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의 좁은 물목에서 7년 조일전쟁의 운명이 갈리다
아들아, 우리 역사 속 결정적인 순간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속의 장소, 현장..
이런 걸로 역사를 풀어보는건 또 어떨까.
때는 1592년 4월 13일부터 1598년 11월 19일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임진왜란, 7년 조일전쟁이고.
장소는 그 전쟁기간동안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전쟁을 벌이던 남해안이란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 3군데 있는데..
견내량(見乃梁), 노량(露梁), 명량(鳴梁)이란다.
먼저 동쪽부터 서쪽 순으로 보자.
그럼 제일 먼저 견내량(見乃梁)이 나온다. 거제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물길이지.
다음은 노량(露梁). 많이 가본 곳이지? 여긴 남해와 하동 사이의 좁은 물길이란다.
그리고 마지막은 명량(鳴梁). 전남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물길인데..
여기는 남해와 서해가 이어지는 곳으로 바닷물이 좁은 물길을 따라 한순간에 흐르고
바닷속에는 암초가 많아 부딪히며 소용돌이 치면서 돌지.
이 좁고 험한 물길을 따라 흐르는 바닷물의 물살이 얼마나 급한지..
바닷물이 흐르며 운다고 울돌목, 명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구나.
세계적으로도 물살이 급하기로 유명한 곳이란다.
왜 이 좁고 긴 물목들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 되었을까.
7년 조일전쟁 기간동안 조선과 일본 수군이 벌인 해전은 남해안의 여러 포구에서
벌어졌단다.
당시 우리 주력함인 판옥선이나 일본 주력함인 아다케부네는 먼바다에서 전쟁하기엔
적절하지 않았고, 특히 우리 판옥선은 더 그러했지만.
또 일본은 남해의 해안선을 따라 서해로 진출하는 것, 보급과 수송이 주목적이라..
전투는 가까운 바다, 포구를 배경으로 펼쳐질 수 밖에 없었단다.
7년 조일전쟁사 속에서 중요시된 것은 견내량은 1592년부터 1597년 7월까지,
명량은 1597년 9월, 노량은 1598년 11월. 시간 순서는 이렇게 진행되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단다.
견내량이 중요했던 것은 1592년 4월 7년 조일전쟁이 개전하면서 부산이 함락되고
부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이 조선으로 오는 모든 물자와 병력이 머무르는 전진기지가
되어 버렸단다. 부산은 일본 수군의 집결지였지.
개전 후 제대로 된 전투없이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이 붕괴하였고, 소수의 경상우수군
함대가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휘하에 남아있었단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전라좌수군과
의민공 이억기 제독이 이끄는 전라우수군 함대가 합류하여..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지휘하에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결성되어 부산에서
남해안으로 진출해오는 일본 수군함대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1592년 7월 8일, 통영의 한산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단다.
그리고 그해 9월 1일, 부산포까지 진격하여 부산포해전을 통해 부산포에 포격을 하는
한편, 왜 전함 1백척 이상을 격침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어.
그래서 일본에서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 명을 내려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지하고 대신에 일본이 점령한 거제부터 부산에 이르는 여러 포구에 왜성을 쌓고
해안에서 포격으로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저지하도록 명을 내렸지.
통영 한산도가는 길에 본 견내량 방량(거제대교) 바다
조선수군은 이때에 전라좌수사인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고 지휘부를 통영 한산도에 두어 일본 수군의 서진을 저지했단다.
자연스럽게 견내량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군사분계선이 되어 끝없이 대치를
하게 되었지.
조선 수군은 강력한 전함과 화포를 바탕으로 일본 수군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일본 수군 함대는 조선 수군 몇배 이상의 전함을 보유해서..수적 우위에 있었고,
거제부터 부산에 이르는 해안을 점령해서 성을 쌓아 주둔하고 있으므로 좁은 물길을
따라 진격하면 우리의 공격로 등 움직임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또 해안에서 포격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제공격으로 견내량을 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단다.
반대로 일본은 몇배에 달하는 함대를 가졌지만 강력한 조선함대가 좁은 물목을 틀어
막고 있으니 더 넘어올 수 없었던 것이지. 팽팽한 힘의 균형!
이때는 이 선을 조급하게 넘는 자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단다. 특히 그것은.. 일본보다 우리에게 더 치명적인 것이었어.
칠천량 해역
그런데 견내량의 팽팽한 힘의 균형에 의한 대치상황은 조선에 의해 깨지게 되었단다.
전장의 사정에 어두워 아는 것도 없는 선조와 조정대신들이, 조선 수군함대를 이끌고
부산을 공격해서 점령하려는 현실에 맞지않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 부당한 명을 받들지 않고, 그 부당함을 간했지만, 옳은 소리를
제대로 듣는 이 없었고, 일본은 일본대로 이런 상황을 알고 반간계를 펼쳤지.
일본의 반간계에 놀아난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을 해임하고 대신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부산으로 진격하게 했어.
원균이 대책없이 그냥 함대를 몰아 견내량을 넘어섰고, 일본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최악의 전장으로 몰아갔고, 탈진하여 퇴각할 때마다 매복과 기습공격, 마지막엔 좁은
물목인 거제의 칠천량에서 야간기습과 포위공격을 당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제독, 충청수사 최호 제독 전사..
조방장 배흥립 제독의 부상과 실종, 그리고 조방장 김완 제독이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고..한순간에 2백척 가까운 거의 2만에 달하는 조선 수군이 전멸하였단다.
그토록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염려하던 일이 이렇게 현실화되었지.
그날이 1597년 7월 16일, 이 해전은 칠천량 해전이었다
그렇게 조선 수군이 전멸하고 일본 수군은 거침없이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의 조선 수군
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을 접수했어. 그렇게 우린 하룻밤에 남해의 제해권을 잃고
우리의 남해부터 서해안까지 일본 수군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단다.
칠천량에서의 패전을 접하고서야 선조와 조선 조정은 실책을 깨달았지만, 이미 참혹한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지. 또다시 마음놓고 바다를 건너온 14만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휩쓸고 전라도까지 넘었단다. 전세는 때때로 악화되고 있었지..
이때에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복직했단다.
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가옥에서..그때 전해진 선조의 교서엔..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하여 오늘날의 참담한 일을 당했으니..내 무슨 할말이 있으리오..
그렇게 적혀있더군. 언제는 죽이려 들더니..위기 상황이 되니 그래도 의지할데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 밖에 없었나봐.
선조..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철면피도 그런 철면피가 없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그래도 담담히 그 소임을 받아들였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서. 그렇게 흩어졌던 장수들이 하나 둘 모이고 또, 장정들이 모여들어 조금씩
수군을 재건했단다.
그러나 시간은 촉박했고, 수습한 수군 전함은 겨우 13척이었어.
한줌의 수군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선조가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 했지만,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열 두척의 전함이 있으니
내 몸이 살아있는한 절대 적은 우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의 뜻을 전하고
결의를 굳혔어.
명량 (해남 전라우수영지에서 진도 방향으로 본 풍경)
그리고 운명의 그 날, 1597년 9월 16일..명량, 울돌목에서 겨우 13척의 전함으로 적선
30여척을 격파하고, 130척 이상의 일본 수군함대를 물리치는 기적을 일으켰지.
우리는 이 전투를 명량대첩이라 부른다.
만약..이 전투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력의 열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더라면,
우리 조선 수군이 그곳에서 전멸했더라면, 일본 수군은 서해를 지나 바로 우리 서울을
공략하고..조선왕조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었을 거야.
충무공 이순신 제독도 이날의 승리를 천운이라 했었단다. 하늘의 뜻, 천운이 실제로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천운을 현실로 만든 것은 오로지..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그와 함께했던 우리 조선 수군의 의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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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결정적인 장소는 1598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남해와 하동 금남면 사이의 좁은 물길 노량과 남해의 관음포 일대였다.
그곳에서 7년 조일전쟁을 마무리하는 최후의 대해전이 펼쳐졌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7년 조일전쟁을 통하여 23번의 해전을 치르고, 단 한번의 패전도
없었다. 그동안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전쟁 스타일을 보면, 그는 상당히 주도면밀한
지휘관으로 승전을 위한 모든 요소를 갖춰 놓고 싸워 반드시 승리했는데..
예외적인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명량과 노량해전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빠르게 조선 수군을 재건했고, 명나라 수군과 연합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전력이 일본에 비해 열세였고, 순천과 사천에서 양면의 일본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악조건이었지.
노량 (하동 금남면 구노량)
게다가 좁고 긴 물목에서 넓게 퍼지는 그 해역에서의 전투는 접근전이 불가피해.
조선 수군은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펼쳐 승리해왔는데 그 장점이 없어지는 것이었단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런 전쟁을 안하는게 맞았어.
하지만 노량해전은 절대 일본을 온전히 보낼 수 없다, 오랜 전쟁을 여기서 확실히
끝 맺는다는는 그분의 강한 의지가 이런 악조건의 전투를 하게 만들었지.
그 악조건을 딛고 조명수군 연합함대는 대승을 거두었단다.
하지만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수많은 우리 조선군 장수들의 전사, 유래없이 큰 희생을
치뤘단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 존영(한산도 충무사)
아들아, 견내량, 명량, 노량..이 좁은 물목은 7년 조일전쟁 동안 우리와 일본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던 곳일까.
우리는 이 좁은 물목을 틀어막아 지켜야 했고, 일본은 이 좁은 물목을 넘어서야 했지.
그건 운명과도 같았어.
이런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찾고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딱한 일이겠느냐. 다음에 이곳을 찾게 되면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거라.
그리고 그 날의 결정적인 순간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고 그 날을 온전히 마음으로
느껴라. 그 날, 우리 선인들의 피와 눈물을 기억하거라.
그렇게 알고나면, 후에 보이는 것은 예전과는 크게 다를 것이며,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넌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될 것이다.
----------글쓴이: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