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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진범(眞犯) 찾기
기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죽인 진범(眞犯)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 예수님 스스로 죽기 위해 왔고 이를 위해 죽을 극적인 장소와 때를 의도적으로 찾아 갔다는 “예수님의 자살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이 문제가 자살을 부정시하는 기독교 교리 체계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직무 태만의 전형적인 한 사례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살해한 책임자를 찾고 그 죄과를 묻는다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여 심판하시는 지극히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할 것이므로 신앙인의 입장에서 정말 필수적인 과업이고, 장차 재림하시는 주님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불손한 무리가 있다고 할 때 2천년 전 같은 끔찍한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엄중히 경고하며 중대한 작업이다.
신약은 예수님을 살해한 자와 살해당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를 밝히고 있다. 통상 전자(前者)는 십자가 참수형을 결정한 유대교 지도자들이고 후자(後者)는 이들에게 판 ‘가롯 유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전자와 후자 중에 후자(後者)에 초점을 두고 그 진범을 찾아보고자 한다. 보다 원인적인 탐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진정 근본 원인부터 전체적으로 밝힐 수 있고 또한 그것은 다시 오실 재림주님조차 위해(危害)하려는 불손한 무리를 차단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 많은 신학자들도 실제적으로 현재와 같이 부정과 비리, 자녀 세습, 내실없는 대형교회, 교권 다툼, 정치권력과 의 결탁 등 오염되어 타락한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구름을 탄 모습으로 재림하지 않고 초림 때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재림예수가 서울에 온다면 분명 정신병원에 갇히거나 살해당할 것이라 보고 있다.
신약을 통해 예수님을 살해한 자를 추론한다면 누구나 다 율법이란 잣대로 십자가 참형을 선언한 유대교 재판관 등 종교권력자들이거나 이들에게 예수의 신병을 넘긴 로마 총독인 빌라도라는 정치권력자이거나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넘겨받아 직접적으로 십자가형을 가한 로마 병정들이거나 흥분한 유대 군중을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 병정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이라 그 책임에서 벗어난다 할 것이고, 유대 군중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심리전 전술에 쉽게 놀아나는 입장이고, 전에 예수님과 관계가 우호적인 사건들을 공유한 적도 있기 때문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무겁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럼 당시 최고의 정치권력자인 빌라도부터 알아보자. 빌라도는 영적으로 민감한 아내를 두고 있었다. 그녀의 계시적 권고(마27:19)를 받아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고, 유대교 지도자들의 완고함에 못이겨 심문하면서도 죄를 찾지 못하고 몇 번이고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시도한다. 빌라도가 심문할 때에 예수님도 "나를 그대에게 넘겨준 사람들의 죄가 더 크다(요19:10-11)" 라고 하면서 빌라도에게 할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책임을 전혀 지우지 않음을 알게 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고집과 소요 조짐에 못이겨 자신은 무고한 사람의 죄와 관련이 없다는 뜻으로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을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내어준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방조한 책임을 묻을 수 있을지라도 그 이상 어떤 직접적인 책임을 묻을 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도신경(“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는 빌라도가 고난을 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진실을 왜곡하는 사도신경은 버려지거나 변해야 한다.
마27:19-26 :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군중에게 누누히 말해도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것을 보고 손을 물에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죄를 당하라. 이때에 온 유대백성이 입을 모아 합창을 하니 예수가 흘린 피의 죄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하거늘 이에 유대인들에게 약점이 많은 본디오 빌라도는 민란이 발생할까 두려워 그들의 요구대로 죄인중의 죄인인 바라바는 살려주고 죄없는 예수는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성경적 사실에 최대한 접근했다는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의 신병을 넘겨받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무지가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성서를 아는 멜 깁슨과 같은 보통사람들의 평범하고도 공통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러난 현상으로 볼 때 예수님을 죽인 진범은 분명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백성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글의 목적에 맞게 '죽인 사람'보다는 '죽게 한 사람' 즉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일단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12 제자들의 책임을 살펴보자.
성경은 분명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위대한 존재가 준비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수님의 바람막이가 되고 여차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도 질 수 있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선지자가 예수님 당시에 실존하였던 것이다. 아는 바대로 그 자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는(마17:11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세례요한으로, 예수님 말대로 역사상 가장 큰 선지자(마11:11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로 태어났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신 스스로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예수님의 말(마17:13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중략)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11:14) 과 정반대로 "엘리야가 아니다"(요1:20-21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고 말해버린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 인하여 종교적 사기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적기사와 더불어 태어난 그는 적어도 구약 말라기 4장 5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봤어야 했고 특히 자기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귀한 말씀에 대해 심사숙고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유대백성들을 예비하기는 커녕 주 앞에 서 있지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눅1:75, 종신토록 주 앞에서 섬기지 못함 즉 동고동락하지 못함) 오직 요단강가에서 세례 한번 주고 두 명의 유대인(어부출신인 안드레과 요한)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했을 뿐이다. 한편,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하자 옛날 성령이 함께 하던 과거가 생각났던지 오랜만에 예수님을 찾는다.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 당신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적인 답변을 주지 않는다.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세례요한 제자들이 돌아간 다음 죽음에 임박한 세례요한을 향해 저주와 책망(마11:11 "저 천국에서는 지극히 낮은 자도 세례요한보다 크다")을 남긴다.
여기서 하늘이 맡긴 엘리야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예수님의 총체적인 평가를 통해 세례요한이 '예수님 노정을 평탄하게' 인도하지 못한 사실을 추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세례 요한의 무지와 불신으로 인해 사탄이 예수님에게 침범했다는 『원리강론』의 주장이기도 하다.
다음은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 예수와 달리 그냥 잠들어 버린, 심정적으로 일치되지 못한 제자들의 책임을 살펴보자. 엘리야의 사명을 가진 세례요한의 불신으로 1차 노정이 실패하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기반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세례요한 때문에 “종교적 망언자(妄言者)”로 몰려 유대교의 기반을 완전히 잃게 되었고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종교적으로 무지한 자들 곧 비종교적인, 비신앙적인 어부 등을 찾아 새로운 섭리적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2차 노정을 걷게 된다. 이렇게 종교적으로 불학무식한 자들은 본시 초자연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을 갈망하는 입장이라 이적기사를 부정하는 구약 말씀(신13:2, “이적과 기사를 너희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너희가 본래 알지 못하던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라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치 말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적기사를 보고 믿으라”(요10:38)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히려 감동되어 세속적 왕을 고대하는 태도에서 12제자 기반이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았음이 골고다 언덕길에서 그 가치가 전적으로 증명되었다. 비록 예수님이 12제자를 세울 때 이적기사라는 방식을 사용했으나 당신 본심에서는 철저히 표적 곧 이적기사를 멀리했음을 성경은 증명하고 있다.
막13:21-22 :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니라
마12:38-42 :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http://blog.naver.com/o2423682/100018962131(표적(이적기사)만을 구하다 예수님을 죽이고만 바리새인들의 신앙 자세)
원래는 원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어떤 시험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 2차 섭리 노정을 걷는 세례 요한의 입장의 탕감 복귀를 위해 사탄으로부터 3대 시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막는데(막8:30) 이것도 실은 예수님의 입장이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결과이다.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이적 기사, 세족식, 3대 시험 등을 통해 얻어진 12 제자 기반이 가롯 유다를 비롯하여 12제자 전반의 불신으로 인해 일순간에 무너질 때에 최후의 조건으로 예수님은 3대 제자를 중심한 겟세마네 동산 싸움에서마저도 3대 제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잠이 들어 사탄 앞에 무너지는 바람에 이젠 사탄이 예수님의 거룩한 옥체(玉體)조차 노리는 입장으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체포되던 그 밤에 잠들어 있는 3대 제자들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과 심정적으로 멀어져 있는 이들의 한심한 행태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른 아침에 수제자인 베드로의 3차례에 걸친 부인도 단순한 해프닝 차원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 그가 늦게라도 주님이신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다면 당시 중죄에 해당하는 ‘반혁명’죄인인 ‘바라바’ 대신 예수님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늘은 유월절에 즈음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불신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살릴 수 있는 하나의 기막힌 섭리적 사건(마 27:11-19 유월절에 무리의 소원대로 죄인 중 하나를 석방하는 전례) 을 준비해 놓았지만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불신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다고 통일교 창시자이신 문선명 샘은 엄중히 선언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을 중심한 2차 섭리의 실패는 십자가를 지는데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http://blog.naver.com/o2423682/110090886449
마27:11-19 : 유월절에는 총독이 유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관례가 있었다. 잔치기간 중에 군중의 요청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마침 바라바라는 이름난 죄수가 갇혀 있었고, 예수도 고발되어 잡혀 있었다.(15-16) 예수는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로마에 위험하다는 누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많은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과 유대 지도자들이 이를 시기하여 그를 붙잡아 왔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아내로부터 그는 무고하고, 재판에 대한 나쁜 징조가 있으니 관여치 말라는 당부도 들었다.(18-19)
제자들의 책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기독교 안에서도 요즘 좋은 글들이 많이 있다. 예수를 따르던 120문도 등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오클로스)의 돌연한 변심 및 무지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 예수님을 죽게 한 진범은 결국 빌라도도 아니고 유대교 지도자들도 아닌 예수를 믿고 따르는 가롯 유다 이하 3대 제자 등을 포함한 ‘오클로스’라고 말이다. 그리고 오클로스는 실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일 수도 있다면서 스스로에게 회개를 주문하기도 한다. 얼마나 놀라운 글들인가? 문제의 그를 소개한다.
http://blog.naver.com/o2423682/100012989036(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십자가 내리기/예수)
다음은 지금까지도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사지(死地)로 찾아 같다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에 간단히 반박해 본다.
바로 절대 예정론자들 곧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이다. 이들은 세례요한과 가롯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의 조연(助演)에 대속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 예수 자신의 주연(主演)에 의해 죽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를‘예수의 자살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통일교도 ‘예수의 자살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생애 노정 초기부터 예수님이 당신의 옥체를 사탄에 내어줄 목적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옥체를 보호할 1차, 2차 방어벽이 사라져 어쩔 수 없이 제물로 내놓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리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자기의 고난 당할 것을 말해왔다면 베드로가 예수의 사명에 관한 변동은 변화산 사건을 전후하여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화산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 고난문제를 의논하기 엿새전 쯤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마가8장 27절 이하, 마태 16장 13절이하, 누가 9장 13절이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고난 받으실 것을 「비로소」 드러내놓고 말씀했다고 되어 있다.” [출처]누가 예수를 죽기 위해 왔다고 가르치는가|작성자파리
이렇게 자살보다는 타살에 무게를 둔다. 세례요한도, 3대 제자도 예수를 불신하게 되어 사탄이 당신의 몸을 침범할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육신을 살리고 영혼(영혼의 부활임)을 버릴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는 결국 마지막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길 곧 영혼을 살리고 육신을 버리는 길을 택하게 된다. 바로 부활 섭리의 배경이다. 결국 옥체를 내어준 댓가로 예수님은 영혼의 부활을 이루어냈고 부활한 동안 영적 세례요한의 사명을 걷게 되었고 그 동안 바울을 비롯하여, 떠났던 12제자(맛디아를 가롯유다 대신 세움)와 70문도들을 다시 찾아 세움으로써 인류를 중생시킬 수 있는 영적 하나님 나라 편성의 수리적 기반을 닦는다. 살아 생전에 닦아야할 토대가 겨우 부활 40일 동안 닦여진 것이다. 그리고 승천한 예수님을 대신하여 역사할 당신의 분신인 성령을 이 땅에 보내주신다. 그리고는 홀연히 승천하셨다. 여기서 대속의 논리를 찾을 수 있는가. 결단코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속이라는 기독교 논리는 점점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왜 그런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에도(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구원 곧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요즘의 신학계의 새로운 흐름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젠 통일교의 논리가 더 이상 이단적이지도, 특이하지도 않는 보편적 신학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협성대 김영봉 교수의 ‘새로운 구원론’을 읽어보시라. 그럼 ‘십자가 대속론’의 허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예수님은 요11:25(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의 선언을 하였고 그 선언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죽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음을 목적으로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 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그는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실천하였으며, 그러한 그의 삶이 당시의 유대인 권력자들의 반감과 적의를 사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생긴 하나의 사건이었고, 예수는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그러한 해석의 결과가 앞에서 인용한 대속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바, 대속의 말씀은 예수의 삶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예수의 “죽음 해석”이다. 그것이 설사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근거하여 예수가 죽으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http://blog.naver.com/o2423682/100012077111(협성대 김영봉교수의 구원론 통일교를 위한 논리)
만일에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초대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고전15:14)이라고 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써 구원이 완성이 되었다면, 부활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부활이 없다면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했는가? 또 다른 질문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예수가 죽기 전에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시켜 믿게 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불완전했는가? 그들이 받은 구원과 십자가를 믿고 얻는 구원은 다른가?
또한 대속되었다고 하는 아무리 잘 믿는 어떤 성도들도 육신을 타고 흐르는 사탄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바울의 증언으로 통해서도 대속론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대속으로도 몸의 속량이 되지 않았다고 하는 바울의 부정할 수 없는 증언(롬8:23: 몸의 속량을 기다림)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 선생은 그런 사악한 사탄의 발호가 끊이지 않는 자신의 육신을 치기 위해 죽는 날까지 결혼조차 하지 않았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결혼보다는 금혼을 가르친다. 그러나 원래 결혼이란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이였다. 구약을 모를 리 없는 그가 값진 하나님의 축복(결혼)조차 부정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왜 그랬는가? 예수님의 대속으로도 자신의 육신을 타고 흐르는 사탄과 죄가 여전히 실존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심지어 수많은 성도들이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스스로 십자가 곧 순교의 길을 간 것도 실은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고 영혼만 부활한” 예수님의 전형노정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도 사탄의 것이었거늘 제자들의 육신인들 사탄의 것이 아니었겠는가. 따라서 예수님처럼 영혼의 부활을 얻으려면 스스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고, 육적인 사고 방식 전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여전히 사탄이 관장하는 육신을 혹독하게 다스려야만 구원된다는 위와 같은 논리는 완전 구원이라는 대속 신앙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예수님 십자가 대속 이후로도 성령의 탄식(롬8:26)은 말할 것도 없고 만물의 탄식(롬8:22)도 여전하다. 그러나 원래 타락하기 전에는 육신이건 만물이건 에덴동산이건 사탄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독신으로 살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육신의 속량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만물의 탄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파요 오메가인 하나님이 사탄을 이기고 육신과 만물의 주인이 되고 에덴에서 주인 노릇할 날이 올 것이다. 속히 만물을 해방하고 육신을 해방하여 그 날이 와야 할 것이다.
다음은 대속론과 관련된 절대 예정설을 잠깐 비판해 본다.
하나님은 천사장 루시엘로 하여금 마귀 사탄이 되도록 예정하였더니 그렇게 되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온갖 악행을 범하도록 예정해 놓았더니 온갖 악행이 세상에 나타났다. 타락해 악행을 일삼는 인간들을 보고 하나님 스스로 한탄하시고 고통당하도록 예정해 놓았더니 하나님은 스스로 한탄하고 스스로 고통을 받으셨다. 인간 타락으로 인해 세상 만물도 탄식하도록 예정해 놓았더니 만물이 탄식하게 되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도록 예정해 놓았더니 예수님이 피눈물을 흘리는 고통을 당했다.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십자가 참수형을 당하는 것을 예정해 놓았더니 그렇게 되었다. 이런 논리가 정말 맞다면 웃지못할 결론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악의 주체인 사탄의 악행도 하나님 때문이고, 인간의 타락도 하나님 때문이고, 예수님을 죽인 진범도 하나님 때문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체성 자체가 여지없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존재를 믿는다! 이건 신학의 포기요 논리학의 포기다. 생각을 포기하는 자들을 놓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절대 예정론은 무뇌아의 논리이기 때문에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세례요한이나 제자들의 실수 이전에 그보다 중요한 원인을 있는지 통일교 창시자이신 문선명 샘의 어록을 중심으로 밝혀 보자.
문선생님은 구세주인 예수님을 사탄의 소굴인 지상에 보내기 전에 사탄으로부터 예수님을 방어할 울타리를 여러 겹으로, 즉 종교적 울타리, 민족적 울타리, 친족적 울타리, 가족적 울타리 등을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다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기반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당대에 말씀을 땅끝까지 전하고 세상을 구할 종교적 기반, 민족적 기반, 친족적 기반 및 가족적 기반 등을 마련해 두셨다는 것이다.
문선생님은 결국 “예수님을 지켜줄 방어막 곧 울타리인 동시에 뜻을 펼칠 충분한 기반이 와해되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4000년간 준비된 종교적, 민족적, 친족적, 가족적 기반이 예수님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엘리야의 사명을 담당한 세례요한의 실수를 1차적으로 들고 있다. 세례요한의 불신과 무지가 예수님을 위한 종교적, 민족적 울타리와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예수님과 겉으론 이종 사촌이지만 배다른 형(문선생님의 정의, 막8:28에 보면 이 둘은 많이 닮았음, 이스라엘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점에서 세례요한으로 세상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 외모가 비슷해서 그렇게 보았다는 것)으로서 장자 입장에서 차자 입장인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례요한의 실수를 유도한 진정한 진범 추론이 도출된다. 바로 마리아이다. 예수님 태어날 때 가장 먼저 탄생의 소식을 접한 사람이 세 명이 있는데 마리아, 엘리사벳, 사가랴이다. 예수님의 친족적, 가족적 기반이 될 중심인물들의 실수를 말하는 것이다. 문샘은 그 중에서도 특히 마리아의 실수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사가랴의 가문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협조를 받은 야곱처럼 1)장자권을 얻도록 인도했어야 하나 그러지 못했을 뿐 아니라, 2)하나님의 선한 씨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자손을 번식할 수 있도록 반드시 결혼시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자협조 섭리에 성공한 리브가보다 못한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문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너무도 닮았다.(막8:28) 닮은 모습이 드러나기 전에는 두 가정 곧 요셉 집안과 사가랴 집안이 서로간 상당한 왕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성장한 이들은 서로간에 닮은 모습을 보자 그만 요셉도 의심하고 세례요한도 의심하게 되었다. 이들은 진상을 알고 싶어 했고, 마리아와 사가랴, 엘리사벳은 불신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요셉가정과 사가랴가정은 왕래마저 끊어졌고, 이젠 두 가정의 선남선녀(‘예수님’과 ‘세례요한의 여동생’)조차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경엔 성장기 예수님의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위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니 픽션이라고 평가절하 하겠으나 누구나 아는 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인적 사항,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 상황 등 전반에 대해 어떤 분명한 예언 기록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새로운 성약 말씀을 주신 문샘도 무작정 불신당하면 곤란하다는 논리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또한 성령이 함께 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언젠가는 성경에 포함될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이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문샘의 행적도 확대된 성경에 기록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마리아가 ‘사가랴’와의 관계를 의심하여 불편했던 요셉 앞에 독신을 고수하면서 오직 한 남자만을 남편으로 섬겼고 메시아이신 예수님만을 당신의 자녀로 섬겼다면, 예수님은 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러나 그녀는 그 반대로 행동했다. 즉 요셉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 요셉의 아이들을 잉태하여 길렀고, 그 결과 예수님을 충분히 모시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월절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 동안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씻지 못할 실수를 저지른다. 그녀는 삼일 후에야 자신의 관심 밖으로 사라진 예수님과 만난다(눅2:40-52). 이렇게 예수님과 무관한 마리아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한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의 소망을 실현해줄 수 없다고 판단한 마리아와 요셉 가정과 결별하여 광야를 헤매면서 공생애 노정을 걷는다. 그리고 어느날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날에 제자들과 더불어 초청받게 된다. 이때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동문서답으로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된다(요2:1-11). 예수님 당신의 결혼(내 때)을 놓고 한탄할 때 ‘무전취식을 말라’는 의미에서의 마리아의 말과 참으로 엇갈리는 장면이 나온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결혼에 무관심했음에 대한 예수님의 책임 추궁이라는 사실이다.
요2:3-4 :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마리아는 또한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등 온갖 이적기사를 보고 곡해한 나머지 예수를 ‘정신나갔다’(미쳤다)고 보고 붙잡으러 예수의 동생들과 더불어 예수 앞으로 나오는 기절초풍할 사건이 성경에 나온다. 아 예수님 가슴이 얼마나 아펐겠는가?(막3: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이때 예수님은 가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고 가족들의 실수를 우회적으로 질책한다. 또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는 예수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도 위와 관련있을 것이다.
막3장20절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마가는 예수께서 얼마나 바쁘신 지를 긴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21절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 얼마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인가?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1절 붙들려 나오니 krath'sai(크라테-사이) [때에 따라서는 억지로라도 힘을 써서 붙잡으려고]의 뜻
친속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지만,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문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불렀다는 점(31절)은 바로 이들이었다는 확증을 갖게 한다. 예수의 행동은 집과 직업을 버리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그들의 생각에) 다니는 것은 미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동생들도 공생애 중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요7:5).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 중 몇 명이 교회에 가입하였다(행1:14).
마리아는 31절에서 또 한번 혈연적인 모자관계를 가지고 주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된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는 예수님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친속이라는 이유로 예수를 미쳤다(문자 적으로는 "제 정신을 잃었다")고 단정하고 무력으로라도 끌어내려고 월권을 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가족사건 중간에 공교롭게도 22절 예루살렘부터 쫓아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예수께 대항했다. 예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장 중요한 설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을 때 또 예수를 불러내려고 하였다. 이들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21절의 생각에서 변함이 없었다. 이들의 생각에는 이제 미친 짓을 그만하고 나오기를 청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친속들을 빗대어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예수의 친족들-http://kcm.co.kr/bible/kor/Mar3.html#mar3_3에서 가져옴...
또한 예수님의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마리아를 복이 있는 여인이라고 하자 예수님이 오히려 낳아주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여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음을 크게 질책하기도 한다(눅11:28).
이상과 같은 성구들은 문샘의 가르침이 핵심적으로 들어있는 관련 성구들이다.
이렇게 문샘은 예수님이 십자가형까지 가게 된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선한 씨를 번식하지 못한 즉 혼인을 하지 못해 가정을 이루지 못한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만일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여동생과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혈통(제2의 예수님)을 계승하였더라면 지상에 하늘의 가정이 최초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고 그러면 사탄은 절대로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마리아는 요셉과 하나되어 세례요한의 여동생과 혼인을 시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사명을 하늘로부터 분명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니인 엘리사벳과 협조하여 사가랴 가정과 하나가 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셉을 주관하지도 못하였고 급기야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묻고 상의 하는 것조차 까맣게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마리아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의문을 가질 때마다 가르쳐 주거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하늘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한번 뱉고 믿어주기를 바랄 뿐 두번 세번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담 해와에게 있었던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책임분담의 원리 때문인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노총각이 될 때까지 어린양 잔치라는 섭리를 이루지 못한 관계로 그의 배우자로 택함을 받은 세례요한의 여동생은 창녀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성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죽게 한 진범 중의 진범은 누구인가? 바로 마리아인 것이다. 천주교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성경과 문샘의 말씀은 증언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