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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2:1-4 은혜가 있거든 기쁨을 충만케하라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하늘나라 시민답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촉구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천국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인가? 3가지를 배웠습니다.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대적하는 자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외부의 대적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내부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도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됨의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입니다. '권면'(paravklhsi")은 위로와 격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좋은 권면은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적절한 권면은 서로 간의 관계를 튼튼하게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넘어뜨리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권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권면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잘못을 바로잡아서 세워주는 것입니다.
2 사랑의 위로가 있습니다. '위로'(parakalewv)는 '권면'(paravklhsi")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로는 슬퍼하는 자의마음을 즐겁게 해 줄 뿐 아니라, 격려하고, 새 힘을 주는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았기에 서로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 위로의 말 한마디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줍니다. 위로는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도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위로는 메아리가 되고 만다. 사랑을 품고 서로의 아픔을 돌아보고, 위로할 때 교회는 하나로 성숙됩니다.
3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교제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일치하게 하는 영입니다. 악령, 마귀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언제나 하나로 연합시켜 줍니다. 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도록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자칫 성도간의 교제가 잘못되면 상처를 주고, 갈라집니다. 성령의 교제를 코이노니아(koinwniva) 라고 합니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 지는 교제는 아릅답습니다. 향기로운 예수님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교제는 자칫 잘못하면 악취를 풍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니나노니아'(ninanonia) 라고 부릅니다. 성도간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서로를 너무 잘 압니다. 그러다 보면 성령님은 사라지고 인간적인 교제로 빠집니다. '니하고 나하고 사이좋게 지내자' 그러나 성도간의 관계는 아무리 좋아도 인간적인 교제만으로는 결국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분들이 한 교회에서 20여년을 함께 생활했습니다. 같은 여선교회를 했던 분들 10여명이 모여 계속 교제를 하다가 친목계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사이 좋게 잘 지냈는데 어느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목돈을 마련해서 여행을 하기로 하고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리고 친분을 이용해서 돈도 많이 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야밤에 외국으로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안에서 만났다고 해도 하나님없는 모임, 하나님과 상관없는 모임은 연합을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분열을 초래하고 맙니다. 교회 안의 어떤 모임이든 성령님께서 움직여가는 교제가 있길 원한다.
4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는 '내장들'(bowels, viscera)을 뜻하는 어원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애정이나 온정, 친절 등의 감정은 내장으로부터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애정을 준다는 뜻이다. 서로를 긍휼이 여기며, 사랑을 나누는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된 4가지 요소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됨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경쟁과 시기심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으로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영적인 교제를 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듯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애교회 안에 날마다 풍성해 질 때 교회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 이번 부흥회를 통해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4가지의 은혜를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자세로 해야하는가?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라고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이같이 하나됨을 강조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 안에 분열의 아픔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분열의 내용은 4: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는 옷감장사 루디아를 중심으로 세워진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자 분들의 입김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여선교회 회장쯤 되는 지도급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서로간에 갈등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의 싸움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이 이름까지 거명하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할 정도니까요.
빌립보 교회는 뜨거운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적대와 핍박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단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서로 단합하지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말한다. 서로 싸우고 파당을 짓고 분열을 잘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면 모두 하나가 된 때가 있었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하나가 되었고, 서로 싸우던 노조와 회사도 하나가 되었고, 지역감정이나 종교를 떠나서 하나가 되었다. 언제입니까? 월드컵 경기 때입니다.
경기장을 찾는 이들이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간 이들이나, 마을이나 회관에 함께 모인 이들이나, 집에서 텔레비죤을 보던 이들이나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 모두는 하나였습니다. 온 국민의 이야기 거리도 하나. 관심도 하나. 심지어 옷색깔도 하나였다. 그리고 왠만한 일 같고는 서로 화도 안내고 참아주고 웃어주고 심지어 경찰까지도 관대해졌다.
그 때에,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물리쳐야 하는 상대방,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이기기 위하여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우리의 공동의 적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목표도 같고 적도 같다.
우리 모두의 관심은 하나님이고 우리 모두의 적은 우리를 분열시키고 넘어트리려는 사탄이다.
교회가 부흥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목표를 향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나누어져 있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모래성을 쌓은 것과 같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를 이간질 합니다.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를 분열시킵니다. 그것이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최고의 작전입니다.
축구경기에서도 가장 어이 없는 일은 자살골입니다. 공을 상대방 골대에다 넣어야지, 자기 편에다 넣으면 안됩니다. 오래 전 월드컵 경기 때에 콜롬비아 수비 선수가 실수로 자기 골대에 넣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콜롬비아는 지고 말았는데, 월드컵 경기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선수는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습니다.
내 골대에 내가 골을 넣으면 상대방이 좋아합니다.
싸움을 싸우는 병사들끼리 서로 다투게 되면, 나뉘이게 되면 적이 좋아합니다. 병법중에 기본이 적을 분열시키거나 분리시키는것이다.
영적인 전투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지 못하면 악한 영, 사단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마귀의 계락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로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6:17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가 부족한 자들입니다. 실수가 있고, 허물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서로를 권면하며, 위로하며,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서로 돕고, 이해하고, 격려할 때 인애교회는 더욱 힘있게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어떠한 자세로 받은 은혜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까?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이나 여기서 생기는 분쟁을 뜻하며 '허영'(kenodaxia)은 헛된 영광을 가리킨다. 혼자 잘난 척하고, 자기를 대단한 양 착각하는 기고만장의 모습 등은 타인들의 시기와 분노를 야기하고 교회 모두의 일치를 해치게 되어 있다.
겸손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야망을 없애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고자 하는 교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죄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욕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자기를 높입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챕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간처럼 욕심으로 하다가는 자기도 망하고, 교회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이스라엘과 함께 전쟁을 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이기적인 야망이 있었기에 자신과 그의 가족은 물론 많은 동족을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힘써야지, 내 욕심과 허영 때문에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높임을 받고,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섬김을 받아서는 안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넘어지게 합니다. 교회의 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주범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남을 존중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진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빈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무술영화를 보면 하수들은 언제나 큰 소리를 칩니다. 괜히 보스를 믿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거들먹 거립니다. 그러나 고수들은 언제나 바람처럼 조용히 나타납니다. 아주 부드럽습니다.
운동을 할 때 보면 항상 같은 요구가 있습니다.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공을 차거나 테니스를 할 때 힘을 줍니다. 그러면 오히려 공이 멀리 가지 못하고, 엉뚱한 쪽으로 갑니다. 공을 차는 순간에 힘을 빼야 합니다. 때리는 순간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스윙을 해야 제대로 날아갑니다.
겸손은 곧 힘을 빼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겸손한 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때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15:9)",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엡3:8)", "죄인 중에 괴수(딤전1:5)" 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수록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남을 비판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은 일방적인 자기비하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위대하시다는 것을 수용하는 태도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제자가 어느 날 환상중에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높은 보좌가 있어서 누구의 의자냐고 물었더니 성 프란시스의 자리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이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질투가 났습니다. 그는 꿈을 깨고 난 후에 자기 스승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 프란시스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 그렇게 대답을 하자 제자는 항의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당신은 성자인데, 악하다고 하시면 살인자, 거짓 증거 하는 자들은 어찌합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웃으며 아주 편안하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걸세, 만약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걸세, 내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사는지 자네는 잘 모르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시스의 겸손이요 위대함입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끝까지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만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십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받은 은혜나 은사를 사용하는 또 다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나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세포가 든든해야 건강한 몸이 됩니다. 병이 들어 암세포가 되면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가정이 든든해야 사회가 든든해지고, 나라가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붕괴되면서 사회문제가 되고, 국가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교인이 든든해야 건강한 교회가 되고,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지는 것입니다.
몸이 약하면 찬바람 불때마다 감기 걸리고 병균만 몸에 들어오면 앓아 눕는것처럼 약한 성도 약한교회는 악한 영, 사단의 먹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 위에 굳게 설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깨어 기도하여 심령이 뜨거운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암,폐암,간암,대장암,직장암,식도암,뇌암,자궁암,혀암,혈액암,골수암,전립선암, 심지어 안암, 피부암까지 암은 없는 데가 없다. 그러나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계속해서 온몸에 피를 공급하느라 펌프질하기에 열이나서 암이 생기질 못한다고 한다. 우리 몸중에서 가장 뜨거운곳이고 심장의 열 때문에 몸이 따듯한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내가 뜨거우면 문제는 커녕 오히려 교회의 다른 지체까지도 따듯하게 할수 있는것이다. 심령이 뜨거운 사람은 시험받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다. 심령이 뜨거우면 시험에 들려고해도 들수가 없다. 각각 자기의 신앙을 돌아 보아서 뜨거운 심령을 가진 뜨거운 신앙을 갖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보는 것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출발점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면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무언가 타인을 향해서 베풀고 나눌 때 진정한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전쟁도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끼리 서로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그놈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
김민기 씨의 "작은 연못" 이라는 곡을 가수 양희은 씨가 부른 노래인데 학생 시위때 많이 불려지곤 했습니다. 예쁜 연못에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서로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하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힘센 한 마리가 다른 친구를 물어 죽였습니다. 연못을 혼자 독차지하고 신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죽은 물고기가 점점 썩어가면서 악취가 풍기고, 물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힘센 물고기도 죽게 되고 아무도 살 수 없는 더러운 물만 고인 죽음의 연못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가사 속에 담겨있는 내용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한 연못에 사는 붕어처럼 우리는 한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입니다. 누구 하나가 나보다 못하게 되길 바란다면 그 교회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잠시동안은 내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고 내가 더 높아져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그 것 때문에 상처받은 심령이 있다면 결국 그 교회는 상처받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지난번의 항아리 비유를 기억하자)
우리는 지난 부흥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러한 은혜를 받았으면(:1) 같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야 하고 서로 섬기며 겸손해지고 자신은 물론 다른성도의 신앙까지 돌아보아서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원한다. 누구의 기쁨인가? 이러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케 되어야한다. 그럴때에 우리의 기쁨도 충만케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