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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 제 11시집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제 1 부 : 민화 한 폭
사랑의 언어
오월 밤 연가
민화 한 폭
상대성 원리
덧셈과 뺄셈
대중목욕탕에서
수박밭 며느리
이 서방 이야기
공습경보
억새꽃
겨울밤에
기억 마을
미세먼지 공화국
어떤 고해성사
빗속의 연가 .1
빗속의 연가 .2
빗속의 연가 .3
빗속의 연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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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왕소나무 고집
행복
대나무
왕소나무 고집
일기
달걀 장사 사모님
어항 속
나무처럼
나목(裸木)
겨울 산정에서
용의 꼬리
길을 걸어가다가
징검다리 건너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세월 산책.1
세월 산책.2
세월 산책.3
세월 산책.4
세월 산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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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하늘을 접어 펼쳐 넣을
감동
거울
독도
빈 바다
세월이
시침은 되돌릴 수 있어도
4월의 바람
칠월 칠석(七夕)
산사(山寺) 풍경
가을꽃
설야(雪 夜)
몫
땅
하늘을 접어 펼쳐 넣을
바람일기 .1
바람일기 .2
바람일기 .3
바람일기 .4
18
제 4 부 :여름바다를 꽃다발처럼
방패로 든 양심
거울이 되어
삶의 자투리
사람과 인간
여름바다를 꽃다발처럼
그믐밤 그 바다에는
바닷가에
솔바람소리 한 줌 빌어다
타고 남은 재
저 은(銀)밭에 빨간 꽃송이를
보내주는 만족
처제
아내 말씀
民 譚.28 - 쑥부쟁이 전설
民 譚.29 - 들국화 전설
民 譚.30 - 호랑이와 대포
民 譚.31 -심부름꾼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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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언어
철철 끓는 쇳물도
빨갛게 달아오른 인고의 터널을 지나야
무서운 힘, 강철로 굳어지고
혼 깊은 불씨 한 덩이
춥고 어두움 속에 남모르게 싹 터
불붙은 가슴 아침 해로 떠오르나.
오월 밤 연가
노을 꽃
막 지고 나면
밤 꽃몽올 다시 피어나는
오월 밤 달무리
철없는 불나비
눈부신 불빛 따라
무작정 찾아온 것도
큰 죄가 되나요
새 생명
싹 터 올라
천상에서 지상으로
울려 퍼지는 사랑의 음률
개골, 개골골, 개골개골
둔산동 샘머리 공원
공사장 빈터마다는
오월 밤의 연가만이.
민화 한 폭
보름 달빛 곱게
색동옷 받쳐 입고
세월 나들이 나선
백두대간 암호랑이는
계룡 장터 구경나온
숫총각 하나 낚아
등 위에 들러 업고
가을 하늘 아래 첫 동네
처녀 하나 어금니로 찍어
새벽달 목 넘어갈 때까지
추억 속 대바구니에
과거의 다슬기 줍기.
상대성 원리
여인의 마음과
가야금의 산조(散調)는
튕기는 듯 쓰다듬어야
제소리가 울리고
남자의 자존(自尊)과
북소리의 함수는
뛰는 심장을 한껏
재우는 듯 두드러쳐야만
제자리에서 풀린다.
덧셈과 뺄셈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부자는
돈을 잘 벌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베풀기도 잘하는 사람이 아닐까
덧셈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뺄셈도 잘하는 사람이 똑똑한 부자
9백 원에 백 원을 더하면 천원이 되고
천원에서 백 원을 빼면 9백 원이 된다는 건
이 세상 부자들이 다 알고 있지만
훌륭한 생각에 좋은 실천을 더 하고
받은 사랑에서 자기희생을 빼면
복이 되돌아오기도 하지만
이기심의 무기가 된다는 진리를
많은 부자는 잘 깨닫지 못한다
우리 인생의 덧셈과 뺄셈
세월이 덧셈을 능숙하게 잘할수록
오늘의 우리 삶은 뺄셈에 능란하고
오늘의 욕망이 덧셈에 빠지면
내일의 만족과 행복은 뺄셈으로 빠진다
대중목욕탕에서
한 뼘의 부끄러움마저
고집하고 하다 보면
남자 때밀이 신분이 드러내고
한 곳 더 아쉬워 가리면
여자 때밀이 신분이 나타나
탕 입구부터 남탕과 여탕으로
탕 안의 색깔과 무게도 구분되어
어깨 축과 말꼬리가 달라지지
앵두나무 우물가가 목욕탕 안
소매 깃 부딪친 사람 모두가
알살이 되어 가슴 깊은 속까지
오르가즘에 오를 수 있다면
등이라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세상 뒤흔들어 놓은 뇌물성 외유도
수서 땅 사건과 낙동강 페놀 오염도
때 씻듯 벗겨낼 수 있었을걸.
수박밭 며느리
봄 나비, 가을 고추잠자리로
꽃과 나무, 창공이건 바위거나
싫도록 앉았다 마음껏 날고파서
말라비틀어져 가는 세월
역류하는 물줄기 되돌려 놓고
동굴 빠져 불빛 따라 왔어요
토끼 같은 자식, 능구렁이 남편
여수 같은 시어머니, 호랑이 시아버지
헌신발작 엎어놓듯 해놓고
보름달 바라보며 헛간 기둥 부여잡고
삼백예순 닷새 그 어느 하루인들
뼛속 깊이 찾아드는 전율, 그 추위
그 누구 하나 알아주면 덮어줄까
2.5t 트럭에 내 인생 모두 싣고
망 뚫고 나온 까투리처럼
들판 지나 숲, 비탈진 언덕에
장승처럼 서 있어요
산 아래 저쪽에 불빛이 보여요
내 아직은 잘 몰라요
한 세상 손뼉 치며 살아가는 법
민들레꽃은 밤에 활짝 피고
설익은 수박도 달빛 받아
분홍빛 속살 더욱 돋아나고
한낮 땡볕 받아 세상사는 맛
찾아내는 것이 삶이 아니겠어요
삶의 답은 모범 답이 따로 없고
오답이 더 정확할 때도 있거든요.
이 서방 이야기
사시장춘 밤낮없이
베잠방이 땀 젖게 살아온
우리 동네 이 서방
산비탈 다랑논 아홉에다
딸만 아홉인데
기름진 물갈이 논 반 다랑이
장군 닮은 아들 하나 기다리다가
딸 하나에 다랑논 하나
흰 머리털 둘
딸 둘에 다랑논 둘
흰 머리털 넷
딸만 열이 됐고
반백이 되었지만
진흙 바닥 헛디딜까
푸른 하늘 흰 구름에
마음 주며 살고 있지.
공습경보
첫 번째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보통 승용차론 차체가 약해서 불안하다며
앞뒤로 공룡처럼 뿔 달린 지프 사서 몰고 다닌 지
불과 몇 달 안 돼, 고향 찾아가던 길
시골집, 처가 집 한 눈에 들어오는 들녘
하루에 겨우 두세 번 오갈까 말까 하는 건널목 위에서
화물열차와 정시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늦둥이 아들만 품에 안고, 노부모 앞질러
이승 떠난 친구 중 호걸 유명동 교수.
두 번째 공습경보 벼락이 떨어졌다
고향에 허름한 땅 사서 자동차 학원 차려놓고
교통법규만은 전직 교사인 자기가 강의해야 한다며
안전 운전만이 파리 목숨 지켜준다며
제 속도 제대로 한 번 내보지 못한 2.4 그랜저는
공터만 있으면 수시로 세워 놓고
아예 걷거나 남의 차 끼어 타더니
법(法)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옆구리 뚫고 나가
빈손으로 저승 찾은 십 억대 부자 정헌주 사장
세 번째 공습경보가 지축을 흔들었다
사람 살만한 곳 찾아
그래도 조금은 조용한 곳
등따슨 사람들 마주 보고 시나 쓰며
시인 같은 사람들 속에서 시인답게
남은 생애 살아보겠다며 정담 나눈 지 며칠
자동차 운전대에 세상살이 운전까지
부인한테 맡겨 놓고 아주 조용한 곳 찾아
이승 빠져나가 가슴에 숨어버린 정의홍 시인
네 번째 공습경보는
정수박이 위에서 인공기 펄럭거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국방부 경보반이 맡았다.
억새꽃
시월의 높푸른 가을하늘 받아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갈바람
색깔도, 향기도 탐내지 않은 채
날카로운 줄기, 순백(純白)의 지조로
지나온 계절의 화려함을 접으며
산자락 넉넉히 마땅한 자리 잡아
깊은 뿌리를 안으로 내리고서는
한 송이 꽃으로 피지 못한 한(恨)을
온종일 몸짓으로만 비벼대다가
석양으로 색칠해 가는 산허리
노랑, 빨강 단풍 숲 잔치 속에
찬란하지 않게, 어쩜 여유롭게
바람에 머리칼을 쓰다듬어보는
가을꽃, 그대는 초로(初老)의 사진첩
나도 때로는 누군가에 저렇게
한 번쯤 흔들려 보고 싶음이네.
겨울밤에
까맣게 타들어 가는 의식
체온이 끊겼다
밤마다
하루살이 떼 앵앵거리는 달빛
조금씩 되살아나는 불꽃
아래로 그 아래로 더 아래로
밟아도 뭉개도
꺼지지 않는 단단한 곳
텅 빈 공동(空洞)에다
잊혀진 그림을 그리자
날아간 목소리를 찾아
물레방앗간 빈 피댓줄
저녁마다 돌아가는 소리
기억 마을
구름 속에 감춰진
봄비가 조용히 내리듯
추억 속에 살아온 마을
햇살 속에 숨겨진 그림자가
살그머니 밖으로 기어 나오듯이
기억 속에 그리움만 살아남은
추억은 기억 마을에
아직도 생생한 얼굴 모습들
아름아름 잊혀가는 이름들
그리움만 성장 과정 마디마다
석우 달석 윤수 성희 덕순 길자
옹기종기 모여 살던 기억 마을
김 씨 이 씨 박 씨 윤 씨 전 씨
이 씨는 칠십년을 터 잡고 살고
기억 속에 새겨 넣기도 전에 떠난 박 씨.
미세먼지 공화국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세상이
언제 어디서부터인가
흑백텔레비전 속으로 피난 나갔다
높고 파란 하늘도
도시의 건물과 거리까지
울창한 숲과 맑은 시냇물을 몰고서
세상 구경나온 사람들을 유혹하여
어제까지 말짱하던 대낮이
아침부터 어둑어둑 물들어오고
사람들의 폐 속에서
심장과 머리통까지 붉은 먼지가
핏줄에 업혀 핑핑 돌아가고 있으니
숨쉬기 힘든 공화국에 태어난
간난 아기가 빨강 오줌똥 싸며
어른으로 커갈까 참 걱정이다.
어떤 고해성사
신부님 제가 주중 대낮에
눈이 먼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눈 똑바로 뜨고 몰래 들어가서
말린 고추를 들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양심이 널을 뛰어
잘못했음을 고해하러 왔습니다
당장 회개 하십시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 했지요
도둑질은 형제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요
깊이 반성하며 흔적을 지우겠어요
할머니가 볼 수 없을 거라 믿고
고추를 지고 나오며 남긴 발자국을
성사 끝내고 가서 지워야겠어요
오점을 닦아야 겠어요
아멘
빗속의 연가 .1
바이칼호수일까
갠지스강 상류이거나
세느강 혹은 나일강 일지도
아니면 아주 가까운 곳인
대청호수이거나 금강일 수도
모태는 강과 호수의 심원
그리던 하늘로 비상하다
산등성이와 나무가 가로막고
골바람의 등쌀에 못 이겨
산줄기와 해안선을 따라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천사의
고향은 마음속의 수중궁궐 .
빗속의 연가 .2
여름 대낮에 구진 비라도 내리면
늙은 엄마들은 하루가 바빠진다
아이들의 출출한 배를 채워줄
주전부리 준비에 손과 발이 바쁘다
솥뚜껑에 들기름을 골고루 두르고
텃밭에서 따온 애 호박 전을 부친다
담 넘어 기웃거리던 키다리 파초잎
내리는 빗방울은 덩달아 춤을 추고
싱그러운 무화과와, 후박나무 잎
추억 속 유년의 시간을 풀어내는 비
또래들과 함께하는 하루는 정겹다
사랑의 꽃을 피우는 빗속의 연가다 .
빗속의 연가 .3
먹구름이 하늘에 포장을 덮자마자
어둑한 대지엔 번갯불로 번쩍번쩍
천둥까지 멀리서 치기 시작하더니
거칠게 달음박질로 내리 쏟아붓네
우산 없이 나가면 소낙비는 내리고
모처럼 챙겼더니 오던 비도 멈추고
시적인 영감을 구름처럼 몰고 온
낭만파 시인들의 반가운 연인
처마 밑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심장을 더 뛰게 마구 흔들어 놓고
머리 위에 살살 내려앉는 빗방울
하나하나가 작은 호수며 바다네
빗속의 연가 .4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리는 빗물은
방울마다 소망과 의지가 담겨있다
목 타는 풀과 나무의 생명수가 되고
더 큰 뜻으로 강과 바다를 목표로
높은 곳을 추월하지 않는 낮은 자세로
맑은 물 흙탕물을 편 가르지도 않고
시냇물 맑은 호수, 논밭과 흙구덩이
내치거나 따돌리지 않고 포용하며
바위에 막혀 앞이 암담해 보이면
절망을 돌아서 희망으로 가는 지혜
시간과 다투며 살아가지 않으면서
온 세상의 만물과 친구가 되었네요
행복
우리의 마음 밭에서 싹 터
군중의 틈바귀에서 자라나
언제는 라일락꽃 향기처럼
때로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소망이 있는 만족은 행복
보이지 않던 소소한 기쁨도
들리지 않던 사랑의 전율도
마음의 문을 열면 찾아오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희망
꺼져가는 불씨도 살려놓고.
대나무
나에게는
한 송이 화려한 꽃도
한 알의 틈실한 열매도
약속되어 있지 못합니다
언젠가 에는 꽃이 필 수 있고
정말로 언제쯤엔 열매가 열릴 수 있는지
자신도 모르며 살아오고 있는 오늘
비바람이 씻고 지난
몇 십 년 후에는
꼭 한 번 쯤
사랑의 꽃몽올도
믿음의 열매 알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잎 떨어져 가는 아픔을
마디마디에 숨기고 있는
인고(忍苦)의 긴 세월
기도의 내 시간.
왕소나무 고집
모진 돌 깎여 조약돌
조약돌 달아 모래알
세찬 강줄기 품에 안고
돌고 돌아온 세월
류성룡 선생이
강가, 솔숲 자리 펴고 앉아
찾아준 나그네
술 한 잔 가득 따라주시며
귓속말로 넌지시
세상사 고되고 힘든 일
볼 것 못 볼 것
들을 것 못 들을 것
눈 씻고 귀 닦자
타이르실 때
강 저쪽에서 몰고 오는
저 솔바람 소리
오랑캐의 말발굽 소리
세상 온갖 시끄러운 소리.
일기
오늘 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희미한 껍질 한쪽
들어와 차지 않는다
안개 낀 거리의 골목도
겨울비를 맞으며 걷다가
목로에 앉아 입술을 마주치던
따스한 유리컵의 촉각도 되살아나는데
화단에 꽃씨를 묻고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젊었을 때 바라만 보아도 떨리던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날
내 속 깊이 일렁이던
파도 너비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직껏 미뤄온 중대발표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달걀 장사 사모님
아내는 달걀 장사 사모님
나는 수박 장수 선생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양계장 집 아줌마 좀
도와주며 살고 싶다며 몇 번 거들더니
아내는 아파트 통로의 달걀 장사 사모님이 되었고
트럭 운전수와 눈 맞아 도회지로 줄행랑친
수박밭 며느리의 홀시어머니 사정이 하 딱해서
스무 나문 통 남짓 사다가 인심 좀 썼더니
그 이튿날부터 나는 수박 장수 선생님이라는
또 하나의 직함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의 젊은 주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고만 찾기 때문에
알이 굵은 계란과 조금 싱싱한 수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뽑혀서 나가고
작은 것, 깨진 것, 꼭지 빠져 시든 것 만남아
중년 부부인 우리들의 마지막 차지가 된다
사실은 가정에서도 매한가지다.
어항 속
조그마한 방안엔
둥근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엔 사각 어항이 있다
유리 벽 너머에서
오늘을 헤엄치는 금붕어
우리들은 바라보며, 즐기며
내일을 맞이하는 주인
아홉 살짜리 조카 놈의
책받침에 그려진 세계지도
눈 크게 뜨고 찾아야
겨우 보이는 땅
갈라진 틈 벽 양쪽에서
애비와 에미는 속절없이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
샘물이 그리운
금붕어는 용기가 없다
만나고 싶은 부부는
말을 잊은 지 오래다
표정만 움직인다
만나고 싶으면 한 숨결
튀고 싶으면 한 번 용트림
그러면서도 언제나 어항 속
그러면서도 책받침 위 빌며
손바닥 안의 지도일 뿐.
나무처럼
조상과 부모가 존재한 후
내가 있어 가족을 이루고
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듯
뿌리가 없는 나무는 없고
줄기와 가지 잎이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도 열린다
하루아침에 자라지도 않고
꽃과 열매도 때를 기다려
피워 주며 무게 잡지 않는 신사
인간들은 배우며 살아야지
반칙 없이 때를 기다려 피며
가시를 향기로 베푸는 장미처럼
나목(裸木)
화려한 외출 후
물기 마르지 않은 채
욕탕에서 방금 나와
온기 휘감고 있는
중년 여인의 알몸.
삼. 사월의 미모
칠. 팔월의 부귀
구. 시월의 영화
외투 벗어 놓듯
추억 속에 묻어놓고
실핏줄 선명히 드러난
투명한 피부와 심장
원줄기와 곁가지들
생명의 본질만이
영혼의 떨림으로
겨울바람에 파문지고.
겨울 산정에서
하루는
빛처럼 다시 사라져도
조그마한 역사 한 줌
건져놓지 못한 고요의 숲
밤바람 소리마저 떠나버린
침묵의 강
막연한 기다림 속에
상현 달빛이 고마웠다
함박눈 마음 밭에 내려
살 속 파고드는 촉감이 좋았다
달빛 받아 곱게 핀 눈꽃
알가지로 남아 더욱더 좋은
겨울나무 속가지.
용의 꼬리
시차를 두 시간만 앞당겨보면
이십년 전의 풍경 속 과거로
유년의 추억을 나르는 하노이
기억의 폭풍 일렁이는 과거 속
외눈박이 가자미가 된 현실은
빛줄기를 타고 밤의 수면위로
조금씩 헤엄쳐 올라오고 있네
긴 호흡 한 번에 빨려들어선
톤킨만의 투명한 우윳빛 바다
하룡은 용이 바다로 내려와서
꼬리가 떨어져 섬이 되었다네.
길을 걸어가다가
나 안의 나를 찾아
삶의 길을 걸어가다가
험한 빙벽이라도 만나거든
고통도 즐기면서 헤쳐가야지
협곡이 기다리면 거스르지 말고
물길 따라 묻어 흘러가야지
혹간 울창한 숲속의 나무나
향기 없는 꽃이 유혹한다 해도
마음 두지 말고 지나쳐야지
꽃보다 못한 내가 아닐진대
죽은 나무 그늘 밑에서는
잠시라도 서 있지 말아야지
길을 걸어가다가
징검다리 건너
내 예까지 걸어온
반평생은 맨발에 자갈길
뒤돌아보면 가시밭길
한발 헛디디면 빠져버릴
한 치 아래 수렁 길
징검다리 건너 저쪽엔
뭉게구름 꿈처럼 피어나고
논두렁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
저녁놀 받아 불타는 사르비아꽃
보름달 마중 나온 가로수
해 돋는 곳, 달 뜨는 곳
그대 찾아 수십 년
징검다리 건너 새로운 길엔
땀에 젖은 작은 이마 씻어 줄
새색시 기다리고 있다네
지나온 길벗 삼아 노래하며
오는 세월 악수해줄 수 있는.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나의 우둔한 머리로서는 계산이 어려워요
셈 헤아려 볼 재간이 없어요
입은 당장에 반창고로 봉해 놓고
쎄일할 때 사 입은 단벌 기성복
걸레 되어 헤어질 때까지
피땀으로 쌓아 올린
성냥갑만 한 집 한 채
불도저에 밀려 나갈 때까지
동전 한 잎 손까딱하지 않고
걸어온 가시밭길 몇십 년
몫으로 차지한 자갈밭 길 또 몇십 년
그때 이 한 몸뚱이
이승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발바닥 물 잡힐 정도 뛰어야
청빈하다고 이름 석 자 푸른 빛 나게 된
어느 공직자 공개된 재산 정도나
될까 말까 하다고 모두가
하던 일손 놓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세 살짜리 손자 이름으로
몇 십 억대 호화 별장
부인. 아들. 며느리. 손주
사촌. 육촌. 고모. 이모
피붙이들 불러내어
대한민국 삼천리 금수강산
발길 안 닿은 곳 없이
냄새 안 맡은 곳 없이
튀밥 튀길 강냉이 땅 모두
챙겨 불려 놓았으니
그린벨트는 갈빗집으로
문전옥답이며 선산까지
간덩이 큰 어른들께서
단숨에 집어삼키셨으니
금싸라기 땅, 도회의 빌딩
시민용 다세대 임대주택까지
값진 보석이며 골동품
고가의 미술 작품까지
권력의 질긴 끈에다
굴비 엮어놓듯 꾀었으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
세상 살아가는 방법
나는 아직도 감이 안 잡혀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뒤가 구린 사람 몇 명은
반짝 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물갈이 각본일지도 모른다고
처음에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소낙비 피해 나무숲 찾더니
썩어 문드러진 고목이 쓰러지고
황금별이 낙엽 떨어지듯
땅에 떨어져 묻히고
맹수가 쥐덫에 잡히고
잡힌 쥐 고양이 몰고 오고
세상 살다 보니 별일 다 보겠어요
속이 다 시원해요
뒤틀린 역사의 물줄기
이제사 제길 찾아
곧바로 흘러가
강이 되고 바다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권부의 방부제 속에서
곪을 대로 곪아온 속살
단칼로 도려내고
새살만 돋아준다면
쓰라린 아픔 왜 참지 못하겠어요
청천 하늘에 치는 날벼락에도
순박한 농부들은
삽과 괭이를 찾아들고 물꼬를 보러 가거든요.
세월 산책.1
바로 몇 해 전으로만
오던 발길 되돌아 가 봐도
나의 친구들은 울고 있었다
울타리 밖, 남의 슬픔을
대신 아파하고 있었다
딸라 캐러 사막에 들어간
미장이 박 씨 아저씨가
미사일의 표적이 되고
봉제공 영자 아가씨는
구식 재봉틀 밑에서
젊음의 꽃이 숯검정으로 변했어도
책가방 내동댕이치고
거리에 뛰쳐나온 대학생과
고구려의 방패를 들고
날아오는 현대의 바람을 막고 있는
오늘의 거리는 식탁 위의 고정메뉴
그 후 얼마 뒤
친구들의 아들들은 모여 있고
세월 산책. 2
백결선생의 옛이야기는
지난 역사에만 기록된다
현대의 거문고는
이야기 속의 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주리던 배 채우고 나면
유명상표 꼬리표 붙은 옷
남 보이며 자랑하고 싶고
눈에 들어오는 작은 나무
마구 흔들어 보고 싶고
꽤나 높으신 어떤 분은
손 안 닿은 곳 별로 없어
다 거두어 잡수시었어도
치과 한 번 안가고
배탈 한 번 안 났다고
화제의 인물로 명성이 드높은데
사촌, 육촌, 팔촌, 이웃마저
시골 논밭 산 떼기 사놓고
피아노와 자가용도 들어오는데
밀어닥치는 돌개바람
생 몸으로 바람막이 되어
오늘 하루 땜장이 되어
삐뚤어진 넥타이 위치나
열심히 바로 잡아보는
세월 산책.3
삼십 몇 년을 하나같이
십몇 년을 살 맞대고
한 몸 되어 살아오면서도
무슨 커다란 비밀인양
깊이깊이 숨겨놓은
아내의 눈물
둘째 아이
유치원 소풍 가던 날
셋째 아이
아파서 병원 가던 날
봇물 터져 나오는
진실의 원액을
실안개 피어오르는
가냘픈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발견 이었다
세월 산책.4
양다리 두 팔 쭉쭉 뻗고
짚방석 위에 팔베개하여
지나가는 뭉게구름
쫓아도 보고
콧노래 흥얼거리면서도
별이 되어
남아 있고 싶지도 않고
달빛처럼 내리비추고 싶지도 않은
가지고 있는 것
갖고 싶은 욕심 모두
손 탁탁 털고 일어서도
아깝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고
거추장스러운 갑옷
묵직한 칼집
벗어 버리고, 끌러 팽개쳐도
알 몸통 있는 그대로 가
사람들의 눈에
부끄럽지도 않고
화살촉이 두렵지도 않은.
세월 산책. 5
만나보고 싶은 사람
만나면 할 말 별로 없어도
쓰고 싶은 시
써보아 별 기쁨 못 찾아도
진실은 진실 그대로
간절함은 간절함 그대로
배고픔은 배고픔대로
못한 일은 못 한 그대로
따뜻하고 추움은 그대로
해낸 일은 해낸 그대로
조용히 같이 온 세월
손이나 꼭 잡고
오던 길 되돌아와
파란 하늘 푸른 산 맞닿은 곳
바라만 보고 싶은.
감동
그대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입으로 전하는 말보다
더 믿음이 가는 감동은
눈으로 쏘아주는 눈길이고
귀로 정확하게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진심의 울림은
마음으로 듣는 감동이지
거울
우리가 살아오던 세월 속에
거울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자기 얼굴이 최고
잘 생겼을 거라며 폼 잡았지
상대방에 비해 자신은 모르니
그때가 그래도 참 좋았어
누구 얼굴이 나보다 예쁘고
어떤 얼굴이 못생겼나 모르니
거울이 세상에 나온 후부터
사람들은 비교하며 후회하고
반성하며 고쳐가기 시작했지
삶에 후회와 반성이 없다면
자기 삶이 최고라 뻐길 거야
어떤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일까
자신의 삶이 그른지를 모를 거야
찌든 거울을 닦듯 마음을 닦자
독도
막내는 밤새껏 추워서 떨었다
망망대해 파도치는 곳에서
엄마 품이 그리워서
형제자매들이 보고파서
밤새워 뒤척이던 악몽을 토하며
괭이갈매기와 함께 을었다
어제도 오늘도 흐느껴 울었다.
아침의 동해에
해가 떠오르며 파도도 가라앉고
지나온 과거의 아픔을
현재에 의젓하게 삭이며
이제부터는 응석만 부리지 말고
투정만 부리지 말고
영원한 미래 조국의 영토임을
빈 바다
물 빠진 갯벌엔
파도를 그리는 빈 배가
한 폭의 그림으로 머물고
목이 쉰
갈매기 두어 마리
고향을 부른다
빈 바다는
알 살 홀딱
드러내놓은 여자
일, 그 후에
곤히 잠에든 아내
썰물이
훑어줄 속살을
고이 어둠으로 입는다.
세월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을 보고
엄마는 예쁜 꽃 같다 하고
누나는 나는 새 같다고 하네
뜯기고 뜯겨 괴롭던 달력
마지막 한 장을 막 뜯어내며
아버지는 세월이 너무 빠르다
손자놈은 거북이처럼 느리다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두 개인
나는 무슨 말로 정답을 풀까
시간의 배급은 모두에 공평한데
삶과 생각이 하늘과 땅 사이니.
시침은 되돌릴 수 있어도
가을바람에 나르는
노오란 은행 잎새에도
눈자죽엔 까닭 없는 이슬이
마음 밭 뜨락의
붉은 석류 알알 내비치듯
풍선 터트릴 줄 알고 있는
마음은 눈 내리는 들판
아마, 계절의 탓만도
바람이 불고 있음만도
결코 아닌가 봐
시침은 되돌릴 수 있어도
세월은 바꿔놓을 수 없어.
4월의 바람
4월의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봄을 찾지 못한 1960년
혹한의 부패와 독재정치
부정선거까지 휘몰아치던
돌개바람이 봄기운을 몰고
2.8 대구에서 3.8 대전으로
3.15 마산에서 4.19 서울로
그 후로는 대한민국 전체로
행진해오던 민주의 새바람
4월에 피는 꽃잎은
색깔의 농도가 유난히 짙다
4월에 피는 꽃에서는
깊은 향기가 풍기어 온다
혹한의 부정 독재 정권에 맞서
침묵하던 꽃봉오리도 잎을
정의의 빛만 뽑아 짙게 피고
마음속 깊이 숨겨온 비수를
농도 짙은 향기로 내뿜는다
민주주의 색깔과 함성으로.
칠월 칠석(七夕)
지상의 까막까치
천상으로 날라와
뛰는 견우 가슴
진물 난 직녀 눈자위
설렘으로
오작교 놓아 주자
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짧은 해후
새벽 닭들이여
하루만은 홰치며 울지마라
날이 새면
삼백예순 닷샛날 날아가고
남몰래 흘린 눈물
산처럼 불어나
은하수 넘칠라
넘쳐흐르는 강물에
네 맘 내 마음
모두 떠내 보내
칠월 하늘 텅 빈 그리움일라
산사(山寺) 풍경
저녁노을 침묵으로
나비 되어 산사에 내려앉고
외진 승방 감아 도는
스님의 독경 소리에
외지에서 찾아온
수녀 한 분이
동양화 한 폭으로 머물러 있다
-석가여래상과 동안의 이 수녀님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도수 높은 안경을 눌러 쓴
무척이나 키가 큰 스님 한 분
다갈색의 바리때 닦아 들고
승방 안쪽 문을 들어선다
수녀님과 스님의 두 눈빛은
한 점에 멈춰 포개지고
무섭게도 조용한 시간은
어둠처럼 덮여가고
불교학원을 나와
수녀가 된 그녀와
수도원을 나와
스님이 된 그이의 그 이후는
서로가 말하지 말자는
오직 하나의 그 무엇으로
화석 되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저녁노을 나비 되어
동양화 한 폭에
말없이 내려앉는.......
가을꽃
비로소
내가 너에 멎었을 때
너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사랑스러울수록
멀리서 바라만 보던
옛 여자처럼
너무나 아까워서
보고만 피워온 꽃
이른 봄 새벽부터
내 마음의 텃밭에
자리를 물려주고
눈만 조아려도
옷고름 입에 물던
새 새댁 수줍음
오직 꽃에서 꽃으로
머물기를 바랐던 네가
양 가슴 흩트린 채
돌개바람에 안겨
달려와 , 눈 쏘아붙이고
몹쓸 웃음 남겨둔 채
둥실둥실 춤을 추면서
오늘도 내 앞에서
맴을 돌고 있네.
설야(雪 夜)
타들어 가는
촛불 심지 돋우며
질화로 불돌 달궈가는
깊은 이 밤
하얀 이마
기다란 머리칼 흩날린 채
기척도 없이 찾아온 손님
저고리 고름
지긋이 입에 문
새아씨처럼
수줍은 내 시가 되고
여인이 되어
가슴속 깊이 안긴다
창밖은 저리도
고운 꽃을 피워대고
너무도 정결해서
피하는 그에 대한 찬 손.
몫
안 뜨락에 갓 피어난
나의 꽃 몽올을
꽃샘바람이 훑어갔다
때 묻은 길거리에
짓밟힌 바닥 위에
나르려다 찢겨버린
노래의 날개깃이여
꽁무니바람 꼭지 떨어진 뒤
몽당비라도 찾아내
소리 나게 쓸어보자
삽사리 발톱에 차인
꽃 넋의 시신을
장대라도 가져와
꽃목이라도 치어보자
차지하면 챙겨질
고목 위의 몫
몫 속의 새 순(筍).
땅
주인의 첫새벽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벼, 보리, 밀, 콩 등의 곡식과 푸성귀들이
받은 만큼 알차게 보답한다고
할아버지는 늘 말씀 하셨지
땅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착한 벗이라고
사랑을 받은 농도만큼
주인에게 은혜로 갚는다고
농부인 아버지도 늘 말씀 하셨어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땅이 주는 선물
옳지 못한 일에 쏟은 힘의 결과는
죗값으로 되돌아오고
바른 일에 기울인 진심은
향기 담은 예쁜 꽃을 피워주지
고추씨 뿌린 곳에
푸른 고추 .빨간 고추
매운 고추 .덜 매운 고추 열리고
참꽤 씨 뿌리면 참꽤
들꽤 씨 뿌리면 들깨
줄기마다 고구마가 주렁주렁 .
하늘을 접어 펼쳐 넣을
여름 실밥 탁 터져
망각(忘却)의 낚시에 걸려 나온
푸른 하늘, 오색 무지개
안경을 벗어버린 눈으로
훔쳐보면 볼수록
머리 위는 깊은 바다
거꾸로 헤엄쳐 나르는 하루
파도에 깃을 터는 작은 새와
구름 타고 노는 물고기들이
계절의 앞뒷문 다투며
시간급 챙겨 여왕과 함께 사라지자
머슴 김 씨의 등 땀내음도
시류가 쳐놓은 안개 그물에 걸리어
푸르름 밖으로 내쫓기었다.
도회는 깨어져 버린 항아리
담겨 있던 보석과 꿈이
보도블록처럼 흩어지고
살아 꿈틀거리는 목소리는
작취미성(昨醉未醒)의 난간 위에서
떠내려가는 침묵의 조각과
석양에 불붙은 비취색 하늘을
하나로 노래 부르고 싶다.
바다를 말아 넣어 하늘
하늘을 접어 펼쳐 바다
바람일기 .1
골바람도
삥 돌아서만 지나치던
그 산 넘어 이 골탱
막 피어오르던
꽃봉오라지 소낙비 그리며
화석 되어 굳어있고
구석구석마다
새새틈틈이 숨겨놓은
슬픔의 깊이와
꿀꺽꿀꺽 삼켜버린
깊은 숨의 넓이를
한 번만 곱해줘도
천지에서 백록담을
몇 번씩은 오고 갔을 텐데
최종 등식은 풀리지 않고
바람은 돌아만 가고
바람 일기. 2
전 민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름밤 하늘의 별처럼
6.25 사변 통에
아들 잃고 딸마저 빼앗겨
화병이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되어
한곳에 머물러
자리 잡지 못한다
바람은 정이 많아
더웁혀진 가슴 속에
깃발로 펄럭이다가
고향의 짙은 냄새며
날아간 그리움의 날개깃을
쫓아나서 보기도 하고
바람은 첫정을 심어놓고
자취를 숨기어 버린
그녀의 현주소를 찾아
함석 대문도 흔들고
유리 창문도 두드려 본다
바람일기.3
깨물던 입술
되짖물다 피멍 맺혀
풀꽃으로 피어오르네
재우던 가슴팍 열기
타고 타, 재티마저 불타
젖꽃판 몽실리네
불 꺼지는 마을
제빛 뽑아
얼굴 밝히는 그믐달
쎈 빛에 시들은
별들이 나와
바람에 몸을 닦는다
반짝이는 4월의 노래여.
바람일기.4
까투리 날아든
솔포장 사이 새
노랑나비 찾아와
그림으로 잡힌 장다리 밭
청보리 보듬히
배불러 오고
하얀 아카시아 향기
푸른 종소리 업고
아침 이슬 줍는다
호밀밭 깊숙이
산비둘기 알 벽 깨어
푸른 세상 한번 날고 싶고
갈잎들의 기지개
청솔 방울 떨어뜨려
이웃 한번 놀래보고 싶은
5월의 노래여.
방패로 든 양심
적이 창을 들고 맹공격 해온다면
나는 방패를 들어서 막아야 산다
자존심에 뺀 창은 양심도 다치지만
방패로 든 양심은 자존심을 지킨다
거울이 되어
내 앞에 걸어 놓은 거울로만
나 자신의 외모를 볼 수 있다
내가 남의 잘못됨을 말하려면
먼저 거울이 되 비춰줘야 한다
남의 장점을 칭찬해주려거든
뒤에서 해주는 믿음이 최고다
등 뒤에 준비해 놓은 진실은
자신을 보호해 줄 전 재산이다
삶의 자투리
조그마한 화단 안의 풀꽃들과
눈싸움을 즐겼다
때로는 고집스러운 담벼락을 뚫고
나는 새의 깃에
하늘 가슴 깊이 안겨도 보고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 위에
또 다른 무게로 내려앉는 상(像)
눈물의 한 올을 찾아 백두산 천지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캐낸 기쁨의 한 올로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아가듯
삶의 자투리를 찍어내며.
사람과 인간
부지런한 사람에겐
돈과 명예도 따라다니고
실천 대신 말로 갚는 인간에겐
머리보다 손발이 바쁘기만 하고
진실한 말만 하는 사람에겐
신뢰의 마음도 함께 와 닫고
달콤한 말로 덮으려는 인간에겐
단맛이 빠지면 멀어진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기가 최우선인 인간에겐
친한 친구도 점점 멀어진다.
여름 바다를 꽃다발처럼
꺼진 배 일부러 부풀려
고무풍선 넣은 듯 살아나면
사장님이 다 된 것 같던 시대
구슬땀 흘리며 가꿔온 세월
조그마한 열매라도 맺히면
모두가 내 뜻인지 흐뭇했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의
목줄이 유난히 솟아 있고
말끝 가지마다 황금알이 열려있고
내 몫 없어 악수하지 못할 때
시내버스에 제비처럼 날아가는
차창 밖의 오너드라이버 그 반바지가
옛 추억의 긴 그림자일 때
가을 하늘은 여름 바다를
꽃다발처럼 가슴에 안고 싶지
그믐밤 그 바다에는
별 꽃몽올 보풀자
달 그림자도 멈춰 선
동해의 그믐 빛
볼 곱던 하늘
살근살짝 내려와
칠흑 바다 위에
살촉을 꽂는다
겉호창 이불 속에서
들릴 듯 말듯
하얀 목소리
밤 파도 신음소리
하늘 천(天)하고
다시 따지(地)
이엉 엮듯이
갑사댕기 풀리듯이
허여멀건
밤바다의 긴 허벅지
하늘 끝을 향해
산봉우리를 만들고.
바닷가에
미역 냄새 해초 내음 갯골 타고
촉촉이 불어오는 솔숲 언덕에다
행주치마 너비만 한
초집 한 채 오뚝이 마련하고
둘이는 하나처럼 살겠네
토방 위엔 세파에 깎인 조가피와
천년 씻긴 조약돌이 가득하고
나는 철없는 내 아이들처럼
맨발로 모래밭을 휘젓다가
개흙이 묻은 손끝으로
원고와 헌책들을 매만지며
책갈피 작은 바다 파도 따라
갈매기 되어 나를래
뭍을 떠난 꿈의 통통선
피안에 와 닿을 때
밤 파도 소리는 일기 시작하고
비워둔 또 하나의 방에는
상현 달빛 외줄기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속삭임을 부르며
가냘픈 맨살을 창틀에 비벼대며
제 몸 앓고 있을걸세.
솔바람 소리 한 줌 빌어다
세월은 강물 흐르듯 하고
저기, 높은 언덕과 바윗돌도
바람에 깎이어 자갈이 되고
다시 부서지어 모래알, 황토
한 줌의 시간 속에 묻히는데
오직 나만은 천년, 만년을
이 세상 다 차지해 영원히
왕이 되어 살아갈 것처럼
위치를 높이며 권력을 쌓고
권리를 뺏고 재물을 모으며
오늘도 바쁘게들 살아가지.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 중에
백 년 뒤 이 땅에 다시 만나
소주잔이나 나눌 이 있을까?
가슴에 새겨 놓은 세월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종종 쓰다듬어보며
나만은 영원할 거라는 단꿈도
얼마 후면 땅에 떨어지는 낙엽
아픔과 갈등. 사랑과 미움을
세월 속에 묻으면서 찾은 것은
내 앞의 믿음마저도 허상이요
한쪽의 낮달이었다는 확신을.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모습을
바로 보고 긍정할 수 있을 때
현실의 허상도 사랑할 수 있고
애증에 눈멀지 않아도 되는 삶
욕망의 늪을 헹궈 내는 시간
이 세상을 좀 더 진실 된 것
닫힌 가슴을 창으로 열어놓고
무상한 것들에 매달리지 않고
자유롭고 여유 있게 살아가세
우리 솔바람 소리 한 줌 빌어다
떠도는 뭉게구름 속에 올려놓고
세상 찾아 하늘 한번 날아보세.
타고 남은 재
가을 산에 갇힌 나무들이
하나같이 바람나 버렸어요
잠자던 풀밭과 억새까지도
노란 꽃으로 피워대지 못한
빨간 열매로 맺혀 놓지 못한
순정에 색깔을 칠하지 못한
한(恨)을 분풀이하고 있어요
만산이 단풍으로 불타고 있어요
보는 사람도 타들어 가고 있어요
타고 남은 재는 한 줌도 남김없이.
저 은(銀)밭에 빨간 꽃송이를
빗 바람 쌔리는 소리
그 소리를 재우려는 속소리
천둥 번개 치는 소리
대답하는 조그마한 목소리
그래도 못다 핀
깊숙한 내 소리
두었다가
얄따란 네 겹 망사
벗으면 하얀 속살 깊이
훔쳐 온 비수(匕首)처럼
숨겨 두었다가
버선발 흰 구름 차며
비단 폭 치마 너울거리시며
그이가 오시는
간밤 꿈결에
장미꽃 피우자
저 은 밭에 빨간
꽃 한 송이를.
보내주는 만족
여름비 곱게 내린 대낮
구름다리 위에 핀 쌍무지개는
아름다운 꽃밭보다 향기롭다
강요하지 않는 사랑
얼마 안 가서 자취 없이 사라져도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도 않고
욕심을 접어두고 찾은 만족
향기 나는 꽃에 이끌리듯
정말로 정이 가는 사람은
자기 사랑을 강요하지 않고
정말 아름다운 우리들의 삶은
향기가 있는 꽃을 사랑하지만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아름다움
욕심 버리듯 , 보내주는 만족.
처제
우리 모두가 먹고사는 것이
삶의 최우선 순위일 때
미국 땅만 밟고 살면
모든 일이 술술 풀려
잘 나갈 거라 굳게 믿으며
자기 핏줄 이은 것도 아닌
갓난아기 둘러업고
부모 형제자매 곁을 떠나간 후
30여년 간 새벽에서 저녁 늦게까지
삶의 터전 열심히 뛰어가며
30대 젊음이 60대 중반 노년기로
지금 막 들어서 이제사 조금쯤
발 뻗고 사는가 싶더니
하루아침에 쌓은 성이 와르르
암이란다 그것도 폐암 4기
이게 날벼락이 아니고 뭔가
내가 미국 가면 내 집처럼 머물고
우리 집에 와 한두 달 머물며
한 가족처럼 믿고 살던 처제가.
아내 말씀
아내는 내가 자기를 못 만났다면
집도 없는 총각 신세 못 면한 채
방랑자로 떠돌고 있을 거라고
가족들이 다 모인 명절만 되면
은근히 비틀어 놓은 꽈배기처럼
경제학 강론을 신나게 펼치신다
설마 그럴 수야 있었겠느냐만
돈 벌어야 할 때 쓰기에 바쁘지
남들은 쌈짓돈 튀밥 튀겨 늘릴 때
봉창 뒤집어 먼지처럼 털어버리지
1년 열두 달 365일 중 반 이상은
책상 앞에 가부장하고 앉아 있지
인생 칠십이 넘어가면서 부터는
아내 말씀을 생존의 법칙으로 여겨
철들며 살아보려고 마음도 먹었다
햇살 비쳐들면 전깃불도 꺼버렸다
책 살 돈 아껴 우유 사 먹으며 살고
평생 펴놓은 신문 접고 주중미사 간다
民 譚.28
- 쑥부쟁이 전설
대장장이에겐 11남매나 되는 자녀들이 있었지
열심히 일을 해도 삼시 세끼가 어려운 처지였어
큰 딸은 쑥버무리를 좋아하는 동생들을 위해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며 쑥을 열심히 뜯어왔어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쑥부쟁이라 불러주었어
어느 날 쑥부쟁이는 몸에 상처를 입고 쫓기던
노루 한 마리를 숨겨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니
노루는 은혜를 꼭 갚겠다며 산속으로 사라졌지
어느 날 쑥부쟁이가 산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데
멧돼지를 잡는 함정에 사냥꾼이 빠져 있었어
쑥부쟁이가 치료해 준 노루를 쫓던 사냥꾼이
쑥부쟁이가 함정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냥꾼은
다시 언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
쑥부쟁이는 잘생긴 그 사냥꾼에 폭 빠져버려
호감을 갖고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어
가을이 왔고 쑥부쟁이는 사냥꾼과 만났던 산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올라가 기다렸지
기다림 속에 계절이 몇 번씩이나 순환했지만
애타게 기다리는 사냥꾼은 나타나지 않았지
그녀는 어느 날 흐르는 계곡물 한 그릇을 떠
바위 위에 놓고 산신령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몇 년 전에 목숨을 구해 준 노루가 나타났지
노루는 구슬이 세 개가 든 주머니를 내주며
구슬을 입에 물고 소원을 말하면 된다고 하네
노루가 숲속으로 사라진 뒤 구슬 한 개를 물고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어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병이 그 뒤 완쾌되었지
노루가 준 주머니 속 구슬 하나를 입에 물고
소원을 빌고 있었는데 그가 눈 앞에 나타났어
결혼을 해 자식을 둘이나 두어 가장인 그가
처자가 있는 몸을 돌려보내야 마땅하다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보내 주세요 라고
마지막 구슬을 입에 물고 그녀는 소원을 빌었지
그를 보낸 뒤에도 그녀의 속마음은 속이지 못했어
세월은 흘러도 쑥부쟁이는 처녀로 일생을 살았어
동생들을 돌보며 항상 산에 올라가 나물을 뜯다가
그녀는 어느 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숨을 거두었어
그 자리엔 나물이 수북하게 나와, 언니가 죽어서도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는 은총이라고 믿었어
연한 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은 그녀가 살아서
지니고 다녔던 주머니 속의 구슬과 같은 색이며
꽃대의 긴 목은 여전히 옛 사냥꾼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던 쑥부쟁이 기다림의 표징이라 믿고 있지
꽃 명은 쑥부쟁이며 꽃말은 옛사랑, 순정, 이라네.
民 譚.29
- 들국화 전설
깊은 산골에 남편을 잃고 홀로된 시누이와 올케가
한 집에서 자수로 생계를 이으며 살아가고 있었지
그들이 자수를 하면 냇물이 소리를 내며 흐르는 듯
새들도 어디서 날아와 노래하며 속삭이다 가버리고
조선 팔도에 소문이 퍼져 임금님 귀에도 들어갔다네
임금님이 금강산과 백두산 중의 한 곳을 가야겠는데
지방관리에게 두 명산의 풍경을 그림을 그려 올리라
명을 받은 관리들은 온갖 궁리를 거듭해 고민하다가
두 여인에게 맡겨 현장에 견학 보내 경치를 보면서
실체의 그림을 색실로 떠 오라고 엄히 분부하였지요
올케는 백두산에 , 시누이는 금강산으로 떠났지요
백두산에 간 올케는 백두산의 호연한 기상을 보며
한 땀 한 땀 흰 천에다 뜨기 시작, 달포가 지난 뒤
삼천삼백삼십삼의 색실로 구천구백구십구 번을
바느질하여 끝내 장엄한 백두산을 다 떠 넣었지요
자수 품 네 귀에 사계절을 상징하는 꽃 네 포기도
자수에 떠 넣었는데 이를 보고 만족해 하였어요
일을 마친 올케는 시누이가 있는 금강산으로 갔고
시누이도 올케와 같은 솜씨로 금강산을 떠 넣었지요
금강산을 담당한 관리가 자수품을 들여다보다가
네 귀에 계절 꽃이 희한하게 새겨져 있기에
그것이 참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보다 더 멋지게
시누에게도 네 귀에 일 년 열두 달에 피는 꽃
열두 포기를 새겨 넣어 보라고 요구 했어요
시누이는 1월부터 시작하여 동지섣달 까지를
떠 넣었는데 다만 9월에 피는 꽃은 생각이 안 나
올케가 노랑, 파랑, 하얀 색실로 꽃 한 송이를
떠 넣으니 아무도 보지 못했던 신기한 꽃이었지
임금님이 네 변두리를 보니 금강산 주위에 그런
뭇 꽃 중 구월 꽃만은 도무지 처음 보는 꽃이어서
꽃명을 물으니 구월에 피는 구월 꽃이라 하옵니다
그 꽃을 가져오라는 어명을 받고 두 여인에게 갔지
여인 둘은 생각하니 이것 참 큰일이 아닐 수 없군
임금님을 속인 죄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던 거야
두 여안은 각각 생각하던 동해기슭 산언덕에 이르러
작은 쑥대 끝에 색실로 꽃송이를 수놓기 시작했지
전번 금강산 그림 귀에 떠 놓았던 꽃이기는 했지만
그 꽃은 죽은 꽃이지 생생히 살아 핀 꽃은 아니잖아
근심 걱정하고 있을 때 동해 여신이 나와 주술을 하며
수놓은 꽃들에 이슬을 살랑살랑 뿌려 주었더니
새롭게 피어난 꽃이 바로 오늘날의 들국화, 해국이지
꽃말은 장애물, 상쾌, 마음으로 그린 아름다움이고 .
民 譚.30
- 호랑이와 대포
아주 먼 옛쩍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갑순이와 갑돌이가 데이트를 하는데
빈 보리와 밀밭은 너무 다 속보이고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숲속으로 갔지
앞산 주인 호랑이는 횡재를 만났고
여보게 둘 중의 하나만 내 먹이가 되던지
정 안 되겠으면 팔 하나만이라도 적선하지
그러면 둘 다 안 잡아먹을게 어흥 어흥
어차피 죽을 바엔 바지라도 내려야지
호 선생, 요거 보이나요 총대가 대포요
이것으로 선생도 한 방 맞으면 죽어요
호랑이는 겁이나 숲속으로 도망을 갔지
여우가 이를 보다가 호랑이에게 말했지
호 선생은 바보요, 대포가 아니고, 오줌보야
호랑이는 분하고 쪽팔려서 어쩌지 못하다
뒷산 아우 호랑이한테 연락 하였어요.
나 앞산 호랑인데, 데이트하는 먹이 2개
그쪽 서 남동쪽으로 10분 거리에 있네
대포 가지고 있다는 거짓말에 속지 말고
잡아 한 마리는 자네 먹고 나도 한마리만
남녀의 눈앞에 뒷산 호랑이가 나타났네
이놈, 대포도 없으면서 그런 건 나도 있다
여자가 치마를 벗고 대포 맞은 자국이다
이를 본 호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民 譚.31
-심부름꾼의 대답
옛날 마음씨는 착한데 좀 부족한 심부름꾼이
장터로 길을 걸어가다가 한 장사치를 만나
쉼터인 느티나무 밑에서 점심을 얻어먹었어
큰 나무 위에서는 까마귀 떼가 마구 울어대어
까마귀는 흉조라며 장사치는 기분이 안 좋은데
멍한 심부름꾼은 도리어 웃는 낯이 아니겠나
시내 장터에 도착한 장사치는 이유를 물어봤지
까마귀들이 울 때 그대가 웃은 까닭은 뭔가?
까마귀들이 저를 유혹하며 저에게 말하기를
짐 속에 값진 보물이 많은 당신을 죽이고
제가 상인이 되면 시체를 먹겠다고 했지요
자네가 까마귀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는 뭔가
저는 전생에 욕심을 버리지 못해 그 업보로
현생에 가난한 심부름꾼으로 살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심부름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욕심으로 무도한 부귀를 누릴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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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학
― 전민 11 시집 『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에 부쳐
나 태 주 (시인)
1.
전민 시인은 그 본명이 ‘병기’인데 시를 쓰면서 ‘민’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까지 사용하고 있다. 일종의 필명인 셈이다. 한자로 쓰면 ‘옥돌 민(玟)’이다. 아름다운 돌, 글의 왕 (글월文 앞에 임금王)이 되어 보겠다는 소년 시절 그 나름의 다짐과 결의를 담은 이름이라본다.
내가 전민 시인을 만나고 사귀어 온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이다. 1970년대 벽두,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시문학 동인회 활동을 시작한 일이 있다. 동인회 이름은 <새여울>. 공주에서 공주교육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동인회였다. 나는 비록 공주교육대학 졸업생은 아니지만 그들이 끼워줘서 그들과 함께 한세월 좋은 우정과 문학의 날들을 보낸 일이 있다.
이제 와 새삼 고마운 일인데 동인지 첫 책에는 윤석산을 필두로 하여 이장희, 김정임, 구재기, 김명수, 안홍렬, 그리고 전민과 같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2집부터는 나의 소개로 권선옥 같은 시인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내가 동인회에 가입해 보니 모두가 문단 등단을 마치지 않은 신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문학에의 열정이 강해 그 뒤에 제각기 길을 찾아 등단의 절차를 마치고 기성시인이 되면서 시집도 내고 이제는 중견의 시인들이 다 되었다. 하기는 이들의 나이가 70살 전후이니 인생으로서도 이제는 노년의 세기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전민 씨는 매우 온건하면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별로 말이 없었고 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동인들 사이에 그야말로 티 없이 정중동으로 존재해 왔다. 그렇게 50년 가까이다. 참 오랜 세월 우리는 우정을 나누었고 또 서로 잡음 없이 잘 살았다. 피차에 감사한 노릇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전민 시인은 동인 가운데 가장 마음씨 좋은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의 인생도 그렇게 온유하고 말없이 모든 일을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영위하면서 살았다. 노자의 말씀에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씀이 있는데 바로 전민 시인이 그런 사람이라 할 것이다.
늘상 스스로 눈초리나 관심이 낮은 데에 있었고 남한테 있었고 선한 데에 있었다. 타인을 안쓰럽게 보았고 긍정으로 대했고 또 한세상을 그렇게 티 없이 부드럽게 건너면서 살았다. 어느 것에도 걸거침이 없었고 무리 없는 삶이었다. 가정생활도 그러했고 사회생활, 직장생활도 그러했다.
문단에서의 봉사나 활약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문학단체나 문예지의 책임자를 맡아서 활동하고 또 주변의 많은 동료 문인들을 챙기고 돕는 일에 앞장선 것으로 안다. 나하고 관계만 해도 그렇다. 내가 결혼을 한 것은 1973년도. 그 당시로는 만혼이었다. 주례를 박목월 선생이 서 주셨는데 결혼식 사회자가 만만치 않았다. 생각 끝에 전민 시인을 결혼식 사회자로 세웠다. 그래서 전민 시인은 박목월 선생을 모시고 나의 결혼을 무사히 잘 치르게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이러한 봉사적이면서 조용한 활동, 뒤에 숨어서 말없이 하는 활동은 전민 시인의 독특한 한 개성이다시피 했다. 그래서 시인의 주변에는 오래된 친구와 함께 새로운 지인들이 많았다. 원만하고 인격적인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2. 시인 전민
전민 시인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것은 1985년 <시문학> 추천으로서였다. 그것은 <새여울> 동인으로 활동을 한 지, 10년도 훨씬 지난 다음의 일로 조금은 늦은 등단이었다. 그만큼 그는 문단 등단부터 느긋하게 대처했고 욕심이 많지 않았다.
오래전, 프랑스 사람 뷔퐁은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전민 시인의 인간과 글을 생각할 때 언뜻 떠오르는 말은 바로 이 말이다. 그의 시는 자신의 일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타인의 일이나 사회적인 일을 다루면서 슬쩍 그 사이에 자신의 정서를 끼워 넣는 식으로 전개한다. 그래서 조금은 싱거운 느낌이 없지 않다. 사람과 시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젊은 시절의 인간을 이끌어오는 두 개의 힘이라고 그러면 앵그리와 헝그리를 말하곤 한다. 두 개는 하나의 욕구불만이기도 하고 상승 의지이기도 해서 젊은 시절의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두 개, 수레바퀴의 축이라 하겠다.
대개 앵그리에 승한 사람은 사회정의나 도덕적인 쪽에 관심이 많고 사회변화에 자신의 열정을 싣기 쉽다. 그런가 하면 헝그리에 기운 사람은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면서 보다 나은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젊은 시절의 인간들은 그 두 가지 경향 가운데 한 가지에 치우쳐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전민 시인은 그 두 가지 모두가 아닌 것같이 보인다. 그만큼 그의 인간과 문학은 느슨하고 무심한 듯 멀리 물러나 있다. 많이 특별한 시와 인간상이다. 그동안 전민 시인은 꾸준히 그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문학 매체를 통해서도 발표해 왔고 시집으로도 발표해 왔댜. 이번에 내는 시집은 열한 번째 시집.
기왕의 시집들과 사뭇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우선은 요설이 많이 줄었다. 요설은 시의 문장의 특성으로는 별로 바람직한 특성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을 흐려놓기 때문이다. 또 시의 문장은 거르고 걸러 줄이고 줄인 짧은 언어조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오죽했으면 촌철살인이라 했겠는가.
조그마한 화단 안의 풀꽃들과
눈싸움을 즐겼다
때로는 고집스러운 담벼락을 뚫고
나는 새의 깃에
하늘 가슴 깊이 안겨도 보고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 위에
또 다른 무게로 내려앉는 상(像)
눈물의 한 올을 찾아 백두산 천지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캐낸 기쁨의 한 올로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아가듯
삶의 자투리를 찍어내며.
― 「삶의 자투리」 전문
이제 그도 후반부 인생을 사는 사람.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고 있고 오늘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오늘의 인생을 ‘자투리’로 인식하고 있다. 자투리란 본래의 것을 떼어낸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자투리땅. 자투리 옷감 그렇게 말하는 바로 그 자투리다.
그렇지만 그는 그 자투리 인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귀하게 소중하게 대하면서 잘 써먹겠다고 다짐한다. 당연한 일이고 좋은 일이다. ‘눈물의 한 올을 찾아 백두산 천지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캐낸 기쁨’은 자기의 지난 인생에 대한 총평이다. 보람이다.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아가듯/ 삶의 자투리를 찍어내며’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소망이고 나름대로 각오다. 이 또한 좋은 일이고 기대해볼 만한 일이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누구나의 인생이라도 여벌의 인생은 없다. 누구나의 인생도 급하고 소중하고 엄중한 것이다. 인생을 엄중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그의 인생은 엄중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아내는 달걀 장사 사모님
나는 수박 장수 선생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양계장 집 아줌마 좀
도와주며 살고 싶다며 몇 번 거들더니
아내는 아파트 통로의 달걀 장사 사모님이 되었고
트럭 운전수와 눈 맞아 도회지로 줄행랑친
수박밭 며느리의 홀시어머니 사정이 하 딱해서
스무 나문 통 남짓 사다가 인심 좀 썼더니
그 이튿날부터 나는 수박 장수 선생님이라는
또 하나의 직함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의 젊은 주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고만 찾기 때문에
알이 굵은 달걀과 조금 싱싱한 수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뽑혀서 나가고
작은 것, 깨진 것, 꼭지 빠져 시든 것 만남아
중년 부부인 우리들의 마지막 차지가 된다
사실은 가정에서도 매한가지다.
―「달걀 장사 사모님」 전문
이 시는 시인이 도회의 아파트에 살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 사람들을 도와준 일을 소재 삼아서 쓴 작품이다. 아름다운 그림이며 미소로운 작품이다. 부창부수라고 시인의 부인도 무척이나 인성이 느긋하고 좋은 사람인가 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양계장 집 아줌마 좀/ 도와주며 살고 싶다며 몇 번 거들더니/ 아내는 아파트 통로의 달걀 장사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다. 좋은 이웃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편 되는 시인은 어떤가. ‘트럭 운전수와 눈 맞아 도회지로 줄행랑친/ 수박밭 며느리의 홀시어머니 사정이 하 딱해서/ 스무 나문 통 남짓 사다가 인심 좀 썼더니/ 그 이튿날부터 나는 수박 장수 선생님’이 되었노라는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이웃으로서 이만한 좋은 이웃은 더 이상 없는 일이다. 이러한 선량과 우애가 우리 세상을 밝게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역시 시문장의 기본 심정은 선량(善良)에 있다. 선량 하나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
신부님 제가 백주 대낮에
눈먼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눈 뜨고 몰래 들어가서
말린 고추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양심이 널을 뛰어
잘못했음을 고해하러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 했지요
도둑질은 형제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요
깊이 반성하며 흔적을 지우겠어요
할머니가 볼 수 없을 거라 믿고
고추를 지고 나오며 남긴 발자욱을
성사 끝내고 가서 지워야겠어요
오점을 닦아야겠어요
아멘
―「어떤 고해성사」 전문
코믹하기까지 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해학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해학은 능청에 그 본질이 있고 심각하고 헝클어진 현실이나 대상을 곧이곧대로 표현하지 않고 비꼬아서 표현하는데 그 묘미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고해성사’가 그렇고 고해성사를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와 반응이 그렇다. 본말이 전도되어 있음을 은근슬쩍 비꼼이다. 그리하여 사실이나 대상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고자 한다.
어둡고 화가 나고 개탄스런 현실 앞에서 이렇게 여유를 갖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서의 전민 시인의 품도요 국량(局量)이다. 국량이란 말을 사전으로 풀어보면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 주며 일을 능히 처리하는 힘’이 된다. 아량과 통하는 말이다. 그만큼 전민 시인의 아량이 넓은 것이다. 이러한 아량으로 세상을 볼 때 그의 세상과 그의 시는 더 높고도 깊은 세계와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미역 냄새 해초 내음 갯골 타고
촉촉이 불어오는 솔숲 언덕에다
행주치마 너비만 한
초집 한 채 오뚝이 마련하고
둘이는 하나처럼 살겠네
토방 위엔 세파에 깎인 조가피와
천년 씻긴 조약돌이 가득하고
나는 철없는 내 아이들처럼
맨발로 모래밭을 휘젓다가
개흙이 묻은 손끝으로
원고와 책들을 매만지며
책갈피 작은 바다 파도 따라
갈매기 되어 나를래
뭍을 떠난 꿈의 통통선
피안에 와 닿을 때
밤 파도 소리는 일기 시작하고
비워둔 또 하나의 방에는
상현 달빛 외줄기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속삭임을 부르며
가냘픈 맨살을 창틀에 부벼대며
제 몸 앓고 있을걸세.
―「바닷가에」 전문
그의 시집 원고 가운데에서 어렵게 찾아낸 개인의 소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쩌면 부인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은 그 어떤 유토피아 같은 것을 그려본 작품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회향(回鄕) 의식이 있고 이상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주로 유년의 삶과 관계가 깊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고향은 바닷가 가까운 마을이었던가 보다.
시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돌아간 땅에서의 삶에 대한 소망과 꿈으로 넘쳐난다. 영국 시인 예이츠 방식으로 말한다면 ‘이니스프리 호도’로의 귀환이다. 시를 분석하여 한 구절 한 구절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시의 전편이 그 자신의 알몸으로 시인의 꿈과 그리움을 말해 주고 있는 바이다.
논리적으로 말할 자신은 없으되 지금껏 50년 가까이 시의 길을 동행하며 오늘에 이른 동지로서의 눈을 담보로 하여 말할 때, 전민 시인의 시는 여백의 정서를 표출하는 여백의 시가 아닌가 싶다. 남들이 비워두고 떠난 그 땅에 농작물을 심어 가꾸는 농부의 심정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를 잠정적으로 ‘여백의 미학’이라고 이름 붙여 부르고 싶다.
전민 시인.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이 20대 푸른 나이였는데 어쩔 수 없이 70대 늙은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날들은 자꾸만 짧아지고 우리의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 보다 열심히 깨어서 읽고 베끼고 글을 써서 우리가 쓰고 싶었던 글을 한 편이라도 더 세상에 남기고 세상을 떠납시다. 열한 번째 내는 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이 시집이 형에게는 첫 시집이 되어 길이 형에게 효도하는 시집이 되기를 소망하고 축원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