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1일자로 사량도 내에 있는 사량 국민학교에 딸린 돈지 분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초 섬으로 갈 때에는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다. 오직 진주행을 꿈꾸며 보낸 3년의 세월, 3년 후에 진주행을 계획해 보니 4년간의 근무 경력으로 내신서 성적이 결정되는 제도에 비추어 전혀 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사량 국민학교에 한 해 더 근무를 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백방으로 알아보았더니, 당시 교육청 초등계장이신 강성래 장학사님께서 가능하다고 했다.
1년간 유예했다가 진주행을 하기로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모든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교장선생님도 찬성을 하신 가운데 진행하는 일이라 무조건 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사량 국민학교의 제반 여건들이 좋은 관계로 희망자가 많아 도저히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내신서에 썼던 돈지 분교장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돈지 분교는 여러 가지 여건들이 사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열악한 곳이었다. 전교생 30명에 2복식 수업을 하는 곳으로 복식수업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는, 내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는 뜻깊은 곳이기도 했다. 매우 불편한 교통 여건 때문에 본교에 볼일이 있어도 2시간 가까이 걸어서 가야 했다. 사량 국민학교에 있을 때에는 이용이 가능했던 엔젤호도 이용을 할 수가 없었다.
단 하나 좋은 점은 동네 사람들이 좋고, 벽지 등급도 사량 보다는 높아서 부여되는 점수 또한 높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 미리 쓰는 받아쓰기
3,4학년 복식을 맡았다. 수업시간 내내 양쪽을 오가며 학습지도를 하다보니, 정신이 없는 가운데 시간들이 잘도 흘러갔고, 화려하게 도입이 어떻고 전개, 정리가 어떻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아예 그런 상황에서는 사치에 지나지 않음을 체험으로 알 수 있었다.
아동들의 학력을 알아보고자 받아쓰기를 해 보고 깜짝 놀랐다. 3학년 8명은 그래도 좀 나은데 4학년은 두 학생을 제외하고는 정말 형편이 없었다. 6명의 4학년 중 4명이 무조건 0점을 받는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그 중에 여 아무개란 아이는 제 이름조차 겨우 쓰는 그런 아이였다. 이미 체벌에도 달인(?)이 된 그 아이는 어려운 수업시간을 괴로워 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이력이 난 전문가로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꿀밤 몇 대쯤은 예약해 놓은 사안이라는 생각인지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받아쓰기를 하면서 여 아무개의 0점을 면해 줄 요량으로 10개 문항 중에 맨 마지막 문항을 제 이름으로 정해 놓고 문항을 부르기 시작했다. 글자인지 그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가운데 그 아이도 열심히 잘도 썼다.
7번 문항을 불러주고 여 아무개 군 쪽을 힐끗 보니 묘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에 옆에 가서 살펴보니 7번을 써야할텐데 10번까지를 모두 써 놓고 놀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무렇게나 글자도 아닌 것을 그려 놓고 노는 것으로 맞고 틀리고는 애당초 관심 밖의 일인 아이였다는 얘기다. 혹 다 따라 쓰지 못하여 비워 놓은 경우면 몰라도 미리 써 가는 받아쓰기는 여 아무개한테 처음으로 배운 셈이었다.
◎ 삼 복식 이야기
2년째에는 3복식 학급을 맡게 되었다. 2, 5, 6학년 삼 복식, 참으로 난감지사였다. 흔히 생각하기를 복식 학급만 하여도 학습지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데, 3복식을 맡았으니 학부모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스스로도 생각이나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나 최선을 다하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이어져 가기 마련일 테지만 삼 복식의 경우는 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문제가 많았다. 쉬는 시간도 없이 오전 일과를 마치고 나면 육체적인 피로는 고사하고라도 정신이 없는 가운데 시간들이 가곤 했다.
2학년 2명, 5학년 6명, 6학년 8명이 세 무더기로 앉아 공부하는 교실에서 그 사이를 오가며 학습지도를 하는 자신이 마치 전투가 치열한 전선 부근의 야전병원에서 일손이 크게 딸리는 가운데의 군의관과 같은 심정이었다.
한 달쯤 지나고 보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매시간 2학년의 과제를 주고, 5학년의 과제를 주고 6학년의 과제를 준 다음 과제확인, 지도, 과제제시의 순으로 아이들의 사이를 오가면 학습지도는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복식학습지도에 관한 이론서를 읽어보기도 했으나 그건 이론을 위한 이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이론은 화려한 이론일 뿐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법이었다.
현장에서 터득한 내 식의 방법이 가장 최선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삼 복식 수업을 진행하면서 3월초에 이런 일이 있었다. 2학년이 두 명이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좀 학습 능력이 우수했고, 한 아이는 뒤지는 아이였다. 수학 익힘책을 공부하도록 예습과제를 제시하고 5학년, 6학년을 차례로 지도하다 보니 그 날 따라 시간이 많이 흘러서 한참 후에 2학년 분단에 가보니 수학 익힘책을 모두 다 해버린 것이다. 빈 틈 없이 답을 적어 놓은 것을 보고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잘 하는 아이는 계속해서 문제의 답을 써 나가고, 좀 못하는 아이는 계속해서 보고 베낀 결과였다.
이치 상으로는 배우지도 않은 부분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건 2학년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 다음부터는 교사용 교과서를 복사 제공하면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삼 복식 수업을 진행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었다. 학습지도와 목욕은 많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말이다.
먼저 단식학급의 학습지도는 부모가 목욕탕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씻겨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고, 복식 학습지도는 스스로 씻게 하고 손이 닿지 않는 부분만 부모가 씻어주는 것과 같으며, 삼복식이 되면 모두 스스로 씻고 서로 등 밀어주기를 하도록 하며 부모는 서로 씻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것과 관련을 지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한 것이다.
◎ 백일장 참가 후의 이야기
돈지에서의 2년째이자 마지막 해에 또 시조 공부를 했다. 2학년은 제외하고 5,6학년을 대상으로 단계 접근식 지도 프로그램의 가동을 한 시조 공부는 이미 지도 경험이 있는 관계로 조금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전되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나마 예상을 할 수도 있었다.
발전의 속도는 사량에서보다 빠름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동 수가 월등히 적어서 철저한 개별지도가 가능했고, 아주 넉넉한 시간을 지도에 할애할 수가 있어서였다.
가을철에 접어들어 진주교육대학교에서 열리는 백일장 공문을 보고 참가를 해 보기로 결심을 했다. 참가 규모는 2,3명 선으로 하고 학교 예선을 실시했다. 사실 예선이래야 이미 참가자를 예상한 가운데 실시한 거지만 그 자체를 수련의 과정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선 결과 조춘희, 박소연 두 어린이가 참가자로 선발이 되었다. 참가 신청서를 공문서로 작성하여 보내는 등 일련의 일들을 한 후 참가를 위해 1993년 10월 어느 날 객선에 올랐다. 삼천포항에까지 가는 동안 아이들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백일장에 참가를 하여 그 결과는 세 가지로 예상을 할 수 있다고……. 하나는 둘 다 입상을 하는 경우이고, 둘은 하나만 입상을 하고 하나는 떨어지는 경우, 셋은 둘 다 낙방을 하는 경우인데 어떤 경우에도 낙심은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두 아이들의 말투라든가 표정으로 미루어 진심인 것으로 판단이 되었다.
백일장 장소에서의 두 아이의 모습은 긴장된 가운데에서도 시제를 보고 그리 어렵지 않다는 표정들이었고, 작품도 1,2착으로 15분만에 써내었다. 진행을 보던 교대학생들도 놀랄 만큼 빨리 제출한 것이다. 심지어 어느 교대학생은 아이들이 제목에 맞게 미리 연습하거나 써 온 것을 베껴서 제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그런데 결과는 가장 좋은 둘 다 입상이었다. 둘 중 조춘희는 차상, 박소연이는 차하였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들은 차상이 무엇이고 차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어쩌면 지도 부재라는 반성을 해야겠지만 그만큼 순수한 아이들이라는 얘기도 된다.
둘 다 입상했기에 전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말 타면 마부 두고 싶다."고 했던가? 차상과 차하의 정체를 알고 난 소연이는 그만 좀 풀이 죽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심리란 참으로 묘하고 복잡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장면이었던 셈이다.
도 규모의 백일장에서 차상과 차하를 차지한 일은 전교생 30명의 작은 벽지 분교장에서는 참으로 위대한 일에 속했다. 온 동네에 화제가 만발했고, 그 분위기는 내가 섬을 떠난 후에도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 『김가』의 계를 조직하다
돈지에서의 첫 해에 김가들만 근무하게 된 참으로 기이한 일이 있었다. 당시 주임을 맡은 김병정 선생님, 김형진 선생(나), 김행식 선생님, 유치원의 김회영 선생님 등 모두 4명의 교사가 공교롭게도 모두 김가였던 것이다.
넷은 어쩌면 다시는 그런 분위기를 만날 수 없다고 여겨질 만큼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다. 저녁식사 후에 마을에 나들이를 갈 때도 함께였고,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겠지만 월요일 아침 출근도 한 배로, 토요일 오후의 귀가도 한 배로 하였다. 혹 본교에 볼일이 있어서 갔을 경우에도 모두의 볼일이 끝난 후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을 함께 걸어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들 모르는 새에 저절로 정이 들었다.
11월 중순쯤이었던가? 내가 제안했다. 우리 넷은 헤어지면 그날로 계를 하나 조직해서 매년 한 번씩이라도 서로 만날 기회를 갖도록 하자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셋 다 찬성했다. 그리고, 모이는 장소는 꼭 돈지 마을로 하자고 했다.
좀 후 그 사실을 안 당시의 기능직 양수일 님과 체육진흥회장을 지내던 김보옥 씨, 기능직으로 있다가 창원으로 전출한 최세홍씨, 한 해 먼저 있다가 간 김정룡 선생님 등 4명이 자기들도 꼭 들어야 한다고 했다. 해서 모두 8명의 계원들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계원을 제외하고는 매년 여름에 돈지 마을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하여 우리는 돈지 마을 주민들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오래오래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 싱싱한 생선회 이야기
<배구와 회식>
돈지에서는 싱싱한 생선회를 참으로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섬에서의 삶 자체가 바다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부분은 없는 것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도회지 횟집의 수족관에서 시달린 생선회와는 비교도 안될 참으로 싱싱한 생선회는 흔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돈지로 옮기고 난 후 3,4일 가량이 지난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경영록 정리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동네 청년들이 10여명 학교에 나타났다. 웬일인가 했더니 김병정 주임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와서,
"배구 한 게임 하자고 왔습니다. 여기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라고 하셨다. 대강 인사를 나누고 나니, 들고 온 짐을 보여 주었다. 물통에 그득히 담아온 것은 싱싱한 숭어였다. 배구 실력들도 상당히 수준급이었다. 배구를 즐기고 나서는 능숙한 솜씨로 회를 만들어 그야말로 포식을 할 수 있었다.
-돈지 마을 청년들은 다른 마을에서 볼 수 없는 특수한 점이 있었다. 열 명 가까운 인원이 모이기만 하면 당시 유행했던 고스톱을 치자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배구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만큼 건전한 청년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해마다 두 차례씩 돈지리의 자연부락 돈지 부락, 내지 부락, 수우도 부락 등 3개 부락이 돌아가며 주최하는 배구대회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 행사에 참가해 보았는데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배구가 아니라,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열전을 벌이는 참으로 짜임새 있는 팀들간의 보기 좋은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바람직한 것은 동네 청년들이 자주 학교로 찾아와 배구를 즐기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연수의 차원이었고, 자주 어린 후배들을 지도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다.
<밤낚시와 회 파티>
늦은 봄부터 초겨울까지는 진흥회장과 마을 청년 두 사람이 합세하여 자주 밤낚시를 다녔다. 아니, 바르게 말을 하자면 그들에게 늘 우리가 따라 다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었다. 왜냐 하면 낚시도구 일체나, 배까지 우리는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언제나 그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인원을 잘 안배하여 효과적인 운영을 했다. 진흥회장 부인과 유치원 선생님은 배에 직접 따라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서 쑥갓, 상추, 풋고추 등 학교 실습지의 야채를 뜯어서 전사하고, 마늘을 까고, 초장을 준비하는 등의 작업을 하고, 나머지 인원은 직접 낚시를 했다.
목표 다섯 마리로 정했으면 꼭 지키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여섯 명이 낚시에 참가하여 다섯 마리를 목표로 정했으면 합계 서른 마리를 낚고 나면 곧바로 철수했다. 이는 바다의 고기를 욕심을 내어 많이 잡지 않는 불문율을 지키는 섬사람들의 환경 친화적인 사고에 우리도 말없이 협조하는 셈이었다.
학교로 가서는 회 파티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회가 넉넉하여 언제나 남기 마련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남은 회를 골고루 나누어 책임제로 먹는 참으로 희한한 장면들이 연출되었었다. 훗날 육지 근무 때 횟집에만 가면 당시의 생각을 하고 자주 이야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는 혼자 미소를 짓곤 했다.
◎ 어느 겨울의 등산
1994년 1월 초, 당직근무를 하느라고 일주일 이상 혼자 학교를 지켰었다. 마을 사람들도 신년 연휴를 맞아 귀향한 사람들과의 어울림으로 학교에는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견딜만 했으나 3일이 지나고 나서는 그만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전화를 본교로 돌려놓고, 본교 일직선생님께 전화로 부탁을 한 후 혼자 배낭을 꾸려 지고 학교뒤의 지리산으로 향했다. 해발 398m의 지리산은 거의 매일 아침 등산하던 곳이라서 쉽사리 정복을 하고, 옥녀봉을 향하여 행군을 계속했다.
산의 정상을 타고 불모산 여러 봉들을 차례로 넘으면서 전혀 다리가 아프다거나 지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고 갑갑하던 마음이 안정이 되니 새로운 힘이 솟았다.
그런데, 가마봉 못미쳐에서 첫 길인데다가 길이 너무 험해서 난감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높이 20m 이상이 될 것 같은 곳을 뛰어내릴 수는 도저히 없고, 우회로도 없는 듯 하여 고심하다가 비스듬히 기는 전법으로 긴 시간을 소비한 끝에 지날 수가 있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가마봉으로 오르는 비늘 같은 산이 너무 가파라서 또 고생하며, 등뒤에 식은땀을 쏟아가며 지나갈 수 있었다. 아니할 말로 잘못하여 떨어지거나 굴러서 다리라도 다치면 마을과는 너무 멀리 떨어졌고, 나 말고는 등산객도 없는 상황이라 밤이 되면 꼭 얼어서 변을 당하기 알맞은 그런 상황이었다.
옥녀봉을 지나고는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량 국민학교에 근무할 적에 몇 번 올라왔던 곳이기에 길을 환히 알기 때문이었다.
하산을 하여 전에 잘 알던 학부모 집(은경이네 집)을 찾았다. 오전 10시에 돈지를 출발하여 금평리에 닿았을 때에는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마침 식구대로 떡국을 끓여서 먹으려던 참이라 함께 먹고, 이야기를 했더니 학부모가 하는 말씀인즉,
"아무 장비도 없이 돈지 뒤로해서 옥녀봉을 타고 금평까지 왔으면 선생님은 등산의 전문갑니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정말 겁도 없이 참으로 위험한 등산을 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등산은 언제나 혼자서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했다.
◎ 은경이의 편지 쓰기 대회 금상의 영광
사량 국민학교를 떠난 지 2년, 돈지 분교장에서도 만기제대의 날을 손꼽던 해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토요일, 볼일이 있어 본교에 갔다가 모처럼 엔젤호로 귀가하려는 생각으로 부두에 나갔다. 거기서 당시 사량 중학교 교감이던 김남갑 선생님을 만났다. 고향 사람이라 잘 아는 것은 물론이고, 내게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기에 참으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 주겠다며 특별히 전해 주신 말씀인즉, 당시 중3인 은경이가 스승의 날 내게 쓴 편지가 전국 편지 쓰기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아울러 사량 중학교에서는 내가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고 하셨고, 옆에 있던 사량 중학교 선생님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김형진 선생님입니다."
별다른 보충 설명이 없이도 이구동성으로
"아, 그렇습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지난 스승의 날 나는 은경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문장 구성 면이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좋아 보여서 전화로 칭찬을 해 준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편지를 응모했고, 전국대회 금상의 영예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긴 설명보다는 그 편지의 전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점 하나도 고치지 않은 그 편지의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지글 전문>>>>>>
뵙고 싶은 선생님께
봄의 아름다움도 무르익어 포근함을 넘어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늘 말괄량이고, 어떤 땐 새침떼기였던 제자 은경이예요. 국민학교 시절을 마감하는 6학년 과정에서 아낌 없는 사랑과 정성을 누구에게나 듬뿍 나누어 주셨던 선생님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스승의 날을 맞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같은 섬에 있으면서도 자주 뵙지 못하고, 더군다나 스승의 날에나 편지 한 장으로 인사 드리기가 무척 죄송합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시간들이 아깝기 한량없어요. 가끔씩 우리 반 친구들이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해 만든 열매인 절장, 양장, 평시조집을 읽어보면서 참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해요. 모든 작품이 하나같이 훌륭하고 나무랄 데가 없어 우리가 언제 저런 것들을 지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이거든요.
이젠 중학교 생활도 3년째이니깐 나름대로의 재미와 정이 흠뻑 들었어요. 국민학교 때와는 어쩐지 다른 "고입"이라는 목표 아래 친구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껴 주며 서로 토닥거리며,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지요. 우정이란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느껴져요. 우정이란 사랑보다 한차원 더 높은 것 같거든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아무런 대책 없이 휙휙 지나가 버려요.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큰 일이지요. 하지마나 작지만 아름다운 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몇 달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귀중한 시간이지요. 아무튼 열심히 할 것이니 지켜봐 주십시오.
언제나 건강하시고, 우리들에게 쏟으셨던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돈지분교 어린이들에게 주세요. 전 항상 선생님을 생각해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선생님이 곁에 계시다면 이 노래를 불러 드리고 싶어요.
♪수레의 두 바퀴를 부모라 치면 이끌어 주시는 분 우리 선생님 그 수고 무엇으로 덜어 드리랴 그 은혜 두고두고 어찌 잊으랴 스승의 가르침은 마음의 등대 스승의 보살핌은 사랑의 손 길♪
선생님 감사합니다.
1993년 5월
은경(올림)
◎ 돈지를 떠나며
돈지에서의 2년은 참으로 짧게 느껴졌다.
2복식, 3복식 학습지도로 분주한 가운데 낮 시간들이 지나 갔고, 시조 쓰기 지도, 부진아 지도 등을 하다 보면 어느 새 어두워지곤 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동안 밤이 갔고, 그러다 보니 전혀 섬 생활의 고적함을 느끼지 못한 가운데 세월이 흘렀으니 짧게만 느껴지는 2년이었다.
생각하면 멸치를 삶아서 말리는 작업을 거드는 동안 묵은 김치에 멸치를 싸서 먹는 맛과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아침마다 398고지 지리산을 혼자 등산하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했던 일, 분교장 주임을 맡아서 크고 작은 학교 일들에 일일이 관심을 갖고 챙겼던 일, 매일 아침 운동 삼아 학교 뒤의 지리산을 등산하거나, 해변을 한바퀴 돌며 맑은 해변의 아침 공기를 실컷 마시면서 상쾌함의 극치를 맛보았던 일들이 모두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친다.
어디서나 거의 마찬가지겠지만 섬에서의 일과는 매우 단조롭고 따라서 무료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이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으면 몹시 피곤한 벽지 근무를 해야했다. 전기한 사례들처럼 스스로 섬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함께 하고 지내다 보면 전혀 지겨움 못 느끼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5년의 세월동안 5박6일의 섬 여행을 반복했던 나는 이제부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참으로 홀가분하고 가슴 설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진흥회장이 특별히 자기 배로 삼천포까지 가자고 함으로써 얼마 안되는 짐을 싣고 정든 돈지 부두를 떠날 때 많은 마을 주민들이 부두에 서서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던 그 광경을…….-
첫댓글 정말 섬 생활을 가족들과 떨어져서 5년동안 ...그 기간을 지냈으니 교감이란 영예도 훈장처럼 차는 것 같다. 교감되기 힘든 것 같다. 물론 인생살이가 즐거움이 없다면 어느곳 어디있더라도 생지옥인것을.....고생했소...김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