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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철밥통에 갑질?
민재가 택시 사무실에 들렀다. 차기 커뮤니티 보드멤버 후보 등록을 마친 여러 후보의 프로필 벽보가 붙어있었다.
인도 출신 브라이언이 아는 체를 하며 전단지를 건네주었다. 평소 그리 친한 내색도 없던 동료였다.
“존, 나 이번에 보드멤버로 등록했거든. 지지 좀 부탁해.”
“응. 알았어. 잘 해보셔. 응원할게.”
브라이언이 민재에게 손을 내밀어 두 손으로 감싸며 허리를 구부렸다.
‘참 발 빠르기도 하네. 난 오늘 후보 등록하러 왔는데, 벌써 분위기가 뜨겁네. 그래 한번 해보자. 좀 늦었지만, 제대로 한번 해보자.
나야 옛날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해 당당하게 당선되었잖아.‘
민재가 보드멤버 후보 신청서를 사무실에 제출했다. 행정 사무 담당자 엘리가 반갑게 맞이했다. 엘리는 야무지기도 하면서 얼굴도 항상 환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이스마엘이 지난번 사고를 당했을 때, 민재가 나서서 회사가 도와주도록 가교역할을 했다. 그때 엘리가 민재에게 호감을 느꼈다.
“존. 후보 출마를 축하해. 사무실 직원들도 청문회 스타 존의 소문을 듣고 기대가 대단하거든. 나도 적극 응원해. 그런데 신청이 좀 늦었네.
후보들 지금까지 6명이 등록했어. 존이 마지막 주자 같아. 후보 출마자 자격 검토 후 바로 후보 번호가 주어질 텐데, 받으면 7번이 되겠어.“
“엘리. 반갑게 맞아주니 고마워. 난 별생각 없었는데, 동료들이 이렇게 보드 멤버 출사표를 던지도록 적극 추천하기에 나와 봤어.
오클랜드 택시 회사를 업그레이드시켜볼게. 한국 대학에서 총학생회장도 해봤어. 이 선거를 위한 좋은 정보 좀 주면 큰 도움 되겠는데.”
“그럼. 당연하지. 존은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잖아. 그런 유능한 이가 택시 운전만 하기엔 아깝지. 보드 멤버에 들어 와봐.
그래서 나중에는 의장까지 해봐. 능력 발휘 기회가 많을 거야. 자, 여기 6명 후보의 홍보 전단지야. 참고해서 파격적인 존의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봐.
이제 딱 한 달 남았어. 내 힘 닫는데 까지 도울게.”
민재가 6명의 후보 공약이 적힌 홍보 전단지를 훑어보면서 엘리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홍보 전단지 만드는 곳, 하나 소개해줘. 여기 6명 다 포맷이 다른데. 난 아는 데가 하나도 없거든. 처음이고.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몰라.”
“응. 내가 아는 곳이 하나 있는데, 아주 신선한 감각이 있더라고. 그곳에 우리 회사 홍보물 맡기거든. 원하는 방식으로 초안을 잡아서 나에게 갖다 줘.
그럼 내가 바로 연결해서 빠른 시간 내에 완성해 받아볼 수 있도록 할게. 요금도 합리적인 곳이야.”
“오~우! 천사가 따로 없네. 바로 엘리가 나의 천사야. 내 보답할게. 이왕 내친김에 두 시간 뒤 초안 작성해 다시 올게. 정말 고마워. 엘리!”
회사를 나서는 민재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속전속결로 밀어 부쳐보자.”
민재가 입술을 꽉 다물며 오클랜드 도메인으로 차를 몰았다. 박물관 아래 윈터가든 레스토랑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1999년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회담 때 21개국 정상들이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회담을 마쳤다.
근처 윈터가든 레스토랑 카페에서 가볍게 점심을 했던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그 당시 한국 김대중 대통령도 참석했다.
클린턴, 장쩌민, 김대중 세 국가 대표가 중심인물이었다. 뉴질랜드 제니 쉬플리 여성 수상도 전성기 때였다.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윈터가든 레스토랑 카페는 민재가 평소 자주 쉬는 곳이기도 했다. 마침 출출해서 에그 베네딕트와 라떼를 시켰다.
세계 각국 대통령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니 그 기운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눈앞에 펼쳐진 공원 풍경에 음식이 절로 넘어갔다. 라떼를 마시며 다른 후보들 공통 공약을 체크했다. 다들 형식적으로 쓴 듯 보였다.
독특한 공약을 살펴도 봤다. 너무 추상적인 내용이었다. 민재가 전단지를 옆으로 치웠다.
민재가 평소 느꼈던 운전사들의 희망 사항과 불만에 대해서 검토했다. 책상머리에서 사무적으로 쓴 공약보다, 발로 뛰며 겪은 생생한 점을 부각했다.
“요즘 주춤한 영업 확장을 위한 주요 관공서 대응 강화, 회사 콘트롤러들의 고압적 자세, 그리고 컴플레인 매니저의 갑질 자세의 개선이 필요하지.”
개선이 절실한 운전사들의 요구사항이 계속 생각났다.
“택시 모뎀의 불만 점을 업데이트할 기술력 확보, 회사 전체의 투명 재정 공유 등도 주요 공약으로 삼아야지.”
오클랜드 택시회사는 개인회사가 아니다. 700명이 주주로 참여한 회사라서 민재도 1/700의 주주였다.
능력만 있다면 보드 멤버로, 나중에는 의장으로 자리를 잡아 경영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회사다. 능력 발휘의 기회를 얻고 싶었다.
홍보지 맨 위에는 경영학 전공 학력과 경력 그리고 외국어 구사력 등을 기재했다. 홍보를 위한 레이아웃을 A4 한 장에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다.
맨 위 왼쪽에 실을 후보 명함판 사진 칸은 비워두었다. 카페 밖으로 나와 두어 번 다시 읽어보았다. 그런대로 신선한 공약이었다. 뉴 마켓으로 향했다.
미리 봐두었던 즉석 여권 사진 찍는 부스에 들러 사진을 찍었다. 준수해 보였다. 사진을 홍보물에 붙였다. 근사한 후보 전단지가 되었다.
바로 회사에 들러 엘리에게 건넸다. 엘리가 받아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존. 7번. 아주 합리적이면서도 신선하네. 실현되면 회사가 레벨업 되겠는데. 그럼 나도 좋잖아. 내가 바로 그곳에 보내서 전단지 만들도록 할게.”
“엘리. 매우 고마워. 내 부족한 점을 이렇게 도와준다니. 비용은 나오는 대로 바로 보낼게. 전단지 수는 다른 후보들 하는 분량으로 해줘.
엘리. 지금 말고 나중에 한턱 쏠게. 보드 멤버 되고서.”
“존.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그래. 내친김에 꼭 의장까지 올라가 봐. 이제껏 보수적인 경영방식이었는데. 우리 회사도 이젠 변신을 할 때도 됐어.”
민재가 흐뭇한 얼굴을 한 채 회사를 나왔다. 아무튼 회사 내에서 우군을 만났으니 힘이 솟았다. 다른 후보에 비해 준비도 덜한 상태였는데.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한다? 홍보물 나오면 만나는 대로 소개해야지”
선거 직전에 청문회는 민재에게 다시없는 절호의 이슈였다. 그때 누가 뒤따라 나오며 민재를 불렀다.
“존. 오랜만이네. 나 제니야. 지난번 내 차가 그 쪽 차 치받은 것도 봐줬는데. 오늘 시간 돼? 빚 갚아야지. 기왕 만난 김에 차 한잔하게.”
“응. 제니. 나야 좋지. 그러잖아도 궁금했어. 어떻게 잘 처리했는지. 어퍼 퀸 스트리트, 아시안 푸드마켓으로 가지. 거기 주차장도 넓고 음식점도 많아.“
만날 사람은 어디서도 제때 다 만난다. 민재가 앞서고 제니가 뒤따라갔다. 둘 다 아시안 푸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시안 카페로 들어갔다.
민재가 레몬주스를 시키자, 제니도 미투 하며 합세했다. 민재가 빙그레 웃었다. 제니가 먼저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차 수리는 다 끝났고, 곧 이사 갈 생각이야. 지금 세 사는 렌트 집 주인이 자꾸 치근대더라고.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야.”
“뉴질랜드에도 별놈들이 다 많아. 남이 부담되는지 생각도 않고 들이대는 놈들. 개들은 자기가 다 잘나서 사는 줄 알아.
그래, 그럼 바로 실행에 옮겨. 이번에 우리 회사 보드멤버 선거하는 것 알지? 나 거기에 7번 후보로 나섰어.”
제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재가 저렇게도 당당하고 든든해 보일까. 싶은 눈으로 제니가 민재를 쳐다봤다.
회사에서 엘리나 제니나 왜 이리들 놀라나 하고 민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레몬주스가 바닥이 났다. 빈 컵을 만지작거리며 다소곳이 대답했다.
“아! 축하해. 대단한 분인데. 여기 난 투표할 자격이 없어. 난 쉐어(share)가 없잖아. 쉐어, 주주권이 있어야 투표권이 있다는데. 아쉽네. 한 표. 어쩌지?”
“아까워라~ 좀 기다려. 다른 방도로 함께할 게 있을 거야. 기왕에 여기 온 것, 여기가 음식점이잖아. 우리 뭐 좀 식사라도 더 하지.
잘하는 메뉴 맛도 보고. 저기 타이음식점이야. 저 앞으로 자리를 옮기지.”
민재를 따라 제니도 일어나서 자리를 옮겼다. 민재가 물었다.
“뭐 먹을 거야? 난 로스트 포크 온 라이스. 맛이 참 좋더라고.”
“나도 그것 먹을게. 나, 여기 처음이라 몰라. 남이 좋다고 하는 것 먹어봐야지. 경험만 한 스승이 없다고 하잖아. 하하.”
“경험만 한 스승이 없다! 제니. 명언이네. 제니는 국문과 나왔어?”
“아니, 세상이 그렇게 알려주더라고. 호주 있다가 뉴질랜드로 왔는데, 좋은 경험 가진 사람들이 다 내 스승이 돼 주어서. 하는 소리야.”
민재가 재미있다는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뭔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다. 둘이 얘기 저 얘기 하는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와! 맛있겠네. 이런 음식 나도 좋아해. 잘 먹을게.”
“맛있게 먹자고. 난 이 음식에 여러 추억이 들어 있어서 고향 음식 같아. 속도 꽉 차고. 제니. 물어볼 게 있는데. 왜,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온 거야?”
“존은 왜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온 건데? 먼저 말해줘. 하하.”
제니의 반격 질문에 민재가 웃음이 나왔다. 은근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자유를 찾아서. 자기만의 이유를 찾아 훌쩍 나선 거야.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 보려고. 난 콜럼버스처럼 호기심이 많거든.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 또 다른 세상을 맞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난 유목민, 노마드 기질이 있나 봐. 앞으로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가 올 거야.”
제니가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를 다시 바라봤다.
“그 말에 공감이 가네. 난 호주에서 백인들한테 심한 인종 차별을 받았어. 성적 모욕에 수치심도 느꼈고.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여기 온 건데. 지금 세 들어 사는 렌트 집 주인 백인도 은근히 그러더라고. 자신이 선심 써 주는 듯 갑질 근성이 있나봐. 그래서 옮기려고.“
민재가 제니의 새로운 면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드 멤버로 후보로 나서며 공약한 내용을 이야기하자 제니가 크게 수긍한 눈치였다.
컴플레인 받은 운전자들 불러다 죄인 다루듯 하는 컴플레인 매니저 사이먼. 그 녀석의 고압적 태도도 꼭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에 제니 눈이 떨렸다. 민재가 깜짝 놀라 말을 멈추고 제니를 쳐다봤다.
“제니. 컴플레인 매니저 사이먼에게 심하게 모옥이라도 당한 적 있어? 왜 그리 떨어?”
제니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연속 끄덕거렸다. 민재가 궁금해 다시금 물었다.
“왜, 그 녀석은 여성 운전사한테도 그렇게 대하지?”
“컴플레인 뿐 아니야. 사실 내가 사는 렌트 유닛이 사이먼 집이거든.”
“뭐라고? 사이번 그 녀석이? 뭘 어떻게 했길래? 이번에 확실히 정리해야겠네. 그 녀석 위에 무서운 사람이 없네. 거기다 여성을 치근대기까지 했다고?”
제니가 말소리를 낮춰 그동안 사이먼이 집에서 자신에게 치근대서 느꼈던 성적 모욕감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회사에선 컴플레인으로 닦달하고.
민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다 아래로 민재를 떠밀었던 그 자. 사이먼!
“사이먼한테 말 못 하는 피해지들이 참 많구나. 이번에 이 건을 주요 개선 이슈로 홍보해야겠네. 공감하는 운전사들이 많겠네.
어려운 합격조건을 넘어 주주가 된 운전사 중 그 녀석 닦달에 신물 나서 그만둔 이들도 많았지. 심지어 사이먼 스트레스에 자동차 사고까지 나고.
철밥통에 갑질이라? 십수 년 그 자리에 앉아 컴플레인 줄인다는 명목으로 살판났었지. 제니. 진정해. 내가 다 그 악의 뿌리 뽑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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