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걸음도 정하여 붙드시는 하나님(2290.2025.2.2)
시37:23-26
할렐루야
주는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새해에 계획을 세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새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잠16:9절에 보면 우리들이 마음으로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계획을 세울때에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2025년도에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2025년의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시작하자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시37편은 우리에게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성실히 살 것을 우리에게 주문합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속상해 하지도 말고,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시샘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모든 일은 올바른 데로 돌아가며, 모든 악은 뿌리째 뽑힐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붙들어 주시고, 공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기에 악인들의 자손은 끊길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대대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이 시인의 노래처럼 되는 것 같지 않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의인의 팔은 부러지는데, 악인의 길은 평탄하며, 의인들이 구걸하는데, 악인들이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 보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럴 때 우리는 어쩌면 좋을까요? ‘에라! 나도 모르겠다’라며 똑같이 악을 저질러야 합니까? 아니면 한숨만 길게 내쉬며 털썩 주저앉아 버릴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악에게 지지 않고,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고난에 좌절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럴 때야말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실수하고 유한하기 때문에 언제든 비틀거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니 혹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어야 합니다. 어쩌다 비틀거릴 수는 있지만 영원히 주저 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선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 세상의 악이 우리를 무너뜨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찬송:주와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요즘에 사는 것이 힘드시다고들 합니다.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경험하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새삼 우리 삶에 버거운 일들이 닥치면 마치 처음 어려움을 겪어보는 것처럼 어쩔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삶의 어려움은 언제나 낯설게 다가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이 올 때 오랜 친구처럼 맞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난은 항상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오늘 시편을 노래한 다윗은 어느 누구보다 다양한 고난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찬송을 지어서 고난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고난을 겪을 때면 항상 대면하는 문제는 ‘왜 고난은 공평하지 못한가?’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질문은 하나님을 향하여 던져지는 질문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 왜 불의한 자들은 형통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런 고난이 닥쳐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나의 인생에 찾아온 고난인데 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요? 간혹 자기 인생에 찾아온 고난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자기 인생에 찾아온 고난인데 하나님께 질문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인생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인생 자기 혼자서 다 책임질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기에 인생들은 그 순간 누군가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 책임질 수 없어 우리는 누군가를 찾고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는 연약함이 다 있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가까운 어떤 사람이 자기 힘들다고 괜히 나에게 투덜거린다면 ‘그 사람이 지금 많이 힘들어 버틸 힘이 없구나’라고 생각하시고 좀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구박하면 그 사람 정말 버티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이제 좀 버틸 힘이 생겨서 정신이 좀 들게 되면 그때는 옆에서 버팀이 되어주었던 나에게 얼마나 고마운지를 그때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러쿵저러쿵 하지않고 가만이 옆에 있어만 줘도 힘이 됩니다. 나중에 다 들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이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 동안 가까웠던 그 사람만은 내가 기대어도 괜찮겠다 생각해서 기대었더니 냉정하게 뿌리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전달되는 실망감과 미움은 평생 남게 됩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정말 힘이 되어줄 것만 같아서 어렵사리 의지해 보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냉정히 모른 척하는지 너무 서운하여 낙심이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마음 같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고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렵고 힘든 분이 기대걸랑 냉정하게 하지말고 힘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는 고난의 사람 욥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고난을 몸소 겪었던 사람입니다. 욥에게 극심한 고난이 닥쳐왔을 때 마침 욥의 곁에는 절친한 친구들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친구들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래서 그 친구들이 고난당하는 욥을 위해서 매일 번갈아 가면서 욥을 찾아와서 욥을 위한다고 토론을 벌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친구들이 와서 하는 말로 인하여 점점 더 상처가 깊어가고 지쳐가게 됩니다. 결국은 하님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욥42:7절‘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의 친구들은 분명 친구를 위로한다고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되고 더 큰 부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욥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이 경험했던 그 인생의 외로움과 이해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자신이 헤쳐 나온 비결을 찬송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낙심한 많은 영혼들이 이 시편 37편의 찬송을 부르며 그 영혼들이 어떻게 힘을 얻어야 할지 묵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찬송 시를 나누면서 우리 삶 가운데 찾아오는 어려움들 속에서 다윗처럼 꼭 믿음으로 극복하고 다시 밝은 인생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믿는 성도들의 걸음걸이도 정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입은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집에서 어린아이를 키워본 모든 어른들의 공통적인 기쁨과 감격의 순간은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서 아마 처음 걸음마를 떼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는 참 신기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저게 눈이 달려있고 코도 달려있고 저 조그만 손가락 다섯 개가 달려있고 그런데 아이가 이제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어다니고 뒤집고 하다가 어느 날 서서 뒤뚱거리면서 한 걸음을 뗄 때, 부모는 너무 기뻐서 박수치면서 ‘잘한다. 잘한다’뒤뚱거리는 아이를 손을 잡아주면서 그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 그 부모님의 기쁨은 말할 수 없고 그것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던 것이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죄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인생, 상처투성이의 인생, 실패의 연속이었던 인생을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 되게 만들어주시고 믿음이 자라나서 겨우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도 힘든 그 때에 손을 잡고 기뻐하시며 발걸음을 인도해주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을 그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얼마나 주님의 은혜 감사한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아가는 걸어가면서 흔들리는 순간에도 엄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오늘 예배드리러 오는 발거음도 하나님이 정하신줄 믿습니다. 우리의 걸음걸이도 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겪을지라도 온전히 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손으로 그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붙들다’라는 동사는 언제나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기대거나 의지 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우리를 격려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기꺼이 치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3절에서‘정하신다’는‘명하신다, 세우신다, 적절하게 하신다, 지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삶의 여정은 하나님의 안내와 통제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의인의 인생 여정을 계속해서 지도, 인도하시며 곁길로 나가려고 할 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통제하기도 하십니다. ‘기뻐하시나니’는 원어 뜻은 ‘유지하다, 보존하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의인의 여정에 대한 계속된 관심과 지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움으로 24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는 말씀처럼 인도되고 있음을 믿고 그것조차 이기고 다시 일어나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성령님과 함께 걷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가장 심각한 것은 길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길이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길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닥쳐온 고난도 심각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어디로 가야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곁에서 함께 가자고 길을 안내해 준다면 이처럼 고마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다윗은 바로 그 순간 다윗을 위하여 그 길을 아시고 그 걸음을 정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노라고 노래합니다.
본문 23절‘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요즘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결정장애’ 혹은 ‘결정장애증후군’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때로는 할 수 있는 것은 많은데 딱히 무엇을 해야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마다 결정장애가 있습니다. 이것을 해야 할지 저것을 해야 할지, 이쪽으로 가야할지 저쪽으로 가야할지, 하는 것이 좋은지 하지 않는 것이 좋은지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주 쉽고 간단한 것마저도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식사를 하는데 메뉴를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그것을 결정하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 결정권을 넘겨줍니다. 어떤 때는 밥을 사 주는 것도 고맙지만 그것보다 더 고마운 것은 메뉴까지 정해주면 훨씬 더 고마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님 뭐 드실래요 하면 그 사람 생각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서 뭐 먹겠다고 결정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000 먹으러 갑시다라고 정해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그냥 따라가서 축복기도 해주고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니까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결정하라고 하면 참 힘듭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모두가 다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내가 결정한 것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두렵고 불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른 사람이 결정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과연 결정을 항상 잘하면서 살았을까요? 다윗은 항상 결정을 스스로 잘해서 그의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도 우리처럼 항상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연약한 인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어떻게 그의 인생에 숱한 미로와 같은 삶이었음에도 끝까지 잘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비밀이 바로 오늘 본문 다윗의 고백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걸음을 정해주셨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길을 걸어갔고, 그런 다윗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은 결코 세상적으로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걸어갈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니라고 무심코 지나치면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다른 특별한 비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분별하고 그 길을 묵묵히 믿음으로 걸어갔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 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걸음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고, 그 걸음을 인도해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걸음을 정하시고 인도해주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 여쭙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 아는 길마저도 우리는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이 비록 고난이 있고, 때로는 길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가셔서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삶에 잘 당도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믿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길만 알려주시고 알아서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환난을 당합니다. 의인에게도 실패와 가난과 병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도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역경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다시금 붙들어 일으키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잘 보세요. 본문 24절‘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속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셨기에 그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동으로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셨기에 다윗은 황량한 광야에서 외롭지 않게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섰을 때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붙들어주셨기에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급소에 꽂히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정말 어디 몸을 숨길 곳이 없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서다윗을 붙들어주셨기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아꼈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했을 때는 다윗은 스스로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붙들어주셨기에 다윗은 버티어내고 다시 회복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만이 아니라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믿음으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도 걸음걸이도 정해주시지만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버틸 수가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환난의 한 가운데를 뚫고 나가 희망의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므로 오늘까지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엇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목회 여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결코 목회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손길이 저를 어루만져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손길이 저를 강하게 붙잡아주셔서 저는 부족함 투성임에도 주의 일을 여지껏 감당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상주에 와서도 어느 날 너무 힘들고 마음마저 지쳐서 성전에서 혼자 하나님 앞에 있었을때도 있었습니다. 기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가만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일방적으로 저에게 임하셨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덮여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꿈 속에서 네가 장차 받아야 할 면류관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힘을 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 충성할 힘을 얻어서 교회도 건축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가지 붙들어 주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이런 붙들어주시는 은혜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믿음으로 잘 걸어오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렇게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만 잡아도 살 것 같아서 그런 말이 생긴 것입니다. 지푸라기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아시죠? 그런데 너무너무 힘들 때는 그것이라도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느끼게 합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신다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팔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믿으시고 힘과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혼자인 것 같아도, 때로는 넘어질 것만 같아도 그 순간에도 우리 성도님들 곁에서 사랑으로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기대했던 많은 것들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에도 여전히 그 손 내밀고 우리를 붙잡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믿음의 사람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하는 인생입니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해 넘어질 때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의 강한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며, 걸어갈 힘이 없어 쓰러질 때 안고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1:31). 우리 하나님은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일생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신 1:3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환난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위한 것으로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연단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 속에는 참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넘어지고 엎드러지게 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의 시 가운데 시편 23편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 묵상하면서 힘을 얻는 찬송시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아름답고 은혜가 넘치는 시편 23편 속에도 사실은 다윗이 험난한 인생의 골짜기를 걸어왔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23:4절‘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여기에 보면 다윗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비롯해서 모든 인생들은 이처럼 각자의 인생여정 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야 했던 경험들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늘 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만 걸어왔다고 하시는 분 혹시 계시나요?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절대 걸어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분 혹시 계시나요? 누구라도 인생여정 중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본 다윗이 오늘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본문 24절‘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다윗도 넘어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엎드러지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붙들어주셔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을 수 있었노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새삼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열심히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열심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착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에 힘입어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믿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기가 잘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드러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붙잡아주셔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주님과 걷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넘어져도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탕자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만약에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세상에서 성공을 해서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여
타락한 모습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이 많은 믿는 자들이 속아 넘어가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성공을 했느냐? 만신창이가 되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 은혜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포인트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다가 좀 넘어졌다고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열심히 살다가 좀 쓰러져도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다시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만 안 잊어버리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잡고 다시 일어서는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복음성가 부릅니다.---주님여 이손을 꼭잡고 가소서--
<복음성가: 주님여 이 손을>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우리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길을 명하시고 세우시며, 적절하게 지도하셔서 우리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도하는 길로 행할 때 선한 인생으로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 길을 계속 유지하고 보존하시려 지속적인 관심으로 안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곁길로 행하려고 할 때 간섭하사 통제하시기도 하시며 때로는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거나 불행에 내동댕이쳐질 때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위로하시고 손잡아 일으켜 세우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역경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종국적인 멸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우리를 건지시며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에벤에셀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를 지도하시는 길에 도우시는 은혜의 기쁨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