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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2. 신성의 증거들
● 연구 범위 요 6:1-15, 사 53:4-6, 고전 5:7, 요 6:26-36, 요 9:1-41, 고전 1:26-29, 요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파생되지 않은 영원한 아들이시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요 1:1-3).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으며 그분이 존 재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의 인성을 취하셨다. 하지만 언제나 신성을 간직하셨으며 필요한 때에는 말씀과 행동으로 당신의 신성을 나타내셨다. 요한이 예수님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 타낸 것은 그가 예수님의 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말씀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신성을 보여 주는 기적들을 통해 그 말씀을 뒷받침하셨다. 이번 주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장 위대한 세 가지 표적을 살펴볼 것이 다. 놀랍게도 모든 경우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믿지 않거나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경이로운 표적이 나타날 때 어떤 이는 예수에게서 돌아섰고, 다른 이들은 더 외면하고 눈을 감았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 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는 계기가 되었다.
오천 명을 먹이심
유월절이 가까울 무렵 행하신 5,000명을 먹이신 표적은 모세의 경험과 평행구조를 이루며 유대 민족에게 특별한 표적을 통해 당신의 신성을 말한다.
요한복음 6:4, 5에서 사도는 5,000명을 먹인 시기가 유월절에 가까운 것을 부각하며 시작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유월절 어린 양은 장자를 대신해서 죽었으며 이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표상한다.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 내려졌다. 유월절 양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셨다(고전 5:7).
"그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면당하셨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분의 심장은 터지고 그분의 생명은 부서졌다. 이 모든 희생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540).
요한복음 6:1-14을 읽어 보라. 예수님과 모세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조상이 모세의 사역을 통해 받았던 구원을 상기시킬 만한 어떤 일을 하셨는가?
이 이야기의 많은 세부사항은 출애굽기의 모세와 예수님이 하신 일 사이의 평행구조를 보여준다. 유월절(요 6:4)은 애굽에서의 위대한 구원을 가리킨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처럼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다(요 6:3).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신다(요 6:5, 6). 떡을 공급하신 것(요 6:11)은 만나를 생각하게 한다. 남은 음식을 모으는 것(요 6:12)은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모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수와 같은 열두 바구니에 남은 음식이 모아진다(요 6:13).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신 18:15)를 떠올리게 하는 세상에 오는 선지자(요 6:14)라고 말한다.
(이어서)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하러 오시는 새로운 모세라는 것을 가리킨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단순히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이 가진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본질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신성을 가리키고 계신 것이다.
<교훈> 유월절이 가까울 무렵 행하신 5,000명을 먹이신 표적은 모세의 경험과 평행구조를 이루며 유대 민족에게 특별한 표적을 통해 당신의 신성을 말한다.
<묵상> 이사야 53:4-6과 베드로전서 2:24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어떤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적용> 그분의 신성은 이 진리와 어떻게 연결되며,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리 중에서 이 진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표상은 중시하고 의미는 무시한 유대인들 - “유대인들은 멸하는 천사가 애굽의 집들을 칠 때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밤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경축하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유월절 양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그 표상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분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표상 그 자체를 가장 중요시하는 반면에 그 의미는 무시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몸을 식별하지 못하였다”(시대의 소망, 388).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군중을 먹인 일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 하셨으나 사람들은 그 대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찾고 있었다.
요한복음 6:14, 15, 26-36을 읽어 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어떻게 반응했고, 그분은 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가르치려고 하셨는가?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이 땅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두 가지 문제는 군대를 먹이는 일과 부상자와 사망자를 관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이 모든 것이 가능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아니었고, 기적을 행하신 목적도 아니었다. 대신 5,000명을 먹이신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으며,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신 것을 보여줄 기회였다. 예수께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요 6:35)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나는(I AM)”으로 시작하는 일곱 개(“생명의 떡,” 요 6:35; “세상의 빛,” 요 8:12; “문,” 요 10:7, 9; “선한 목자,” 요 10:11, 14; “부활과 생명,” 요 11:25;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 14:6; “참 포도나무,” 요 15:1, 5)의 말씀 중 첫 번째 말씀이다. 이 기록은 각각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드러낸다. “나는”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나타내신 출애굽기 3장을 생각하게 한다(요 8:58, 비교). 예수님이 바로 그 위대한 '나는(I AM)'이시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불만스러운 마음은 예수께서 저희가 목격하였던 바 그렇게 많은 이적을 행하실 수 있으신데도 어찌하여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건강과 힘과 재물을 주시고 그들을 억압하는 자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능력과 영예를 주어서 그들을 높이실 수가 없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 주장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거절한 것을 오해했다.
(이어서) 많은 사람은 예수 자신이 스스로의 신성한 사명의 본질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펴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의 마음을 불신을 향해서 열었으며 곡해와 배반 가운데서 사탄이 심은 씨는 그에 걸맞은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385).
그들은 영생에 이르는 진리 대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직면할 수 있는 함정이다.
<교훈> 군중을 먹인 일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 하셨으나 사람들은 그 대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찾고 있었다.
<묵상> 예수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과 그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은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적용> 어떻게 하면 영적인 것을 희생하면서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모세가 예언한 그 사람 - “보리 떡의 이적은 큰 군중의 각 사람에게 감명을 주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이적이 주는 유익을 받았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셨다. 지금 그들을 먹인 이 사람은 모세가 예언한 그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어떤 인간의 능력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천 명이나 되는 배고픈 무리를 배불리 먹일 양식을 만들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다”(시대의 소망, 377).
눈먼 자를 치유하심 -1
눈먼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맹인은 예수를 보기 시작하지만, 보던 이들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요한복음 9:1-16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이 사람이 보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가?
제자들은 질병을 죄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했다. 구약의 어떤 구절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여지가 있지만(출 20:5, 왕하 5:15-27, 왕하 15:5, 대하 26:16-21 참조), 욥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이 꼭 죄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죄와 고통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으셨지만, 이 경우에 그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더 높은 목적을 제시하시면서 문제를 바로잡으셨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태어날 때 빠졌던 것을 진흙을 이겨 바르심으로 채워 주는 듯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창조의 이야기(창 2:7)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들은 모두 문제를 진술하고,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가 일어나고, 그가 치유 받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정한 흐름을 따른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런 전개가 7절에서 완결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보다, 그 일이 가지는 의미라는 더 큰 주제에 대해 치유받은 사람과 종교 지도자 간의 긴 대화가 이어진다. 이 논의는 죄/하나님이 하시는 일, 보지 못함/보는 것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 있는 대조적인 개념 쌍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한복음은 9:14까지 예수께서 이 치유를 행하신 날이 안식일인 것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위반한 것이기에 바리새인들은 그분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문제 삼았다(요 9:16).
(이어서) 토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분열이 시작되었다. 눈먼 사람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거나 보지 못하고 있다.
<교훈> 눈먼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맹인은 예수를 보기 시작하지만, 보던 이들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묵상>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신조와 전통에 눈이 멀어 바로 눈앞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진리조차 보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적용> 나의 눈과 귀를 막는 오늘날의 신조와 전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안식일에 살인을 계획한 이들 - “바리새인들은 이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분께서 바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안식일의 모든 의무를 아시는 분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데 매우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그날에 살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이적에 대한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시대의 소망, 472).
눈먼 자를 치유하심 -2
요한복음 9장은 세상의 빛이신 그분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는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다.
요한복음 9:17-34을 읽어 보라. 지도자들은 어떤 질문을 했고, 눈먼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요한복음 9장의 이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이 무대의 주인공이 아닌 부분이지만, 토론의 주제가 예수님인 것은 분명하다. 죄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가 시작한 것처럼(요 9:2),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에(요 9:16, 24) 죄인이라 여기고,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는 “온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라고 비방한다(요 9:34).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눈먼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커지고 그분을 더욱 굳게 믿으면서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두고 의견이 갈리고(요 9:16), 다음에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에 이어 예수님에 대해 점점 더 보지 못하게 된다(요 9:29).
한편, 요한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할 기회를 얻는다. 요한복음 9장에 기록된 이 표적의 주제는 복음서의 다른 여러 주제와 교차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다시 확인한다(요 9:5, 요 8:12 비교). 이 본문은 또한 예수님의 신비한 기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그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9:12, 29; 요 1:14 비교)
이전의 기적 이야기에서 언급된 모세의 모습이 이 장에 다시 나타난다(요 9:28, 29; 요 5:45, 46, 요 6:32 비교).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이라는 주제도 있다. 어떤 이들은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반응한다(요 9:16-18, 35-41, 요 1:9-16, 3:16-21, 6:60-71 비교).
이 대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어두움이다.
(이어서) 한때 눈먼 자였던 거지가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2, 33)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영적 지도자이자 가장 먼저 예수를 알아보고 그를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할 종교 지도자들은 모든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한 얼마나 강력한 경고인가!
<교훈> 요한복음 9장은 세상의 빛이신 그분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지만,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는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다.
<묵상> 고린도전서 1:26-29을 읽어 보십시오. 이 구절에서 바울이 기록한 내용이 본문의 기록과 어떻게 일치합니까?
<적용> 그 같은 원리가 오늘날에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성경과 학문을 연구하면서 그 말씀의 교훈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소경이면 죄가 없으리라 - “소경에게 육체적, 영적 시력을 모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은 바리새인들을 더욱 깊은 흑암에 남겨 두었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리라고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진리를 볼 수 없게 하셨다면 그대들의 무식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다고 하니.’ …그런 까닭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의 탓인 우매함에 빠졌다. 예수께서는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475).
나사로의 부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요한복음 11장은 사랑하는 친구가 병에 걸린 슬픈 소식(요 11:1-3), 그의 죽음에 대한 애곡(요 11:19, 31, 33); 예수께서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매들의 비탄(요 11:21, 32),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요 11:35) 등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가는 여정을 이틀 늦추셨고(요 11:6), 심지어 더 일찍 가지 않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14, 15). 이 행동은 비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17-27에 이르렀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라고 마르다가 말한 것처럼 그의 시신은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체하셨던 것은 뒤이어 일어난 기적을 더욱 놀랍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썩어가는 시체를 다시 살리다니,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이보다 더한 증거가 있겠는가?
하나님으로서, 생명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당신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26).
요한복음 11:38-4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떤 일을 하셨는가?
예수께서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주심으로서 당신이 세상의 빛(요 8:12, 요 9:5)임을 보여주신 것처럼(요 9:7),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서(요 11:43, 44)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심을 보여주셨다.
다른 어떤 기적보다도 이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한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요한의 주제를 강력하게 증거한다(요 20:30, 31).
(이어서) 이 표적을 본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에도(요 11:45) 불구하고, 이 놀라운 이야기(요 11:45-54)의 끝에는 참혹한 역설이 펼쳐진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으나 그런 때에도 어떤 이들은 그분을 죽여서 막아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그에 대조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더 이상의 예가 있겠는가!
<교훈>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드러내셨다.
<묵상> 당신도 어떤 소식 때문에 눈물로 가득할 때가 있습니까? 내가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예수께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것과 그분이 때로는 지체하신다는 사실은 나에게 어떤 용기와 소망을 제공해 줍니까?
<영감의 교훈> 지체하신 이유 - “예수께서 지체하심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완고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에게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또 다른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방황하는 가련한 양들의 모든 희망을 좌절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당신은 만물의 회복자요 생명과 불멸을 가져올 수 있는 분이라는 또 하나의 확증을 주시기로 계획하셨다”(시대의 소망, 529).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힙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이를 위해 요한은 예수님은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표적을 보여준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돕는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증거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것을 받지 않는다.
시대의 소망 41장 “갈릴리에서의 위기,” 58장 “나사로야 나오라,” 59장 “제사장들의 음모”를 읽어 보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은 그의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으며,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증언하였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교사들을 통하여 옛적에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며 구주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말씀에 고정시키기를 원하셨다. 육체로 계신 예수께서 물러가실 때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능력의 원천이 되어야 했다. 그들의 주와 같이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마 4:4)었다.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각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자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말씀을 자신을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을 얻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깊게 성경을 연구하여야 한다"(시대의 소망, 39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어떤 사람들은 의심으로 반응했다. 이 이야기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2. 교과에 기록된 기적은 모두 그리스도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가리킨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데 그분의 신성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3. 고린도전서 1:26-29을 다시 보라. 우리가 사는 시간과 장소에는 이 원리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조롱하고 거부하는 어떤 “미련한 것들”을 여전히 믿고 있는가? 오늘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