에 다운로드해 본다. 중간에 자리를 뜨기도 하고 전화를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주의력이떨어져 흥미는 반감된다. 어려서 흑백 방송으로 본 영화가 컬러로 방영된 적이 있다. 작고 각진 흑백 화면이 더욱 감동적이라면 내가 가진 문화적 흡수력이 고루하게 평가될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오랫동안 주변에 남아 쓰임새를 이어가는 것은 대중의 평가 속에 부족한 작품이 걸러지기 때문이다. 손에 익숙한 물건은 길들어 정감이 들고, 친숙한 도구는 손때가 묻어나 반질거리기 마련이다. 몇 번 다녀 익숙한 경로에 지름길이 생겼다고 바로 다니던 길을 바꾸기는 어렵다. 고집스럽게 옛것에 매여 현실에 어두워지는 것과는 다르다. 어두운 산천을 휘돌아다닌 바짓단이 어룽져 있다 한들 흠잡을 일은 아니다. 지나가다 정들었고 지우기 어려운 기억이 얼룩져 남은 것이다. 사람 만나고 떠나가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삶이 허락하는 조건과 지역이 서로 맞지 않으니 당연하다. 다투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다짐한 친구 사이도 머지않은 시간 내에 화해로 돌아서는 일이 빈번하다. 새로운 벗과 교류하는 것보다 틀어진 오래된 친구가 오히려 편하다. 지나온 세월 속에 만난 인연을 정겨워하고 손에 익숙해진 소품을 아끼는 이치를 조금씩 배워 간다.
첫댓글 한해를 정리해 가야 하는 시기에 이런저런 인연을 어떻게 갈무리 할까 고민하면서 김작가님의 글을 대합니다
한갓 나무조차도 덜어낸 욕심을 부질없이 간직함을 탓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먼 타국 땅에서 건강관리 잘 하시고 의미있는 한해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