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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몇 점이 만점일까?
(슥8:1~24)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신앙은 몇 점이 만점일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신앙은 몇 점이 만점일까?
이제 대학입시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들 막바지 점검 작업에 들어가서 불철주야 열심을 낼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 수능시험은 450점이 만점이라고 합니다.
저희 때는 예비고사라는 것이 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예비고사가 340점 만점이었거든요?
그래서 보통 서울대학을 들어가려고 하면 최소한 280점 이상을 맞아야 된다, 이런 말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토플시험은 120점이 만점이고, 토익은 990점.
그것 말고도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은 여러 항목 중에 각 항목이 10점 만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만점이라는 것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과연 만점이라는 게 있을까요?
보통 우리가 만점이라고 하면 만점자만 합격을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합격점이 따로 있습니다.
합격점이 있고, 고득점자가 있고, 만점자가 있습니다.
만점이 쉽지가 않아요.
신앙에 있어서 ‘섰다 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있지만 신앙에 과연 만점이 있을까요?
만점이 있지요.
‘섰다’고 하는 것은 만점의 상태가 아닌 거죠. 그러니까 넘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점이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분야에서처럼 만점자가 드물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누가 만점자인지조차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확하게 가려낼 수 없다는 것에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히 신앙에 만점자는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겁니까?
다른 모든 시험은 100점 만점 중에서 만점을 못 받더라도, 심지어는 60점이 통과점수인데 낙제점수인 50점을 맞더라도 그 낙제점수를 맞은 자가 만점이 백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만점인가를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는 내가 몇 점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떤 상태가 만점인가조차도 아예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만점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고,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하고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한 것을 행한다’고 얘기합니다.
답을 아는 거예요, 그리고 만점이 어떤 상태라는 걸 알고 있죠.
그런데 이론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탄식을 하는 거예요, 탄식을.
문제는 우리 마음이 만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지금 낙제 점수에 해당되는 신앙적 심령의 상태로 있더라도 내가 낙제점이라는 걸 알려면 만점이 어떤 건가를 알아야지 내가 낙제라는 걸 알고 탄식을 할 수 있는데, 탄식이 안 나오는 이유는 내가 몇 점인지도 모르고 만점이 어떤 건지도 모르니까…
오늘 본문은 성전재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성전을 중심으로 사는 선민들의 삶에 대해서 또 다른 측면을 얘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이 뭐냐 하면 진리의 성읍이 된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예언은 성전이 완성되는 단계를 지향하고 있지만 더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시작되는 교회의 시대, 예루살렘과 교회를 일치시키면서,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재림 때에 이루어질 온전한 메시아 왕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시대의 예루살렘 성읍, 교회가 진리의 성읍이 되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진리의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이 진리의 성읍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는 거예요.
하나도 재미있을 게 없는 데 그게 뭐가 재미있느냐?
아니에요, 여러분!
진리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쓰이는 보편적인 용례를 가만 살펴보면,
서울대학교의 표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라틴어로 ‘외리타스 룩스메아’ ‘진리는 나의 빛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져보고 찾아보면 이 진리가 들어가는 말을 표어로 쓰는 학교가 무지하게 많을 것이에요. 또 각 연구소라든지 수도원이라든지.
그런데 진리의 대학교, 진리의 수도원이나 연구소가 아니라 ‘진리의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성읍’이라는 말에서 성읍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먹고 살며, 집짓고, 장사하고 사는 삶의 현장이에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진리의 시장판, 진리의 레스토랑, 진리의 영화가, 진리의 거리, 진리의 가정, 일상적인 삶에서 진리의 성읍에 사는 사람들로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리가 뭡니까?
참이에요, 거짓이 아닌 것이고 정답입니다.
진리가 정답이에요.
그러니까 진리의 시장판, 진리의 가정, 진리의 레스토랑, 진리의 길거리, 성읍이라는 말과 진리가 합쳐질 때 얘기될 수 있는 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점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문제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되는데, 신앙의 만점을 측량할 수 있는 문제는 어떤 문제입니까?
일상적인 삶에서 측량되어질 수 있는 그런 문제라는 겁니다.
자, 모든 세상 사람이 다 성읍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건, 읍에서 살건, 면에서 살건, 다 사람들이 모여서 군집으로 이루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살고 있는 동안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많겠지요, 건강문제 가정문제, 가정에서 자식문제 부부간의 문제 시부모님과의 문제, 또 돈 문제, 그리고 사회적인 문제, 정치문제, 모든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이런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신앙인에게 내준 문제가 뭐예요? 뭐가 다릅니까?
신앙인이 풀어야 될 문제, 만점을 향해 가야 될 문제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읍에서 일어나는 내 삶에 부딪혀 오는 사건과 사람과 모든 순간이 다 문제가 되니까 만점이 몇 점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에요.
얼마동안 이 세상에서 사느냐에 따라 다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점은 한 문제, 한 문제를 다 맞을 때 만점이 되는 거니까 만점이 몇 점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사람이 만점인 상태냐 아니냐를 하루를 살아가는 걸 보면 비례적으로 따져서 하루를 온전히 산다고 하면 365일 만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칠 수도 있어요.
내다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수천, 수만 가지가 될 수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한 경직 목사님처럼 90세가 넘게 사신 분은 수십만 점이 만점이 될 수 있겠고…, 그런데 문제의 공통점이 뭐냐 이겁니다.
수천, 수만 가지 문제가 다 공통점이 있는데, 돈 문제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항상 신앙인에게는 문제에 붙어 다니는 혹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만군의 주 여호와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게 닥친 돈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게 문제예요.
자식문제, 그냥 자식과 둘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만군의 주 여호와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게 닥친 이 부모자녀간의 관계문제를 어떻게 풀 것입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수십만, 수백만 문제가 될 수 있고, 하루에도 몇 십, 몇 백 가지의 문제가 주어질 수 있으니까 그 모든 문제의 공통점은 ‘만군의 주 여호와하나님 앞에서’ 이것을 어떻게 풀 것입니까? 이렇게 문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왜 그렇지요?
성전이 재건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군의 주이신데,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권자로 군림하고 계시는데, 유독 나에게 인격적으로 일대 일의 관계를 맺고 싶으셔서 내게 다가오시고 내 삶으로 들어오신다는 이야기가 성전재건의 의미이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할래?’
이게 바로 만점을 향해 가기 위해 풀어야 될 지금 내게 닥친 이 한 문제예요.
모든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게 바로 모든 문제에 주어진 공통적인 항목이라는 겁니다.
자, 그 답을 어떻게 풀어가야 될까요, 여러분.
오늘 본문 3절에 진리의 성읍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의 성읍은 정답으로 사는 사람의 삶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그 정답이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래?
그런데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그 다음에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자리가 모리아 산, 그리고 재건이 되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이 성산이라고 일컬어 질 것이라는 것이에요.
성산(聖山), 오늘 이 문맥에서 살펴보면 성산이라는 의미가 뭐겠습니까?
오직 그곳에서만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얘기에요.
그렇죠?
‘하나님이 앞에 있을 때 어떻게 할래?’ 이게 문제인데 문제를 바로 읽어야 정답이 나오니까… 문제를 모르면 정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리아 산 그 자리에 솔로몬 성전이 지어졌다는 것은 정답과 어떤 연관이 있겠습니까?
모리아 산,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00세에 얻은 아들이삭을 이제 한 120세쯤 됐을 거라고 추측을 하지요, 이삭도 청년이 됐습니다.
그 시절에 이삭을 장작더미로 번제 단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묶어서 올려놓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장소가 모리아 산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만점이다’라고 외치신 사건이 바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며 갑자기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뛰어 내려오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아들이삭까지 아까워하지 않고 나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정답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돈 문제를 어떻게 할래?
하나님 경외가 정답이에요.
근데 하나님 경외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지는 겁니까?
하나님 경외를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 경외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 경외는 이삭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납니까?
이삭을 아까워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아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아들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아들이 빼앗아 갈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 전체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정답을 맞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는 그 현장을 우리가 볼 수가 있지요.
여러분!
만점을 향해 가기 위하여 순간순간 주어지는 문제, 영어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도 test라는 말입니다.
test, 시험을 봤다는 것이에요, 만점을 맞습니다.
만점의 요령은 하나님 앞에서 아까워하지 않는 겁니다.
무얼 아까워하지 않습니까?
이삭이 상징하는 의미가 뭐겠습니까?
자, 아브라함의 마음을 끄집어내서 한번 분석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제일 아까워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재산, 아내, 자신의 몸, 그리고 아들이삭 아깝습니다.
아까운 것을 대충 이렇게 놓고 볼 때, 아브라함에게 제일 아까운 것은 뭐겠습니까?
이제 나이가 120세가 되었어요, 살만큼 살았습니다.
175세까지 사는데 살만큼 살았어요, 지금 죽어도 돼요.
나는 죽어도 내 자식은 남아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늙은 나보다도, 이미 어머니는 경수가 다 끊어진 상태에서 난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제일 아깝지요.
내 몸을 중심으로 아까운 정도가 결정이 되고, 몸이 있기 때문에 아까움의 수치가 달라지는데, 몸을 중심으로 해서 아까운 것 중에 가장 아까운 것, 그러니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풀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 아들을 바치라는 문제, 자기를 죽이라고 했으면 더 쉬웠을 텐데 아들을 바치라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는 겁니다.
왜?
가장 아깝기 때문에.
가장 아까운 것을 하나님 때문에 마음에서 버립니다.
아깝다는 것은 마음을 많이 할애한다는 것이고, 아까운 걸 버린다는 것은 아까운 것에 할애했던 마음을 다 거둬들인다는 얘기죠.
누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자,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의 정답은 무엇입니까?
아까워하지 않는 겁니다.
내 몸이 있기 때문에 몸을 중심으로 해서 아까운 것들이 층층으로 늘어서 있는데, 볼펜 하나도 아까워요, 내 자식은 비교할 수 없이 아까워요, 아내가 아깝고, 재산이 아깝고, 집이 아까워요.
또 추상적인 것들, 명예가 아깝고 내 인생이 아깝고, 인생의 시간이 아깝고, 다 아깝습니다.
근데 이 아까운 것들, 문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아까운 것들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할래?
답은 그 아까운 것을, 아깝다는 것은 마음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안 들어간 것을 아까워하는 법은 없습니다.
아까워한 것에 들어간 마음을 다 끄집어내서 하나님께로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일어난 영원한 신앙의 정답이라는 겁니다.
영원한 신앙의 정답.
그런데 이 정답을 알아도 우리가 행할 수가 없는 거예요.
머리로 아는 정답을 마음이 그 정답을 맞히지 못하는 겁니다.
아까워하는 걸 여전히 아까워하고 그래서 아까워하는 바람에 고민하고, 아까워하는 바람에 걱정하고, 아까워서 근심합니다.
내 인생이 망가질까봐, 내 자식의 인생이 망가질까봐,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길까봐, 아깝기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합니다.
마음은 정답을 맞히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까운 걸 버렸으면 되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있으니까…
이삭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칭찬하신 것처럼, 내가 아까워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아까워하시고 다 이끌어 가실 텐데 내 마음이 아까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내 마음이 정답을 맞히지를 못하는 거예요.
만점을 향해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래서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주어진 것이에요.
정답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마음이 맞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십자가에 걸려 질 때에 하나님 앞에서 아까워하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아까워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릴 수 있게 되고 그 아까운 것들에 대해 내 마음이 죽을 수가 있어서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릴 수가 있어 만점의 상태로 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모리아 산, 그리고 진리의 성읍, 모리아 산에 세워지는 성전, 그 성전의 완성인 주님의 십자가사건, 신앙은 몇 점 만점일까요?
정확하게 몇 점 만점인지는 몰라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문제들을 맞는 정답을 통해 만점으로 향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점을 향하여 어떻게 걸어가십니까?
하나님아버지 만군의 주의 뜻이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행복도 없고 기쁨도 없고 거기에는 명예도 없습니다.
거기는 저주받는 자리입니다, 죄인의 자리니까…
여기서 주님은 당신의 몸과 당신의 인생과 당신의 명예 전체를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그 아까운 것들에 할애될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다 하나님께 드리고, 만군의 주 여호와가 아버지이신 걸 인정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정답을 내십니다.
여러분, 다윗은 몇 점이었을까요?
요셉은 몇 점이었을까요?
사울은 낙제 점수 받은 것 아닙니까?
자, 정답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다윗을 보세요!
사울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측근들은 답을 냅니다, ‘칼로 찔러 죽여라’
다윗은 다른 답을 냅니다, ‘그건 정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동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만군의 주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너희가 정답이지만…’
그러나 원수 사울이지만 원수보다 앞서서 하나님이 먼저 내 옆에 계시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래? 문제를 너희가 잘못 읽었다는 겁니다.
사울과 나의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 원수 사울을 어떻게 하겠는가가 문제였는데 측근들은 문제 자체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겁니다.
자, 만군의 주 여호와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일상에 주권적으로 관여하셔서 이끌어 가신다는 얘깁니다.
눈 뜨고 맞이한 오늘, 하루 이 상태, 하나님 만군의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으면서 내 몸이 있기 때문에 아까운 것들,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있기 때문에 아까운 것들이 뭐가 있습니까?
아내, 남편, 자식, 부모님, 재산, 심지어는 몸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있고 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일에 대해서 느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모든 느낌, 생각, 계획조차도 십자가에서 다 버리는 겁니다. 다 죽는 거예요.
내 생각에 할애된 마음조차도, 내 감정에 할애된 마음조차도 다 거두어 들여서 하여간 몸이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사건, 관계, 일,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니까 정답은 희한하게도 제로(0)예요, 제로!
모든 문제에 대해서 내 마음이 가는 것이 제로일 때, 그때 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고 만점을 향해 가는 생이 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넘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참 희한한 거예요.
어제까지의 점수가 싹 지워지고, 오늘 다시 점수를 주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지우개 역할을 해주시고, 그 보혈과 찢기신 살이 지우개 역할을 해주시면서 동시에 앞으로 닥칠, 이제 원점에 서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오늘 하루를 시작할 때, 앞으로 주어질 모든 문제의 정답이 되십니다.
이제까지 낙제 점수를 받았습니까?
F학점 하나 맞으면 평생 끝까지 성적표에 쫓아다니잖아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보혈이 어제까지의 낙제 점수를 다 지워 주십니다.
사도바울은 그 힘으로 날마다 죽으면서 새롭게 태어나서 그날 하루하루를 만점을 향해 달려갔던 것이지요.
인생전체를 누적해서 점수를 매기지 않으시고 이제 주님의 합산방법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매일매일 점수를 매겨주십니다. 날마다 새롭게…
어제의 연장선이 아니라, 오늘 하루 위에서 주어진 새로운 하루로서 하루의 만점을 위하여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고 내일 또 하루의 만점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현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아까워하면서 이 몸을 중심으로 아깝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마음을 다 거둬들이는 만점의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루하루 만점으로 살게 해 주세요!
어제까지 낙제 점수 받았던 인생의 점수를 주님의 보혈의 힘으로 다시 원점으로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깨끗한 눈과 같이 희게 된 사유하심의 근거 위에서 오늘 주어지는 모든 문제들을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정답을 내며, 하나님 이외에 아까워하는 모든 마음을 회수해서 하나님께만 드리며 살아가는 만점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