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9, 복 있는 사람으로 7
화평케 하는 자, 2020.3.22, 박홍섭 목사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소위 팔복이라고 말하는 여덟 가지의 내면적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신자의 인격과 성품 속에 생명의 씨앗으로 들어 있는 이 특징들은 교회를 통한 지속적인 말씀의 공급을 통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로 자라나 세상 속에서 독특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보려고 하는 화평케 하는 성향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에는 어디든지 불화가 있고 전쟁이 있으며 미움과 적대와 다툼이 있습니다. 가족 안에도, 직장 속에도,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공동체와 공동체 간에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든 인종 간에 빈부 간에, 종교와 정치와 이념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있습니다. 서로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가능하면 서로 잘 지내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대립과 미움과 증오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부패한 본성은 좋은 것은 자기가 누리려고 하고 나쁜 것은 다른 사람이 받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여 갈등의 씨앗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투고 갈라지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약4:1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는 역사 내내 화평을 소망해왔지만 정작 경험하는 것은 죄와 욕심이 초래한 불화의 고통이었습니다. 누가 이 죄 성을 이기고 화평의 삶을 이룰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 수 있고 누가 욕심 덩어리인 이 타락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교육으로 될까요? 훈련과 자기 절제로 될까요? 육신을 입고 친히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우리 안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관계를 화해시키고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보내시어 죄와 욕심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그 누구도 화평케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2:14). 그리스도가 자기의 육체, 곧 십자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과 막힌 담을 허물고,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원수 된 것, 모든 미움과 증오와 적대감의 막힌 담들을 허시고 소멸하셨습니다(14-16절).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치료받은 사람입니다. 불화의 고통 속에 있는 이 세상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복을 받은 팔복의 사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화평의 왕,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양자라면 하나님의 독생자를 본받아 불화의 고통 속에 있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곧바로 천국에 데리고 가시지 않고 아직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불화 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주님이 맡기신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자로 성령의 능력으로 욕심을 극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화평을 만드는 자들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골라서 하던 사람들이었고 자기 욕심으로 여러 가지 불화와 분쟁들을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단순히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들을 맡기셨습니다. 자녀의 권세를 맡기셨고 성령의 능력을 맡기셨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과 화해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우리 안의 정욕과 죄를 이기게 해주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있을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화가 끝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참된 화평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을 받은 화평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후5:17-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화목케 하는 직분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려고 애쓰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욕심을 내려놓고 화평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부릅니까? 하나님의 친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요? 2008년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본부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이후 기독교의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2009년도는 19.1%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당시 개신교인이 전체인구의 18.3%임을 감안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 빼고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요? 2017년도에 처음으로 신뢰한다가 20%를 넘었습니다. 그런데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도 50%을 넘었습니다. 2008년도는 47%였는데 50%를 넘은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2020년도는 신뢰하지 않는다가 63.9%입니다. 30-40대는 4명 중에 3명이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를 신뢰하느냐는 물음에 30%만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욕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 몰상식하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그냥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도까지 하면서 더 극성맞게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모습들이 그들의 눈에 비추어진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으로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 보고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면서 세상 가운데 보여야 할 모습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섬김과 나누는 삶을 보여야 합니다. 화평이란 말을 한문으로 보면 화할 화(和)자와 평평할 평(平)자를 쓰는데 화할 화자는 벼 화(禾)변에 입구(口)자를 씁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 곡식을 공평하게 넣어 주는 것이 화평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의 입에 공평하게 곡식이 들어가지 않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불화와 다툼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사람들을 공평하게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공평한 세상이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높은 곳이 있는가 하면 낮은 곳이 있습니다. 강한 곳이 있는가 하면 약한 곳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어떤 사람은 병약하게,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낮은 사람이 있고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불공평하심 때문에 이 세상에 불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공평한 세상을 만든답시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평화는 전부 똑같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도와주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해 줄 때 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평화입니다. 불화는 높고 강한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여 낮고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깔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높고 강한 사람이 예수님 같이 늘 겸손하여 낮고 천한 사람을 귀히 여기며 함께 살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겸손하게 자신보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과 나누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돈을 버는 것도 남들과 나누기 위해 열심히 벌고 공부하는 것도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열심히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화평케 하는 자로 인정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습니다. 높은 사람의 교만도 불화의 원인이 되지만 낮은 사람의 시기와 불평 그리고 원망 또한 불화의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웃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픈 좋지 않은 성격들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곱게 봐주지 못하는 삐뚤어진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내 속에 있는 시기와 원망과 불평을 없이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잘되기를 위하여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와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는지 모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살리는 말을 합니다. 반면에 불화케 하는 자들은 죽이는 말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말이나 은근히 남을 깍아 내리고 비방하는 말들이 화평을 깨트리고 불화를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말을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바른 말을 좋게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화평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는 정신없이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화평에는 참 화평과 거짓 화평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와 타협해서 얻은 거짓 화평을 주시기 위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참 화평은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말씀의 검으로 싸울 때 주어집니다. 진정한 화평은 진리의 검과 말씀의 검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평화의 사신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것과 싸우려고 하는 말씀에서 오는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피스메이커는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겸손하게 나누는 삶에 힘쓰고 말을 조심함으로 평화를 지키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거짓된 화평이 아니라 참 평화를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막힌 담을 헐어야 될 사람들이 없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으로 가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 안에서 구석구석을 돌아보십시오. 서로 담을 쌓고 1년, 2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는 형제자매가 없는지. 그대로 방치하면 안 됩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여 서로가 손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 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여러분들이 사시는 가정과 세상 그리고 교회에 언제나 평화가 넘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