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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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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스크랩 안동권씨 권진사댁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17 12.03.12 1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안동권씨 권진사댁(安東權氏 權進士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235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235)
건 축 주 :  권철연(權喆淵)
건축시기 :  1880년(고종 17)
소 유 자 :  권탄웅(관리자 : 권탄웅)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1987-05-13 지정, 3동


건축 특징
처마 길이가 긴데도 추녀들림을 아주 미약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 구성
건물은 대문채·별채·본채로 크게 구분된다. 9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마당의 좌측에는 3칸의 서실이 있으며, 대문채와 마주하여 口자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정침의 양측 허리부분에는 토담을 좌·우로 뻗어 내외마당으로 공간구분을 하고 있으며, 동향 건물 임에도 툇마루를 설치하는 등, 남측 면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평면구성이 돋보이는 주택이다.

 

문중 이야기
- 충재 권벌과 춘양
충재(?齋) 권벌(權?)의 정자와 그것에 딸린 전장은 춘양에도 있었다. 충재 권벌은 삼척 부사로 부임하던 중 춘양에 들러 이곳 산천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거연헌(居然軒)이라는 산장을 짓게 하였다. 그것을 후에 다시 정자로 바꾸어 짓고, 한수정(寒水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한수정에 딸린 전답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인연으로 하여 그 후손들의 한 갈래가 춘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안동권씨 충재공 계열의 춘양 입향조는 24대 권착이다. 그는 20대 충재 권벌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2남 권세충(權世忠)의 3남이다. 권착은 권벌의 정자와 전장이 있던 춘양에 옮겨 살았다. 그 후 안동권씨 31대인 권중하(權中夏)는 춘양역 자리인 은곡으로 옮기고, 그 아들인 32대 권철연은 의양에 집을 지어 거주지를 옮겼다. 원래 이곳은 안동김씨의 기지였으나, 권진사 댁이 들어온 후 하나 둘 떠나가고, 이제는 정자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한다.


관련이야기
- 안동권씨 권진사댁 건물 구성
건물은 대문채·별채·본채로 크게 구분된다.

대문채는 전체 정면 9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밖에서 보았을 때 대문채는 무슨 성곽처럼 견고하고 웅장하게 처리되어 있다. 중앙의 1칸에는 솟을대문을 마련하였다. 지붕 자체가 좌·우의 행랑채와는 독립되어서 조금 높게 가설되어 있다. 대문도 물론이지만, 좌우 행랑채도 보통의 집들의 높이보다 더 높게 지어져 있다.

좌·우의 행랑채는 동일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바깥에서 볼 때 이 벽면은 위 1, 아래 4 정도의 비례로 분할되며, 아래쪽에는 돌담, 위쪽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돌담 영역은 아이의 머리만한 크기의 둥글둥글한 강돌들을 흙을 이용하여 15층 정도 두텁게 쌓아올리고, 위쪽은 벽면 쪽으로 사선을 지으며 올려붙이는 방식을 썼다. 이 부분에서는 칸의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위쪽에서는 칸의 구분이 나타나며, 벽면에 창을 둔 곳도 있다.

행랑채의 양쪽 끝에서는 바깥담장이 이어지는데, 담장의 높이는 행랑채 아랫부분보다 낮다. 담장의 위에 얹은 지붕구조의 끝 선과 행랑채의 담 영역이 끝나는 높이는 서로 같다. 담장은 행랑채 벽면 아랫부분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행랑채는 왼편의 경우에는 대문 쪽으로 붙은 2칸에 방이 있고, 오른편의 경우에는 대문에서 가장 먼 1칸이 방이다. 나머지 칸은 헛간이다. 대문은 동향을 하고 서 있다.

별채는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데, 뒤쪽이 되는 남쪽 편에 세 뼘 정도를 달아매어 놓았으므로 측면은 1칸 보다 좀 넓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은 왼쪽 2칸에는 방이 만들어져 있고, 오른쪽 1칸에는 마루방이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앞과 좌우의 3면은 폭 좁은 쪽마루가 가설되었다. 오르내리는 계단은 따로 없고, 왼편 끝 칸 부분에 섬돌 하나가 놓였을 뿐이다.

본채는 口자 구조이다. 앞 선으로 나와 선 사랑채는 정면 7칸 규모이다. 왼편 끝으로는 1칸 반 규모의 방이 있다. 이 방은 기둥 앞 선까지 나와 있고, 앞으로 쪽마루를 덧붙이고 있다. 이 점은 이 건물의 오른 편 끝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른 편 끝 부분에는 바깥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옆마루가 있고, 안쪽으로는 1칸 규모의 마루방이 있다. 이 마루 방 역시 앞쪽 기둥 선 까지 나와 서 있다. 그런데 이 마루방의 벽면은 미학적으로 상당히 미려한 나무판벽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부분에서 보이는 나뭇결의 모습과 목재의 색감, 그 결구와 평면의 모습들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마루판 바로 위에는 나무틀을 만들고 그 사이에 다섯 조각의 나무판을 옆으로 일선으로 박아 넣었다. 그 위로 벽면은 위 1, 아래 3의 비례로 구분된다. 위에는 마름모꼴 광창을 옆이 긴 사각형 모양으로 가설하였고, 아래에는 중앙에 2쪽의 나무판 문을 두고 좌·우에 나무판 벽을 만들었다.

나무판 벽은 각 2개씩의 나무 판을 수선 방향으로 깔고 중앙 부위에는 좀 사이를 띄워서 좁은 판재를 횡으로 박아 넣었다. 좁은 횡판 위에는 꽃무늬 장식물을 각 2개씩 붙였는데, 그것은 안쪽의 판재와 결합하는 못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중앙의 나무판 문은 또 위 1, 아래 1.5 정도의 비례로 횡분되며, 위에는 마름모꼴의 창살을, 아래에는 나무판을 깔았다. 문의 나무판 부분도 좁은 횡판에 의해 중앙 부위가 2분 되는데, 이 부분의 횡판이 자리 잡고 있는 높이는 위의 것은 좌 우 나무판 벽면의 아래쪽 것과 같은 높이이고, 아래의 것은 그 보다 더 낮다.

건물 중앙 부분 4칸은 앞에 반 칸의 앞마루을 두고 뒤로 물러나 있다. 벽면은 오른편 2칸과 왼편 2칸이 조금 다른 모습이다. 오른편 2칸은 4쪽 방문을 달고 그 위에 두 뼘 정도의 벽을 두었다. 왼편 2칸은 아래에 5쪽으로 분할된 나무판 구조를 만들고 그 위는 위 1, 아래 2 정도의 비례로 벽면을 갈라서 아래쪽 중앙에 2쪽의 방문을 두었다. 이 방문은 오른편 2칸의 방문보다 춤이 낮다.

건물의 오른쪽 측면은 3칸만이 사랑채 쪽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부분에서 바깥채와 안채를 가르는 담장이 쳐져 있다. 안과 밖을 가르는 담장은 건물의 왼쪽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보인다.

본채의 왼쪽은 8칸 규모로 되어 있다. 앞으로부터 제 2칸에 측문이 열려 있고, 제 3칸에서 담에 의해 안 밖으로 나뉘어 있다. 오른편과 왼편의 안팎 구분 담 부분에는 문이 가설되어 통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채는 사랑채와 같은 평면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루를 두었다.

마루의 뒤편 천장 아래로는 횡목 사이에 틈목을 두어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 있다. 그 조금 아래쪽으로는 폭 좁은 시렁이 있다. 오른편으로는 오른쪽 연결채와 연결되어 있는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방이 있다. 왼편의 1칸은 앞으로 1칸 넓이의 마루가 붙어 있는 방이고, 그 왼편으로는 앞으로 1칸 나와서 측면 2칸 규모가 되는 방이다. 그 왼편으로는 왼편 연결채와 붙어 있는 부분이다. 뒤쪽 부분은 총 7칸인데, 좌 우 끝편에 반 칸씩 나뉘어져 있고, 중앙의 6칸은 제대로 된 칸 모습을 갖추었다.

굴뚝들은 모두 건물 처마 바깥까지 끌어내어 처마 높이에 이르는 사각형의 구조물을 기와장과 백회를 써서 만들어 놓았다. 나무를 태워 난방을 하는 경우 연기는 처마 끝을 타고 건물 전체를 그을리게 마련이다. 처마 밖으로 독립되어 서 있는 굴뚝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권상경(權相經)
- 교유 인물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 가양주를 빚지 못하게 한 권진사와 그의 가계
권착(1632~1705)의 자는 경우(景雨)이다. 묘는 소천 선애(仙厓) 성두방(星斗坊)에 있다. 배위는 여주이씨이다. 안동권씨 충재공 계열의 한 갈래가 춘양에 들어와 살게 한 사람이다.
권착의 아들 진사 권두광(權斗光, 1653~1726)의 자는 명언(明彦), 호는 일노당(逸老堂)이다. 묘는 석현(石峴) 미곡(美谷)에 있다. 배위는 의성김씨 김수(金燧)의 딸로 학봉 김성일의 현손이다.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두었다.
권두광의 양자는 권혜(權蕙, 1679~1755)인데, 생부는 권두위(權斗緯)이다. 묘는 춘양 나복당에 있다. 통덕랑이고, 증직 장락(掌樂) 정(正)이다. 배위는 숙인 예안김씨이고, 후 배위는 재령이씨 말암 이재의 딸이다.
권혜의 장자는 권정통(權正通)이고, 2남은 권정근(權正近, 1719~1797)이다. 진사 권철연의 가계는 권정근 계열에 속한다.
권정근은 자가 지겸(持謙)이고, 묘는 서당곡에 있다. 배위는 풍산류씨, 후 배위는 풍산김씨이며, 장자는 권사격(權思格)이다. 권사격의 장자는 권각도(權覺度)이고, 권각도의 장자는 권재보(權載輔)이다. 권각도는 6남을 두어 2남은 양자를 보냈는데, 진사 권철의 가계는 5남 권재익(權載益, 1820~1901)에게로 연결된다.
권재익은 자가 도겸(道謙), 배위는 완산이씨이고, 묘는 관석 옥녀봉에 있다. 아들은 권중하(權中夏, 1849~1919)이다. 묘는 법전 방현에 있으며, 배위는 진성이씨이다.
권중하의 장자 권철연(權喆淵, 1874~1951)은 자가 성길(聖吉), 호가 성암(省庵)이다. 1888년에 생원이 되었으며, 유고가 있다. 묘는 거곡에 있으며, 배위는 진주강씨, 후 배위는 진성이씨, 3배위는 청주정씨, 4배위는 김해김씨이다.
하루는 밀양에서 시집오신 분이 가양주를 빚어서 올렸다. 권철연은 맛있게 마시고, 누가 빚었는지를 물어 칭찬을 하고는 다시는 빚지 말라고 일렀다. 곡식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권철연의 근검절약하는 삶의 태도를 알게 하는 부분이다. 후손들은 권진사의 촌부 같은 삶의 모습을 다투어 이야기해 주었다. 손자들을 요와 베개도 주지 않고 맨바닥에 재웠다는 이야기, 어떤 과객이 오든 과객과 똑같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 독서뿐만 아니라 풀 뽑기, 노끈 꼬기 등으로 소일하기도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줄을 이었다. 춘궁기에는 동네 사람들과 똑같이 먹도록 안식구들에게 엄명을 내렸으며, 봄에는 보리쌀과 쑥을 넣은 죽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 종손이 들려준 이야기들이다.
권철연의 장자는 권상경(權相經, 1890~1955)이다. 권상경은 자가 정부(正夫), 호가 석당(石堂)이다. 문집이 있다. 묘는 운곡 동촌에 있고, 배위는 진성이씨이다.
권상경의 장자는 1910년생인 권영환(權英煥)이고, 손자는 1943년생인 현 종손 권탄웅(權坦雄)이다.
권탄웅에 의하면 권철연은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에게 배웠고, 곽종석의 사후 문집의 출간을 위해 거금을 출연하였다. 당시 곽종석의 제자인 김창숙(金昌淑) 등은 유림계열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그 돈은 문집을 발간하는 대신 독립자금으로 전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탓인지 권철연의 자제인 권상경은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해서 활동하였고, 그 공으로 2005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고 한다.

봉화 > 법전춘양권 > 의양리
- 철길 따라 만산고택 지나 태고정까지, 의양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는 춘양면소재지가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봉화의 여러 면소재지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지 않나 여겨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춘양이 비교적 넓은 삶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춘양목의 집산지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봉화 현동 사이의 35번 도로는 방전에서 88번 도로로 갈라져 영월 쪽으로 북행한다. 방전으로부터 88번 도로가 춘양을 향한 북행을 시작한다면, 법전을 거쳐 온 철도는 수청거리에 이르러 춘양을 향한 북행을 개시한다.
그 두 지점 사이의 북쪽 삼각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춘양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이다. 북행을 개시한 철도가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의양리 지역은 남산리이다. 남산고을은 철로 주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동향을 하고 있다. 의양의 남쪽 산록에 있다고 하여서 남산리, 또는 남산편이라고 한다. 남산편을 지난 철도는 평촌고을에 이른다. 이곳은 조금 평탄한 들로, 남서쪽 방향으로 의양에서 제일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돌마 또는 들마라고도 하며, 안동권씨가 세거하여온 마을이다.
평촌을 지난 철도는 괴정못티고을에 이른다. 만석봉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인데, 300년 전 재령이씨가 지은 괴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괴정못티 위쪽으로 나아간 철길은 현말 서편을 훑고 올라간다. 현말은 현동 또는 현리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고려 충렬왕 때 호군 김인궤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1907년 봉성에 위치하던 현청이 화재로 소실되자 이 마을에 현청을 두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현청은 1913년에 현재 봉화 읍내로 다시 옮겨갔다. 현말이라는 이름은 현청이 있었던 고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현재 춘양면사무소 영역의 북서쪽 부분을 이룬다. 이곳의 북쪽으로는 만산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철길은 만산고택 서쪽으로 올라서서 태고정 아래쪽으로 휘돈다. 태고정 북쪽으로는 낙천당이 있다. 이 부분은 낙천당고을이라 불린다. 낙천당은 태고정과 나란히 서 있는 정자이다. 이곳에는 김해김씨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이곳에 김장군·강장군·곽장군 셋이 난을 피해 살다가 난리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갈 때 즐겁게 지냈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도 이 정자의 이름으로 불렸다.
태고정에서 휘돈 철길은 호를 그리며 돌아서 동쪽으로 굽어 내린다. 그리하여 현 마을의 동편에는 역사가 자리 잡게 된다. 역사의 위쪽, 철길 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운곡이다. 마을 동쪽의 높은 산에 늘 구름이 머물고 신선이 사는 곳 같다고 하여 운중선인이라 하였고, 그 뜻을 담아 운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역사의 남서쪽, 시내 서편으로는 한수정이 있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동촌·동마·한수리 등으로 불린다. 한수정은 충정공 권벌이 지은 정자이다. 여기에는 300여 년 전에 남양홍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의양리는 법전을 지나 동행한 철길이 춘양을 싸안으며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는 곳, 그 엄지손가락처럼 돌출된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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