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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어떤 특정한 날의 기억이 일생 동안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이다. 나에게 1994년 7월 8일이 바로 그런 날이다.
그날도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둘째 강의가 채 끝나기 전인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고 전교에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몇 분 후이면 정규적인 업간체조시간인데 말이다.
교내가 술렁거렸다.
가끔 비상 집합이 있긴 하지만,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수준이었다.
농한기라 농촌 동원은 아닐테고, 대학생들을 자주 불러내는 방공호 공사나 케이불 공사도 공구 착용 없이 맨손으로 나가는 건 아닌 듯 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난 것 아니냐?”하는 소리가 가장 타당한 집합 이유로 여겨졌다.
당시는 김영삼과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있던 때였다.
김일성은 “내가 남조선에 내려가 서울시민 앞에서 ‘김일성이 왔수다’ 한 마디만 하면 그 자리에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모두가 통일이 눈앞에 왔다고 확신하고 있는 터인데 전쟁이라면, 이건 김영삼의 뒷통수가 아닌가?
하긴 6.25도 일으켰는데, 못할 것도 없는 양아치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익혀두었던 대피 메뉴얼을 상기해 보기까지 했다.
운동장에 교직원, 학생들이 빠르게 집합하였다.
단상에는 도당의 간부들이 여럿 나와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화석처럼 굳어 있었고 이어 한 간부가 ”김일성의 사망“소식을 침통한 목소리로 전달하였다.
순간 궁금증에 술렁이던 장내가 얼음처럼 굳어졌다.
잠시 후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나고 점차 통곡으로 변했다.
정오를 맞추어 조기가 오르고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온 나라가 거대한 장례식장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세살배기 딸이 ”추모놀이“를 하고 있었다.
초상화 앞에 꽃을 놓고 ”아이고, 아이고~“ 땅을 치며 우는 흉내를 내는 모습이 어찌나 처량한지 식구들도 덩달아 눈굽을 적셨다.
모든게 꿈처럼 믿기지 않더니, 세살 아이가 저러고 있으니 이게 진짜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는건가?
갑자기 온 나라가 ”영적 구세주“를 잃어 버린 셈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그는 일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찾아 준 해방의 은인이요,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였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김일성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었고 세계만방에 빛내신 분이시다.
미제와 남조선괴뢰가 일으킨 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셨고 이 나라를 세상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만드셨다.
온 세계가 우러르는 인류의 태양, 불세출의 영웅!
그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다.
주체사상의 창시자요, 거룩한 교단의 교주였다.
“신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는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잠시 심장을 멈출 수는 있어도 영원히 그가 죽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지면 작은 솔방울이 "수류탄"이 되고, 천하를 주름잡는 "축지법"에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이 산산조각나지 않았던가?
어떤 마법을 써서라도 그는 "부활"할 것이다.
어떤 천재지변을 통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한 세기에 두 제국주의를 타승한 전설적 영웅, 천상천하 유일무이한 위인의 심장이 고동을 멈추다니?
"이건 거짓말이다." 나는 못박듯 되뇌였다.
그러나 누가 믿거나 말거나 모두가 바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온 나라 인민이 상제가 된 가운데 열흘 장과 백일 애도기간이 거행되었다.
애도기간에는 상적 행위도 금지되었고, 관혼상제도 모두 미루거나 간소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결혼이나 환갑같은 길사는 미루어도 괜찮겠지만, 상을 당한 사람들은 슬픔마저 절제해야 했다.
나는 아침이면 출근하여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산에 올라 화환을 엮을 꽃을 꺾었다.
지금도 길에 나서면 산과 들에 핀 꽃들을 보며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7월은 꽃이 많은 계절이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꺾었는지 들꽃이 동이 나버렸다.
닭대신 꿩이라고, 꽃대신 풀대며 나무가지를 끼워넣어 다발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눈물은 내려가고 밥술은 올라간다고 했던가.
부모 상이든, 국상이든 먹지 않고는 제 아무리 효자라도 곡을 할 수가 없다.
대식구의 며느리인 나는 식구를 먹여 살릴 걱정을 한시도 놓을 수 없었다.
부모상도 삼일을 채우기 어려워 당일에, 관도 없이 "직파"하는 북한 실정에 백일애도는 길고 긴 절제의 연속이었다.
“애도미”는 며칠 못가 떨어지고 퇴근 후에 빵을 팔아 땟거리를 마련하던 노릇도 할 수 없었다.
저녁마다 “김일성 동상”에 올라 헌화하고 호상하면서 나의 몸은 점점 지쳐만 갔다.
영양실조를 겪은지 몇달 지나지 않은 때여서 풍선처럼 가벼워진 몸은 땅밑으로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걸 애도기간 호상을 서며 새삼 깨달았다.
우리 학부의 호상근무 시간은 주로 저녁시간 부터 자정이었다.
그날도 나는 헌화하고 담당구역에서 호상을 서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탓인지, 그곳에 오르니 통곡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듯 했고, 머리가 뗑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의료봉사대 천막 안이었다. 내 옆에 몇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처럼 바싹 야윈 여자 둘과 어르신 한분이었다.
어르신은 애도기간 하루도 빼지않고 동상앞에 앉아 울며 넋두리하던 할머니였다.
식사는 언제 하고 잠은 언제 자는지 모를 정도로 애도에 진심이더니 아마도 탈진을 하신 모양이었다.
나는 안정을 취한 후,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은 그런 나를 보며 호상근무는 나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애도기간'의 일거일동이 그 누군가의 눈에 의해 기록되고 있음을 알기때문이었다.
소식을 듣고 근처에 사는 시누이가 집에 왔다.
미용사인 그녀의 시아버지는 호프농장 부기장이었다.
양강도는 기후조건이 호프재배에 적합한 곳이다.
호프농사가 잘 되고 수출을 많이 할 때는 기름이며 설탕, 쌀을 쌓아놓고 먹었다며 옛말하는 시누이다.
큰 집이 무너져 삼년이라고, 그 집은 배급 없이도 끼니를 건늬지 않고 근근히 살고 있었다.
대신 매운 시집살이에 머슴이나 다름없이 산다며 지나는 길에 들려 한참씩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녀는 사흘에 피죽 한끼도 먹은 티가 나지 않는 나를 흩어보더니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때는 끓여야지. 배급을 안주면 굶어서 죽을 작정이요?
대학을 백개 졸업하면 뭐하오?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든든하고 봐야 된다니"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상태가 말이 아닌 올케를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막말을 하다니, 나는 시누이가 너무나 밉고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공부 안했으면,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반문하는 듯한 나의 태도에, 그녀는 대답 대신 자루를 하나 챙겨 따라 오란다.
시누이는 나를 이끌고 산길로 한참 가더니 어느 감자밭에 들어섰다.
개인 감자밭이였다.
시퍼런 감자 숲에서는 아릿한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사방을 살피더니 감자숲 사이에 작은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뿌리밑에 손을 넣고 우물대더니 애기 주먹만한 감자알을 뽑아냈다.
숨겨두었던 보물을 찾아내 듯 한 알씩 끄집어낼 때마다 나를 향해 치켜올렸다.
“새기(새아기), 콩알만한 감자는 다치지 말고 큰 것만 따야 해. 작은 애들은 또 자라야 주인이 먹지.”
심성고운 그녀는 그 상황에도 씨를 심고 가꾸었을 주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저런 식으로 언제 내 자루까지 채워주나 싶어 조바심이 났다.
망이라도 잘 봐야겠다 생각하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변을 살피는데, 그녀가 또 소리질렀다. "아니, 남의 밭에서 뻐뚜륵 하니 서있으면 어쩌자는기요?
빨리 들어와 엎드려야지.
어이구, 도둑질두 손발이 맞아야 해먹지비...쯧~쯧~"
그제서야 나는, 내가 다름아닌 "도둑"임을 지각했다.
맹탕한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도둑질이라도 가르치려고 그런 일을 벌였을까, 지금은 시누이의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내숭을 떨고 젊잖을 빼다가는 굶어죽을 수도 있음을 경고해 주고 싶은 것이였으리라.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땅을 일구어 농사지을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큰 소득이었다.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에게 현장체험은 필수코수였다.
그날부터 나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감지하지 못했던 "고난의 행군"에 서서히 익숙해 갔다.
지금도 북한의 "민둥산"엔 내가 나무 등거리를 파내고 한땀한땀 일궜던 땅, 1,000평이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나는 몸을 낮추고 감자숲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본 대로 감자알을 뚜져내기 시작했다.
아직 트지 않은 땅은 도둑에게 어린 새끼들을 내어주지 않을 심산으로 딱딱하게 맞서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통채로 쑥 뽑은 다음 큰 놈들을 줏고 싶었지만, 견습생인 만큼 메뉴얼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애도기간이라 밭은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격으로, 나에겐 그 정적이 오히려 살 떨리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둘은 한 뙈기를 다 요정내면 안 되겠다 싶어 이 밭, 저 밭 건너다니며 "피해분할"센스까지 발휘했다.
그리고는 그 옆 콩밭에서 배도 부르지 않은 콩꼬투리까지 한 웅큼 따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시누이는 노획물을 모두 내 주머니에 덜어 주었다.
사실은 강냉이 쌀이라도 몇 되박 훔쳐다 주고 싶었는데, 눈이 많아 그럴수도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연로한 부모님과 형제들이 다 나한테 얹혀사는 까닭에, 항상 나를 위해준 유일한 사람이 그녀였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저녁준비를 했다.
식구들도 빈자루에 저녁거리를 가득 채워 온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감자 껍질을 벗겨 솥에 앉힌 후 불을 지폈다. 감자가 다 익을 쯤, 소금을 살짝 놓고 버무려 둔 강냉이 가루를 위에 얹었다.
뚜껑을 열지 않고 잉글 불에 뜸을 들인 후, 주걱으로 감자를 보드랍게 부수면서 가루와 잘 섞으니 우리가 즐겨먹던 "감자투시"가 완성되었다.
"감자투시"는 양강도 사람들의 밥상에 빼어 놓을 수 없는 주 메뉴이자, 생명을 유지해준 "보배 음식"이었다.
금방 솥에서 퍼내어 먹을 때는 포슬포슬 쫀득하니 먹을만 하지만, 식으면 뚝뚝한 강냉이 식감에, 감자특유의 묵은 냄새로 먹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리는 "두 얼굴의 음식"이다.
도둑질까지 해가며 온 식구의 한끼를 챙기고 나니 내일의 걱정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그 언덕을 올라야 했다.
그 누가 추억은 아름답다 했던가?
나에게 "칠월 팔일" 의 추억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요, 영원히 해소되지 아니할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첫댓글 소름 돋는 실화를 잔잔하게 풀어 내시는 한나 선생님의 지난날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는 그동안 분에 넘치도록 행복했다는 걸 새삼 느껴 봅니다. 감사합니다.
장시인님, 언제나 긍정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좋은 글 많이 쓰고 계시죠?
늘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기망과 허구의 끝없는 선전선동으로 영혼이 사로잡힌 삶의 현장을 보면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합니다.
국가의 폭압적 애도 강요 앞에서도 가족의 생존을 걱정하며 감자밭을 뒤져야하는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신 작가님의 평정심과 필력에 감탄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우리 민족의 자유,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헉~ 댓글이 더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