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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9:1-18) 싸움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싸움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싸움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여러분! 한국영화 중에 "싸움"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멋진 남자 설경구씨와 아름다운 여자 김태희씨가 젊은 부부로 등장합니다. 영화의 소재는 부부싸움입니다. 정말 지독한 부부싸움.
그러나 주제는 보기에 흉측할 정도의 지독한 부부싸움 현상 이면에,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흐르고 있는 부부간의 사랑 이야기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니 좀 과장된 모습으로 부부싸움을 하지요. 이야기하다가 서로 싸우고 이혼을 하고 찻집에서 만나 대화하는 중에 서로 싸우는데 (저는 얼마나 보고 또 봤는지 몰라요. 그 장면을 돌려서 보고 또 보고 재미있어서 뭐가 재미있느냐?), 김태희씨와 설경구씨는 극 중에서는 이혼한 부부지요.
김태희씨가 일어나서 그냥 이 손바닥으로 설경구씨의 머리통을 후려갈기는데 딱- 소리가 나는 거예요. 와,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웃겨요?
만약에 저의 집사람이 제 머리통을 딱- 소리가 나도록 그렇게 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별의별 소리를 다 해가면서 10배로 갚으려고 정말 온갖 못된 짓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영화장면에 나오고 있는 김태희씨가 설경구씨의 머리통을 그대로 후려갈기는 것을 볼 때는 너무너무 웃기는 거예요. 여러분도 한 번 시간 나면 보시지요.
여러분! 이렇게 싸움이라고 하는 게 이상한 게 있습니다. 싸움 당사자는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괴롭고 분노에 차고 때로는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데 구경꾼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 싸움의 광경을 재미있게 보는 겁니다.
격투기에 등장하고 있는 두 선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그들의 부모나 가족이나 아내가 본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마음 졸임과 불안과 공포는.
그런데 한 쪽이 링 위에서 완전히 KO 당해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승리가 결정되었어요.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기뻐합니다.
‘야, 오늘 돈값 했다. 돈 주고 싸움 보러 가서 진짜 멋진 장면 봤다.’라고 나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너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예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싸움과 같은 삶을 삽니다. 꼭 싸움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싸움과 같지 않더라도 삶의 현장 안에 들어가서, 삶에 빠져서 삶을 사는 것과, 삶을 구경하는 것과 차이가 굉장히 많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요.
삶을 구경하는 것이 삶에 대한 바른 태도냐? 아니냐? 라는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고, 우선은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내가 삶을 사는 것과, 삶을 보는 것과 어떻게 차이가 날까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오늘 바로 본문 9절로 넘어가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헛된 날, 헛된 삶을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는 말이 나와요.
이 ‘즐겁게 살지어다.’라고 하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 성경의 뜻은 ‘삶을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게 사는 비결입니다.
헛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해 아래의 모든 삶이 다 헛됩니다. 그런데 그 헛된 삶이 헛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고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을 바라보아야 되는 겁니다.
'삶을 바라보아야 된다. 즐겁게 살지어다.’ 라고 하는 말은, 아내와 함께 그 삶을 바라보는 겁니다.
여기서 여러분! 아주, 아주 귀한 가르침을 전도서가 우리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1절, 2절, 3절 그리고 우리가 읽은 8절, 9절을 우리가 이어서 생각해 보면 더 명확해 집니다.
3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마음에 악이 가득해서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악이 가득해서 미친 마음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악이 뭔지 아십니까? 악이 가득하다는 게 달리 사람을 죽이고 사기를 쳤다는 게 아니라, 삶에 빠져 있는 겁니다.
‘미쳤다.’라고 번역된 이 말 자체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언행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난다. 이게 미친 것이지요. 그리고 또 다른 뜻이 있다면 '도달한다. 도착한다.'라는 뜻이 있고 그리고 '무엇 무엇에 미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탁구에 미쳤다. 돌 수집에 미쳤다. 낚시에 미쳤다. 어떤 여자에게 미쳤다. 자기 직업에 미쳤다.'는 말인데 이게 빠져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빠져 있는 것입니다.
바로 미친 마음, 악, 이것이 다 삶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경꾼의 자리와 삶에 빠져있는 자리를 비교해 보면, 빠져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잖아요.
격투기를 하는 링 위에서 싸우고 있는 당사자가 된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싸움이라는 영화에서 정말 그 영화 속에 들어가서 부부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싸움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 9절에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의복을 희게 한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한다.'라는 게 다 축제를 상장하는 단어들이라고 합니다.
흰옷이라고 하는 것, 나를 감추고 기쁨을 드러내고 기쁨을 맞이하는 옷입니다. 축제에, 잔치에 들어갈 때 입는 예복입니다. 그리고 기름이라고 하는 것도, 향 기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축제 때 사용되던 기름이에요. 그러므로 8절은 네 삶을 축제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9절은 해 아래서 헛된 날을, 8절의 그런 축제처럼 살려고 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삶을 바라보는것입니다.
왜 아내와 함께 바라봅니까? 아내와 함께 공유되고 있는 삶의 현장이 제일 많으니까. 어떤 사람보다도 아내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삶의 영역이 많으니까. 그 삶을 바라보라는 것이에요. 만약에 아내가 아닐 수도 있지요. 친구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삶의 영역이 있다면 친구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을 바라본다.'
여러분! 빠지지 않아야 삶은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미치지 않은 상태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삶에 빠져버리면 삶은 그만 즐거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빠지지 않는 상태가 되려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되는 겁니다.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는 한 삶은 싸움이요. 삶은 고통이고 그리고 헛된 나날들로 점철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빠지지 않은 상태인가를 알 수 있습니까?
결과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일을 하고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 모든 일에서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 1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가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라고 합니다.
또 2절에도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으로 일어나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까 죽음이 동일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삶의 원칙을 자꾸 붙잡으려고 하잖아요.
이 원칙대로 하면 내가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니까. 내가 일찍 일어나서 새벽형 인간이 되면 내 삶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질 것이니까. 내가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면 가문이 복을 받게 될 테니까. 이렇게 원칙을 붙잡는 이유는 원하는 기대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원칙을 붙잡고 노력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자에게나 우매 자에게나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모른다. 제사를 드리는 자나 안 드리는 자나 다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 바로 제로원 복음이 표방하는 것입니다. ‘손 떼세요. 하나님이 하십니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들어와 보면 손 떼세요. 대신에 눈 떼세요. 눈 떼세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어디서? 내 삶의 현장에서. 눈을 떼야 마음을 떼니까.
‘눈 떼세요.’ 라는 말은 마음이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빠져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하는 얘기 아닙니까?
자식을 계속 바라봅니다. 바라보는 것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고, 곧 내가 자식의 영역에 빠져버리는 얘기지요. 그리고 그 자식의 영역에서 결과를 기대합니다. 그 결과를 기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원칙을 찾아 헤맵니다. 노력합니다.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결코 거기에서 즐거움과 행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떼는 것입니다. 구경할 수 있는 상태가 되려면 마음의 눈을 떼야 돼요.
링 위에서 싸우는 선수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지고 얻어맞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아들보다 더 괴롭지요. 지금 마음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마음을 떼야 돼요. 마음의 눈을 떼고 구경꾼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그럴 수 있느냐? 여러분! 어머니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임할 수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 우리들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손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손이 이끌어 가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기려고 한다면, 내가 기대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원칙을 붙잡고 애를 쓰는 삶의 상태에서 빠져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구경하는 삶의 자리에 서야 되는 겁니다.
오늘 솔로몬이 서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삶이 이렇게 동그란 원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합시다. 그 바깥은 죽음이에요. 동그란 원으로 한정되어 경계가 있다. 이제 그 경계 바깥은 삶이 끝나는 것이고 죽음이면 솔로몬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바로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 경계선에 서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바라볼 때 그 하나님과 만나지 못한 채로 내가 원칙을 찾아가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삶은 결코 원칙을 행했다고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냐? 제일 좋으냐? 하나님 손에 맡겨 드려야 되는데 하나님 손에 맡겨드리려면 나는 구경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경꾼으로서 삶을 바라볼 때라야만 삶이 즐거워지고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 말이 10절에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라고 합니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이게 바로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로원 복음 방송이 아침마다 오늘의 번제를 시작한지 한 달이 됩니다. 4월 19일부터 방송을 시작했으니까요.
그 전에도 목회할 때든지 선교회를 할 때든지 방송을 하면서 늘 부딪혀서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해야 되는 과제가 하나 있었어요.
설교를 해서 방송을 내 보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클릭을 해서 들어오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청을 하느냐가 큰 관심거리이지 않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저를 돕는 부사역자들도 그게 큰 관심거리입니다. 그래서 클릭수가 많아야 마음이 기뻐지고 즐거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클릭수를 나타나게 하고 아침마다 가서 지난 하루 동안에 얼마나 사람들이 들어와서 설교를 봤나? 이걸 자꾸 확인을 하다 보니까 주객이 전도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설교하면 클릭수가 많아지겠는가를 자꾸 염두에 두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클릭수가 나타나는 것을 없애버렸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이제 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숫자가 방송으로 된 설교를 듣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 어떻게 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해서 하나님아버지의 입맛에 맞게 설교를 내보내느냐는 것이 과제로 바뀌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결과가 없어지게 됩니다.
10절에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열심히 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주어지더라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이니까 아이들에게 밥 해 먹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겨지는 거예요.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면서 우리들도 아이들을 구경하는 겁니다. 제로원 복음 방송의 앞날을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까?
구경꾼에게는 영화에서 김태희씨와 설경구씨가 진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치열하게 싸울수록 재미있더라는 겁니다.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공부를 못합니다. 구경꾼의 입장이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구경꾼이 아니라 자식에게 빠져서 자식과 함께 내가 직접 삶을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내 인생전체를 다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러나 자식으로부터 빠져나와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식, 내가 할 본분을 다 한다고 하는 입장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학교 보내주고 그저 관리를 해주고 사랑해 줍니다. 그러나 내가 뜻하는 결과를 기대하면서 자식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구경합니다. 이때 성적이 좋지 않은 성적표를 가지고 왔다면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이고, 우리 딸 이렇게 공부 못하는 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까?’ 1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 하나님의 손에 어떻게 맡깁니까? 하나님께서 그 딸과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떻게 믿어요? 십자가에서 확증된 것 아닙니까?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지구 인류역사상 어느 어머니도 자기 자식을 그렇게 사랑해볼 수 없었을 만큼, 하나님이 나를 십자가를 통해 사랑한다고 확증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을 믿는 거예요. 믿고 하나님의 손이 있으니까 나는 구경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게 맡겨진 일들도 이래야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효과도 더 크게 나타나게.
그런데 삶에 현장에 무겁게 빠져서 살아갑니다. 못해요. 힘들어요. 효과도 안 나요. 효율이 제로예요. 점점 떨어집니다.
여러분! 삶의 구경꾼이 되세요.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삶은 구경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셔서 홍해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바로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고 쫓아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진퇴양난의 위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여호와가 오늘날 너희를 구원하는 것을 보라.’
보라! 인생의 구경꾼이 되라는 겁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동분서주하며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쫓겨 다니며 방책을 구하지 말고 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보는 사람의 입장이 되겠습니까? 헛된 말인데도 불구하고 축제로 바뀌려면 봐야 됩니다. 봐야 돼요. 나랑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같이 봐야 돼요. 제로원 복음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각자의 삶을 봐야 돼요. 구경할 때 하나님의 손이 구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들어가 구원하려 하지 말아요. 하나님의 능력조차도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동원 하지 마세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삶의 모든 구석구석 삶의 모든 과제와 소제와 모든 관계 맺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그 삶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을 주님의 십자가가 막아 주시고 삶에 미치지 않게 삶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여러분 ! 대한민국의 서울 강남에 고3 어머니들, 고3이 아니라도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에서 서울대반 연대반 고대반을 정해놓고 가르치는 학원이 있더라고요. 미친것이지요. 미친 겁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사업생각, 오직 사업만 생각합니다. 미친 거지요.
틈만 있으면 골프 치러 갑니다. 미친 겁니다. 다 미친 것이고 빠져버린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바라보고 나와 주님의 죽음이 일치되어 있다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고백하는 가운데, 제로된 상태에서 '내가 죽었다.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해야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오직 그 때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 삶을 향하여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하시고, 내가 보고 있는 현장 앞에서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의 모든 영역을 이끌어 가실 수 있는 기회가 또 하나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흰옷입고 머리에 향 기름을 바르면서 축제의 삶을 사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어서 악한 생각을 갖지 않는 겁니다.
악한 생각이 뭐예요? 어떻게 하던지 내가 기대하는 바로 내 삶을 이끌어 가자. 내 자식이고 내 사업이고 내 건강이고 내 외모고 이것을 내가 기대하는 바로 원하는 바로 이끌어 가자. 이게 악한 마음이요, 이게 바로 미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죽고 마는 겁니다.
미친 나날들을 살다가 죽는 삶을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으로 바꿔버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만이 삶을 구경할 수 있고 세상을 구경하는 자 앞에서만이,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싸움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싸움의 현장에 들어가지 마세요. 보세요.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서 마음이 빠져 나온 상태에서 일을 하세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된다고요? 내가 기대하는 바를 마음에 품지 말라는 거예요. 일을 하되 그 일의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에.
지금 이 일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으니까 그 일을 할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노라보면 예기치 않았던 어마어마한 일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가 이렇게 설교를 했어.'라고 하면 설교한 것을 몇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니 한다는 생각으로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할 때에, 마음이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마음이 지속될 때, 뒤에서 퉁-퉁-하고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 계시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내 상급과 내 몫이 되고 내 기업이 돼서 내 마음에 느껴지고 내 마음에 다가오시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삶의 구경꾼이 돼 가는 겁니다.
옆집아저씨의 지갑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지갑에 돈이 없어요. 그런데 내 지갑을 구경하는 겁니다. 내 자식의 문제입니다. 구경하는 겁니다. 자식에 대해서 죽고 나서 구경하는 겁니다. 구경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손이 임해서 어떻게 이 아이를 이끌어 가시려고 하나? 아, 참 궁금하네. 얘가 이렇게 공부를 못하네. 앞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공부 못하는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끌어 가시려고 하시지. 되게 궁금하네.’라고 하면서 맡기는 거예요.
‘내 사업이 이렇게 안 되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려고 하시지? 야, 기대되네.'
뭐가 기대돼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상황을 바꾸어 가실지.
내가 기대하는 바를 정해놓고 바라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빠집니다. 빠져요. 원칙을 찾고.
'싸움하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하늘과 땅 차이요. 고통과 축제의 차이입니다.
싸움과 같은 삶, 그 속에 들어가서 살지 마시고 보세요.
그리고 행동을 하고 행위를 하는 모든 순간에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대에 대해 죽는다면 내가 바라는 바에 대해 죽는다면, 여러분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에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의 생의 시간, 시간들을 내가 특정하게 기대하는 결과들을 마음에 부여잡고 미친 마음으로 삶에 빠져서 살아왔던 모든 과거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지워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세상 속에서 있지만 세상을 구경하며 사는 자들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오늘도 맡겨주신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결과를 내 마음에 기대하지 않고, 단지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행하므로 오늘 하루도 축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목사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오랜동안 지내왔네요.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풀어가시는 모든 것울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것; 다음 일은 어떻게 풀어가실까 기대하는 것, 삶의 소용돌이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바라보는 것, 그 결과는 틀림없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일테니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이 이렇게 쉬운일임을 오늘하나님에 말씀으로 다시믿음을 다져봅니다 십자가에복음을숨쉬는 순간순간에도 잊지않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