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수정다키니의 예언을 듣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일요시장으로 나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하다.
그 힘이 이끄는 대로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겨 놓으니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귀퉁이 후미진 곳에 이른다.
아무도 없다. 순간 온 몸이 수정으로 이루어진 다키니(Dakini, 티벳밀교에 나오는 수호여신)가 홀연히 나타난다.
얼핏 보아 17, 8세 소녀의 얼굴과 몸매인데, 이마 가운데 눈이 하나 더 달려있고 기괴한 미소를 띤 채 나를 주시하고 있다.
오른 손엔 도끼날(카트방가, khatvanga,鉞刀)를 들었고 왼손엔 붉은 피가 가득 들어 넘칠 것 같은 해골바가지(카팔라, kapala)를 들고 있다. 온 몸이 투명한 나체에 마른 해골을 꽃목걸이처럼 엮어서 목에 걸었고 오른 발은 구부리고 왼 발은 쭉 편 채 서있다.
‘너는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이심전심의 텔레파시로 의사가 전달된다.
‘훈자에 들렀다가 우디야나에 가려고 합니다.’
‘너는 우디야냐에 들어갈 수 없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인간에게 봉쇄되었다.
네가 카일라스를 순례한 공덕이 있기에 지금 나의 젖가슴을 찢어서 우디야나를 보여주겠다.’ 그러면서 오른 손에든 도끼날로 자기 젖가슴 중앙부위를 쩍 가른다. 두 손으로 그 갈라진 부위를 잡아 좌우로 힘껏 잡아당기니 놀랍게도 거기에서 찬란한 빛이 비쳐 나오면서 우디야나 왕국이 눈앞에 환하게 열린다.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 보듯 우디야나왕국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본다. 아, 넓고도 푸른 호수, 다나코샤(Danakhosha)호수다! 큰 연꽃위에 앉아 계신 분은 파드마삼바바 존자! 파드마삼바바 존자의 부릅뜬 눈에서 쏘아져 나온 안광이 내 눈에 닿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본래의 가슴을 회복한 수정다키니는 ‘이히히히이’ 웃으면서 내 앞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서있다.
다키니가 말한다.
'너는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리고 동쪽으로 가라. 라피스 라줄리의 나라에서 너의 소울메이트(Soul mate)를 만날 것이다.' 그리곤 연기처럼 획 사라진다. 꿈을 깬 듯 뒤돌아보니 양 손에 말 여물통을 든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나는 휘적휘적 걸어서 근처 주막집에 들러 라씨(요구르트) 한 잔을 시켜 놓고 방금 일어났던 사건을 되씹어 본다.
‘카라반을 따라갈 것인가, 다키니가 예언한 대로 동쪽으로 방향을 돌릴 것인가?’
‘투기꾼은 주사위를 던져 먼저 나온 숫자를 취하는 법. 일단 카라반을 따라가자. 그리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자.’

24. 타쉬쿠르간(Tashikurgan)에서 밤을 새다
드디어 대상과 합류하여 길을 떠나다. 핫산을 나의 통역사로 데리고 간다. 핫산은 전날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왔다.
핫산에게는 이번 카라반이 처녀 출정인 셈이다. 웃소르와 내가 축하해준다. 카라반의 선두와 후미에는 말 탄 호위무사들이 사방을 주시하면서 호위해가고 본 대열은 중간에 선다. 노예들은 짐을 잔뜩 실은 낙타의 고삐를 잡고 걸어가거나 타고가고 말을 탄 대원들은 행렬을 지키면서 서로 긴밀한 접촉을 유지한 채 간다. 호위무사들은 자기네들 끼리 통하는 신호체계가 있다. 피리와 호각을 불어서 출발하거나 멈추거나 행진속도를 조정한다.
카쉬가르를 출발한 카라반은 하루가 지나 타쉬쿠르간 호숫가에서 여장을 풀고 밤을 보낸다.
‘핫산, 네가 믿는 신이 있니?’
‘아니, 없어요. 그러나 쉬는 날이면 카쉬가르 시장에 계시는 살라만 현자(Salaman the Wise)를 가끔 찾아가요.
그분의 좁은 방에는 여러 종교의 성전으로 가득 차 있어요. 살라만은 허연 구렛나루 수염을 기른 노인이죠. 향신료를 파는 점포를 해서 먹고 살아요.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냥 항상 그곳에 계셔요. 사람들이 찾아와 무엇을 물어보면 경우에 맞는 말을 몇 마디 해줄 뿐이죠. 그러면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해진다고들 해요.
그래서 ‘살라만 현자’라고 하죠.’
‘그분이 네게 주신 가르침 한 가지만 들려다오.’
‘한 번은 제가 물었어요. 지금 이 도시엔 여러 종교가 들어와 제 각기 자기네들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저는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혼돈스러워요. 진리가 하나라면 왜 이렇게 많은 종교가 갈라져 있죠? 선생님.’
살라만 현자가 말하길 ‘방은 하나라도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다. 방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가깝고 편리한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어떤 문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는 사람은 그 방에 들어가고자 하는 절실함이 아직 부족하다. 그런 사람은 바깥으로 더 돌아다녀야 봐야한다. 방황의 끝은 진리의 방으로 들어와 쉬는 것이라는 깨침이 올 때까지.’
‘핫산, 아주 족집게 같은 말씀이구나. 방황의 끝이라, 나의 순례의 끝은 어디일까?’
사막의 아들은 타쉬쿠르간의 이역만리 하늘 밑에서 깜박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25. 쿤제라브(Khunjerab)에 흐르는 피
타쉬쿠르간을 출발한 카라반이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목에 이르렀다. 여기는 해발고도 4500 미터 이상.
공기가 희박하여 그냥 서있기도 불편하다. 말을 타고 주위를 휘둘러본다. 앞에는 나무 하나 없는 첩첩산맥 사이로 외줄기 길이 아스라이 나있는 삭막한 풍경. 뒤로는 다시 돌아가기 힘든 타쉬쿠르간 고갯길. 오른쪽으로는 불타다 남은 것 같은 자갈밭 벌판이 죽 펼쳐져나가다 그 끝은 산기슭에 닿아있다. 왼쪽으로는 험난한 바위언덕이 치솟아 있고. 어느 한군데라도 눈길을 둘만한 곳이 없어.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사람 같으면 풍경자체가 압도적이라 ‘지옥의 아가리에 들어왔구나!’라면서 두려워하겠지. 호위대장이 호각을 불어 잠시 휴식할 것을 신호한다. 더러는 낙타나 말에서 내려 볼일 보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면서 두리번거릴 때, 돌연 ‘다다다다다’하는 말발굽 소리가 땅을 진동하며 먼지구름이 벌판 끝에서 ‘화악’ 일어난다. 대원들은 놀라서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호위대장이 목청 높여 외친다. ‘도적떼다, 전원 수비태세로!’ 우리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지? 아마도 정보를 빠삭하게 알고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은데. 대원중에 몇 명이 도적떼의 간자(첩자)였던가?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효하면서 달려오는 도적떼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온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오른쪽 옆에서도 삼면에서 진격해온다. 달려오는 품새가 숙련된 전투병이다. 시시한 도적이 아니라 직업적인 도적이다.
거창한 규모에 조직적인 전술을 구사하는 게 정규군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도적떼는 300명 정도인 것 같고 완전 무장했으며, 심지어 한번에 100여발을 날릴 수 있는 자동화된 석궁도 갖고 있다. 호위무사들은 사력을 다해 활을 쏘기도 하고 말을 타고 나가 맞붙기도 한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낙타와 말들은 배후에 진을 치고 우루루 한데 모여 있다.
짐승들 가운데 구법승과 나, 핫산과 만주르 대장, 시종 몇몇이 은신한 채 망을 본다. 노예들은 낙타와 말 앞에 서서 수비대형을 유지한 채 호위무사의 지휘에 따르고 있다. 한꺼번에 백발 씩 날아오는 화살에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말 탄 도적떼들이 사방에서 긴 쇠갈고리를 던져 무사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닌다. 호위대는 거의 무력화되었다. 도적들은 카라반의 저항을 완전히 평정하고 둘러서서 장물을 챙기려 한다. 노예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내려놓았던 짐꾸러미를 낙타와 말에다 싣고 도적떼에게 끌려간다. 만주대장은 혼비백산하여 겨우 종자3명을 데리고 가파른 산길을 타고 어디론가 도망갔나 보다. 나와 핫산, 천축 구법승 3명은 생포되었다. 도적떼가 우리 앞에 선다.
그들은 이마에서 콧잔등까지 검은 칠을 한 까닭에 두 눈이 번들번들 거린다.
핫산이 보더니 소스라치며 ‘악, 검은 늑대들(Black Wolves)! 악명 높은 도적떼! 나라에서도 갋을 수 없는 놈들이. 카라반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죠.’ 그들은 몸값을 내 놓으라고 한다. 구법승은 품안에서 노잣돈으로 쓸 황금주머니를 내어놓는다.
나도 품속에 간직한 황금을 내어놓으려다가, 번개에 콩 구어 먹듯 지혜가 반짝 떠오른다.
사막의 왕의 힘을 빌리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잖아.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나 생명과 맞바꿀만한 선물이 있을 때 쓰라고 했잖아. 목에 걸고 있던 예세 노르부를 풀어 그들의 면전에 던졌다.
예세 노르부를 꺼내자마자 사막의 정령이 검은 회오리바람(黑暴風)을 실어와 도적떼를 쓸어가 버린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을 다 날려버릴 듯한 일진광풍이 도적들의 몸뚱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전원몰살. 땅위에는 피가 흥건히 적셔 있다. 그 때 피 묻은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땅위에 남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 그래서 이 길목이 ‘쿤제라브(Khunjerab)-피 묻은 고갯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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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쿤제라브의 어원: 쿤(Khun, 고향, 집)+제라브(jerab, 샘물, 떨어지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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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하니 텅 빈 넓은 길 마당에 검은 망토에 휩싸인 거대한 존재가 우뚝 선다. 거목이 돌연히 땅에서 솟아오른 듯하다.
사막의 왕이다!
사막의 왕은 포효하듯이 외친다.
달과 해가 운행하여
사방을 비추고 빛나는 한
천 개나 되는 작은 나라들, 그곳까지도
나의 지배력은 미칠 것이다.
나는 몸과 마음에 대해 최고의 지배력을 가졌나니.
몸을 극히 미세하고 가볍게 만들 때는 비단 보다 고운 모래먼지가 되고,
몸을 아주 크게 만들 때는 거대한 모래 산이 되기도 한다.
내 몸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어 원하는 곳에 즉시 나타날 수 있고
건조한 열 폭풍과 모래폭풍(沙塵暴)을 몰아친다. 초원을 초토화시키고 번성한 도시도 날려버려 폐허로 만든다.
내가 밟고 지나는 땅에서 물은 말라버리고 건조해져 내 몸으로 합해져버리나니.
나 사막의 왕, 불모의 악령이여. 내 몸은 내가 원하는 대로이다.
이 핏자국은 사막의 왕이 다녀간 흔적이다. 나는 너를 지킨다. 나의 아들이여. 계속 너의 길을 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