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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위 |
김씨 |
명 칭 |
휘 (諱) |
성 |
재 위 |
서 기 |
1 |
|
혁 거 세 왕 |
|
박 |
61 |
BC57~4 |
2 |
|
남 해 왕 |
|
박 |
21 |
4~24 |
3 |
|
유 리 왕 |
|
박 |
34 |
24~57 |
4 |
|
탈 해 왕 |
|
석 |
24 |
57~80 |
5 |
|
파 사 왕 |
|
박 |
33 |
80~112 |
6 |
|
지 마 왕 |
|
박 |
23 |
112~134 |
7 |
|
일 성 왕 |
|
박 |
21 |
134~154 |
8 |
|
아 달 라 왕 |
|
박 |
31 |
154~184 |
9 |
|
벌 휴 왕 |
|
석 |
13 |
184~196 |
10 |
|
나 해 왕 |
|
석 |
35 |
196~230 |
11 |
|
조 분 왕 |
|
석 |
18 |
230~247 |
12 |
|
첨 해 왕 |
|
석 |
16 |
247~262 |
13 |
1 |
미추(味鄒) |
김 |
23 |
262~284 | |
14 |
|
유 례 왕 |
|
석 |
15 |
284~298 |
15 |
|
기 림 왕 |
|
석 |
13 |
298~310 |
16 |
|
흘 해 왕 |
|
석 |
47 |
310~356 |
17 |
2 |
내물(奈勿) |
김 |
47 |
356~402 | |
18 |
3 |
실성왕(實聖王) |
김 |
16 |
402~417 | |
19 |
4 |
김 |
42 |
417~458 | ||
20 |
5 |
김 |
22 |
458~479 | ||
21 |
6 |
김 |
22 |
479~500 | ||
22 |
7 |
김 |
15 |
500~514 | ||
23 |
8 |
김 |
27 |
514~540 | ||
24 |
9 |
김 |
37 |
540~576 | ||
25 |
10 |
김 |
4 |
576~579 | ||
26 |
11 |
김 |
54 |
579~632 | ||
27 |
12 |
김 |
16 |
632~647 | ||
28 |
13 |
김 |
6 |
647~654 | ||
29 |
14 |
김 |
8 |
654~661 | ||
30 |
15 |
김 |
21 |
661~681 | ||
31 |
16 |
김 |
12 |
681~692 | ||
32 |
17 |
김 |
11 |
692~702 | ||
33 |
18 |
김 |
36 |
702~737 | ||
34 |
19 |
김 |
6 |
737~742 | ||
35 |
20 |
김 |
24 |
742~765 | ||
36 |
21 |
김 |
16 |
765~780 | ||
37 |
22 |
김 |
6 |
780~785 | ||
38 |
23 |
김 |
14 |
785~798 | ||
39 |
24 |
김 |
3 |
798~800 | ||
40 |
25 |
김 |
10 |
800~809 | ||
41 |
26 |
김 |
18 |
809~826 | ||
42 |
27 |
김 |
11 |
826~836 | ||
43 |
28 |
김 |
3 |
836~838 | ||
44 |
29 |
김 |
2 |
838~839 | ||
45 |
30 |
김 |
1 |
839~839 | ||
46 |
31 |
김 |
19 |
839~857 | ||
47 |
32 |
김 |
5 |
857~861 | ||
48 |
33 |
김 |
15 |
861~875 | ||
49 |
34 |
김 |
12 |
875~886 | ||
50 |
35 |
김 |
2 |
886~887 | ||
51 |
36 |
김 |
11 |
887~897 | ||
52 |
37 |
김 |
16 |
897~912 | ||
53 |
|
신 덕 왕 |
|
박 |
6 |
912~917 |
54 |
|
경 명 왕 |
|
박 |
8 |
917~924 |
55 |
|
경 애 왕 |
|
박 |
4 |
924~927 |
56 |
38 |
김 |
9 |
927~935 |
1대 미추왕(味鄒王) -----미추이사금 : 신라왕 13대
시조 대보공 알지의 7세손인 미추이사금께서 왕위에 오르시니 신라김씨 왕조의 시작이다. 어머니는 이찬 갈문왕(葛文王)의 따님 박씨이고, 비는 조비왕의 따님 광명부인 석씨이다.
- 임오 원년 12월에 즉위하여 금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금성은 경주부의 남쪽사리(四里)에 있으니, 시조왕41년에 축성한 바 아직도 남아 있음. (궁궐은 낭산으로서 주산을 삼고 선도산(仙桃山)으로서 안산을 삼았음). 3월에 궁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
- 2년 봄 2월에 국조(박혁거세)의 사당에 친히 제향을 올리고 대사(大赦)하였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를 추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갈문왕이란 신라때 추존왕을 말함)
- 3년 정월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해남을 바라보았고 황산 양산에 순행하여 고령자 및 극빈자를 찾아 구휼하였다.
- 7년에 여러 신하를 남당에 회합시켜 정사와 형벌의 득실을 친히 묻고 또 사신을 보내어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각처에 가서 순문(巡問)하게 하였다.
- 11년에 영을 내려 무릇 농사에 방해되는 일은 일체 제거하게 되었다.
- 15년 2월에 신료들이 궁실의 개축을 청하거늘 임금께서 백성의 수거로움을 중난하게 여겨 쫓지 않았다.
- 19년에 한발이 심하거늘 죄수들의 억울한 정상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 20년 2월에 사당에 참배하고 양산에 서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 23년 2월에 국내의 여러 성을 순무하고 10월에 임금이 훙하시거늘 대릉(미추왕릉)에 장례를 하였다.
[죽엽군(竹葉軍) 고사]
신라 제14대 유례왕때에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 오거늘 우리 군사가 대항할 수 없었는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협조했으니, 모두 귀에 댓잎을 걸고 있었으며 힘을 합하여 적을 돌파하였다.
군사가 물러간 후 돌아간 곳을 알지 못했고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으니, 이에 왕이 음으로 도와 전공이 있었음을 알고 인하여 죽현릉이라 이름했으며 또 죽장릉이라고 이름하였다.
고종 25년 무자에 비석을 세웠으니, 전면에 신라 미추왕릉이라 새겼으며 신라 두글자는 전자(篆字)로 새겼고 다른 능소도 이를 모방했는데 다만 왕호에 따라 새겼다.
신라 시조왕(성은 박씨요 혁거세니 원년 갑자는 한선제오봉(漢宣帝五鳳) 원년이 됨)으로부터 남해왕을 거쳐 유리왕에 이르러 탈해왕(성은 석씨)에 전위하였다.
탈해왕은 파사성(성은 박씨)에 전위하였고 지마왕과 일성왕을 거쳐 아달라왕에 이르러 벌휴왕(성은 석씨)에 전위하였으며 내해왕과 조비왕을 거쳐 점해왕에 이르러 미추왕에게 전위하였다.미추왕은 유례왕(성은 석씨)에게 전위하였고 기림왕을 거쳐 흘해왕에 이르러 내물왕에게 전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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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번 호 - 사적 제175호 | |
시 대 - 서기 284년경 |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 |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 |
지 정 면 적 - 61,413m² |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 사적공원인 대릉원(大陵苑)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 전방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 262-284)은 일명 미조(未照)이사금이며 성은 김씨이고,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갈문왕(葛文王) 구도(仇道)의 아들이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이고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릉이 흥륜사(興輪寺) 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미추왕릉에는 죽엽군(竹葉軍)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추의 다음인 유리왕(儒理王) 14년(297)에 이서국(伊西國)이 금성(金城)을 침공하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의 음조인 것을 알고 이에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竹長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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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 소개 직경 10m 미만에서 120m까지, 높이 1m 미만에서 23m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한 이 사적공원 안의 고분들은 삼국 시대 신라의 왕과 귀족으리 능묘로 추정되고 있으며,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 토분으로 되어 있으나, 표형분이라고 하는 부부 합장용의 쌍분도 있고, 내부 구조는 몇몇 고분의 발굴 결과 신라 특유의 적석목관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경내에 위치한 고분은 신라 미추왕(262-284)의 능으로 전하고 있는 바, 미추왕은 김씨 시조 알지의 7세손으로 신라의 첫 번째 김씨 왕이 되어 22년간 재위하는 동안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하여 그의 능을 죽현릉 또는 죽장릉이라고 불렀다 한다.
또한 천마총(황남동 제155호 고분)과 황남대총(황남동 제98호 쌍분)은 발굴조사 결과 신라 적석목관분 가운데에서도 특색 있는 내부 구조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하여 각종 금은제 장신구와 무기, 마구 등 호화찬란한 수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입증한 바 있다. 천마총은 공개시설을 갖추고 내부 구조와 유물의 출토상황을 그대로 복원하여 발굴 당시의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황남대총은 외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이 고분공원 경내에서는 공원 조성 당시 지하에 묻혀 있던 수많은 파괴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적석목관분과 함께 옹관묘, 수혈식석곽분도 다수 발굴도어 신라 시대의 다양한 묘제(墓制)를 보여주었다.
2대 내물왕(奈勿王) -----내물이사금 : 신라왕 17대
이름은 내물이니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요 갈문왕 구도(仇道)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고, 김씨로서는 제2대왕이다. 비는 보반(保反)부인 김씨이니, 일설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로서 미추왕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홀해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매 내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진 원년 (진 영화 12년 서기 356년) 4월에 즉위하였다.
- 2년 봄에 사신을 보내어 환과고독(鰥寡呱獨)을 위문하고 각기 미곡 3곡(곡)을 내려주었으며 효성과 우애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자는 벼슬 한 계급을 하사하였다.
- 3년 2월에 시조묘에 친히 제향을 올리니, 사당 위에 붉은 구름이 감돌고 묘정에는 신작(神雀)이 모여 들었다.
- 9년 4월에 왜병이 대거하여 쳐들어오거늘 풀로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손에 들려 토함산 아래에 줄지워 세웠으며 용사 1천명을 매복시키었다가 왜병을 쳐서 몰살시켰다.
- 13년 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 17년에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고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니, 임금께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 42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 (강능)에 한발이 심하고 황충(蝗蟲)이 일어나 백성이 굶주리거늘 죄수를 놓아주고 1년에 조(祖)와 조(調)<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던 제도>를 면제해 주었다.
- 47년 2월에 임금이 훙하고 아들이 어리거늘 나라 사람들이 실성왕을 세워 왕위에 계승하게 했으니, 키가 칠척이요 총명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고 식견이 심원하였다. 내물왕은 참성대 서남방 <지금 교촌이니 본전에서 동쪽으로 백무(百武)쯤 떨어져 있음>에 장사하였다.
지 정 번 호 - 사적 제188호 | |
시 대 - 서기 402년경 |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4 | |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 |
지 정 면 적 - 사적 제161호에 포함 |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보다는 횡혈식 석실분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平地古墳)이지만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 석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성이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말구각간(末仇角干)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비(妃)는 김(金)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다. 신라에서 김씨로서는 미추이사금에 이은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의 신라왕들이 내물의 후손으로 신라 김씨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신라는 이 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낙동강 동쪽을 아우르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의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능(陵)이 점성대(占星臺, 즉 瞻星臺) 서남에 있다고 하여 현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물왕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왕조의 창시자로서 그 능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石室墳)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내물왕릉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인 대릉원(大陵苑)의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도 있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내물왕계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 왕실의 수축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3대 실성왕(實聖王)-----실성이사금 : 신라왕 18대
서기 402년 실성왕이 즉위하였다. 실성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별슬에 있던 대서지의 아들이다. 실성왕은 키가 7척5촌이나 되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 내물왕이 죽자 그 아들이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왕으로 세웠다.
4대 눌지왕(訥祗王)-----눌지마립간 : 신라왕 19대
서기 417년에 눌지가 즉위하였는데, 왕호를 마립간(통치자라는 뜻)이라 하였다.
5대 자비왕(慈悲王)-----자비마립간 : 신라왕 20대
서기 458년, 자비왕이 즉위하니 눌지왕의 큰아들이다.
2년(서기 459년) 4월에는 왜인이 병선 수백 척을 이끌고 동쪽을 습격하고, 이어서 월성(月城 지금의 반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이 왕성을 잘 지켜서 적은 그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 때 왕이 군사를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북으로 해구(海口 포항 부근)까지 쫓으니, 도망가던 적군 중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익사하는 자가 반이 넘었다.
6년(서기 463년) 2월에 왜병이 삽량성(자금의 양산)을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 가려고 하였다. 이 때 왕은 벌지와 덕지 두 장군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다.
이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미리 길목에 숨어 있다가, 돌아가는 왜병을 습격하야 크게 이겼다. 왕은 왜병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므로 바닷가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하고, 7월에는 병사들의 열병식을 하였다.
11년(서기 468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했다.
17년(서기 474년)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 (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을 축조했다.
7월 고구려 거련왕이 백제를 침공하니 백제왕 경이 왕자 문주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니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다.
19년(서기 476년) 6월에 왜인이 동쪽으로 침범하였다. 왕은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이를 쳐부수고, 적군 2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기도 하였다.
22년(서기 479년) 2월 3일 왕이 돌아갔다.
6대 소지왕(炤智王)-----소지마립간 : 신라왕 21대
소지왕은 신라 제21대 왕으로 자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겸손하고 어질어 백성들이 잘 따른 덕있는 왕이었다.
7대 지증왕(智證王) : 신라왕 22대
이름은 지대로(지대로) 혹은 지도로(지도로)라 하며 또 지철로(지철로)라고도 하고,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습보의 아들이요, 내물왕의 증손이며 어머니는 오생부인 김씨니 눌지와의 따님이다. 비는 모량부마을 상공의 딸 박씨이다. 신장이 8척이 넘었다 한다.
- 임오 3년 (齊 中興 2년 서기 502년) 3월에 순장(殉葬:이에 앞서 국왕의 장사에는 남녀 각 5인으로서 순장하였음)을 금지하였고 신궁에 친히 제향에 올랐다. 3월에 여러 고을의 군주에게 나누어 분부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했고 전답의 경작에 비로서 소를 사용하였다.
- 4년 국호를 신라로 통일 호칭하였고, 왕의 호칭도 왕(王)자로 통일하고 처음으로 시호제를 썼다.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로 나라의 이름이 정해지지 아니하여 혹은 사라(斯羅)라 이르고 혹은 사로(斯虜)라 이르며 혹은 신라라고 이르는데 신등의 생각에는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옵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옵니다. 그러므로 국호를 신라로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또한 살피옵건데 예로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모두 제 또는 왕이라고 칭하옵니다. 우리 시조의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지금까지 22세를 전해오는데 다만 방언을 일컬음 뿐이요 존호는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 국왕으로서 존호를 올리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를 쫓았다.
- 5년 4월에 상복법(喪服法)을 마련하여 반포하였다.
- 6년 2월에 임금께서 나라가운데서 주/군/현을 친히 정하고 실직주:[삼척] 설치하였다.
- 7년에 봄부터 여름까지 가뭄이 계속하여 백성이 굶주리거늘 창곡을 풀어 진휼하였다.
- 13년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실리고 우산국[울릉도]을 위혁하니 항복하였다.
- 15년 정년에 작은 서울을 아시촌에 설치하고 7월에 육부의 주민을 옮겨 채웠다. 이달에 임금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중으로 올리고 법흥왕이 즉위하니 신장이 7척이요 관후하여 사람을 경애하였다.
8대 법흥왕(法興王) : 신라왕 23대
휘는 원종(原宗) 지중왕의 아들. 비는 보도부인 박씨.
- 즉위하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 정상화
- 517년 처음으로 병부(병부)를 설치.
- 520년 율령 반포.백관의 공복(공복)제정
-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여 살생을 금함
- 금관국왕 김구해(金仇亥) 투항하여 가락국 병합
-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제정,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
- 27년 7월에 돌아가시니 애공사북봉(哀公寺北峰)에 장사하였다.
9대 진흥왕(眞興王) : 신라왕 24대
휘는 삼맥종(三麥宗) 법흥왕의 아우이고,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으로 신라가 종전에 미약했던 시기를 벗어나 팽창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적 시대로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영왕(英王)
- 41년 이사부(이사부)에게 내외병마를 맡기고 백제와 화친.
- 545년 이사부에게 국사를 편찬케 함.
-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치고, 우륵(于勒)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제작케 함
-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의 땅을 점령.
- 553년 한강 하류지역에서 백제를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을 완전 점령, 중국과 통하는 해상을 확보.
- 554년 백제 성왕이 침공해온 것을 격퇴. 성왕전사.
- 562년 화랑 사다함(斯多含)이 가야지방을 정복
- 한강유역에서 강력한 군단을 주둔케하고 북한산,창녕,황초령,마운령 등에 순수비를 건립.
- 37년(576년) 돌아가시니 시호는 진흥이고 석명은 법운이다.
10대 진지왕(眞智王) : 신라왕 25대
휘는 사륜(舍輪), 진흥왕의 차자. 비는 지도부인 박씨.
- 상대등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돌보게 하였으나 치정 4년동안 나라가 어지러웠다.
- 내리 서성을 쌓고 백제의 침공을 맞았으나 이찬 세종으로 정벌하여 3700의 목을 베었다.
- 진나라에 사신을보내어 화친
- 4년 7월 돌아가시니 영경사 북쪽에 장사하였다.
11대 진평왕(眞平王) : 신라왕 26대
휘는 백정(白淨) 진흥왕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 모는 만호부인 김씨. 비는 마야부인 김씨. 후비는 승만부인 손씨
- 수나라와 친교를 맺어 지명, 원광, 담육을 수나라에 파견, 수학케 함.
-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명명.
- 각성(남산성)을 개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 천사가 내려와서 옥대(玉帶)를 전하였다.(신라삼보의 하나)
- 54년 1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보문동 608의 사적 180호 왕릉이다.
12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신라왕 27대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의 맏딸로서, 모는 마야부인, 성품이 관인(寬仁)하고, 사리에 밝아 진평대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화백회의에서 왕위에 옹립되었다.
- 635년에 당나라로부터 ‘주국 낙랑공 신라왕(柱國樂浪公新羅王)’에 책봉됨.
- 634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 분황사(芬皇寺) 창건.
- 642년 의자왕 침공에 40여 성을 빼앗감.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갇힌 몸이 되었는데 김유신이 결사대를 보내 구출하였다.
- 당나라에서 문화를 수입하고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등을 건립
- 16년 1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보문동 79-2 사적 182호 왕릉이다.
13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신라왕 28대
휘는 승만(勝曼) 진평왕의 모제(母弟)인 갈문왕 국반의 따님. 왕은 용모와 자질이 아름답고 키가 7척이고 손은 무릎밑까지 드리웠다.
- 648년 김춘추를 당으로 보내어 원병요청.
- 649년 관제를 당나라 형식으로 개편.
- 김유신 등 명장으로 하여금 국력을 신장케 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 651년 정월 1일에 왕은 조원전(朝元殿)에 나와 신년하례를 받았다.(신년하례의 시작)
- 8년 3월 돌아가시니 지금의 견곡면 오류리산48 사적 24호이다.
14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신라왕 29대
휘는 춘추(春秋)요 수(壽)는 59세였다.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요 진지왕이 손이며 모는 진평왕의 따님인 천명부인(天明夫人) 金氏요,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 金氏요 이름은 문희(文姬)이니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의표(儀表)가 영위(英偉)하고 제세(濟世)의 웅지가 있어 신라 중흥의 군주가 되었다.
- 즉위하자 돌아가신 아버지 용춘을 추봉(追封)하여 문흥왕(文興王)을 삼았고 어머니 김씨를 추봉하여 문정태후(文貞太后)를 삼았으며 죄수를 크게 석방하였다. 5월에 이방부(理方府)에 분부를 내려 율령 60여조를 소상히 침작하게 하였다.
- 2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로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북쪽 변경을 침략하거늘 임금께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원자(元子) 법민(法敏)을 세워 태자를 삼았고 월성 안에 고루(鼓樓)를 세웠다.
- 7년 3월에 당나라에서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수륙군 13만명을 이끌고 백제를 징벌하거늘 임금께서 유신(庾信)등으로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에 남천장에 당도했다. 이떄 황산벌 싸움이 가장 치열했는데 김유신장군이 7월 9일에 진격하니 백제의 계백장군이 마주와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반굴,관창등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7월에 당라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을 애워싸거늘 백제의 임금 의자왕이 좌우를 이끌고 밤에 도망하여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의자왕의 아들 융(隆)이 먼저 항복하였고 의자왕도 태자와 웅진의 방영군(方領軍)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후 백제를 파하매 훈공을 논하여 상사(賞賜)에 차등이 있었고 백제에 항복한 사람들은 모두 그 재능에 의하여 벼슬에 임용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소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 인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하니 정방이 대답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인자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며 아랫사람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과 같이 하니, 도모(圖謨)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8년에 당나라에서 또 소정방을 보내어 수륙 35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징벌하였다.
- 무열왕때 비로서 중국의 의관과 아홀(牙笏)을 썼는데 이는 자장법사가 가져온 것이다.
- 6월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무열(武烈)이라 시호하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니 풍채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으며 선왕을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15대 문무대왕(文武大王) : 신라왕 30대
휘는 법민(法敏)이니 태종무열왕의 태자요 모는 문명(文明)이고, 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 김씨이다. 왕은 자표(姿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고, 삼국을 통일하고 당을 몰아내어 물리친 군주이다.
- 신유 원년(660년)에 당고종과 함께 군사를 들어 고구려 정벌에 협조하게 하니 7월에 김유신으로부터 대장군을 삼고 부(部)를 13도 총관(總管)으로 나누어 임금께서 몸소 거느리고 시이곡(始餌谷)에 이르렀다
- 그해 9월 백제의 유민이 옹산성에 웅거했다 하여 임금께서 먼저 사신을 보내 회유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유신이 옹산성을 애워싸고 먼저 대책(大柵)을 불살라 수천명을 베인대 드디어 항복하였다.
- 2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군량미를 요청하므로 임금께서 유신 등 아홉 장군에게 분부를 내려 수레 2천여량에 백미 4천석과 조(租) 2만2천여석을 실려 보냈는데 풍설과 추위가 심하여 인마에 동사가 많았다. 그해 2월 군량을 인도하니 소정방은 크게 기뻐하다가 군량미만 얻어가지고 싸움을 하지않고 돌아가 버렸다.
[삼국사기]에는 나.당연합군의 통수장군임에도 소정방에 대한 비굴한 점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다.
- 4년 정월에 부인으로 하여금 또한 중국의 의상을 착용하게 하였다. 상고하건데 진덕왕 3년에 비로서 중국의 의상을 착용하게 하였고 이제 부인들도 또한 중국의 의상을 입게 하였다.
- 6년 2월에 임금께서 고구려를 섬멸하고자 하여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10월에 당고종이 이적(李勣)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의 중신연정토(淵淨土)가 12성 7백63호 3천 5백43구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 8년 9월에 당나라 군사가 우리 군사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쳐서 함락하매 고구려왕 고장이 항복하거늘 이적이 고장(고장) 및 왕자 복남(복남)덕남(덕남)과 대신 등 20만명을 대리고 당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10월에 유신으로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았고 식읍 5백호를 하사했으며 여(여)와 장(장)을 내려주었고 궁전(궁전)에 올라도 추장(추장)하지 않게 하였다. 인문은 대각간(大角干)을 삼았고 식읍 5백호를 하사했으며 그 나머지 장사들은 훈공을 논하는데 차등이 있었다.
11월에 임금께서 환국하여
고구려의 부로(부로) 7천묭으로 조묘에 고(고)하기를 “삼가 선조의 뜻을 받들어 당나라와 함께 외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으니 원흉이 죄를 자복하여 국사가 안정되옵기에 감히 구하옵니다.”하고 드디어 왕사에 죽은 자들에게 비단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 10년7월에 당나라 도독(도독)이 장수를 보내어 우리 허실을 엿보거늘 임금께서 그 꾀를 알고 여러 장수를 보내어 백제를 토벌하게 하였으니, 품일(품일)은 63성을 취하고 천존(천존)은7성을 취했으며 문영(문영)은 12성을 취하였다. 8월에 임금께서 안승을 책봉하여 고구려의 왕을 삼았다. 백제땅으로 신라군을 치러왔던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가 ‘무기를 걷우라’는 글 점휴납우(占休納祐)에 대해 싸움의 근원은 당권에 있다는 답서를 보냈다.
- 이후 17년(676년)까지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대소 수십회가 넘는 싸움끝에 소부리주(所夫里州) 싸움을 이김으로써 끝났다. 문무왕이 당병을 물리치는 전쟁동안 한편으로는 사신을 자주 당에 파견하여 당고종을 달래며, 국내에서는 진두지휘하여 당나라 군사를 섬멸했다.
- 18년에 북원(北原)에 작은 서울을 설치하였다.
- 19년에 사신을보내어 탐라국을 경략하였다.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창조했으며 비로서 여러 궁문의 액호(額號)를 정하였고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다.
- 21년 7월 1일에는 임금이 돌아가시거늘 시호를 문무(文武)로 올리고 신문왕이 즉위했으며 유조(遺詔)에 의하여 선왕을 동해의 어귀 큰 바위 위에 장례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숨을 거둔 후 10일에 문득 고문(庫文)의 외정(外庭)에서 서역국(西域國)의 예식에 의하여 화장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문무왕이 왜침을 진압하고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동해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고 2년에 완공하였는데 금당 섬돌밑에 동쪽으로 향한 큰 구멍이 나 있으니 곧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면서 맴돌다 가도록 꾸민 것이다. 이는 대왕의 유조로 유골을 모셔 둔 곳으로 이름을 대왕암이라 했고 절 이름은 감은사이다. 뒤에 용이 실제로 나타나 보였으니 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16대 신문왕(神文王) : 신라왕 31대
휘는 정명(政明), 문무왕의 장자. 비는 김씨 흠운의 딸 신목왕후.
- 682년(개요 2년) 국학(國學)을 설립, 인재교육에 힘씀. 감은사의 공역이 끝났고, ‘만파식적(萬波息笛)’의 고사와 이견대의 유래가 생겼다.
- 686년 백제의 옛땅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는 등 국내 주,군을 정비.
- 689년 녹읍(祿邑)을 폐지하였으며,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축조하여 국방을 강화.
- 690년 삼변 수당을 두어 군비를 충실히 하였다.
- 일본,당과의 사신교류를 빈번히 하였으며 문화융성을 도모하여 설총,강수같은 대학자를 배출.
- 12년 7월에 돌아가시니 지금의 배반동 사적 제181호이다.
17대 효소왕(孝昭王) : 신라왕 32대
휘는 이홍(理洪), 신문왕의 태자 비는 김씨.
- 692년(원년) 처음으로 의학을 설치. 고승 도증이 당으로부터 돌아와 천문도를 올렸다.
- 694년 송악성과 우금성을 쌓았으며, 695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의 시장을 열었다.
- 11년 7월에 돌아가시니 지금의 조양동 산 8의 사적 제184호 왕릉이다.
18대 성덕왕(聖德王) : 신라왕 33대
휘는 륭기(隆基) 효소왕의 아우, 비는 무정왕후김씨 원태의 딸 성정왕후, 차비는 소덕왕후김씨 순원의 딸.
- 즉위하자 대사령을 내리고 문무백관의 작위를 한급씩 올려주고, 여러 주군의 1년 조세를 면제하였다.
- 718년 처음으로 누각(漏刻:물시계)를 만들었으며, 문화사업에 힘썼다.
- 731년 일본 병선 3백척이 바다 건너서 동쪽 변방에 쳐 들어 왔으나 왕은 장병을 보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 732년 발해를 정복코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36년에 돌아가시니 성덕이라고 시호하였다. 지금의 조양동 사적 제28호 왕릉이다.
19대 효성왕(孝成王) : 신라왕 34대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제2자 비는 김씨.
- 741년 대신(大臣) 정종(貞宗)과 사인(思仁)에게 명하여 노병(弩兵)을 검열.
파진찬 영종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 6년 왕이 돌아가시자 사후(死後)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에 뿌렸다.
20대 경덕왕(景德王) : 신라왕 35대
휘는 헌영(憲英), 효성왕의 친동생, 비는 의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 효성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
- 원년에 일본국에서 사신이 왔으나 받지 않았고, 12년에도 왔다가 되돌아갔다.
- 신라가 극성기를 달한 때로 제반 제도, 관직을 개편하였다. (9주 5소경 117군 293현)을 완비.
- 751년 김대성이 다보탑,석가탑을 증건.
- 759년 의학을 전공하는 학자를 선임하고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 성덕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을 주조
- 24년 6월 왕이 돌아가시니 지금의 내남면 사적 제23호 왕릉이다.
21대 혜공왕(惠恭王) : 신라왕 36대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왕자, 모는 만월부인 비는 신보왕후 김씨, 차비는 김씨장군의 딸, 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앙후가 섭정하였는데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
- 3년에 일길찬 대공형제가 모반하다가 토평(討平)되었다. 6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11년에도 두번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 오묘(五廟)를 세워 미추왕을 비롯 태종,무열,문무,성덕,경덕왕의 위패를 모시었고 봉덕사 종이 주조되었다.
- 16년(780년) 왕은 성색을 좋아하여 기강이 문란하니 모반하는 자가 많다가 왕과 왕비가 난병에게 해쳐졌다. 내물왕의 10세손인 김양상(金良相)이 자립하여 왕 [宣德]이 됨.
22대 선덕왕(宣德王) : 신라왕 37대
휘는 양상(良相), 해찬 효방의 아들, 내물왕의 10세손, 모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 김씨,비는 구족부인 김씨, 양품의 딸.
- 원년(780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왕위에 오름.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 5년 왕이 손위하려하니 군신이 세번이나 상소하여 말리므로 손위하지 못했다.
- 6년 정월 당나라 덕종이 지절사를 보내 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책명하였다. 이 달 왕이 병으로 위석하여 왕위를 선양하고 13일에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23대 원성왕(元聖王) : 신라왕 38대
휘는 경신(敬信)이니, 일길찬 효향의 아들로 내물왕 12세손이오 모는 계오부인 박씨니 창도의 딸이다. 비는 연화부인이라 하고 숙정부인이라고 하는데 김씨로 각간 신술의 따님이다. 혜공왕 말년에 역신반란을 평정한 공이 있엄 선덕왕때에 상대등으로 있었다가 선덕왕에 자손이 없어 군신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처음 군신들은 왕의 족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 하였으나 군신회의때 큰 비가 있어 알천(閼川)의 물이 넘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군신들이 판단하였다.
- 을축 원년(당정 원년 서기 785) 2월에 고조 법선을 현덕왕, 증조 이찬 의관을 신영왕, 부 일길찬 효양을 명덕왕이라 추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라 하였으며, 아들 인겸을 태자로 세우고, 성덕왕의 개성왕의 2묘를 헐고 시조대왕(미추왕), 태종대왕(무열왕), 문무대왕과 조부 흥평왕, 부친 명덕왕의 묘를지어 5묘를 삼았다.
- 2년 왕도의 백성이 굶주리어 3만3천2백40석의 곡식을 내어 구휼을 하고 10월에 또 3만 3천석을 내어 구휼하였다.
- 4년 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두었다. 서쪽 지방에 가뭄이 계속되어 황충이 일고 도적이 많이 생겨 관원을 보내어 사정을 살피고 어루만져 주었다.
- 8년 8월에 태자 인겸이 죽고, 9년 8월에 왕자 의영으로 태자를 삼았으나, 10년 2월에 의영이 죽으니, 11년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으로 태자를 삼았다.
-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금1천량을 내노으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기를 원하였으나 거절하였다.
- 14년 12월 돌아가시니 원성이라 시호를 올리고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하였으며 소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24대 소성왕(昭聖王) : 신라왕 39대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손자, 비는 계화부인 김씨, 대아찬 숙명의 딸.
- 청주(지금의 진주), 노거현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함
- 재위 2년만에 별세하니 이 이후로 왕위 쟁탈전이 극심해짐. 이때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가 나타났고 폭풍이 불어 임해,인화의 두 문이 부서졌다고 함.
25대 애장왕(哀莊王) : 신라왕 40대
휘는 청명(淸明), 소성왕의 태자, 모는 계화부인, 비는 박씨. 13세에 즉위하여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했다.
- 2년 탐라국이 조공했고, 3년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했다.
- 5년 일본과 수교를 맺고 사신을 파견함. 금3백량을 보내왔다.
- 10년 7월 왕의 숙부 언승과 아우 이찬 제웅이 왕을 시해했다.
26대 헌덕왕(憲德王) : 신라왕 41대
휘는 언승(彦昇), 소성왕의 친동생, 비는 귀승부인 김씨, 각간 예영의 딸. 왕은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 악무를 좋아했고 숭례전에서 잔치를 배풀며 스스로 고금(鼓琴)을 탔다.
-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 자식을 팔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 810년 국내의 제방을 수리.
- 824년 한산이북의 사람 1만명을 징발하여 패강(대동강)에 300여리의 장성축조
- 18년(826년) 10월에 돌아가시니 동천동 사적 제29호 왕릉이다.
27대 흥덕왕(興德王) : 신라왕 42대
휘는 수종(秀宗), 헌덕왕의 친동생, 비는 장화부인 김씨, 소성왕의 딸.
- 3년(828년) 장보고를 청해진(완도) 대사로 삼고 병졸 만명으로 왜적을 방어토록 하였다.
- 기근이 심하고 도적이 여러곳에서 일어났다.
- 9년 복색제도를 고치고 분에 넘치는 사치를 금함.
- 11년 12월에 돌아가시니 유언대로 장화부인과 합장하였다. 안강읍 육통리 사적 제30호 왕릉이다.
28대 희강왕(僖康王) : 신라왕 43대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이찬 헌정의 아들, 비는 문목부인 김씨, 대아찬 충공의 딸.
- 2년(837년) 죄수중 사형수 이하의 죄인에게 대사명령을 내렸다.
- 3년 3월 상대등 김명[민애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자진하였다. 내남면 망성리 사적 제190호 왕릉이다.
29대 민애왕(閔哀王) : 신라왕 44대
휘는 명(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의 아들. 비는 윤용왕후 김씨. 형정을 바로잡고 상대등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등극. 그러나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와 합세하여 달구벌(대구)에서 왕의 군사를 물리쳤고 왕은 도망하다가 김양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 재위 2년만에 김우징[신무왕]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능은 내남면 망성리 사적 제220호
30대 신무왕(神武王) : 신라왕 45대
휘는 우징(祐徵),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요 희강왕의 종제이니 모는 정교부인 박씨이다. 비는 진종부인 김씨니 명해의 따님이다.
기미 원년(당 개성4년 서기 839) 4월에 즉위하고 조고 예영은 혜강왕으로 고 균정은 성덕왕으로 어머니 박씨는 현목태우라 추존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세웠다. 7월 23일 왕이 돌아가시니 신무라 시호 올리고 문성왕이 즉위하여 선왕을 형제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왕은 민애왕을 해치고 왕이 되었는데 이에 적대한 이홍(利弘)을 죽였는데 꿈에 이홍의 화살이 등을 관통하여 깨어보니 등창이 나서 돌아갔다고 함
31대 문성왕(文聖王) : 신라왕 46대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요 모는 진종부인이고 비는 소명부인 김씨니 시중 위흔의 따님이다.
- 경신 원년(당 개성 5년 서기 840) 8월에 대사(죄수를 석방하고 감면함)하였다.
장보고를 노공하여 청해장군을 삼고 장복(章服)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8년에 자객을 보내 죽였다.
- 흉년이 자주 들고, 모반자가 많았다.
- 9년 아들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14년 10월에 졸하였다.
- 17년 정월에 관원을 보내어 서남지방의 백성들을 안무하였다.
- 19년 8월에 시중 김양이 졸하니 왕이 심히 애통해 하였으며 서불한(舒弗翰)을 추증하고 증부(부조를 말함)와 염장을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랐으며 태종왕릉에 배장(왕릉곁에 장사함)하였다.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문성이라 시호를 올리고 헌안왕이 즉위하였고, 서악동 사적 제178호 왕릉이다.
32대 헌안왕(憲安王) : 신라왕 47대
휘는 의정(誼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모는 조명부인.
- 3년(859년) 기근이 심하여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함.
- 5년 1월 돌아가시니 서악동 사적 제179호 왕릉이다.
33대 경문왕(景文王) : 신라왕 48대
휘는 응렴(膺廉), 아찬 계명의 아들, 희강왕의 손자, 모는 광화부인 비는 문의왕후 김씨(처음에는 영화부인 김씨 헌안왕의 딸).
- 신라 말엽으로 국내 정세는 내란과 동요가 심하였다.
- 5년에 당나라 의종이 사신을 보내 선왕을 조문하고 책문과 선물을 보냈다.
- 14년(874년)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하였고, 황룡사 탑을 증수하였다.
- 15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34대 헌강왕(憲康王) : 신라왕 49대
휘는 정(晸), 경문왕의 태자로 모는 문의왕후 비는 의명부인. 왕의 성품이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번 눈으로 보면 모두 암송하였다.
- 4년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왕은 조원전에서 인견하였다.
- 6년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학사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함.
왕의 시중 민공이 “음양이 고루 화평하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농사가 잘 되어서, 백성의 생활이 충족하며, 변경은 잠잠하여 거리가 환락에 찼으니 이는 성덕의 소치입니다” 하였다.
- 11년(886년)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왔고,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베풀었다.
- 12년 보로국(여진족)이 신라와 화통하기를 청했다.
- 12년 7월 왕이 돌아가시니 남산동 사적 제187호 왕릉이다.
35대 정강왕(定康王) : 신라왕 50대
휘는 황(晃), 헌강왕의 아우이고 경문왕의 제 2자로서, 조차인 요가 출생후 돌 전이라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
- 888년 황룡사에서 백고자를 베풀고 친히 청강.
- 재위후 바로 돌아가셨는데 후사가 없어 누이인 진성여왕에게 계승하였고, 남산동 사적 제186호 왕릉이다.
36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신라왕 51대
휘는 만(曼), 헌강왕의 여동생이며 정강왕의 누이. 각간인 위홍과 내통하며 정사를 의논했다.
- 지방에서 조세가 걷히지 않고 도적이 발호. 견훤, 궁예 등이 내침.
- 2년에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향가집 삼대묵을 편찬케 함. 위홍이 죽자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요직을 주어 기강이 무너졌다.
- 5년 궁예가 명주(강릉) 일대 10여 군,현을 침탈하였다.
- 6년 완산(전주)의 도적 견훤이 후백자라 자칭하고 무주(광주) 동남 군,현을 점령하였다.
- 8년 최치원이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지어 올리고 아찬이 되었다.
- 10년 적고적(붉은 바지의 도적)이 일어나 서울 서쪽 모량리까지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달아났다.
- 11년 6월 왕은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라. 현인을 가리어 왕위를 선양하려 한다”라 하고 태자 요(堯)에게 선위하고 그 해 12월 북궁에서 돌아가시니 왕산에 장사했다.
37대 효공왕(孝恭王) : 신라왕 52대
휘는 요(嶢), 헌강왕의 서자, 모는 김씨 의명왕태후 비는 이찬예겸의 딸 박씨.
- 궁예와 견훤의 발호(跋扈)로 신라기강은 날로 깨어짐.
- 2년 궁예가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했다. 5년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함
- 8년 궁예가 신라제도를 모방하고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9년 궁예가 국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 11년 견훤에게 일선군 이남 10여성을 빼앗김.
- 14년 나주에서 견훤군과 궁예군의 큰 싸움이 있었다. 이 해에 궁예가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이라고 하였다.
- 왕이 천한 첩에 홀리어 정사를 돌보지 않음으로 대신 은영이 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은영은 그 첩을 잡아다가 죽이었다.
- 16년 4월 왕이돌아가시니 도반동 사적 제183호 왕릉이다.
38대 경순왕(敬順王) : 신라왕 56대
경애왕의 뒤를이어 신라 56대왕으로 927년에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부(傅)로 문성왕의 6대손이고 이찬 효종의 아들이며 모는 헌강왕의 따님 계아태후이고 비는 죽방부인 박씨와 왕건의 딸인 낙랑궁주 왕씨이다.
가뜩이나 국력이 쇠약한데다 경애왕은 비빈 및 종친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놀고 있을 때 견휜이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했다. 왕은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군신과 더불어 통곡하며, 경애라 시호하고 남산해목령(경주)에 장사하니 고려 태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하였다.
- 원년(927) 11월에 왕은 선고(先考)를 추존하여 신흥대왕이라 하고 모를 왕태후로 하였다. 12월에 견훤에 대목군(칠곡인동)에 침입하여 전야(田野)에 쌓인 곡식을 다 태워 버렸다.
- 2년(928)에 강주(진주) 장릉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에 지진이 있었다. 8월에 견훤은 장군관흔에게 명하여 양산에 축성하므로 고려 태종은 명지성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격퇴시키었다. 견훤은 대야성(합천) 밑으로 진격하여 군사를 나누어 보내어 대목군(칠곡인동)의 벼를 베었다. 10월에 견훤은 무곡성(군위)을 함락시켰다.
- 3년(929)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마후라를 고구려에 출판하였다.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의성)을 공격하므로 고려장군 홍술이 나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니 고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이를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치게 하였다. 10월에 견훤이 가은현(문경가은)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4년(930) 정월에 재암성(청송)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므로 태조는 이를 후례로 대접하고 상부라 칭하였다.
처음 태조는 신라와 통호하고자 하여 선필을 인도하였는데, 이때 항복하였으므로 그 공이 있음을 생각하고 또한 모든 일이 노숙한 까닭으로 총포(寵褒)하였다.
태조는 견훤과 고창군(안동) 병산밑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는데, 참살포로한 것이 심히 많았다. 그리고 그 영안(안동 임하), 직명(안동 일직), 송생(청송) 등 30여군, 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는 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승리한 것을 알리니, 왕은 이를 사례하고 아울러 서로 한번 모일 것을 청하였다. 9월에 국동에 연해주 군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5년(931) 2월고려 태조는 50여기를 거느리고 경기에 이르러 배알할 것을청하므로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권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하여 환란이 일어나게 하고 견훤이 불행을 자행하여 우리 국가를 침해하니 얼마나 분통한지 모르겠다.”
하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는 흐느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도 또한 울면서 왕을 위로하였다.
그로부터 태조는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니 왕은 혈성까지 이르러 전송하고 당제 유렴을 인질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그런데 태조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바르므로 민가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았다. 이에 도인사녀(都人士女)들은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일에 견훤이 왔을 때는 표호(豹虎)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은 왕공(태조)이 이르렀을 때는 부모를 보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신을 신라로 파견하여 왕에게는 금채안마(錦綵鞍馬)를 보내고 관료와 장병들에게는 포백(布帛)을 보내왔다.
- 6년(932)에 5월에 지진이 있었다. 4월에 집사시랑 김불을 정사로 사빈경 이유(李儒)를 부사로 삼아 후당으로 파견하여 예물하였다.
- 7년(933)에 후당 명종이 사신을 고려로 파견하여 사명(賜命)하였다.
- 8년(934) 9월에 노인성(남극성)이 나타났다. 운주(충남 홍성) 계의 30여군,현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9년(935) 10월에 군웅이 할거하고 침공과 약탈이 날로 심해지자 군신회의를 열고 백성을 토탄에서 구하려면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넘길 것을 결의하고 스스로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의 왕경으로 가서 군신의 예를 올렸다.
이 군신회의에서 왕자는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이니 미땅히 충신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 이를 의논함이 옳을 것이어늘 어찌 1천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옳으리요”
하자 왕은 말하기를
“고약하고 위험함이 이와 같아서 형세는 능히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왕 강하지도 못하고 또한 약하지도 못하니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금 글을 갖추어 고려 태조에게 청강(請降)하니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을 이별하고 곧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의지하며 집을 짓고 마의 초식으로 그의 일생을 마쳤다.
- 고려태조는 낙랑공주를 경순왕비로 삼고 유화궁에서 살게하였으며 정승 벼슬에 봉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제수했으며, 한편 사심관에 임명하였다.
- 공은 대송흥국(大宋興國) 4년(978) 무인에 이르러 돌아가시므로 경순(또는 효애라고도 함)이라 시호하였다.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에 있는 사적 제244호 왕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