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밥그릇
(레6:24-3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레위기 말씀 '아버지의 밥그릇'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부분은 속죄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직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속죄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속죄제물은 어떻게 다룰 것이며 또 어떤 절차를 통해서 해야 될 것이냐? 이런 것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마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지는 그런 부분들을 다시 지금 언급하면서 제사장의 제사시에 행동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지금 말씀이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속죄제를 드릴 때 특징적으로 우리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제사가 다 『거룩』합니다. 구분되어졌다는 것이에요. 차별화되어졌다는 겁니다.
제사행위가 그렇고, 제사물이 그렇고,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구분되어져 있고 차별화되어져 있는 그러한 거룩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속죄제에 특별히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무려 제가 대충 세어보니까 거룩하다고 하는 말이 다섯 번이 나올 정도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구분되었다, 차별화되었다, 이렇게 나오고 있고 어느 정도로 거룩하냐 하면 그 속죄제의 제물을 삶은 토기나 유기 그 그릇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이 나올 정도로 거룩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토기 같은 경우는 아예 그 속죄제 제물 뭐 양이면 양 고기를 삶은 그 토기 그릇을 아예 깨부숴버리라고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 속죄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사용된 그 토기를 절대로 다른 일에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만큼 거룩하다고 하는 이야기예요.
또 유기일 경우에는 하나님에게 드릴 속죄제물을 사용했던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른데 사용했다가는 큰일난다 너희들.
이게 위생적으로 고기를 삼던 것에 그대로 삶으면 위생적으로 안 좋지 않느냐 지저분하지 않느냐 이런 뜻에서 깨끗이 씻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속죄제 제물을 삶았던 그 고기나 그 삶았던 흔적이 남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것에 쓰면 안 된다.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그런 뜻으로 깨끗이 씻으라고 하는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신약성경에서 기억을 하지요.
옥합을 깨뜨려서 그 옥합 속에 들어있는 향유로 에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그 막달라 마리아의 헌신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 사건에 대한 주석을 읽다보면 그 당시 풍습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그릇이 있다고 그럴 때 예를 들어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왕이 지나가다가 어느 평민 집에 들러서 그 왕이 어떤 밥그릇으로 밥을 먹었다. 그러면 그 밥그릇은 깨버리는 거예요.
너무 훌륭하고 너무 존경하고 너무 거룩한 분이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다른 자가 또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깨버리는, 그래 옥합을 깨뜨렸다는 의미는 옥합 깨뜨리지 않아도 향유는 부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나서 그 그릇에 다시 향유를 담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지금 이 속에 들어있는 향유를 사용하게 되는 그분이 너무 좋고 너무 존경스럽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분에게 사용된 뒤에는 이 옥합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사용되는 거를 아예 끝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떤 거룩성에 대한 그 의미가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에요.
오늘 토기를 깨버린다. 유기를 깨끗하게 씻는다. 이게 다 마찬가지의 의미가 들어있는 사건이라고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속죄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부지중에 어겼을 때 하나님의 뜻을 어긴 범죄에 대해서 속죄하는 제사입니다.
근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게 거룩하다 그리고 그것을 삶은 그릇을 깨버려라, 다시 사용하면 안 된다, 이러한 모든 뜻이 도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게 지금 아주 거룩하다. 그러니까 참 딱딱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들고 사람 얼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
그러니까 내가 범죄자로서 신성한 법정에 서서 나의 죄악에 대해서 추궁을 받게 되는 그런 장면을 연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거룩하다는 뜻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럼 무슨 뜻이냐?
아버지 밥그릇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드려지는 속죄제물을 삶은 토기를 부숴버린다 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 밥그릇이 비슷한 성격이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요즘은 뭐 집에서 남자들이라고 자기들의 밥그릇을 따로 구분해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 제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 밥그릇을 따로 구분을 해서 그 밥그릇은 아버지가 드실 밥만 담는 그릇이 있었어요. 대부분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보통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시간이 늦기 때문에 그때까지 식구들이 다 기다렸다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녁을 먼저 먹게 되는데 그 저녁을 먼저 먹게 될 때는 어머니도 그러시지만 할머니의 준엄한 명령이 있으십니다.
맛있는 생선을 구웠다 그러면 그 생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겨 둡니다. 불고기를 했다 그러면 우리가 불고기를 먹기 전에 그 불고기를 제일 먼저 아버지 것을 구분합니다.
이게 거룩한 것이에요.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모든 반찬 어떠한 것이든지 먼저 아버지 것을 따로 구분하고 아버지 밥그릇은 언제나 아버지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밥그릇에 있는 밥을 남은 거라도 식모 누나가 먹는 것 할머니가 아주 야단을 칩니다. 그 밥그릇 채로 먹는 것을. 항상 엄마가 아버지 밥그릇에 남은 것을 밥을 덜어서 주면 먹을 지언정 그대로 먹지를 않았다는 것이에요.
할머니에게 제일 좋은 생선토막을 드립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이렇게 보시다가 "애비 줘라" 그리고 할머니가 그걸 치워버리십니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 반찬 아버지 밥그릇은 구별되었고 그게 거룩한 거지요. 차별화되었고 아버지 밥그릇은 또 어떡합니까?
이불장을 열고 그 이불 속에 집어넣으셨습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치셨고 어머니도 그렇게 하셨어요.
그게 어떨 때는 아버지가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실 때면 그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불을 꺼내서 필려고 하다가 밥그릇이 막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을 하거든요.
그렇게 구분을 합니다.
근데 여러분!
제가 막내아들이에요. 아들 셋 중에 막내아들로 컸는데 형들은 막내가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를 하고선 자기들 방에 들어가고는 그냥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식사를 하시면 꼭 아버지 옆에 붙어 있었어요. 붙어 있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제가 살이 찐 게 괜히 찐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통통했거든요. 하여간 평생을 통통해요. 이런 사람도 없을 거에요. 좀 빠졌다가 쪘다가 그래야 되는데 어쩌면 이렇게 초지일관 그냥 시종일관 이렇게 통통한지 몰라요.
이유가 있다는 것이에요.
아버지 옆에 이렇게 앉아 있어요. 그러면 제가 마음껏 못 먹었던 맛있는 반찬들이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저녁식사를 한지는 한 세시간 정도 지나요. 그러면 시장기가 돌지요. 어린 마음에 또 몸집도 커서 소화도 잘돼서.
그러고 있으면 아버지가 밥을 이렇게 드시다가 내가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아버지 밥그릇을 내어놓습니다. 여덟 식구 중에서 아버지 밥그릇에 숟가락을 넣어서 아버지와 함께 밥을 먹는 자는 나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저 밖에 없었어요.
어머니와 할머니의 그 준엄한 명령과 어머니의 뜨거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완전히 구분되었던 아버지의 밥그릇이 아버지 자신에 의해서 막내아들에게 스스로 내어진다는 것이에요. 그래 막내아들이 같이 먹게 만든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지요.
할머니의 준엄한 거룩성에 대한 명령, 어머니의 준엄한 존경에 어린 차별화, 이 모든 담을 넘어서 아버지의 사랑이 막내아들에게 밥그릇을 밀고 아버지와 함께 먹고 아버지가 남긴 것을 내가 직접 다 먹습니다.
이게 바로 속죄제사에 임하는 제사장에게 허락한 은혜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다 만인제사장설에 의하면 제사장 아닙니까? 다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속죄제물을 먹는다 무슨 뜻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범한 것에 대해서 이런 속죄제사를 드리는데 이 속죄제사가 그러한 사랑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렇게 생각해요.
아버지의 뜻.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까지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럼 우리는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건 무슨 뜻이냐?
오리를 가자는 친구에게 십리를 가주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냐 하면 말입니다 나에 대해서 내가 뜻을 가질 수 있고, 나에 대해서 아내가 뜻을 가질 수 있고, 나에 대해서 내 자식이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나에 대해서 친구가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 뜻을 갖고 계신 그 뜻은 모든 지상에 살고 있는 아무리 나를 사랑하고 나를 존경하고 나를 아끼는 사람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뜻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뜻이고 구분되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의 뜻.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뜻을 갖고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죠? 많던 적던 뜻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판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른편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들이대라고 하는 말씀을 나에게 해주신 이유는 뭐냐?
아버지의 뜻인데 그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아버지의 밥그릇과 아버지의 밥상에 차려지는 그러한 반찬과 밥과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최고로 좋은 겁니다.
아버지의 뜻이 거룩하다는 이야기는 거룩이 뭐라고 그랬지요?
차별화 된 거다. 다른 것이다.
근데 나쁜 방면으로 부정적인 방면으로 다른 거겠습니까?
뭐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예인이 감옥에 갇혔다 그래서 연일 인터넷 뉴스난에 계속 보도가 되던데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감옥에 갇히는 거 구분하는 겁니다. 차별화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거룩하다고 말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힌 게 아니라 뭐 정말 연예인들 같은 경우면 천억짜리 집을 샀다. 좋은 쪽으로 우리 세상 가치관으로 봤을 때 좋은 쪽으로 말할 때 그걸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데 그 뜻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좋다. 좋은 것이 차별화되고 차별화됐을 때 내게 가장 좋은 것, 마치 그날 저녁에 그 집안에서 차려지는 반찬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그 할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향해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뜻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나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뜻보다도 더 좋은 반찬 더 좋은 것으로 갖고 있는 게 아버지의 뜻이라는 겁니다.
근데 그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 아버지가 갖고 계신 그 뜻을 내가 가질 수 있게 밥그릇을 내어놓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를 얽매이는 그런 어떤 사슬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에서 나온 최고의 뜻을 나도 갖고 나에 대해서 적용하고 그것을 내가 먹고 그대로 살 수 있게 밥그릇을 내오놓는다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부담이 되고 이게 어떻게 우리에게 안 좋은 것이고 경직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 얼어붙게 만드는 것일 수가 있냐는 것이에요.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 나에게 해당되는 모든 말씀들이 내게는 최고입니다.
그 가정에서 도저히 아버지 밥상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반찬들이 놓여져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지의 말씀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악의 뿌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억울해 해야 되지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좋은 반찬입니다.
그 반찬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어놓으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속죄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눈높이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눈높이가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냥 좋게 되어진 운명적인 삶을 사는 건 아니잖아요. 아예 좋게 된 것이 붙박이로 되어 있다면 동물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 인간은 어떤 것이냐?
좋게 만들어 가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는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아버지의 밥그릇이 구분되고 아버지의 반찬이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거면 내게도 최고로 좋은 거라는 거예요.
아버지 밥상이 최고로 좋은 반찬인 것처럼 그것이 내게도 최고로 좋은 반찬인 것처럼 아버지가 보시기에 좋은 거면 내게도 최고로 좋은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좋은 것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되는데, 다른 동물들과 자연 이런 나무나 꽃들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만들어 가야 되는데 그 만들어가는 길이 뭐냐 하면 아버지의 뜻이라는 거예요. 율법이고 계명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너희에게 복음을 주고 죄 사함의 역사를 이루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율법과 선지자의 말들이나 하나님이 계명을 일점일획이라도 폐지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점이라도 다 이루기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왜? 그것이 나를 위해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니까. 가장 좋은 길이니까.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포기하시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포기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죄 때문에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그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는 걸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믿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눈높이로 올라가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속죄제가 바로 그거라는 것이에요.
이제 우리가 우리 눈에는 도대체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는 그 말씀이 비현실적이고 안 맞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눈높이로 가는 거예요. 아버지의 밥상에 앉는 겁니다. 아버지의 밥상에 마주 앉는 겁니다.
거기서 보면 말입니다 오른편 뺨을 칠 때 왼편 뺨을 돌려대는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삶을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이야기예요.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갈 수 있는 그런 것 우리로서는 불가능해보입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아니 네가 나에게 오리를 가주라!” 이렇게 거꾸로 말할 판인데. 그 십리를 가주라고 그런 것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밥상에 같이 앉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밥상에 초청을 하고 당신의 뜻의 밥그릇을 먹으라고 그대로 내놓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안겨서 내려다보면 그 오리를 가자할 때 십리를 갈 수 있는 그 마음이라야 가장 아름다운 삶을, 가장 행복한 삶을, 가장 멋지고 기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정해주신 거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여러분!
속죄제 정리합니다.
속죄제에 임하는 제사장. 우리가 제사장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속죄제입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대할 때에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떤 마음가짐이라야 하느냐?
어떤 깨달음을 가지고 그 십자가를 대해야 되느냐?
아, 내가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늘 아버지의 밥상 앞에 앉는 것이다. 그 속죄제물을 삶은 토기를 부숴버려라. 가장 거룩하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오직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구분되었다는 겁니다.
근데 토기로 삶은 고기를 내가 먹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아버지의 밥그릇으로 구분될 정도로 차별화되고 좋은 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다는 겁니다.
이제 성경에 기록된 말씀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우리가 그 주님을 먹습니다. 주님의 속죄제의 고기를 먹습니다. 먹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너무 구분되고 너무 좋은, 예를 들어서 자녀가 있다. 자녀문제가 있으면 그 자녀문제에 관해서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와 무소부재하시고 그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게 된 하나님의 뜻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거예요.
자녀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 되고, 자녀에 대해서 선택을 해야 되고, 자녀를 지도해야 되는데 난 못하겠습니다.
그래 속죄제 제물인 주님의 십자가를 붙듭니다. “주님 나는 못하겠는데요.” 그리고 주님을 가득히 담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되느냐?
지금 자녀문제를 둘러싼 것에 대해서 뭐 선생님이 뜻을 가질 수 있고, 아빠가 뜻을 가질 수 있고, 그럼 그 아이의 형이 뜻을 가질 수 있고, 누나가 뜻을 가질 수 있고, 할머니가 뜻을 가질 수가 있는데 그 모든 뜻 중에 구별되고 구별된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뜻을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그 뜻을 내가 지금 먹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같이 그 하나님의 생각의 밥그릇에 넣어서 그 뜻을 내가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라는 겁니다. 속죄제가.
이게 얼마나 좋은 겁니까? 얼마나 좋은 거냐고요?
그냥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최고요 최선의 길이라는 건데 그 뜻을 내가 먹고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거는 멋진 사람. 자기를 부인한 무슨 종교적인 인간, 성인 같은 사람만 드리는 기도가 아니에요. 바보가 이런 기도를 안 드리지요.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그것이 아버지의 밥그릇이에요.
그것을 내가 먹도록 내밀고 계신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내가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밥그릇을 내밀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의 밥그릇이다. 감히 내가 손댈 수 없는 밥그릇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옆에 있는 셋째 막내아들에게 그 밥그릇을 내밀면서 “승철아 먹어. 먹어. 먹어.”
전능한 아버지, 전지하신 아버지, 정말 능력이 뛰어나신 그 아버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가 당신만이 생각할 수 있는 그 거룩하고 그 좋은 뜻을 감히 지렁이 같은 내가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뜻을 아버지의 밥그릇에만 담겨야 될 그 뜻을 내게 내밀면서 “이걸 먹어라. 내 뜻을 먹고 내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라. 아들아! 아들아! 내 딸아! 내 밥그릇 네가 먹어라.” 내미는 것이 바로 속죄제의 제물을 먹는 제사장의 이 사건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070608)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