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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4:1-13, 믿음, 안식, 순종, 20.11.22,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신앙 현실의 고달픔 속에서 믿음의 의심과 갈등과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저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우월하고 모세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신앙의 현실 앞에서도 하늘과 땅을 잇고 인생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사랑할 때 그분이 주시는 새 힘을 얻고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장 11절부터 안식의 주제가 등장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4:13절까지 안식이라는 말이 10번이나 반복되면서 안식을 강조합니다(3:11, 18, 4:1, 3, 5, 8, 9, 10, 11). 또 안식과 같은 개념인 ‘쉬다’라는 말도 3번이나 나와서(4, 10) 안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킵니다. 왜 이렇게 안식을 강조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그 나라를 영광의 나라로 가꾸어 가라는 사명을 인생에게 주셨을 때 사명만 주시지 않고 안식을 선물로 함께 주셨습니다. 이 안식은 본문 3절에서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루어진 안식, 4절에 제 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안식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안식으 뿌리이고 원명입니다.
창2:1-3을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6일 창조를 완성하시고 7일째 그가 하신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다고 하는데 이 안식은 단순한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다고 피곤하셔서 휴식이 필요하거나 쉬어야 다시 일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시고 곤비함이 없는 창조주이십니다. 6일 창조 후에 7일째 안식하셨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모든 것을 계획대로 완전하게 창조하셔서 더 창조하시지 않아도 되는 상태, 당신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위임시켜 맡긴 인간을 보셨을 때 흡족하고 만족한 상태, 그 만족에서 나오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다 마치고 나서 그 기쁨과 만족을 안식일과 선악과 언약과 문화명령에 담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우리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안식은 지금 누리는 선물인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고 가꾸는 사명과 더불어 더 크고 영화롭게 완성될 소망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인간이 언약에 불순종함으로 안식의 선물과 소망은 다 깨어지고 죄와 사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하고 신음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이 안식을 회복하는 동시에 더 큰 기쁨과 만족과 영광을 향한 남은 안식의 소망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구원에는 반드시 안식이 따릅니다. 구원과 안식은 한 세트입니다. 구원은 안식을 향하고 있으므로 안식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안식을 향하여 역사와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 구원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의 모델로 설명됩니다. 출애굽은 가나안의 안식을 바라보고 이루어진 구원의 시작입니다. 신 12:9-10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때에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출애굽한 광야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어떤 땅으로 약속되고 있습니까? 안식의 땅입니다. 기업의 땅입니다. 구원은 안식이 없었던 애굽을 나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애굽에서 나왔다면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어있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안에 담겨 있는 만족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목표와 방향입니다.
그러나 광야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서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가나안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저들이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희미해서가 아닙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애굽에서부터 경험한 10가지의 재앙, 유월절 어린양의 은혜, 홍해를 가른 하나님의 권능,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킨 기적들, 광야에서 터진 반석의 물,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 기둥과 불기둥,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 그들 모두가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해주신 십계명의 하사가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에 따른 기쁨이 있음을 충분히 경험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시고 무턱대고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약속이 어떤 효력을 가지는지 충분히 납득하고 항복할만한 근거를 주시고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 될 것이니 믿고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고 들어가라는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히 3:7-19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에게 왜 격노하셨습니까?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완고해서입니다. 그들이 몰라서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몰라서 못 믿고 몰라서 불순종하면 노하지 않습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충분히 보았습니다. 어느 민족이 하늘에서 난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어느 백성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광야 이스라엘은 다 보았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반석의 생수를 마셨고 하늘의 만나를 먹었습니다. 믿음의 근거와 조건이 되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셨고 경험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완악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무지해서 하나님이 격노했다고 하지 않고 완고해서 격노하셨다고 한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격동시켰습니까? 하나님의 기적을 보지 못한 2세대가 아닙니다. 모세를 좆아 10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애굽을 나온 1세대입니다. 이들은 온갖 기적을 경험한 세대들입니다. 핑계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가나안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완고한 마음으로 말씀을 믿지 않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가나안 안식은 참된 안식의 예표입니다. 그림자요 모형이기에 출애굽 2세대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도 온전히 다 누리지 못한 안식입니다. 그럼 가나안 안식이 바라보는 실체 안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안식입니다. 8-11절이죠.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히브리서 독자들을 비롯해 신약 성도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나은 인도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허락된 안식을 누리는 동시에 광야 세대의 불순종을 거울의 교훈으로 삼아 남아있는 더 나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특별히 9절의 안식할 때가 남아있다고 할 때 안식할 때는 ‘사바티스모스’라는 단어로 훨씬 동적인 의미의 단어입니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안식의 축제가 남아있다. 혹은 안식의 잔치할 때가 남아있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도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믿음으로 안식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 이 안식이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긴장 속에서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우리의 죄 성과 세상의 도전 앞에 이 안식이 방해받고 있으므로 아직 안식의 축제, 안식의 잔치 때는 아닙니다. 안식의 잔치는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죄가 해결되고 영광의 나라가 완성될 때 완전한 기쁨과 만족으로 주어질 남아있는 안식입니다.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바로 이 남아있는 안식의 잔치와 축제를 기억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식의 축제와 기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남아있는 안식의 잔치를 소망하고 붙들 때 오늘의 어려움과 믿음의 시험과 침체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남아있는 안식 축제의 즐거움이 얼마나 확실한지 10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여기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얼핏 보면 먼저 죽은 성도들로 생각할 수 있지만,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고 시제도 과거시제이므로 자기 일을 그치고 이미 자신의 안식에 들어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확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자신의 사역을 마친 후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의 안식에 도달해계시면서 자기 백성과 함께 안식의 축제를 즐기시려고 준비해놓고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며 성령을 보내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주의 백성들이 이 안식의 축제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1절은 이렇게 말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않음이라”
광야 이스라엘이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않아서 이 안식의 모형인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결부시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고 들은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하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약속하신 안식이 우리의 기쁨과 만족으로 허락됩니다. 믿음과 안식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안식이 허락될까요? 그분의 말씀이 이런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2-13절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그 앞에 하나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데 어떻게 활동합니까? 나를 해부합니다.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삼분론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술하는 의사가 해부하듯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다 드러내어 나타낸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고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데 여기 드러난다는 말은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방에게 목이 잡힌 상태를 가리키는 특수한 단어입니다. 나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 노출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이렇게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도 보지 못하는 심지어 나 자신도 다 알지 못하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목을 잡고 드러낼 뿐 아니라 판단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영혼에는 안식을 방해하는 수많은 나쁜 동기들과 생각들, 죄의 본성들이 숨어 있고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드러내고 해부해서 보여줍니다. 보여줄 뿐 아니라 판단해줍니다. 그것이 옳은지 나쁜지,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해줍니다.
안식이 언제 누려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나의 모든 것을 해부하고 드러내어서 판단해줄 때 그 판단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입니다. 버릴 것 버리고 취할 것 취할 때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안식이 나에게도 허락됩니다.
그럼 왜 믿지 못합니까? 하나님의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 광야의 이스라엘보다 더 많은 확실한 증거가 바로 아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 대신 못 박아 죽이시고 부활시킴으로 입증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증거는 없습니다. 이 큰 증거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계시로 주어져 있습니다. 성도는 이 말씀으로 거듭났고, 살아있고 활력 있는 이 말씀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게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판단하여 계속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3:8절부터 계속 강조되는 것이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당부이죠(3:8, 13, 15, 4:7). 왜 완고해질까요? 하나님의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을 계속 듣지 않고 다른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롬10:17절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자꾸 들어야 믿음으로 결부가 됩니다. 광야 이스라엘이 왜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어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 아니라 그 약속을 거역하고 불평하는 10정탐꾼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도 자꾸 들으면 의심이 생기고 확신이 듭니다. 뱀과 하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안식의 축제, 남아 있는 안식,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활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듣고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감동이 들 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내가 해부되고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말씀의 판단을 받는 것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해부하고 쪼개도록 말씀 앞에 나를 세우고 내 안에 가득한 안식을 방해하는 죄와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들, 불신앙과 의심과 침체들을 말씀의 방망이로 부수고 그 자리에 허락되는 여호와의 새 힘을 얻도록 힘 쓰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허락되는 믿음으로 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시대에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시고 더 나은 안식, 남아있는 안식, 안식의 축제를 소망하면서 사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