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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주의 법칙
일반 사주와는 보는 방법이 다르다.
일반 사주는 생년월일시에 해당되는 간지(干支)의 상생, 상극과 오행의 강약, 대운(大運)과 세운(歲運)의 순환에 따라 길흉이 결정되는 법이지만, 당사주는 간지의 상생과 상극에는 상관이 없고 오직 12성의 조우(遭遇; 우연한 만남)로 길흉을 판단한다. 이 점법은 원래 당나라 때 이허중(李虛中)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천귀(天貴), 천액(天厄), 천권(天權), 천파(天破), 천간(天奸), 천문(天文), 천복(天福), 천역(天驛), 천고(天孤), 천인(天刃), 천예(天藝), 천수(天壽)의 12성을 인간의 생년월일시와 관련시켜 인간의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당사주라고 불렀다.
그 뒤 송나라의 서자평(徐子平)이 이허중의 설에 간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길흉을 가미하여 연해자평(淵海子平)을 지었는데, 뒤에 당사주와 사주로 분리되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민간신앙으로 발전되어 이허중의 원문에 그림을 삽화하여 서민들이 알기 쉽게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일생을 초년, 중년, 말년, 평생 등 4단계로 구분하고 인명(人命), 골격(骨格), 유년행운(流年行運), 심성(心性), 12살(煞), 부모, 형제, 부부, 자녀, 직업, 길흉, 가택, 신상, 관살(關煞), 수명 등 인간생활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가 있는 사항이 모두 첨가되어 있어, 사람의 일생을 예견하고 자기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 참고가 되게 하였다.
보는 방법은 머리에 천귀성을 12지의 자에 붙여서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생년이 어떠한 성정과 만나는가를 결정하여 생년으로 초년의 운세를 결정한다. 다음에 생월의 수를 생년에서부터 정월, 2월 등 순차적으로 셈하여 생월의 수와 만나는 성정을 중년의 운세로 정한다.
그 다음에 태어난 날의 수를 중년운세에서부터 하루, 이틀 셈하여 생일의 수와 만나는 성정을 말년의 운세로 정한다. 그리고 평생의 운세는 말년의 운세에서 자시, 축시 등 순차로 셈하여 태어난 시와 만나는 성정으로 정한다.
이와 같이 만나는 성정이 길 성이면 길하고 흉성이면 흉하다고 한다.
12성 중에 천귀, 천복, 천권, 천간, 천문, 천예, 천수의 7성은 길 성이고, 천액, 천파, 천역, 천고, 천인의 5성은 흉성이다. 인명, 골격, 유년, 심성은 생월로 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생시로 보게 되어 있다. 지금도 일생 동안의 길흉화복이 당사주에 따라 맞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학에 있어서 점술학은 그 종류가 많은데 그중에 당사주는 보기가 쉬운 편이다. 역학은 음양오행 상생상극을 기초로 하여 배우는 것인데, 당 사주는 천간사용은 적고 지지를 많이 사용한다. 당사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나라 개국 전후의 중국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고조로 알려진 이연 장군은 원래 터키계의 피가 반은 섞인 인물로 서기 618년 수(隋)나라를 제거하고 당나라를 개국하였다.그 후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회교 사원이 세워지고 그 문화가 급속도로 중국 내로 전파되었다. 원래 점성술은 중동지역의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전파되었다. 따라서 당사주는 당나라 개국이래 아라비아 문명과 함께 들어온 점성술이 중국인들의 의식구조에 맞도록 정리된 것이다. 일부 전문인들은 당사주를 정통 명리학이 아니라 하여 가볍게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당사주만으로도 ‘귀신같다’는 평을 듣는 유명 역술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사주는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또한 옛날 시골 노인들이 손가락만 짚고도 사주를 보았다는 그 학술이 바로 당사주인 것이다.
당사주는 인간의 운명이 12개의 성좌에 의해 주재된다는 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12 성좌와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분권 1책으로 국한문 필사본과 한문본, 한글본이 있다. 이 책은 중국 고대사상인 주역에서 파생된 사주법으로, 인간의 운명을 판정하는 방법을 생년월일시에 따라 그림과 함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모두 14장으로 총론(總論), 십이성론(十二星論), 인명골격론(人命骨格論), 유년행운론(流年行運論), 심성론(心性論), 십이살론(十二殺論), 육친론(六親論), 직업론(職業論), 길흉론(吉凶論), 가택론(家宅論), 신상론(身上論), 소아관살론(小兒關煞論), 수명론(壽命論) 명부전(冥府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총론’은 사주의 기본을 정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 먼저 6갑의 간(干)과 지(支)를 설명하고 합(合)과 충(冲), 오행(五行), 수(數), 방위(方位), 4계절과 쇠왕, 생극(生克), 소속과 성질, 건록(建祿)과 귀인(貴人), 살(煞), 육신(六神) 등을 해설하였다.
‘십이성론’은 인생의 운명을 초·중·말·총운의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인명골격론’은 태어난 달에 따라 12지에 소속된 짐승의 골격에 비유하여 판단하는 방법이다.
‘유년행운론’은 골격의 판단에 따라 그 운의 유행이 다르다고 설명하고,
심성도 12수의 성교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육친론’은 형제와 자식의 수와 길흉, 부부간의 관계 등을 설명한 것이다.
‘길흉론’은 일생에 다가오는 길운과 흉운의 횟수·대소의 차이, 전길, 전흉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밖에 가택의 선택, 신상의 이해(利害), 어릴 때 잘 자라지 못하고 죽거나 병신이 된다고 하는 ‘소아관살론’, 수명의 정한(定限)을 판정하는 ‘수명론’, 죽어서 선악의 심사를 받는다고 하는 ‘명부전’ 등이 있다.
이 책은 운명 판단의 방법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육임(六壬)』·『기학(氣學)』·『오성(五星)』·『구성술(九星術)』과 함께 5대 기서(奇書)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점복자(占福者)들의 점서로 흔히 이용된다. 1969년에 『당사주』를 번역한 『당사주요람(唐四柱要覽)』이 명문당에서 간행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리학은 운명을 점치는 학문이다.
사람이 태어난 때를 말하는 사주에 바탕을 두어 운명을 예측하는 학문.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 사주학(四柱學), 팔자학(八字學), 추명학(推命學), 산명학(算命學), 역학(易學)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연(年)·월(月)·일(日)·시(時)의 네 간지(干支)를 각각 사람의 운명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이라고 보아 사주(四柱)라고 부른다. 명리학은 개인의 운명을 뜻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하는 학문이다.
음양과 오행
명리학은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동양의 자연철학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요약되는데, 음양은 자연·우주·인간 등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홀수와 짝수, 밝음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등과 같이 상대적인 쌍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오행은 우주를 이루는 물질을 불(火)·물(水)·나무(木)·쇠(金)·흙(土)의 다섯 가지라고 보고, 이 다섯 가지 물질이 서로 관련되고 변화하는 양상을 바탕으로 세상의 흐름을 판단하는 사상이다.
이 다섯 가지 물질은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상생은 한 물질이 다른 물질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물이 나무를 키우고, 나무는 불을 만들며, 불은 흙을 낳고, 흙에서는 쇠가 나오며, 쇠에는 물이 맺힌다는 의미로 요약된다. 상극은 이와 반대로 한 물질이 다른 물질을 이기는 관계로, 물은 불을 이기고, 불은 쇠를 녹이며, 쇠는 나무를 자르고, 나무는 흙을 이기고 솟아나며, 흙은 물을 가두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 12간지
간지(干支)는 시간, 공간, 방위 등에 의미를 부여한 전통적인 방식이다.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조합한 60주기(周期)가 기본 단위이다. 중국의 상(商) 나라 때부터 간지가 이용된 사례가 남아 있으며, 한(漢) 나라 때부터는 하루 24시간을 12지(十二支)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때 비로소 연,월,일,시를 사람의 운명과 관련지어 네 개의 기둥으로 보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간지의 사용과 음양오행설이 확산되면서 간지와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풍토가 시작되었다.
명리학의 효시, 이허중
당(唐) 나라 때 이허중(李虛中)은 개인의 사주를 근거로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방법을 체계화했는데, 이를 뒷 사람들이 당사주(唐四柱)라고 불렀고, 이허중은 중국 고대 명리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송(宋) 나라의 서자평(徐子平)이 오행의 상생과 상극 개념을 사주와 결합하여 명리학을 더욱 체계화했다. 그는 개인의 사주를 나타내는 여덟 글자를 오행으로 분류하고, 그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관계를 분석하여 길흉화복을 판단했는데, 그에 의해 정리된 명리학의 원리는 이후 기본 틀에서는 큰 변화가 없이 전승되고 있다.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해(年), 달(月), 날(日), 때(時)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의 생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해볼 때 위의 네 가지가 각각 네 기둥을 이룬다 해서 사주(四柱)로 표기했다.
사주를 각각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표기하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팔자(八字)라 한다. 천간(天干)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의 10가지다. 지지(地支)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12가지다. 이 간과 지가 조합을 이루어 60갑자(六十甲子)를 만들어낸다.
‘사주’란 본래 위의 설명처럼 사람이 난 연월일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사람이 타고난 운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주를 본다’는 말은 곧 한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사주를 보는 것은 옛날에나 하던 풍습이었는데, 그걸 굳이 오늘날에까지 끌고 와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흔히들 사주팔자를 붙여서 얘기하는데, 사주와 팔자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점쟁이는 무당에서 분화되었다. 무당은 몸에 신이 내려 인간의 소원을 듣고 또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닌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제의를 주재하고 질병을 고치며 미래를 예언하는 일을 맡아 했다.
이 때문에 고대에는 전문적인 점쟁이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부족국가가 성립되면서 왕과 국가의 길흉 및 운명을 예언하는 무당을 두기 시작했다.
이를 고구려에서는 사무(師巫), 신라에서는 일관(日官), 백제에서는 일자(日者)라고 불렀다. 특히 신라는 이들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관상감(觀象監)까지 두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당에서 전문적인 점쟁이가 파생되었다.
이들은 동물의 변태와 식물의 변형으로 미래를 점치는 점복(占卜)도 했지만, 주로 천재지변으로 미래를 점치는 점후(占候)를 하는 등, 천문을 관찰하는 천문자(天文者)와 미래를 점치는 예언자의 직능을 함께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언자보다는 천문자로서 직능이 발달하여 신라 말기에는 이들을 천문박사(天文博士)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약화된 예언자의 직능을 대신하기 위해 중국에서 발달한 거북의 등이나 짐승의 뼈로 점을 치거나 역수(易數:주역의 원리로 점치는 법)의 산목(算木)을 가지고 점서(占筮:점치는 일)하여 미래를 예언하는 봉공복사(奉供卜師)를 따로 두게 되었다.
따라서 민간에도 중국의 점서로 점을 치는 직업적인 점쟁이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전문으로 하는 무당에서 예언을 전문으로 하는 강신무의 일종인 명두(明斗, 明圖)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제도를 따라 천문을 전담하는 태사국(太史局)과 점복을 전담하는 태복감(太卜監)을 따로 두었으며 태복감에는 복박사(卜博士)와 복정(卜正)이라는 관직을 두었다. 태복감은 사천대(司天臺), 사천감(司天監), 관후서(觀候署)로 이름이 바뀌다가 고려 말기에는 서운관(書雲觀)이라 불렸으나, 광종 이후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부터는 복박사나 복정을 민간의 점쟁이 중에서 선발하여 임명, 승진시켰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판수는 점을 쳤다.
이 판수들은 조선시대에 와서 고려의 서운관을 관상감이라 하고 점복을 담당하는 음양과(陰陽科)를 두었을 때 관수를 명과맹(命課盲)으로 임명하고, 관직을 참봉(參奉)과 봉사(奉事)라 하니, 후대에 이를 높여 참봉 또는 봉사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판수가 다른 점쟁이보다 용하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는데, 그 중 홍계관(洪繼寬), 유은태(劉殷泰), 함순명(咸順命) 등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직업적인 점쟁이는 관청의 관리로서 삼국시대 사무·일관·일자에서 출발하여 신라 관상감의 봉공, 복사, 고려 태복감의 복박사·복정, 조선 관상감의 명과맹이 있었다.
민간의 점쟁이는 무당에서 파생된 전문적인 예언자 명두와 중국의 영향으로 등장한 눈이 밝은 점바치 그리고 눈이 어두운 판수의 세 계통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명두나 판수는 수가 줄어들고 점쟁이의 대부분은 점바치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직업적인 점쟁이 이외에 무당이나 그 밖의 사람들이 부업으로 점을 치고 있다. 옛날 판수들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문복(問卜)이요!” 하고 외치면서 손님을 찾아다녔고, 명두나 점바치는 자기 집에 ‘점’ 또는 ‘점집’이라는 깃발을 달아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의 점쟁이는 거의가 자기 집보다는 여관이나 여인숙 등에 ‘운명감정소’·‘동양철학관’·‘역리연구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영업을 하며 손님의 주문에 따라 점을 쳐주고 복채를 받아 생활한다.
점쟁이가 치는 점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평생의 운명을 점치는 사주점, 몇 년 간의 앞일을 점치는 운수점, 당년의 길흉을 점치는 신수점, 며칠간의 재수를 점치는 단시점(斷時占), 액운의 퇴치법을 점치는 멸액점(滅厄占), 질병의 치료방법을 점치는 절초점(折草占)이 있다.
또한, 재판의 승패를 점치는 관송점(官訟占), 길일을 점치는 택일점, 합격, 당선, 승진을 점치는 관운점(官運占),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을 점치는 실물점(失物占), 사람의 생사를 점치는 구심점(救尋占), 그리고 결혼의 행복을 점치는 궁합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점을 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점쟁이가 강신하여 공수(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이 하는 말이라고 전해주는 말)로 미래를 예언하는 신점(神占)과 주문을 외워 신의 뜻을 물건에 나타나게 하여 그 형상으로 점을 치는 영점(靈占), 그리고 점책을 가지고 풀어서 점을 치는 역점(易占)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신점은 주로 명두가 하는 방법이고, 영점은 주로 여자 점바치가 하는 방법으로 쌀을 던져 점치는 쌀점, 돈을 던져 점치는 돈점, 새가 물어온 점괘로 점치는 새점, 그리고 판수가 산통의 점괘를 뽑아 점치는 산통점이 여기에 속한다. 역점은 일반적으로 남자 점바치가 하는 것으로, 음양으로 풀어 점치는 음양점, 오행으로 풀어 점치는 오행점, 육효(六爻)로 풀어 점치는 육효점, 팔괘(八卦)로 풀어 점치는 팔괘점, 구궁(九宮)으로 풀어 점치는 구궁점 등이 있다.역점에 사용되는 점책은 역경(易經)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한문본과 한글본이 있으나, 특히 글씨를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만든 그림책도 있는데, 이를 흔히 당사주(唐四柱)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도 신체의 특성으로 점을 치는 인체점(人體占)에는 머리통으로 점치는 두상(頭相), 얼굴을 보고 점치는 안상(顔相), 손금을 보고 점치는 수상(手相), 뱃살을 보고 점치는 복상(腹相) 등이 있지만, 통칭 관상(觀相)이라 하며 엄격한 의미에서 점복과는 구별하고 있다.
그런데 점쟁이들은 점을 칠 때 손님의 미래를 점치기 전에 거의 과거를 맞혀 자기의 점을 믿도록 한다. 또 손님에게 반말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것은 고대에 예언자가 갖고 있던 권위를 지위한 것이다. 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간지
10간과 12지를 조합한 말.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며, 12지는 자(쥐)·축(소)·인(호랑이)·묘(토끼)·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이다. 결혼이나 이사 등의 날을 잡는 일로부터 운세에 이르기까지 민간신앙의 한 축으로 사용되며, 예전에는 농사짓는 적당한 시기를 선정하는 농사력도 간지에 의존했다. 새해가 밝으면 간지에 근거한 그 해의 이름과 상징을 즐겨 찾아보는 것과 같이 한국 민중들의 일상적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전승되어 왔다. 오랫동안 속신의 대상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간지 개념을 활용한 궁합이나 사주 등을 흥미로 살펴보기도 한다.
개요
우주만물이 주역의 이치에 따라 순행한다는 동양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기준 중 하나. 10간과 12지를 조합해 간지라고 부른다. 일찍이 중국에서 들어와 주체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한국 민족문화의 근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주로 연·월·일·시를 나타낼 때 쓰이며, 현재도 매 해를 칭하는 이름부터 사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생활 전반에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다.
유래
동양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10간 12지는 일찍이 중국에서 들어와 정착된 이래 한국 민족문화의 근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원은 중국이지만, 한국의 간지는 나름대로 주체적인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에 중국의 간지와는 약간 다르다. 4세기 이후 음양사상이 발전함에 따라 간지는 각각 '줄기와 가지', '하늘과 땅', '해와 달', '양과 음'에 대응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오행설과 결부되면서 갑·을은 목, 병·정은 화, 무·기는 토, 경·신은 금, 임·계는 수, 인·묘는 목, 사·오는 화, 축·진·미·술은 토, 신·유는 금, 자·해는 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간지는 잘못 이용되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오도되기도 했으나, 한국 민중들의 일상적 세계관 속에서 끊임없이 전승되어 왔다. 중국이나 한국뿐만 아니라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숫자나 방위개념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도 이용되었지만, 서양으로부터 양력이 들어옴에 따라 급격히 쇠퇴했다. 그 영향력이 상당히 떨어진 오늘날에도 궁합이나 이사 등의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간지 개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구성
간지는 10간과 12지로 구성되어 있다. 10간은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이며, 12지는 자(子:쥐)·축(丑:소)·인(寅:호랑이)·묘(卯:토끼)·진(辰:용)·사(巳:뱀)·오(午:말)·미(未:양)·신(申:원숭이)·유(酉:닭)·술(戌:개)·해(亥:돼지)이다. 주로 연,월,일,시를 나타낼 때 쓰며, 간이나 지만으로 시간, 특히 해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대개 60간지를 그 차례에 따라 붙여가면서 이용했다.
10간은 날짜를, 12지는 달수를 세기 위해 만들었다.
4세기 이후 음양사상(陰陽思想)이 발전함에 따라 간지는 각각 '줄기와 가지', '하늘과 땅', '해와 달', '양과 음'에 대응된 것으로 보았다. 또 오행설(五行說)과 결부되면서 갑·을은 목, 병·정은 화, 무·기는 토, 경·신은 금, 임·계는 수, 인·묘는 목, 사·오는 화, 축·진·미·술은 토, 신·유는 금, 자·해는 수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12지는 12개의 방위신(防衛神)인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와 결부시켜 해석하였다.
용도, 시간의 표시
간지는 주로 연·월·일·시를 나타낼 때 쓴다. 간이나 지만으로 시간 특히 해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대개 60간지를 그 차례에 따라 붙여가면서 이용하였다. 10간은 날짜를, 12지는 달수를 세기 위해 만들었다.
간지가 가리키는 시간은 다음과 같다. ① 자시(子時):23~1시, ② 축시(丑時):1~3시, ③ 인시(寅時):3~5시, ④ 묘시(卯時):5~7시, ⑤ 진시(辰時):7~9시, ⑥ 사시(巳時):9~11시, ⑦ 오시(午時):11~13시, ⑧ 미시(未時):13~15시, ⑨ 신시(申時):15~17시, ⑩ 유시(酉時):17~19시, ⑪ 술시(戌時):19~21시, ⑫ 해시(亥時):21~23시.
한편 한 해를 부를 때 붉은 원숭이의 해, 황금 개의 해 등 색상과 동물을 함께 묶기도 하는데, 그것은 숫자와 사람, 장소, 사물, 문화 등과의 숨겨진 의미와 연관성을 공부하는 옛 수학인 수비학에서 발생한 것이다. 간지에서의 수비학은 해를 나타내는 10간에 각각 색상과 방향, 숫자를 대입시킨 것이다.
방위의 표시
간(무·기는 제외)지는 방위를 나타낼 때 이용하기도 했다. 간지가 가리키는 방위는 다음과 같다.
①자(子):북, ②축(丑):북북동, ③인시(寅):동북동, ④묘(卯):동, ⑤진(辰):동남동, ⑥사(巳):남남동, ⑦오(午):남, ⑧미(未):남남서, ⑨신(申):서남서, ⑩유(酉):서, ⑪술(戌):서북서, ⑫해(亥):북북서.
묘지의 방향을 정할 때에는 간지가 가리키는 방향에 머리가 있다고 보고, 묘지의 방향은 머리의 반대쪽을 의미했기 때문에, 간지 방향의 반대쪽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자(子)'는 묘지의 방향이 남향임을 의미했다.
속신의 대상
간지를 신앙의 대상으로 보기도 했다.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간지는 사주라고 하는데, 사주가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결정한다는 속신도 생겨났다. 혼인의 택일, 남녀의 궁합, 흉일을 피하는 비방, 이사 갈 때의 택일이나 방향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왕릉과 대가집의 무덤에도 12지를 상징하는 동물을 조각하여 수호신으로 세워두었다. 경상북도 경주의 무덤에서 출토된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유명하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삼재(三災):인간의 길흉사(수재·화재·풍재·병난·질병·기근 등)를 결정하는 데에 이용하였다. 삼재가 드는 3년 동안에는 인간관계나 모든 일을 꺼리고 삼갔다. 삼재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들어오는 해를 (들), 눌러앉는 해를 (눌), 나가는 해를 (날)로 표기한다. 뱀·닭·소띠는 돼지해에 (들)삼재, 쥐해에 (눌)삼재, 소해에 (날)삼재. 범·말·개띠는 원숭이해에 (들)삼재, 닭해에 (눌)삼재, 개해에 (날)삼재. 돼지·토끼·양띠는 뱀해에 (들)삼재, 말해에 (눌)삼재, 양해에 (날)삼재. 원숭이·쥐·용띠는 범해에 (들)삼재, 토끼해에 (눌)삼재, 용해에 (날)삼재.
② 궁합(宮合):년·월·일·시에서 각각 천간(天干)과 지간(地干)을 찾아내어 오행으로 무엇에 해당하는가를 찾아 인간의 결혼을 점친다. 가령 남과 여의 궁합의 길흉을 '남금여금'(男金女金)은 좋지 않고 '남수여화'(男水女火)는 좋다는 식으로 판정한다.
③ 이사방위(移徙方位):이사할 사람을 남과 여로 구분하여 나이가 몇인가를 안 후 동·동남·남·남서·서·서북·북·북동으로 방향을 결정한다.
④ 길흉일(吉凶日):10악대패일(十惡大敗日)은 무슨 일을 하면 실패하는 날이다. 10악일은 갑진일·을사일·임신일·병신일·정유일·경진일·무술일·기해일·기축일·경인일·계해일·정해일 등이다. 또한 황도일(黃道日)은 좋은 날이고, 흑도일(黑道日)은 불길한 날이다. 천덕월합일(天德月合日)은 모든 살(煞)이 없어진다. 흉일을 피하는 법은 길일을 볼 때와 같으나 다만 띠의 날을 택하는 점이 다르다. 즉 갑·을·병·정 순서가 아니라 자·축·인·묘의 순서대로 날을 택하는 법이 다르다.
세시풍속
간지는 세시풍속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령 정월 1일은 닭, 2일은 개, 3일은 양, 4일은 돼지, 5일은 소, 6일은 말, 7일은 사람, 8일은 곡식의 날이라 하여 각 날마다 해서는 안될 일과 좋은 일을 구별하였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나와 있는 것 중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오행점(五行占):새해의 신수를 점친다. 오행에는 각기 다른 점사(占辭)가 있다. 나뭇조각에 금·목·수·화·토를 새겨 장기 쪽같이 만들어 이것을 한 번에 던져서 엎어지고 자빠진 것으로 점괘를 얻는다.
② 정월의 인일(寅日)에 백발을 태우면 길하다고 보았다. 상자일(上子日)에는 집에서 콩을 볶으면서 주문을 외우는데, "쥐의 주둥이를 태운다"라고 한다. 상해일(上亥日)에는 콩가루를 만들어 세수를 하며, 묘일(卯日)에는 뽑은 실로 액막이를 하고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
사일(巳日)에는 이발을 하지 않는다. 정월 열엿샛날에 대개 거동을 삼간다. 패일(敗日:8일)은 남자들의 출행에 좋지 않은 날이다. 2월 5일·14일·23일을 삼패일이라 하여 이날에는 모든 일에 조심한다.
현황
간지는 예전처럼 실질적으로 생활 전반에 개입되어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생활 전반에 녹아 드는 풍습처럼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간지가 가장 활발히 사용되는 경우로는 각 해의 이름을 부를 때와 궁합, 운세 등이다. 또한 한 해를 2016년 병신년, 2017년 정유년, 2018년 무술년 등으로 표기하면서 붉은 원숭이의 해, 붉은 닭의 해, 황금 개의 해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수비학에 의거한 색상이 덧붙여지면서 그에 맞는 캐릭터 상품이 생겨나는 등 상업적인 용도로도 사용된다.
음양 오행
음양과 오행은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나, 전국시대 중엽 하나의 사상으로 통합되었다. BC 3세기 전반부터 음양을 우주 만물을 만드는 상반된 성질의 두 가지 기로 설명했으며, BC 4세기 초부터 수·화·목·금·토를 가리키는 오행의 개념이 나타났다. 그후 오행은 음양과 결합하여 우주에 편재하고 충만한 5가지의 기로 간주되었다. 체계적인 음양오행설을 성립시킨 사람은 제나라의 추연이다. 그는 음양의 기와 오행에서 발생하는 덕의 소식이론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했다. 진한대의 음양오행설은 사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정사를 오행상생의 순환원리로 설명하는 시령설로 발전되었다.
송대 철학자인 주돈이는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5행을 낳는다는 구도로 음양오행을 이해했으며, 이 내용은 성리학의 이기론 체계를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음양설과 5행설은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 중엽에 하나의 사상체계로 통합되었다.
원래 음양은 산의 북쪽(응달)과 남쪽(양달)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 만물을 형성하는 에너지적 원소로서의 의미를 가진 개념은 아니었으며, 또 실재하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도 아니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 음양이 풍(風)·우(雨)·회(晦)·명(明)과 함께 천(天)의 6기(六氣)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면서 비로소 음양은 실재하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BC 3세기 전반 무렵에 천지만물의 생멸과 변화를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설명하는 사고방식이 성립되면서, 이때부터 음양을 성질이 상반되는 2종류의 기로 설정하고, 음양 2기에 의해 천지자연의 운행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5행이란 수·화·목·금·토를 가리키며, BC 4세기 초부터 그 개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물자의 기본재가 상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음양설과 결합하여 5종류의 기, 즉 우주에 편재하고 충만한 5가지의 에너지 적 원소로 간주되었다.
음양설과 5행설을 통합하여 체계적인 음양오행설을 성립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추연(鄒衍)이다. 그는 음양의 기와 5행에서 발생하는 덕(德)의 소식(消息)이론으로 사물의 변화를 설명했는데,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학설로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있다.
5덕이란 5행에서 발생한 5종류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 5덕의 전이에는 일정한 기운이 있고, 거기에 적응한 정체(政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왕조의 제왕은 누구나 이 5행의 덕 가운데 하나를 갖추어 왕자가 되며, 모든 왕조는 5덕의 순서에 따라 흥망하게 된다. 그리고 5행의 상호관계는 토 - 목 - 금 - 화 - 수와 같이 각기 전자의 왕조를 이기고서 나타난다는 상승(相勝)과 순환의 법칙, 즉 상극설(相剋說)의 입장을 취했다.
그 후 이 오덕종시설은 진한의 교체기를 거쳐 전한(前漢)의 정치적 안정기가 오면서 목 - 화 - 토 - 금 - 수로 차례차례 생성해간다는, 정권 선양(禪讓)의 형태를 취하는 상생설(相生說)로 변화했다. 그리고 진한대의 음양오행설은 〈여씨춘추 呂氏春秋〉 12기(十二紀)와 〈예기 禮記〉 월령(月令)에 보이는 시령설(時令說)로 발전되었다. 시령설은 사계절의 변화와 인간의 정사를 오행상생의 순환원리에 의해 설명하고, 다양한 인간사의 현상과 4시(時), 12월(月)의 자연현상을 각각 오행에 배당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이 음양오행의 순환운동에 따르면 그 화평상태가 유지될 수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면 자연과 사회의 화평이 깨어진다고 했다.
또한 인간의 행위 가운데서는 특히 천자의 통치가 음양오행의 순환운동을 제대로 따름으로써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한대에는 이러한 음양오행설이 유가와 도가를 포함한 모든 사상에 공통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하나의 보편적인 사상으로 성행했다. 특히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과 유교정치사상을 결합하여 천인감응(天人感應)과 휴상재이(休祥災異)의 사상을 완성했는데, 이 사상은 그 후의 유교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는 음양오행설에 의해 자연현상과 인사, 특히 군주의 정사가 대응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따라서 군주의 통치는 '천'(天)에 순종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군주의 통치가 민생을 해치는 경우에는 음양오행의 부조화를 초래하게 되어 가뭄과 장마 등의 자연재해를 통한 '천'의 견책이 있게 되며, 혜성이나 지진의 발생 등의 괴이(怪異)를 통한 경고가 내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가 반성하지 않을 때는 천명을 바꾸어 그 국가를 멸망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군주의 통치가 민생을 보호할 때는 보랏빛 구름이나 진기한 짐승이 출현하는 등의 상서(祥瑞)가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그는 또 오행설을 응용하여 군주에게 외모, 언어,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의 '5사'(五事)에 근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이 동중서의 재이설은 절대군주의 권위를 천의 권위에 의해 뒷받침하면서 절대군주의 올바른 통치를 촉구하는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그 후 유교가 국교화되어가면서 재이설은 점차 신비스러운 참위설(讖緯說)로 바뀌어갔다. 동중서에게는 과거 군주의 실정에 대한 견책으로 설명되던 재이가 참위설에서는 장래 발생할 사태의 예언, 특히 역성혁명에 의한 정권교체의 예언으로 바뀌었다. 그결과 참위설은 기존 왕조의 권위를 위협하면서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음양오행설은 자연과학의 영역, 특히 의학자의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학에서는 인체의 내부와 자연계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즉 인체의 조직은 자연계의 음양오행에 적용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음양오행의 도식이 생리학의 도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컨대 비장(脾臟)은 목, 폐(肺)는 화, 심장(心臟)은 토, 간(肝)은 금, 신장(腎臟)은 수에 배당하여 그 기능과 성질을 설명하는 식이다. 또 음양오행설에서는 사계절의 변화가 인간의 생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인체 내부의 5장(五臟)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이론들을 취했다.
음양오행설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는 송대 성리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돈이는 음양오행을 태극과 관련지어 설명했는데,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따르면 태극이 음양을 낳고 음양이 5행을 낳는다는 구도로 음양오행을 이해했다. 그는 5행을 5기로 파악하면서 5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라고 설명하여 음양 속에는 태극이, 5행 속에는 태극과 음양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음양과 5행의 결합에 의하여 만물이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태극도설〉의 내용은 그후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태극이 이(理)로, 음양오행은 기(氣)로 해석되어, 이기 개념에 의한 만물의 생성과 운동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보통 방위는 자오선에 의해 남·북이 정해지고 자오선과 수직으로 만나는 선의 양쪽 방향이 동·서로 정해진다. 따라서 동·서·남·북의 4방위가 대표적이며, 이를 기준으로 32방위로 등분한다.
동양에서는 동·서·남·북·중앙을 가리키는 5개의 방위가 있으며, 5방위는 오행에 비교해 정의된다. 풍수지리설의 좌향론은 방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상호영향을 설명하는 체계이다.
좌는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 기능의 후방을 말하고 향은 전방을 뜻한다.
따라서 자좌오향이란 특정장소의 뒤편이 북쪽이고 앞쪽이 남쪽이라는 뜻이다. 이때 자가 북, 오가 남을 지시하는 것은 풍수지리의 24방위에 온 것이다. 24방위란 주역의 8괘와 10간, 십이지를 사용해 각 방위의 간격을 15°씩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오선(子午線)에 의해 남·북이 정해지고 이 자오선과 수직으로 만나는 선의 양쪽 방향이 동·서로 정해진다.
따라서 동·서·남·북의 4방위가 대표적이며, 이를 기준으로 32방위로 등분하고 있다. 방위는 공간상의 위치를 지정하는 데 사용되지만 이러한 물리적 의미를 넘어선 의미의 체계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지구의 자전이나 별의 운동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절대적인 방위체계가 가능하다.
남·북 방위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지구 자기의 방향에 관계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자연의 순환이나 운동이 일정한 방위를 갖는 것은 자연적 사실이지만 이것이 인간에 의해서는 질서나 원리로 비춰지고, 다시 이것은 가치의 세계인 좋고 나쁨이란 기준에서 이해된다. 즉 자연의 원리에 합치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그렇지 못한 것은 나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해는 동쪽이란 특정한 방위로부터 떠서 서쪽으로 지게 된다. 이것은 사실의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동쪽은 해가 떠오른다는 사실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동쪽은 양(陽)이며, 출발과 성장을 의미하는 방향이 된다. 그리고 북쪽은 북반구 중위도 지역에서는 차가운 자연 계절풍이 불어오는 방향이다. 그래서 북쪽은 한랭한 계절풍이라는 자연적 사실로부터 겨울이 오면 모든 식물이 성장을 정지하기 때문에 죽음을 의미하는 방향으로 의미부여가 이루어진다. 동양에서는 동·서·남·북의 4방위와 함께 사방의 방위를 인식하는 가운데인 중앙도 또한 하나의 방위로 취급되어 5개의 방위가 있다.
그리고 이 5방위는 각각 오행에 비교해 정의된다. 북은 수(水)이며 색깔로는 검은 색이고 음(陰)이다. 남은 화(火)이며 붉은 색이고 양(陽)이다. 동은 목(木)이며 청색이고 양의 방향이며, 서는 금(金)이며 흰색이고 음이다. 그리고 중앙은 토(土)이며 황색이 된다. 물론 이러한 5방위와 음양오행의 결합은 중국 화남지방의 풍토와 경험적으로 대비되는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설의 체계화로 말미암아 일단 방위에 음양과 오행이 배정되면 이를 바탕으로 복잡한 자연현상과 인문현상의 조화와 역동성을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자연을 변화자체로 이해하는 역(易)의 체계도 방위에 따른 천지자연(天地自然)과 인사(人事)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기본적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예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8괘방위(八卦方位)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방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상호영향을 설명하는 체계의 전형적인 예가 풍수지리설의 좌향론이다. 풍수지리의 4요소가 산·수·방위·사람이라는 데서도 이러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지형과 지세에 따라 일조시간과 바람 등의 미기후적 차이가 커질 수 있고 이것이 식생이나 토양, 물길의 흐름, 풍화와 침식 등의 지형작용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자연과학적 사실에 있어서도 방위가 중요하다. 풍수지리는 산수(山水)의 배치와 지형에 민감한 논리체계를 가지기 때문에 자연지리적 의미에서 방위의 중요성을 이미 포괄하고 있으며, 이런 측면은 일찍이 나경(羅經)이라는 기구를 통해 좌향을 중시했던 데서 잘 나타난다. 풍수지리에서의 좌향론이 바로 방위에 관련된 지기(地氣)의 여러 측면을 살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취락입지의 기본이 배산임수와 남향인데, 여기서 남향선호의 사고를 바로 풍수지리의 좌향론의 모태격으로 이해하면 된다. 자연환경에 인간이 조화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 것이 풍수지리이고 방위에 주로 관련된 것이 좌향론이기 때문에 남향선호도 결국 자연조건에 인간이 적절히 조화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 본다면 위와 같은 논리가 가능하다. 본래 좌향이란 좌는 어떤 지점에 위치하는 기능의 후방을 말하고 향은 반대로 전방을 뜻하는데 이 양자를 합해서 좌향이라 한다.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 함은 특정장소의 뒤편이 북쪽이고 앞쪽이 남쪽이라는 말이 된다. 이때 자(子)가 북, 오(午)가 남을 지시하는 것은 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24방위에 말미암은 것이다. 24방위란 주역의 8괘(八卦)와 10간(十干), 십이지(十二支)를 사용해 각 방위의 간격을 15°씩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남동에 손(巽), 남서에 곤(坤), 북서에 건(乾), 북동에 간(艮)을 배치해 8괘 중 4괘를 사용하고, 12지는 자(子)를 정(正)북에 두고 왼쪽으로 돌면서 30° 간격으로 순서대로 배치하며, 10간은 중앙을 나타내는 무기(戊己)를 제외하고 8개를 각각 오행으로 나누어 오행에 배정되는 방향에 배치하여 괘 4, 12지 12, 10간 8, 모두 24개의 방위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특정장소의 좌향이 24방위 중의 방위 명으로서 결정되면 그 다음은 주역과 음양오행의 원리로서 시설이나 기능의 성격에 비추어 장소의 조화와 부조화의 여부를 판정한다. 복잡한 자연과 인문현상이 뒤얽힌 실타래를 방위에 음양·오행과 역(易)의 이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풍수지리의 좌향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술법이나 과장, 해석의 어려움이 개입될 수도 있지만 기후현상, 지형현상, 인문적 조건을 음양오행론과 주역의 논리 속에서 검토해 하늘·땅·사람의 조화를 추구하려 하는 사상적 토대로서의 좌향론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만물은 '기'로 이루어졌으며 만물 중의 하나인 땅도 '지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지기에 대해 음양·오행·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풍수지리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풍수지리서는 동진의 곽박이 지은 〈금양경〉이다.
풍수지리는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논리이며 이 양자의 존속을 조화와 균형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음양의 상보적인 이해와 오행의 순환적 변화의 원리가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간접적인 지기에 대한 대표적인 접근은 땅의 모양을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형국론이다. 매화낙지형, 연화부수형, 노서하전형 등 땅을 동물·식물·사람 등의 모양으로 규정하고 땅에 비유된 동식물의 특징을 가지고 생기가 모이는 혈을 찾는다. 길지를 찾는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는 간룡법, 장풍법, 득수법, 좌향론, 정혈법 등이 있다.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졌다고 보아 만물 중의 하나인 땅도 지기(地氣)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지기에 대해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풍수지리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 서양의 지리(geography)가 지리의 영역을 차지하기 이전까지의 진정한 전통지리는 풍수지리였다. 19세기까지 실학자들의 지리관과 동학과 같은 개벽사상의 밑바탕이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미신으로 격하되었으며, 이러한 외세에 의해 왜곡된 풍수지리가 제모습을 찾기 전에 다시 서양의 지리에 의해 묻혀 졌으며, 풍수지리는 풍수라는 봉건시대의 속신으로 버려지게 되었다.
풍수지리는 인간이 일찍부터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터득된 지혜에 근본을 두고 있다. 특히 농경을 시작한 후부터 작물의 재배와 성장에 관계되는 땅의 성격과 분포의 차이를 기의 차이로 이해하면서 풍수지리는 이론적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춘추전국시대 이후 기의 변화와 동정을 음양으로 파악하는 음양가의 성장이 인간의 개별 경험적 수준에 머물던 기에 대한 인식을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으며, 이후부터 풍수지리서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눈·바람 등의 기후현상, 토양, 수분, 지형, 생태계내의 물질순환 등 모든 자연현상을 기의 작용으로 파악했다.
현존하는 풍수지리서 중에서 최고(最古)의 것으로는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 지은 〈금양경 錦襄經〉이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땅에 대한 기의 인식이 발달했으나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학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땅에 대한 독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중국으로부터 풍수지리가 전래된 후 중국과는 다른 우리식의 풍수지리를 발전시켰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우리의 독자적 풍수서가 저작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동외산선문(桐畏山禪門)의 도선(道詵)이라는 선승에 의해 한반도 풍수지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도선에게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비보사상(裨補思想)으로서 중국과 다른 한반도 풍수지리의 특성이다.
즉 주어진 땅의 지기에 의지에서 살 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거나 가산을 만들고 사찰과 탑 등의 입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땅의 지기를 인간의 삶과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비보로서 한반도 풍수지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고려시대에는 비보문제를 전담하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비보와 같은 땅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고려시대 풍수지리에서 지기쇠왕과 그에 따른 국도의 천도문제를 제기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의 도읍인 개성을 벗어나기 위해 계룡산·모악산 등과의 비교를 통해 결국 한양이 도읍지로 선정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 후에 새로운 도읍 선택에 골몰한 것은 고려시대에 문종·숙종·예종·공민왕 등이 모두 풍수지리 논리를 고려의 개혁에 이용하려 했던 전통을 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태조는 왕조의 정통성 문제를 민중의 사고 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지리를 이용해 정면돌파한 것이다. 즉 지기가 왕성한 한양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앞날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어 신생왕조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성종 이후 문물이 안정되면서 개혁적 풍수지리의 사상성은 점차 몰락하고 좋은 터를 골라 가문과 개인의 부와 권력을 탐하는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함으로써 풍수지리는 이기적인 터잡기 잡술로 여겨지게 되었다. 타락한 풍수지리를 비판하고 건강한 지리관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실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외세의 침략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풍수지리는 오늘날에도 저속한 옛 관습을 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풍수지리는 기본적으로 지기로서 이루어진 살아 있는 땅에 인간이 어떻게 잘 조화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땅은 좋고 나쁜 것이 없고 스스로 그러한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이 조화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조화하기 어려운 땅이 인간의 눈에는 좋지 못한 땅으로 보일 뿐이다. 자연 그 자체로서는 선악의 판단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다. 땅과 조화할 수 있는 기반은 인간이 땅의 기를 느껴서 자신과 잘 맞는 장소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문명을 만듦으로써 점차 자연과 멀어졌고 이에 따라 인간의 본능적인 능력으로서의 기감(氣感) 능력은 상실되었다.
기감이 상실된다면 풍수지리의 이론체계는 쓸모가 없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론이 만들어졌다. 직접 땅의 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땅의 여러 가지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지기를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이 풍수지리의 이론을 형성하고 있다. 간접적인 지기에 대한 접근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땅의 모양을 눈으로 봄으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국론(形局論)이다.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연화부수형(連花浮水形)·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 등 어떤 지역의 땅을 호랑이·소 등의 짐승이나 매화·연꽃 등의 식물, 또는 사람 등의 모양으로 규정하고 땅에 비유된 동식물들의 생태적 특징을 가지고 생기(生氣)가 모이는 혈(穴)을 찾는다.
학이 둥지에서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라면 알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가 된다. 만약 생기를 느낄 수 있다면 굳이 학 모양을 그리지 않고서도 알이 놓이는 곳을 기감으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기가 수반되지 않은 형국론은 공허하며 이런 점에서 명당을 찾는 일은 땅과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지 않고서 단지 어떤 도식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생기를 바탕으로 한 형국론은 땅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풍수지리의 정신을 대중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삼천리 방방곡곡 풍수지리는 형국명이 붙지 않은 곳이 별로 없을 정도이다. 보다 체계적으로 길지(吉地)를 찾는 노력으로 간룡법·장풍법(藏風法)·득수법(得水法)·좌향론(坐向論)·정혈법(定穴法) 등의 경험적 지기인식을 위한 이론체계가 있다.
간룡법은 우리 땅의 연원인 백두산, 즉 태조산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마을 뒷산, 즉 주산(主山)에 이르는 산맥이 힘있게 끊어지지 않고 잘 달려왔는가를 보는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지기의 흐름인 산맥을 용(龍)으로 본다. 생기가 넘치게 뻗은 용을 보통 좋은 것으로 판단한다. 간룡의 요체는 조산(祖山)에서 주산을 거쳐 혈장에 이르는 맥의 연결이 생기발랄한가를 보는 것이다. 장풍법은 주산을 중심으로 명당주변의 산세를 살피는 방법이다.
명당주변의 산세가 포근하게 사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무정하게 돌아앉았거나 외면하는 산세는 좋지 못하다. 가장 전형적인 장풍법은 사신사(四神砂)의 구조를 살피는 것이다.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형태는 서울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서울의 명당을 주재하는 것이 북현무인 주산이며, 북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북악산은 다시 조산인 북한산에서 맥을 이어받았다.
주산은 혈장 뒤에 우뚝 솟아 위엄을 갖추고 명당의 얼굴이 된다. 좌청룡·우백호는 주산의 좌우에서 주산을 호위하면서 명당을 감싸는 모양을 갖추어야 좋다. 서울에서의 청룡은 낙산, 백호는 인왕산이다. 남주작은 조산(朝山)인데 말 그대로 임금인 주산에 대해서는 신하와 같은 산으로서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듯 한 모양이어야 한다. 서울에서는 관악산이 이에 해당하는데 조산으로서는 다소 기가 센 것이 흠이다.
그리고 주산과 조산 사이에 책상과 같은 산이라 하여 나지막한 안산(案山)이 있는데 서울 남산이 이와 같은 산이다. 장풍법을 살핌으로써 명당의 크기를 볼 수 있는데 사신사의 구조가 만드는 넓이가 크면 도읍이나 고을 및 마을이 입지할 수 있는 명당이 되고 국면이 협소하면 음택이 입지하는 땅이 된다. 즉 풍수지리에서 음택과 양택 풍수지리의 구분은 오직 명당의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다.
간룡과 장풍법을 통해 대략적인 명당의 범위가 확정되면 어느 부분이 생기가 모이는 혈처(穴處)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혈을 정하는 것이 정혈법이다. 땅에도 몸과 같이 경락(經絡)의 체계가 있고 혈이 있다. 이 혈기는 경락을 타고 흐르던 기가 잠시 멈추는 기의 정거장과 같은 장소이다. 그러므로 한방에서 침을 혈에 놓게 되는데 혈을 벗어나면 효험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명당에서 혈을 찾는 것도 침구술과 같이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어도 명당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될 수 있다. 그만큼 정혈은 어려운 것이다. 서울의 혈처는 경복궁이 된다. 명당의 중심이 혈이기 때문에 도읍이나 마을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이 이곳에 입지하게 된다. 간룡법·장풍법·정혈법이 주로 산, 즉 용맥에 관련된 사항에 주목하는데, 풍수지리란 말에서 이미 상징되듯이 물도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중국의 풍수지리에서 중시되고 있다.
명당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서 물길을 보는 것이 득수법이다. 자연에 직선의 날카로움이 드물듯이 풍수지리에서도 조화와 부드러움을 좋아한다. 산의 흐름도 부드러우면서 힘있는 모습으로 꿈틀꿈틀 흘러야 하지만 물도 마찬가지로 직선으로 빠르게 흘러서는 안 되며 뱀이 기어가는 모습처럼 구불구불 유장하게 흘러야 한다. 그리고 그 흐름은 산의 흐름과 조화되어야 한다.
자연의 운행은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가 그러하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도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명당에 배치하는 기능들의 방향에 따라서 기의 영향도 상당히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입지하는 존재의 성격에 따라 적절한 방향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좌향론이다.
좌란 혈의 뒤쪽 방향을 말하며, 향이란 혈에서 앞을 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좌향은 지기와 천기(天氣)의 조화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이와 같은 경험적 지기의 인식을 위한 논리는 서로 조화되고 협동적으로 지기 파악에 사용된다. 그러나 역시 풍수지리에서 중요한 것은 땅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것은 그 특징을 알아서 적절히 대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 그 개성을 무시하고 죽은 것과 다름없이 대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풍수지리는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논리이며 이 양자의 존속을 조화와 균형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실제로 땅의 해석에 동원되는 모든 이론체계는 음양의 상보적인 이해와 오행의 순환적 변화의 원리를 토대로 형성되어 있어 조화와 균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땅에 대한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땅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소 은유적·비유적인 표현을 빌리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엄밀한 서술양식과 비교해 소박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적 사실, 특히 생태학과 같은 지식체계에 풍수지리의 논리가 매우 잘 부합된다. 풍수지리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자연에 대한 지혜의 축적이기 때문에 현대과학이 부분적 확실성에 치중하는 데 비해 풍수지리는 포괄적이고, 과학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선도하는 사상이 될 수 있다.
현대의 환경문제는 지구의 죽음을 염려한 것이고 지구의 종말에 따른 인간의 몰락을 걱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현대과학이 자연에 대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확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연과학 지식의 확대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지식의 응용으로 자연을 이용하여 쾌락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데 더욱 열중했기 때문에 과학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문제가 급격히 커져 마침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자체의 붕괴를 초래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대과학의 왜곡된 성장을 올바르게 되돌리는 데 풍수지리와 같은 유기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전통사상이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음양가의 사상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우주, 자연에 관한 음양·5행의 체계를 종합하여 이룬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추연, 장창, 추석 등을 음양가로 들고, 그 저작으로 추자(鄒子), 추자종시(鄒子終始), 추석자(鄒奭子) 등이 있다고 했다.
오학적으로 체계화되고 다른 사상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5행이란 음양이 여러 가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가져오는 자연의 변화를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와 같은 5가지 유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리학에서도 음양오행설을 수용하여 우주만물의 법칙과 원리를 규명하고 있다.음양가의 사상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의 설화나 벽화 또는 관직의 명칭 등에서 음양사상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승려인 도선에 의해 참위설과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도참설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 바탕은 음양사상이었다. 이는 조선의 건립을 정당화하고 천도문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감록 鄭鑑錄〉도 이러한 음양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끊임없이 민중들의 정서를 지배하면서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많은 난과 민중 항쟁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음양사상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감록은 감결 등의 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고 '정감록'이라는 말세예언의 민간신앙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기원은 참위설인데 주로 국가나 왕국의 성쇠를 점치는 것으로 풍수지리설, 도교사상과 복합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성립되었다고 보여진다. 정감과 이심이라는 인물의 대화로 전개되고 있는데 내용은 반왕조적, 현실부정적인 것으로 봉건사회에서 억압된 민심을 보상하는 작용으로 민간에 전파될 수 있었다. 조선에서 금서로 취급했으나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의 성립에 그 기반을 제공하여 조선 후기 사상계와 민중의식의 변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 가지 감결류와 비결서가 집성된 것으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동안 다양한 이본이 생겼다. 내용이 다양한 수십 편의 비결 류의 집성이라는 것은 정감록이 단일한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정감록은 흔히 감결을 비롯하여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 역대왕도본궁수 등을 묶어 동국의 비기집성이라 일컫기도 하고 감결 하나만을 가리켜 따로 정감록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위설적인 내용 때문에 책 이름이라기보다는 '정감록'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세예언의 민간신앙으로 지칭되고 있다.
정감록의 기원은 참위설인데 '참'은 은어·예언으로 국가나 인사의 길흉화복·성패를 예언하는 것이고, '위'는 육경을 해석하여 그 숨은 뜻을 밝혀내는 것으로, 그 연원은 점복과 같으나 다만 '참위'는 주로 국가나 왕국의 성쇠를 점치는 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참위설은 풍수지리설과 혼합되는 것이 보통인데 정감록도 참위설·풍수지리설·도교사상과 복합되었다.
또한 이것은 오행사상과 결부되어 천문지리적 조건이 인간사의 길흉화복과 관련된다는 민간사상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풍수도참설은 신라말 고려초 도선의 도선비기(道詵祕記)에 의해 고려의 건국과 연결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성행한 풍수도참설은 통치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반왕조적, 서민적 성격을 띠었다. 요컨대 〈정감록〉은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성립되었다고 보여 진다.
내용은 정감과 이심이라는 인물의 대화로 전개되고 있다. 대화 내용은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된 피난처에서만 복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의 성을 지닌 진인이 출현하여 이씨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으로서 역성혁명 사상과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로서의 이상경에 대한 동경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전쟁 등으로 인한 사회혼란의 극심한 정세가 반영되어 반왕조적, 현실부정적인 내용을 담게 된 것으로, 혹세무민의 참설을 통하여 정상적인 백성의 의사를 반영시키고 있다. 이것은 관민의 의사소통이 통제된 봉건사회에서 억압된 민심을 보상하는 작용을 하여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민간에 전파될 수 있었다.
이때문에 조선에서는 〈정감록〉을 금서로 취급했으며 민간에서는 새로운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사회심리가 반영되어 은밀히 전승되어갔다. 이 책은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회변동의 와중에서 왕조교체의 사회변혁사상과 우주론에 입각한 운세의 법칙이 결합되는 성향이 강해졌다. 따라서 19세기에 일어난 대부분의 농민봉기는 정감록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의 성립에도 그 기반을 제공하여 조선 후기 사상계와 민중의식의 변화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신비적인 요소가 강한 예언서이지만 조선 후기 민중의식과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오음양가의 사상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우주, 자연에 관한 음양·5행의 체계를 종합하여 이룬 일종의 자연철학이었다.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추연·장창·추석 등을 음양가로 들고, 그 저작으로 추자(鄒子), 추자종시(鄒子終始), 추석자(鄒奭子) 등이 있다고 했다.
음양가의 사상은 음양의 개념이 도(道)·5행 등의 개념과 결합하면서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다른 사상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5행이란 음양이 여러 가지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가져오는 자연의 변화를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와 같은 5가지 유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리학에서도 음양오행설을 수용하여 우주만물의 법칙과 원리를 규명하고 있다.음양가의 사상은 한국에도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의 설화나 벽화 또는 관직의 명칭 등에서 음양사상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승려인 도선에 의해 참위설과 풍수지리설이 결합된 도참설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 바탕은 음양사상 이었다. 이는 조선의 건립을 정당화하고 천도문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감록)鄭鑑錄)도 이러한 음양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끊임없이 민중들의 정서를 지배하면서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많은 난과 민중 항쟁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음양사상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풍수가 집안을 망친다
땅의 형세를 보아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람을 풍수 혹은 풍수쟁이라고 한다. 반풍수라 함은 서투른 풍수쟁이를 일컫는 말로서, 그가 명당이라고 잡아준 자리가 도리어 좋지 않아서 집안이 망할 수도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서투른 재주를 믿고 함부로 일을 벌이다간 도리어 일을 망치는 수가 있다는 뜻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과 같은 뜻이다.
네가 뭘 안다고 그 일에 나서냐! 반풍수 집안 망친다더니 네가 꼭 그 짝이로구나. 너는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냐? 겨우 1년 정도 남의 밑에서 일한 것을 가지고 감히 집을 짓겠다고 나서냐!
청(靑)·적(赤)·황(黃)·백·흑(黑)의 5색, 즉 5방색을 기본으로 하여 다채롭게 변화시키는데, 이 5색은 오행사상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각 색마다 해당되는 오행·계절·방위·방위신이 정해져 있다. 또한 오행의 상관관계에서 중간색이 나오는데 청백의 간색은 벽(碧), 청황의 간색은 녹, 황흑의 간색은 유(騮), 청흑의 간색은 자(紫), 적백의 간색은 홍(紅)색이다.
조선시조 대 단청에서는 장단·주홍·양청·양록·황·석간주 등을 주요색으로 사용했고, 주요색에 흰색과 먹색 등의 여러 색을 배합하여 다양한 색깔을 만들었다. 즉 양청에 백분을 섞어 삼청을, 양록에 백분을 섞어 옥색을, 양록에 양청을 섞어 하엽을, 석간주에 먹을 섞어 다자를, 주홍에 백분을 섞어 육색(살구색)을 만들었다. 단청의 색 배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데 여기에는 민족의 고유한 색채감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분벽화를 통해 그 양상을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부석사조사당·봉정사극락전·수덕사대웅전을 통해서 빛을 많이 받는 기둥이나 난간 등에는 붉은색을, 빛을 적게 받는 추녀나 천장 등에는 녹청색을 써서 명암의 장식적인 대비효과를 높인 상록하단의 원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늬가 다양해지고 건물 외부에 등황색 계통을 많이 써서 매우 밝고 화려해졌는데 이것은 조선건축의 다포양식이 복잡해지고 장식화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내부단청의 경우는 광선의 명도가 외부보다 낮기 때문에 주로 녹청색으로 처리하여 밝은 느낌이 나도록 했다.
단청의 색배열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가감된다. 즉 2가지 색부터 6가지 색까지 있는데 첫번째 색은 장단이며, 끝색은 석간주이다.
6가지 색에서 하나씩 줄이고자 할 때에는 맨 끝의 석간주는 그대로 두고 그다음 색부터 차례로 하나씩 줄여서 5색, 4색, 3색, 2색 계열을 만들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단청의 색조는 건물의 구조적인 표현성을 높이게끔 적용되었고, 다채로운 보색대비로 원색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색을 규칙적으로 반복·처리하여 색조의 율동과 조화를 이루어낸 것이 특징이다. 즉 한색과 난색을 엇바꾸면서 색의 층단을 구성했고, 보색대비와 명도 차이에 따라 색띠의 면적을 달리했으며, 층단식 바림법에 의한 대범한 명암효과를 내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