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중간에 깨지 않고 아침까지 곤히 잤다.
그래도 전기난로가 밤새 지켜준 덕분이다.
그는 내 믿음을 받지 못했지만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열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땡큐! 스토브. 오늘밤도 부탁한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훈자의 아침이다.
숨이 막히는 풍경이다.
훈자 강이 계곡을 반으로 쪼개면서 흐른다.
깊고 너른 계곡 사이로 헤집고 들어온 강이 물에 뜬 뱀처럼 몸을 사리며 흘러간다.
강은 다시 더 깊고 좁다란 협곡을 만들고 있다.
강이 갈라놓은 두 개의 마을은 각자 자기 산비탈을 등지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것을 보면 부다페스트는 너무 도회적이다.
강 너머 마을 산비탈이 만개한 살구꽃으로 불타고 있다.
저쪽 마을에서도 이쪽의 찬란한 봄을 살피고 있겠지.
문득 어제 저녁 식당 창가에서 보았던 ‘heartbreak’ 낙서가 가슴을 툭 치며 나온다.
아름다움이 다하면 비통으로 가는가?
가슴에 차오르던 기쁨이 순간 슬픔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런데 ‘heartbreak’는 그곳 한 곳에서만 본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종이에 써서 붙여놓기도 하고, 벽에 직접 써놓기도 했다.
왜들 다들 이러는 걸까? 젊은 연인들의 감성이었을까?
아니면 쓸쓸한 노년의 흔적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지금 훈자에게 상심한다.
정신을 수습하고 나는 독수리 둥지를 떠났다. 반드시 일출을 보겠다는 욕심 때문만은 아니다.
5분여 비탈을 오르니 부지런한 일행들이 벌써 꼭대기에 진을 치고 있다.
카메라를 받쳐두고 해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동쪽 방향은 하늘색만으로도 쉽게 분별이 되었다.
훈자는 사방 설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여행 고수를 자처하는 한 분이 파노라마 경관을 보여주는 주변의 산 이름들을 꿰기 시작한다.
“저기 라카포시 7,788미터, 다음 울타르 사르, 저 손가락 튀어나온 산은 핑크 레이디.”
“그 산은 레이디 핑거예요.”
무리 속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어느 분이 말참견을 한다.
나는 이의제기가 옳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저건 손가락 형상이다.
저건 분명 레이디 핑거 산이 맞다.
설왕설래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장흥의 며느리 바위를 떠올렸다.
국도 2호선 순천 가는 길 오른편에 장흥 억불산이 있다.
정상을 쳐다보면 바로 아래 엄지를 치켜세운 듯한 레이디 핑거와 비슷한 형태의 바위가 서있다.
이 며느리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으나 생략한다.
내가 아는 장흥 출신 시인은 그 바위를 또 남근에 비유했다.
그 역시 그럴듯한 비유이기는 하다.
한 사물을 두고 이처럼 지역마다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건 객실에서 보는 풍경과는 다르다.
나는 다른 높이 다른 각도로 새로운 훈자를 만나는 중이다.
자연 속에서 초자연적인 풍경을 만나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이 풍경이야말로 내 평생 마음에 각인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고쳐 생각했다. 장담할 일은 아니다.
너는 시간과 함께 나에게서 희미해져갈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나는 지금 낡고 약해져 있다.
그런데 오늘 일출은 틀렸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내일 아침도 있다.
나는 훌훌 털고 혼자 먼저 내려왔다.
언덕 입구에 내려서는데 안내판이 눈에 띈다.
여기 ‘도이카르 언덕은 훈자 지방 왕자의 개인소유지이니 출입을 금지하고,
어기면 의법 조치한다’는 경고판이다.
태양광 패널이 가득 널려있더니 1MW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란다. 아침 식사 8시 반까지는 아직 두 시간 여유가 있다.
여행하면서 이렇게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는 것도 드문 일이다.
오늘 일정도 가뿐하다.
가이드의 선심일 것이다.
선한 사람들이 사는 훈자에 스며들어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다.
독수리 둥지에서 이틀 연박을 한다. 훈자에 자연스럽게 흠뻑 젖어들 수 있는 시간이다.
9시 반에 호텔을 나서 알팃 포트로 갔다.
포트(Fort)라고는 하지만 훈자 왕국 당시의 왕의 거처였다.
민가 사이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넓은 초원이 나왔다.
숲을 이룬 나무들은 대부분 아주 수형이 빼어난 큰 나무들이었다.
살구꽃이 져서 길바닥을 하얗게 덮고 있어 발걸음 떼기가 조심스럽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웃 길기트 지방의 공주가 시집오면서
석공과 목수 등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왕궁을 지어 시집에 헌납했다.
그래서 길기트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도 했다.
돌과 나무와 흙으로 지은 소박한 건축물이다.
내부를 통해 지붕에 올라가니 훈자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들어가는 방향을 제외하고 세 방향이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다.
절벽 끝에 터를 잡은 이유는 방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팃 포트는 왕궁이자 요새였다.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다보이는 요새를 가리켰다.
포탈라 궁과 유사하다고 설명했지만 내 눈에는 전혀 아니었다.
버스가 오르지 못하는 오르막길을 걸어서 올랐다.
땀이 날 정도의 거리였다.
요새의 내외부가 거의 알핏 포트와 비슷했다.
통치자들의 사무실과 숙소는 전망이 훌륭한 맨 꼭대기 층의 남향과 서향이 교차하는 모서리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액자를 하나 발견했다.
청나라가 보낸 임명장인데 훈자지방의 통치자를 청나라의 대리인으로 겸직 발령을 내는 내용이었다.
지금 연대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시기가 어느 때이던 간에 청나라의 영향력이 훈자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 만하다.
또 하나, 당시 통치자가 사용했던 사무용 가구나 휴식용 의자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할법한 소박한 수준이었다.
나는 벌써 오전에만 화장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아침에 욕심냈던 살구 주스가 문제였다.
조심한다 하면서도 신선한 맛에 들려 그만 얼음처럼 차가운 주스를 마시고 말았다.
고질적인 과민성 대장염은 언제나 내 여행길의 큰 적이다.
오늘은 다행히 장거리 버스 이동이 없는 날이라 그나마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
기대를 잔뜩 했던 여행자의 거리는 실망이었다.
상점들도 변변치 않았고, 거리도 비좁고 지저분했다.
나는 벼르던 살구 씨 기름을 사려고 했다.
가이드가 다음 행선지인 스카르두에서 살 것을 권유했다.
오후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려던 계획도 취소했다.
몸 상태를 고려해서 차라리 호텔에서 빈둥거리는 편이 나을 듯해서였다.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
룸메이트는 미술 교사 출신이고, 현직 사진작가이시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독수리들이 먼지 나는 산비탈을 타고 날아서 둥지로 돌아오니 오후 2시 반이다.
우리 호텔은 레이디 핑거 봉우리 아래에 둥지를 틀고 있다.
호텔 마당에서 올려보아도 여전히 숙녀의 가느다랗고 길쭉한 손가락이다.
한가함을 견디지 못하는 일행 몇몇이 거기까지 트레킹을 도모한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강풍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마을 탐방 길에 나선다는 전갈이다.
몸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오늘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방에서 쉬기로 마음먹었다.
최정인은 혼자서 마을 아랫녘까지 걸어내려 갔다가 주민의 오토바이를 얻어 타고 올라왔다고 한다.
혼자 그 먼 곳까지 내려간 것도 그렇고, 또 어떻게 오토바이 뒷좌석을 얻어 탈 궁리를 했을까 싶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카스행 비행기에서 나와 같은 줄의 통로 측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가 창 측의 나와 중간에 낀 교장선생님 모두 꼼짝 않고 앉아있으므로
길을 내준다며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다녀오라고 권유했었다.
나는 그때 그를 슬쩍 지나치며 사십대로 보았었다.
젊은 여자가 혼자 이 먼 여행을 왔네 하며 속으로 신기해 했는데 알고 보니 작년에 환갑을 지났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동안이다.
하긴 안면을 자주 가리고 있었으니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도 없었다.
발코니로 내다보이는 훈자 아랫마을은 나무들이 바람에 출렁이고,
골목은 살구꽃 비에 젖고 있다.
설산의 연봉들이 구름으로 덮여 있어 훈자마저 쓸쓸하다.
오늘 일몰 관측도 구름 때문에 포기해야할 듯하다.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창밖은 어둠이 내리고 있다. 어둠 밖에는 훈자의 불빛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바람이 지붕을 스치며 소리를 낸다.
정중한 음식 서빙과 식기들 부딪치는 소리.
나는 내 앞에 놓인 음식과 대장과의 상관관계를 저울질했다.
내일은 버스 타는 날이다.
어제는 파키스탄 도착 첫날인지라 몰래 들여온 백주를 대놓고 돌리더니
오늘은 주당들끼리 속닥거리며 마신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하고 넘어가려는데 슬그머니 욕구가 솟구친다.
‘어어, 그러지 말자. 훈자는 훈자. 너는 너.’
나는 나의 욕구를 토닥토닥 다독여 잠재웠다. 방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룸메이트의 엉덩이가 염려된다.
연고를 바르려고 보니 넘어질 때 땅에 찧은 부위가 상당히 부어 있다.
통증이 느껴진다고 해서 우선 내가 가져온 근육이완제를 복용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목이 칼칼하다.
이럴 때는 아스피린이 최고다고 친구 이상종이 말해줬다.
침대에 들기 전에 코감기 목감기 알약과 아스피린을 삼켰다.
천장 등이 몇 번 깜빡이더니 꺼지고 말았다. 정전이다.
방금 전 식당에서도 두 번 정전이 있었다.
전력사정이 나쁜 것은 어제 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을 보면 중국은 최소한 정전은 없었다.
불을 끄면 정전인줄 모르겠지. 빨리 잠자리에 들 핑계가 생겼다.
지금 여기서는 달리 할 일도 없다.
그러고 보니 ‘기찻길 옆 인구론’이 생각난다.
어제와 같은 요령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참 어제 밤에 지진이 있었다고 했지.
나도 모르게 지나가긴 했지만.
내일 아침에는 샤워 온수가 나와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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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6.05.13 19:20
첫댓글 여행기 읽으며 10년전 발걸음 추억에
빠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파키스탄 사람들 선한
눈망울도 그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