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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2237.2024.2.18 사순절 1주)
갈3:13-14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사순절의, 사(四, 넉 사)는 숫자 4이며, 순(旬, 혈흘 순)은 열흘(열번)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숫자와 4와 10을 곱하면 40이 되고, 40일 동안 지키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주간으로는 6주간이며 주일은 제외하기 때문에, 6주이면 36일(6일/1주×6주=36)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재의수요일)부터 수, 목, 금, 토 4일이 더하여져서 총 40일이 채워지는 겁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나도 동참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기입니다. 사순절은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며 금식하던 전통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사순절을 대표하는 행동으로는 인내와 절제를 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들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우리 주님의 고귀하신 희생 앞에 머리 숙여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나의 죄와 허물이 다시 반복 되지 않도록 깊이 참회 하며 구원의 은혜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사순절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잘 믿다가 천국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인정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있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잘 믿도록 새 힘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잘 믿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우리는 반복적인 예배를 드리며 살아갑니다. 예수님 잘 믿는 일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우리의 모든 신경을 예배의 시간 속에서 초 집중하여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의지와 생각으로 예배드리면 실패 합니다. 성령님이 내 몸과 마음을 예배자로 세워 주셔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온전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의 몸과 마음이 집중할 수 있도록 붙잡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는 믿음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성령 충만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를 믿는 나 개인을 위하면서도 예수를 영접한 모든 자들을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한 번 죽으심으로 그 효력이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효력을 가져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한 죄인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원래 이 같은 사형 집행은 로마인들이 최초가 아닙니다. 이미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왔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 방식은 중대한 범죄자들을 십자가에 못으로 박았습니다. 손바닥은 뼈가 얇아서 쉽게 찢어져 나갈 수 있음으로 못을 손바닥에 박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큰 뼈들로 결합하고 있는 더 튼튼한 손목 관절부에 박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저주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13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므로 의도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모세와 같이 애굽에서 자기 민족을 구출할 위대한 왕을 기대했습니다. 또한 다윗과 같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여 자기 민족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시고 자기 민족을 세계에서 일 등가는 국가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들을 대신하고 대표해서 죽으셔야만 합니까?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불순종하였습니다. 이 같은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와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사망과 저주의 대가를 하나님께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마귀에게 지불한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의 대가를 하나님께 대신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한문 표기로 대속이라고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려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갈 때 단 돈 10만원이라도 대신 갚아주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나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감사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고 십자가를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입니다. 일반적인 사형틀은 목을 매서나 참수를 해서 쉽게 죽입니다. 죽는 것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렇게 쉽게 죽이는 사형틀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끔찍하고 사람을 오래오래 고생시키며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사형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런 것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맞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채찍은 가죽으로 만들어 졌는데 군데군데 삼각형모양의 쇠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으로 사람을 때리게 되면 맞는 사람의 살덩어리들이 같이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사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쯤 죽도록 맞은 사람이 실신하게 되면 다시 쉬었다가 기운을 차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게 되면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워 사형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 사형장에 서 죄수의 옷을 벗겨 십자가에 답니다.
죄수의 손과 발에는 못을 박아서 세워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몸의 수분이 다 빠질 때 까지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온몸에 받아 목이 타는 고통을 겪습니다. 또 밤에는 차가운 바람이 상처 난 몸을 에이는 고통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면서 이런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지 어떤 사람은 보름이상 40일까지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죽는 것이 십자가의 형틀입니다. 또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들이 날아와 눈을 파 먹고, 머리를 파먹습니다. 또 들짐승들이 찾아와 다리를 찢어 먹습니다. 십자가에 그냥 매달아 놓으면 이러한 고통을 온몸에 받기에 누가와서 죽여주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로마의 한 군병이 동정하여 차라리 빨리 죽으라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원한과 증오의 창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 중 가장 악랄한 방법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견디기 가장 어려운 십자가의 형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십자가의 형틀에 죽으심을 자처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기도의 제목을 다시 바꿔 주셨습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수 많은 죽음의 방법가운데 가장 비참하다고 하는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모르면 우리의 믿음은 다 헛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다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출세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고 믿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려면 무조건,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십자가 문제 만큼은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펴 놓고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내용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는 것은 기분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알고, 깨닫고 믿고 행하는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그것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첫번째, 죄 지은 인간이 당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지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고통만 당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 지옥에 간 사람의 소원은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간 부자가 ‘여기 오는 것이 너무나 나쁘니 내 자식들에게 가서 얘기해 주시오’라고 나사로 에게 부탁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당할 끔찍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는 누가 갑니까? 죄인이 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게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죄 지은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어 있고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지옥의 죽음에, 십자가의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고통보다 더 한 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죄가 클 수록 인간의 운명도 비참합니다. 그 죄 값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생각만 해도 비참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나는 내 죄 때문에 저런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하신일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쉬기 위해서 내 죄의 짐을 모두다 주님께 드렸습니다. 삭개오의 짐도,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짐도 주님이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모두 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짐, 내가 예수를 믿고 죄의 짐을 맡겼더니 주님은 그 무거운 짐을 가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짐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의 짐을 지고 가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그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너의 죄 값을 내가 다 치루었다’ 주님은 그 고통과 괴롬 속에서도 우리를 만족게 하시려고 죄 값을 다 치루시고 그 대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가는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있으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가 다 없이 되었습니다. 지옥가게 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죄도, 약함도, 어리석음도 주님이 다 가져가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가 아닙니다. 내게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으므로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최상의 것이 있기때문도 아니고 내가 어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게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프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대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형벌의 표시일 뿐 아니라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서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변화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믿는 자들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해줍니다. 복음을 깨닫고 믿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부어집니다. 복음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2가지인데 하나는 값없이 죄 사함을 받는 은혜요. 또 하나는 선물로 주시는 성령입니다.
2.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방이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 미치게 하고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저와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복이 임하시기를 바라고 이 복이 상주감리교회로 인하여 이 지역사회에 국가에 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 덩어리는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자원으로 살아갑니다. 율법의 법칙이 아니라 은혜의 법칙으로 살아갑니다. 가정과 직장 등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어납니다.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과 함께 마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터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교제하는 그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가정과 직장에 천국공동체가 건설됩니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내 삶, 내 얼굴, 내 언어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고 힘이 됩니다.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어디에 가서나 존귀함을 받습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덩어리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역사의 맷돌을 붙드시고 움직여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걸음이 멈추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때로는 안 보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길이 때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하늘의 참새 한 마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주십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기드온이 그랬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그랬습니다. 이영표가 쓰임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 직장에서 선교지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수많은 하나님의 일군이 쓰임 받고,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은혜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는 다는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망이란 지옥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작은 것이 아니므로 꼭 필요한 것은 죄 사함입니다. 만일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해야 용서받을 수가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자는 지은 죄가 많아서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행을 해도 자신의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선행을 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인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오직 대속의 은혜 외에는 없습니다. 그럼 대속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는 것입니다. 죄인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시고 죄인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데 대속의 재물이 없으면 용서할 수가 없는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면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의 재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천사들도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피의 능력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우리는 죄가 있어서 죄 값을 받을 사람이었고 그 결과 사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망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에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기쁨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변화게 되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고 사람의 변화입니다.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갈 사람으로, 저주 받을 대상을 사랑받을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께 사랑받는 자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즘 더 느끼는 것은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닮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쁜 것 까지도 그렇게 쏙 빼 닮습니다. 어떤 교사는 어떤 아버지를 가르치고 나이 먹어 그 아버지의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 아들을 보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부전자전’학교 빼먹고, 공부 안하고, 학교 담장 넘나드는 것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적인 질병도 유전이 되어 닮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은 그나마 고칠 수 있지만 그러나 영적인 질병은 정말 고치기 힘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건강을 많이 물려주어서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범죄자로 키우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 잘 믿고 건강하게 성공하는 자녀로 키우려 해도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창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금 살기 어려우니 애굽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자신의 목숨이 아내로 인해서 위태로우니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창26장에 가면 그의 아들 이삭이 똑같이 그 일을 합니다. 이처럼 자녀들은 부모들의 잘못된 모습까지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잘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줄 알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에게 약점이 그대로 전수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전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영적인 약점이 유전되지 않도록, 신앙생활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 앞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것인데 그 저주를 끊은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가르쳐야 합니다. 판,검사가 되고 의사를 만드는 것은 나중문제입니다. 믿음의 계승만 잘 이루어지면 축복은 저절로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함께 예배 드리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낼 때도 부부끼리만 알고 내지 마시고 자녀들을 불러 놓고 십의 일조를 어려서부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은 첫월급을 타면 통째로 드리라고 가르쳐서 지금가지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가르칠 것은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을 대상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받으며 살아가고 우리 가문을 복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의 증거를 많이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성령을 약속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고아와 같이 살지 않도록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임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상담자요. 위로자요. 중보자요. 인도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수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켜서 우리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분명하게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옛 생활 방식을 떠나지 못하고 거기 매여 살면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상실합니다. 모든 것을 내 힘, 내 계획, 내 경험, 내 재주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찾아오는 것이 지치고 탈진합니다. 세상에서 바쁘게만 살다가 나이가 들어 허둥댑니다. 이 꽃 저 꽃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다 하루를 보내는 한 마리 나비처럼 방황하다 인생을 끝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자원을 공급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기도를 한번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연결되어집니다.찬송 한번을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접촉되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번, 설교 한번을 듣더라도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능력으로 위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사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사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의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복의 근원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하나님의 영,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나를 넘어서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되어 내 이웃을, 내 공동체를, 내 민족을, 역사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죽음을 생명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거룩한 은총을 그 놀라운 복을 전하여 주는 진정한 인생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약속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해도 하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강해집니다. 부해집니다. 지혜로워 집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복의 근원으로 살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게 애굽땅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라고 했을 때에‘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에게로 가오리까’라고 질문했습니다.이때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된 것입니다.
기드온은 추수해서 타작을 하는데 미디안 군대가 무서워서 포도주 틀 속에 깊은 곳에 들어가서 타작을 하던 겁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큰 용사여’기드온은‘내가 무슨 큰 용사입니까? 저는 겁쟁이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내가 너와 함께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여호수아도 승리하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도 이 세상속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나의 허물과 허풍(虛風)으로 가득한 죄악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허풍과 허물로 가득하다고 한다면 제아무리 밥을 많이 굶어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회개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눈을 넓게 멀리 보아야 합니다. 고후1:5절‘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위로가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4:13절‘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이라고 하여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를 죄를 사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