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10월29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21장, 사도행전5장
성경낭독: 에베소서2:11-19절
설교본문: 사도행전2:37-41절
설교제목: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예배찬송: 찬송280(시104), 찬송89(시31), 찬송1(시1), 찬송357(시134)
행2장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엡2장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했던 사건에 놀라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던 이들에게 베드로는 차근차근 이 일의 이유와 의미를 설명하였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며 비난했던 이들의 입을 틀어막을 뿐 아니라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보좌에 앉으신 유일한 중보가 되심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는 묻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과 율법 없는 이방인의 손을 죽게 하였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큰 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심령의 아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이미 오셨음에도 우둔하게 알아보지 못한 것과 주님께서 지난 번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저주와 모욕 속에 죽으신 사건에 침묵했던 책임 있는 자가 되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무엇보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부인했다는 무서운 책임이 그들의 양심을 짓눌렀습니다. 복음 앞에서 저들의 마음은 찔렸고 어찌해야 할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37-39절을 봅시다.
1. 우리가 어찌 할꼬?
37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의 설교에 무리는 깊은 감동이 되었는데, 마음에 크게 찔림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떨림이 일어났고 심한 마음의 고통이 일어 마음이 상했습니다. 주석가 폴 힐에 따르면 ‘찔림’의 단어는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고창병에 걸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발을 동동 구르는데 사용되는 표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상태처럼 심령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각 사람의 마음에 칼처럼 비집고 들어가 찔렀고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복음의 설교는 두 가지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찔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권면에 따라 순종한 것입니다.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로 들어가는 일은 경건과 믿음을 들어가는 입구와도 같습니다. 말씀의 날선 검(히4:12)은 단지 죄악 된 마음과 양심을 벨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머물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까지 함께 만들어냅니다. 낮아진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며, 죄인 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게 하는 길입니다.
양심에 찔림을 받고 애통해하는 것과 회개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마음이 상하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심란해지는 경우들이 허다하더라도 참된 회개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순종으로 방향을 바꾸어 살아가는 참된 회개는 드뭅니다. 참된 회개는 생명의 주님만을 붙들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애통해하며 어찌할지 몰라 물어오는 무리에게 베드로는 말합니다. 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의 대답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이며, 다음으로 죄 용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자가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되는 일입니다. 거짓된 회개와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심령의 아픔은 아무런 쓸모도 없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으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회개의 형식과 규례는 감정의 소모와 피곤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롬12:2)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중보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죄가 깨끗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사역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무리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던 마음에서 돌이켜서 죄 용서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회개는 죄용서가 필요하게 된 시작점을 강조한다면, 믿음은 죄 용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결과적 사실에 대한 신뢰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짧은 권면 안에는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헌신하는 새 사람이 되라는 회개의 권면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에 대한 권고, 곧 기독교 강요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회개에 대한 메시지는 우리시대에도 동일하게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 또한 회개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의 삶은 결코 나뉘지 않습니다. 회심으로 생명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과 육신의 제어 속에 씨름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과 걸음은 한 순간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세월의 변화를 따라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믿음을 침식시켜오는 유혹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을 입으며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회개에는 두 가지 국면이 함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슬픔과 애통의 국면과 더불어 주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의 국면이 함께 있습니다. 돌이킴에는 아픔이 수반되지만 순종에는 참된 안식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성례요, 죄 사함을 받았음에 대한 표와 인으로 은혜의 방편입니다. 세례가 죄 사함보다 먼저 올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례를 각각 받으라는 말은 구원받기 위한 수단으로 세례라는 예식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니고,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권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하여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세례는 공허한 상징이 아닙니다. 참되고 실효적인 증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받은 죄 씻음에 대한 확고한 언약의 표와 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가 지향하는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를 불의에서 정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특정한 형식의 세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가 표상하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흘리신 피로 정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갑자가 이방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주님께서 너희에게도 동일하게 같은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방언, 곧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한 것은 약속하신 성령이 가시적으로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표적이요, 이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모든 세대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시는 은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방언은 오순절과 초대교회 당시에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은사였습니다. 오순절의 난 곳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일은 세상에 없던 놀라운 일이었고, 성령의 강림사건은 온 세계에 드러낸 표적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보좌에 앉으셨음을 선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속사적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반복되지 않는 것처럼 다시 반복되지 않을 언약의 성취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됩니다. 그 때의 이적들을 한시적으로 지속될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너희가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메시지는 그때에 모였던 무리들 뿐 아니라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에도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물론 우리가 방언을 말하거나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거나, 병자를 치료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표적보다 더 본질적으로 더 나은 것, 곧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10:10), “사망에서 생명으로”(요5:24) 옮겨지는 것을 선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탄과 세상에 담대하게 맞서 싸울 수 있게 되었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보존되며, 걸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약속은 모인 무리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39절을 봅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도들과 모인 제자들의 것인 것과 동시에 함께 모여 있는 무리를 넘어 오는 세대와 이방인들에게도 약속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약속은 이미 오래 전에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도, 야곱에게, 다윗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선물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에 지금 이 광경을 목격하며 함께 참여하게 될 유대인들은 예언된 그 때에는 후손의 세대였고 이제 그 성취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의 효력이 후손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3단계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고, 다음으로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로 확대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약속이 주어졌고 그들이 율법을 받은 장자의 신분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약속을 가진 백성이었고 민족으로 이방인들과 구별되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이어서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은 전에는 외인이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부름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2:11-13절에서 말합니다.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았던 담을 허무심으로 모두가 차별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가까이 있던 자든 멀리 잇던 자든 모두에게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바벨탑에서 나뉘어졌던 모든 족속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까워졌고, 동일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아버지의 자녀, 동일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2.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베드로는 또 여러 말로 확증하고 권했다고 말합니다. ‘권하다’는 말은 ‘팔라칼레오’로 설교할 때 사용되는 ‘선포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시간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권면하였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일과 주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 사도들의 수고와 애씀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러 말로 간곡하게 권하고 설득하기 위해 힘을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변화는 성령의 역사로 되는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사도들의 수고와 권면 여러 말로의 설득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끈질긴 수고와 강권을 따라서 패역한 세대, 불신앙의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습니다. 생명을 얻는 일과 변화 속으로 들어오는 일은 하나님의 부름과 일하심이지만, 하나님은 사역자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부모의 애 터지는 수고와 권면, 말씀을 듣는 자리에로 이끄는 애씀을 통해서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자라가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변화와 생명이 하나님께 달렸지만, 우리에게는 언약의 약속을 주실 뿐 아니라 순종의 요구를 하십니다. 애를 써야 할 우리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세대 역시 패역한 세대이며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아성을 강력하게 구축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귀찮은 감시자이며 내 삶의 자유를 빼앗는 분으로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세대이며, 하나님을 없이하며 창조주를 밀어내는 악한 세대입니다. 교회였던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생명의 주를 이방인의 손을 빌어 죽였듯이, 우리 세대에도 불신앙의 불길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의 강물에 자녀들이 익사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애를 쓰고 강권하듯 형제를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역자들과 우리의 수고 속에 교회를 보존하시고, 악한 세대에서 보존되도록 지키십니다.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약함과 머뭇거리는 우유부단함이 얼마나 큰 장애물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단한 권세를 누리면서 교회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백성들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거짓교회요 사탄의 회당이 되었지만 성전과 규례 뒤에 숨어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죽이고 패역한 교회가 많은 사람들의 장애물이 되었고, 주님께 나아오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우쭐함을 자랑할지라도 패역한 세대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패역한 세대’는 부패하여 적그리스도가 된 당시의 교회요 세상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리스도의 원수로 사는 제도들과 기관으로부터 우리는 벗아 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패역한 세대’라고 부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주요 메시야를 거절하고 부인하는 일을 넘어 죽이며 박해하는 이들이야 말로 교회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독을 독인 줄 모른다면 그 독을 경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위험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한 세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믿음을 조롱하는 세대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길에서 탈선한 세대이며,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세대입니다. 심판을 당할 세대라면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헤드린과 제사장 집단인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까지 한 가지로 심판받을 패역한 교회에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으로 올라온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패역한 악한 세대와 거짓교훈들에서 탈출 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와 권면으로 얼마나 큰 열매가 드러났는지 41절에서 말합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설교가 마무리 되었을 때 일어난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약 삼천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영혼들이 구원받은 사람들로 더해졌습니다. ‘신도의 수’가 3,000명으로 증폭되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무리가 120명에서 3,000으로 수십 배가 늘었습니다. 교회가 아직 정식적인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적은 무리가 큰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3,000이면의 적지 않은 수효였습니다. 절기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대략 55,000에서 200,000명으로 늘어나는 도시에서 보자면 상당한 규모의 무리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3,000명의 집단적 회심은 갑작스런 충동으로 된 일이거나 일시적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가 흐지부지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드러난 이적 같은 일이었지만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속했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의 걸음을 이어가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열매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교회라는 한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지속적으로 배워가고, 형제를 세워 그리스도의 몸을 강건하게 세워갔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이 더해지는 일은 우리시대에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은 백 번의 설교를 듣고서도 감동을 받는 사람을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진보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찾기 힘들며,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염증을 느끼고 미워합니다. 세상의 일에는 번개처럼 빠르게 반응하고 분주하면서도 사활적인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태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은 우리시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무서운 시대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이전의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패역한 세대가 되고 세상이 되어버리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경고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패역한 세대에 빠져가지 않도록 형제를 지키고 우리의 자녀들을 강권하며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굳게 세워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