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민,동무, 이러한 언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남파간첩쯤으로 경계하게된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좋아하지도 않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중년세대가 되었는데 그냥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고져 하는바이다.
------------------------------------------------------------------------------------------------------------
도서명: 동북항일운동유적답사기
출판사명: 중국 만주 연변인민출판사
가격: 중국 16.80元(위엔) (구입당시 환율;1위엔당 한국돈120원) , 출판일: 2000년 10월 1차 인쇄
저자: 강용권(姜龍權)
강용권 선생님은 1945년 8월8일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출생하셨다.
부친 강인선은 국공내전시 목단강시 목릉현 마교하전투에서 국민당군에게 사망,렬사칭호
1951년~1957년 도문시 소학교졸업
1964년~1970년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졸업
1970년~1983년 안도현 량강중 교사,안도현 만보중학,자재중학교 교사재직
1983년~1996년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에서 조선족 력사연구사업 종사.
1999년 6월 1일 동북항일운동자료발굴을 위한 답사의 길에서
오전10시20분경 대련~단동시 방향 아스팔트길에서 자전거로 달리다
길옆에 쓰러진채 뇌출혈로 안타깝게 사망하였다.
저서: <홍범도장군><죽은 자의 숨결><강제징병과 군위안부>등 의 저서가있다.
저자의 서문...
필자가 13년의 교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연변력사연구소에 들어가게 된것은
1983년7월 연구소 실무분공회의에 있었던 필자는 전설적영웅으로 칭송 받는
홍범도의 자료를 수집,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의 사적을 두루 조사하기 시작하여
사적발굴에 나섰다.
제1차 답사기간:1992년 5월15일~ 12월 10일까지 218일간
제2차 답사기간: 1995년 연변의 8개 현, 시를 자전거로 답사<강제징병과 위안부>
유작 탈고후 과로로 인하여 뇌혈전 발생 전신마비 1년 치료
제3차 답사기간: 1999년 6월 1일 답사도중 뇌출혈로 안타깝게 사망
답사지역: 동북3성(만주)의 45개 시(市)와 현(縣)
총답사거리: 7,500Km
방문한 로인(노인): 600여명, 학자(20여명)
유적지고찰: 52개소, 기념관,박물관: 14개소
사용한 필관(필름): 34통, 록음테프(녹음테이프): 80여개
가장 일찍 출발한 시간: 새벽 3시 50분, 늦게도착한 시간: 21시 40분
하루에 가장 많이 달린 거리: 135Km,
방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93세
중국내 료녕신문, 흑룡강신문,종합신문,연변일보,언론기관에서 대서특필
한국 KBS등 언론기관에서 만주의 조선족역사 및 항일운동역사 증언채록을 보도
<<< 책의 차례 >>>
가. 나. 다.
맨처음 도착한 곳 김구상 선생의 증언 오상현(흑룡강성 소재)
3.1학원 김규식의 딸- 김현태 흑룡강성을 떠나다
김소래 할빈역을 찾아서 김내전 국장
김좌진의 딸 산조 할빈 일본총령사관 막석<중앙청년특별훈련소>
서일의 사위 최관 독립군의 녀걸 남자현
눈물을 흘리며 목단강을 떠나다 소래 김중권선생의 딸 라.
산시성에서 상지까지 서일 길림 대툰
고령자 죄악의 산실 731부대 길림시
횡도하자 리민이 부른 노래 길림의 성곽과 문
석두하자 장인덕선생의 회고
상지시 중국경내 조선민족항일투쟁
마. 바. 사.
정승국로인(노인)의 회고 오동진과 그의 두번째(고향) 고마령 사건
편강렬의 조카를 만나다 리진룡과 아하구 신팔균의 희생지
편강렬 양하산과 하로하 독립군 노래
김지섭 45년만에 다시 찾은 묘소
안산시에서 왕청문이야기를 듣다 류린석과 방취구
박윤걸
려순감옥
아. 자. 차.
강제징병에 나가 손가락 자르다 리중집과 그의 후예들 3.13 반일 대시위
강전자 속성군관학교 량환준선생의 회고 경신년대토벌과 장덕준기자
신흥무관학교 봉오동전투 윤동주
한경희목사 청산리전투 숨겨졌던 독립투사-원재룡
의병장 차도선 북로군정서의 소재지는
무송 조선소학교 연길로 돌아오다
맺는 말
강용권선생님은 자전거를 타시고 맨처음 도착한 곳이 만주의 발해진으로 동경성에서 20리 떨어져있고
백두산 여맥이 뻗어내린 동경성분지에 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이 경영하던 발해농장을 조사하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안희제는 1885년 8월5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안발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보성학교,양정의숙을 다니면서 구국비밀결사에 정력을 쏟았다.....<< 중 략 >>
73세 조상로로인,양재욱로인(노인) 의 증언을 정리해보면...
1933년도 조두원의 동방농장토지를 몽땅사고 그외 수 백쌍을 더 사들여 규모를 점점 확장시켜나갔고
발해농장 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안희제가 잡혀가자 후임으로 서울의 김씨 큰부자가 조카 문세경을 파견
했다고 한다. <<< 중 략 >>>
김좌진의 딸- 산조(山鳥)
목단강시 조선족문화관 강신극을 만나서 산시에서 김좌진의 활동에 대해 대화를 하였는데 그때 김좌진
의 딸 산조가 목단강에 있다는 것을 알고 너무도 놀랐다. 1990년 6월 11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흑룡강성 조선족출판사 근무 김창준의 안내로 김좌진의 딸 산조(본명은 김강석, 현재는 김순옥)를 방문
필자는 우리민족의 력사를 연구하다 1989년 1월 산시,해림,등 김좌진의 사적을 조사하려 다녔다는 자기
소개를 하니 경계심을 늦추고 처음듣는 많은 이야기를 증언하였다.
김좌진이 산시에 있을때 모사 여덟분을 받들어모셨는데 그들을 8로(8명의 존경하는 어르신)라고 불렀다.
김좌진의 생전,사후에도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하며 지금도 8로들의 애기를 할 때면 산조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8로( 정해식, 리달분,김기철,리덕수,장기덕,외3명) 평균연령은 김좌진 보다 20세 정도 많다.
김좌진은 항상 8로들 앞에서는 머리를 숙였고 분부를 명심해 들었으며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먼저 8로들
에게 문안을 올린 다음에 자기 일을 하였다.
김좌진을 살해한 자들이 그의 무덤까지 파헤칠것을 우려해 4년간이나 륜번(로테이션)으로 비밀보초를 섰다.
<<<산조의 비극적 출생이 대하여...>>>
김좌진이 해림(만주 목단강시 부근)에서 8로중 좌상인 정해식 로인댁에 머물고 있을 때 8로들은 김좌진의
건강이 념려되어 한국에 있는 본부인 " 오숙근 "을 모셔오려고 2년간 무진 애를 썼으나 " 오숙근 "은 결국
오지 않았다.그래서 8로들은 이곳에서 새 부인을 찾아 가정을 꾸리도록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8로들의 이런 토론은 김좌진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1926년 말의 어느날 정해식 로인이 김좌진을 불러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
< 자네가 홀애비신세로 뛰어다니는것을 민망스러워 더는 못보겠네. 그렇다고 언제까지 늙은이들 집에
얹혀 살겠나 내 생각에는 마땅한 녀인을 얻어 살림을 하도록 하는것이 어떤가 싶네! >
이 말을 들은 김좌진을 펄쩍 뛰면서 < 할 일이 태산같은데 언제 부부의 정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
하면서 인사도 없이 훌쩍 나가버렸다. 이것이 김좌진이 행한 예절없이 행동한 처음이자 마지막 행동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 김좌진은 8로 의 좌상(정해식)앞에 무릎을 끊고 낮에 있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지만
정해식 로인은 노여움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넓은 도량으로 분을 삭이고 다시 한번 일깨워주듯 설복시켰다. 끝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김좌진은
동의하였다.
1926년 19세의 처녀인 김영숙을 맞아드리니 그는 김좌진의 고향부근 마을에서 살았고 그의 부친은 3.1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왜경에게 맞아죽고 모친은 이를 악물고 영숙이를 공부시켰으며 중학교2학년때 모친마저
병사하니 학교를 중퇴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집안에는 오빠 (김영기),남동생,김영숙 , 3남매는 마을사람들은
김좌진을 찾아 만주로 갈 것을 권했고3남매는 물어물어 김좌진을 찾아왔던 것이다. 오빠 김영기는 오자마자
신민부의 별동대에서 활약했다.
8로들이 김좌진의 새 부인이 될 녀인을 찾던 때에 마침 김영숙이 나타나서 지적이고,얌전하며,알뜰한 김영숙을
8로들의 눈에 들어 8로들이 참가한 가운데 김좌진과 김영숙은 1927년 단오를 앞두고 간소한 성례를 치렀다.
이듬해 봄, 김영숙은 만삭이 되여 해산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김좌진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정해식 로인은 김좌진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김영숙을 라동호가 있는 동산시로 보냈다
정해식 로인은 남동생을 같이 보내면서 산길로 가는 길에 누나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김좌진의 아내를 암살하려는 암살범들이 미행하여 약 20리 길을 걸었을 때 산통이 오기 시작했다.
마침 남동생이 숲의 새소리에 취해서 앞서가는통에 김영숙은 혼자서 아이를 낳을 요량으로 슬그머니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전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숲이였다.숲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바로 이때 뒤를 밟던 암살범들이 금방 해산하고 맥없이 누워있는 김영숙을 더 깊은 산속으로 끌고들어가서 잔혹
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흉수(암살범)들이 자취를 감춘 뒤, 김기철,김좌진,강익선 외 별동대원 2명이
동산에서 해림으로 가다가 산속에서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따라가보니 발가벗은 갓난애가 바둥거리며
울고있었다.그리고 란도질을 당한 김영숙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김기철 등은 비통한 심정으로 시체를 매장했고
금방 낳은 피덩이를 강익선의 옷섶에 싸안고 돌아왔다. 김좌진은 더욱 과묵해졌다.끓어오르는 격분을 삭여나갔다
8로들은 김좌진의 딸에게 산에서 낳은 애라는 뜻으로 < 산조 >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산조를 두어달 가량 동냥젖으로 키우다가 너무도 힘겨웠던 김좌진은 하는수 없이 중국인 리씨의 집에 주기로했다.
한편, 1930년 1월29일 음력설이 가까워서 정미소가 분주한 때 며칠 째 기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김좌진은 몹시 고통
스러워했다.지난밤에도 등불을 켜놓고 밤새도록 수리하다가 겨우 새벽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밥을 막 먹으려는데'
숟가락이 똑 부러졌다.< 젠장! 재수없군!> 다른 숟가락으로 바꾸어 먹으로는데 마침 정미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좌진은 너무도 반가워서 수저를 놓고 밖을 내다봤다. 대문에서 방아간까지의 거리는 불과 열댓걸음
방앗간문을 열려는 순간 등뒤에서 김인관이 총을 쏘았다. 김좌진은 쓰러지지 않고 웬 놈이냐고 소리치며 돌아서려
는 순간 또 한발을 맞고 7척 장군이 죽은 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란 별동대원들이 뛰여나왔다, 북쪽으로 급하게 도주하는 김인관이 보였다.
별동대원들은 추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별동대원들은 재빨리 말에 올라 추격했다. 거의 따라잡으려는 순간
김인관이 홱 돌아서면서 쏜 총에 맞아 쫒아가던 별동대원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마침 앞에서 마주 오던 두 농군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소리지르자 흉수(암살범 김인관)는 한 농군을 쏘면서 계속
도망치고 말았다 .
김좌진이 피살당하자 원 신민부와 한족총련합회 주요 간부들은 장의위원회를 발족 성대한 추도회가 열렸다.
산소는 해림, 산시,일대 백여리를 샅샅이 훑으며 물색한 결과 동산시로 선정하였다.
장례를 치른후 8로 들은 24시간 교대로 묘소를 지겼고 유일한 딸자식을 중국인으로 만들수는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8로들은 중국인을 찾아가서 사정애기를 했다. 입쌀 두마대(2가마니)를 가져가서야 비로소 산조를 찾아올 수
있었다.그후 1934년 봄, 8로의 좌상 정해식 로인의 지휘로 김좌진의 유해를 고향으로 반환하게 했다.
김좌진의 고향 본부인 오숙근이 오고 산시의 8로 중심으로 김좌진의 옛전우와 부하들이 면례에 참가했다
전용짐차를 빌려 기차에 싣고 할빈, 심양, 안동, 조선의 신의주를 거쳐 반환했다.
<< 누가 김좌진의 암살범인가 ? >>
김좌진이 필살 당할 무렵 1930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선전부장 량환준 선생의 증언..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의 지시로 공도진이 암살했다.
량환준 선생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인 김백파 와 어린 시절부터 같은 고향에서 자라나 익히 알고 있던
공도진 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김백파는 본인이 김좌진 암살을 위해 공도진을 파견했다고 진술하였으며 공도진은 1931년 초 량선생을 만나
이렇게 진술햇다고 한다.
<< 총국에서 나에게 특수임무를 내렸고 나는 김좌진의 정미소에서 거의 1년간 신분을 숨기고 일만 했다.
1929년 음력설을 앞두고 정미소를 시찰하는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
김좌진을 조선공산당만주총국(화요파)에서 암살하게 된 리유는 김좌진이 일제의 끄나풀이라는 내부의 정보에
의해서였다. 그 정보에 의하면 김좌진은 할빈의 OO일본려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돈을 담보로
공산당에 관한 정보를 맞바꾸기 위해 밀담을 나누었고 그 후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해 공산당을 많이 죽였
다고 한다. 따라서 화요파에서 암살하지 않았다면 ML파에서 행동을 취했을거라는 얘기 였다.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개새끼들!!! 영원한 매국노잡종들 !!! >>>
산조는 김기철 로인을 양부로 모시고 친딸처럼 자랐다.(풀은 뿌리채로 뽑는다 는속담처럼) 김좌진을 암살했으니
유일한 핏줄 산조를 그대로 내버려두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해림일대에서는 산조가 김좌진의 딸이라는것을 아는
사람이 많기때문에 안전을 위하여 녕안현 해남촌의 싸호리 라는 깊은 산골로 이사를 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자 독립군도 투쟁의 대상으로 지목이 될까 념려되어 각지로 피난 다니다가 흑룡강성 연수현에
정학했다.이때 산조는 김순옥이라 고쳤고 1949년 위정규와 결혼 했다.1953년 연수현 가신자에서 목단강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고있다.
산조가 9살때 소아마비의 일종의 병으로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그때 김기철은 즉시 정해식에게 련락, 정해식은
여러곳에 련락 의연금을 모으고 장춘,할빈,연해주,일본등지의 동지들에게 속식을 전하니 드디어 연해주의 라상호
선생깨서 연해주로 데리고 와서 치료를 받으라는 소식이 왔으나 로씨야어(러시아어...)를 몰라 망설이던차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동경에서 대학을 2군데 졸업한 김기철의 소개로 일본에 도착 오사까의 어느 병원에 입원
시켜 1년반에 걸쳐 치료하여 완쾌했으며 김좌진장군의 딸을 구해내자는 공통된 의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끊이질 않았다.
그후, 김기철은 완쾌한 나를 데리고 싸호리에 돌아온 후 자기의 친딸을 가리키며< 이놈이 아팠다면 일본은 커녕
이곳 병원에도 못 갔을거다!..>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다.
그후, 김기철은 1946년 3월말 림종때까지 남아있던 신민부의 모든 문건자료를 나에게 넘겨주면서유언을 남겼다.
<이것이 너의 아버지의 일생의 기록이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태우지 말아라>
그러나 문화대혁명시 집수색도 엄해져 모든 자료를 소멸시키고 말았다.
<<< 김좌진이 애창하던 노래 : 감추가 >>>
어언간 3철은 지나가고
가을바람 서늘한데
단풍이 들어서 어라 둥실어라
먼저 난 양털은 빛을 잃고
노란 국화가 피였는데
이 세월 뜻없으니
영웅호걸이 늙는다.
김좌진의 딸 산조와 함께 산시에 있는 방앗간터를 찾아본것은 1990년 6월11일 , 60여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옛날의 자그마한 농촌 산시는 6만명의 진(한국의 면단위...)으로 변했다.
방앗간은 현재 산시진의 서남쪽에 위치해있고 원래의 터에서 8m 정도 북족으로 들어가서 벽돌 단층주택을 새로
지었는데 장진립 이라는 한족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의 주소는 산시진 도남촌 삼소조(道南村 三組), 8로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던 산조는 철이들며
수십번 와본적이 있는 이 방아간터에서 눈물부터 흘렸다.
김좌진이 독일제 정미기를 사오기전에는 당나귀를 리용한 매돌을 썼는데 정미기를 들여온 후로는 별로 사용하지
않다가 정미기를 뜯어간 다음에 다시 맷돌을 썼다. 지금도 한짝이 개울물 옆에서 빨래돌로 사용되고 있었다.
<<상지시>> 1946년 11월 20일 주하현 제1차 농공대표 회의에서 항일장령 조상지의 영웅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주하현을 상지현으로 개명했다.
1926년 4월하순 주하현 일면파 하동 길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성립대회를 열었다.
총국은 녕고탑, 중앙책임서기: 조봉암, 조직부장:최원택 , 선전부장:윤자영이 임명되었다. 그후 한달도 안돼 역시
일면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이 조직됐다. 현재 일면파진의 인구는 4천여명 조선족은 1천여명 뿐
상지시에는 어지조선족향 (조선족 7천여명 거주)과 하동조선족향(조선족 6,600여명 거주)이 있다.
상지시민족사무위원회에 들러 조사를 해보니 상지시의 중심은 하동...상지시 조선족중학교 교원 김구상(78세) 선생님이
증언에 의하면 경북출생으로 부모를 따라 화전으로 왔다가 주하현 하동에서 60여년간 살아왔다고 한다.
<<하동에 독립당만 해도 여러 패가 있었다. 김좌진이 신안진에서 한족총련합회를 조직했는데 그 세력이 하동에 까지
미쳣다. 조선공산당도 활동했는데 조선공산당은 지하활동, 독립당들은 반공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김규식은 연수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선생구하러 나왔다가 하동3계에서 한족총련합회에서 파견한 무장대가
김규식을 살해했다 한다. 나는 록음기를 틀어놓고 김구상 부부가 대화하는것을 록음했는데...
<<김규식을 살해한자는 한족총련합회에서 파견한 4명. 하동3계의 리붕해(황포군관학교졸업생)를 선생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가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총을 가진 4명이 뛰어들어 김규식의 목을 조이고 묶어서 마이하에 던졌다.
김좌진이 피살된 후 김좌진의 옛부하들이 김규식을 살해했던 것이다.
김규식이 피살된 후 그의 셋째아들 김현이(金顯伊)가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권총을 들고 주하로 갔다.
도로에서 할빈정미소주인이며 한족총련합회 간부인 박춘을 만나자 무작정 권총으로 쏴죽이고 더 죽이겠다고
석두하자로 갔다가 오히려 사살 당했다. 지금 김규식의 딸 김현태(80세)가 상지시에 살아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사 제5권704쪽의 인명소개란에 상해림시정부에서 활약한 우사 김규식 이 있고,
북만주에서 활약한 호은 김규식이 있는데 우사 김규식은 김규식박사로 호칭했으나 호은 김규식은 김규식 선생으로
불렸고 한국의 광복회장 이강훈은 김규식장군 이라고 칭하였다.
호은(芦隱) 김규식(金奎植)(15세 임오생1882년생)와 모친 주명수(朱明洙)(16세,1974년 93세로 사망)는 서울에서
결혼하여 4남1녀 를 두었는데 김현태는 1915년 1월20일 경기도 양주군 구림면 사로리에서 태어났다.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은 1881년 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출생 본명은 서기학,호는 백포(白圃)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리운협선생이 창설한 유지의숙에 다녔다 .1902년 함일사범학교를 졸업 1911년 두만강을
건너 왕청현에 뿌리를 내렸다 1912년 의병중심의 <중광단>을 조직 단장에 취임하였고 1919년 중광단을 바탕으로
<정의단>을 조직 그해8월 김좌진을 맞이하여 <군정부>를 편성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본영을 두고 군자금을
모아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들여왔으며 1919년 12월 상해림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군정부>를
<북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사관련성소를 건립 수백명의 청년
을 받아들여 군사력을 키워냈다.이것이 바탕이되어 청산리전투 대승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3500여명 독립군의 총재로
추대되고 만주의 9개 무장단체의 대회합시 서일을 총재로 추대한것은 그의 높은 명망과 능력을 증명하는것이다.
<<길림의 유래>> 만주족어로 " 길림우랍 "이라고 하는데 길림은 " 곁, 변 이란 뜻이고 " 우랍"은 하류 의 뜻으로서
송화강 곁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간단하게 길림 이라고 불리웠다.
길림을 예전에는 " 선창 "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1420년 이곳에서 배를 만들었기 때문 1661년 짜르 러시아를 정벌
하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만들어 " 선창 " 이라고불렀다.
<<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1918년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리동휘를 당수로 건립된<한인사회당>후일<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세칭 상해파라고 하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동북요하>의 3개의 작전부를 건립
북간도작전부의 본부는 돈하, 서간도작전부의 본부는 길림, 동북요하작전부의 본부는 요하,에 두었다.
1919년9월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철훈을 당수로 조직된 <전로한인공산당>은 세칭 이르쿠츠크파 라고한다.
건립초기부터 두 단체는 격렬하게 대립투쟁하여 1922년말 제3공산주의국제회의에서 양당의 해산을 결정하고 통일된
공산당조직이 나올 것을 호소했다.
1925년 9월17일 조선 국내에서 화요파를 위주로 서울상해파, 동북파,가 잠시 연합하여 조선공산당을 성립
동년11월 조선공산당 당수 김재봉이하 30여명이 일제경찰에 검거되자 1925년 10월 강달영을 위수로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을 조직하여 <만주><상해><일본>에 해외총국을 건립할 결정을 지었다. 이 결정에 따라
1926년 5월 흑룡강성 주하현 일면파 하동에서<<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요파, ML파,서상파, 는 각각 만주총국을 건립 대립투쟁하다가 1928년 12월 7일 제3차 국제공산주의
대회에서 파벌싸움만 하는 조선공산당을 해산시키기로 결정하여 1930년 상반기 각파는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해산 선포했다.
제3국제 공산주의대회는 12월 제강에서 <일국일당>제의 원칙을 세워 해산된 원조 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하여 만주에는 금방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중국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갑자기 팽창했고 중국공산당내의 조선족 비례가
증가되였다. 1930년대 초기에 만주의 공산당조직내에 조선족당원의 수가 많은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병신새끼들 자기네들끼리 싸우다 국제공산주의대회에서 인정못받고 해산당하고 결국 중국공산당에 기어들어가서
중국공산당의 역량만 키워서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일조했군요...그때 차라리 똘똘뭉쳐서 만주와 한반도를 통일했으면
좋았을것을 결국 요령성과 길림성의 경계지역인 사평(四平:쓰핑)에서 중공군들은 장개석정부군을 파격적으로 격파하고
여새를 몰아서 중국 전지역을 통일하여 공산화한 계기가 되었으니 아휴!! 저 만주땅을 되찾을 기회를 또 한번 놓쳤네요.....C8!>>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은 1911년 4월에 류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세워진 경학사의 부속 신흥강습소 였다.
신흥강습소는 1913년 5월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 신흥학교 로 개칭, 3.1운동후 1920년 5월에 신흥학교의 교명에 <무관>
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특수훈련반 1개월, 하사관반 3개월, 장교반 6개월의 과정으로 장교와 병사를 속속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신흥 무관학교 교가를 높이 부르며 일제 타도의 전투에 뛰어 들었다>
<< << 신흥무관학교 교가>>>>>
1.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에
여러번만 헌헌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 다 품고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 후렴>
우리우리 배달나라에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끊는 피가 우리 가슴 좔좔좔 거치며 돈다.
2. 장백산밑 비단같은 만리락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여맡기고
종 설음 받은이 뉘뇨
< 후렴>
3.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로운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내여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 후렴>
만주에서 독립군 세력이 증가하자 일본제국군은 1920년 경신년에 수만명을 동원 토벌작전을 감행하니
1920년 10월 신흥무관학교는 자진폐교 리청천장군 지휘로 300여명의 사관생도는 7년간 정든 합니하를 떠났다.
<<< 일본제국군의 경신년대토벌 작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참패를 한 일본군은 복수를 하기위하여 조선주둔군, 만주의 관동군, 씨비리파견군,
수만명을 동원하여 독립군 포위협공 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사이 독립군은 만주 북부 러시아 국경부근 밀산현
당벽진방향으로 대장정의 행군을 마쳤다.
1920년 10월 5일 부터 11월 23일 까지의 일본제국군의 만행을 경신년대토벌 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대토벌이라고 하면 안된다 <<경신년 비무장 조선족대학살 사건 >>이라고 하여야 마땅하다.
이제부터라도 대토벌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 1920년 10월 5일 ~ 11월 23일 까지의 피해 집계 >>
---------------------------------------------------------------------------------------
공격당한 마을 피살자수 인질수 강간 불탄 집 불탄 학교 불탄 구석
---------------------------------------------------------------------------------------
훈춘현 6 249 457 1 9,825
연길현 35 1,239 110 76 1,094 19 15,580
화룡현 20 570 314 6 8,320
왕청현 8 307 38 642 5 5,070
----------------------------------------------------------------------------------------
당시 용정촌 에 거주하는 카나다 장로파교회의 의사 말틴은 일본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고
<<견문기>>를 작성 서방 각국 신문에 보도하여 전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특히 시베리아 파견군인들의 악질적인 파렴치행위중 부녀자들의 은비녀까지 절취해 갔다.
특히,동아일보기자 장덕준은 취재를 위해11월2일 용정에 도착 삼성려관에 투숙후 즉시 일본영사관
에 찾아가 민간인학살을 따지고 항의하는데도 서울에가서 종군기자증을 확인받아오라는등 취재를 방해하고
익일 새벽에 와룡동토벌이 있으니 종군의향이 있으면 오늘밤에 마차를 같이타고 국자가에 가서 새벽
일찍 토벌대와 함께 행동하라는 받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급히 삼성려관으로 돌아가니 2명의 헌병이
마차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장덕준기자가 마차에 오르니 바로 떠났다 그 이후 장덕준 기자는 행방불명됐다
한국 최초의 순직기자로 인정되었다.
장덕준기자는 1892년 황해도 재령 출생 1911년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 1914년 평양일일신문 국문주간
으로 활약하고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되자 논설기자,군사부장,통신부장을 역임하며 활약하였다.
현재 삼성려관 은 용정시 전진골목9호 려관의 절반은 허물고 2층건립사용, 절반은 함석지붕 단층으로 남아있음.
<< 북로군정서의 사관련성소(사관학교) 1920년 7월초 조직과 간부배치도>>
소장 : 김좌진< 사령관 겸임 >
교수부장: 라중소 <참모부장 겸임>
본부교사: 리범석
체육교사: 김관 <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
제1학도 대장: 최준형
제1구 대장: 한건원
제2구 대장: 강화린
제3구 대장: 리교성( 강화린으로 교체)
제2학도 대장: 오상세( 서리 )
제1구 대장: 김훈
제2구 대장: 백종렬
제3구 대장: 허활( 백종렬로 교체)
<사관 련성소의 훈련과목>
1. 정신교육
2. 력사( 세계 각국 독립사외 한일관계사 )
3. 군사학 ( 러시아사관학교 교재를 번역한 것 )
4. 병과 ( 병기의 사용법, 부대의 지휘운용법 )
5. 교회법 등
제1기 졸업생은 298명 배출했으며 한달반후 10월21일 청산리전투에서 중요한 전투력을 발휘하였음.
----------------------------------------------------------------------------------------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의 전투내용을 증언으로 기록된것이어서 흥미로웠고
특히 북한사투리 형태의 생소한 단어를 읽는 재미가 있어 독서의 즐거움이 있었다.
차후 중국여행시 관영 " 신화서점 " 에 꼭 들려서 신간서적을 많이 구입하여야할것이다
그러나, 종이의 재질이나, 책 디자인, 교열부족으로 오자 탈자도 상당히 있어서 냉정히
평가하면 돈주고 구입하기 아까운 측면이 많으나 책의 내용에 좋은 정보가 있어서 참을수 있었다.
연길시내...훈춘시내...의 <<신화서점>>을 들렀으니...북경의 신화서점을 꼭 방문할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