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저우 북서쪽, 간쑤성
징타이의 국경을 더듬어 갈 때,
대지는 문득 숨을 고르며 거대한 태고의 가면을 벗어 보인다.
황하의 거친 흙빛 물결이 빚어낸 깎아지른 석림(石林).
그곳은 단순히 바람과 물이 스쳐 간 흔적이 아니라,
수억 년의 시간과 인간의 애환이 켜켜이 층을 이룬 거대한 지각(地殼)의 서사시였다.
억년 전, 이곳은 거대한 호수였다.
신생대 제3기의 붉은 사암과 이암이 호수 바닥에 차곡차곡 쌓였고,
뒤이어 일어난 격렬한 히말라야 조산운동이 대지를 하늘 높이 밀어 올렸다.
오랜 세월 동안 대지의 가슴을 가르고 흐른 황하는
단단함과 무름의 층을 정교하게 골라내며 하방침식과 풍화를 거듭했다.
그렇게 물은 거대한 조각도가 되어 수백 미터에 이르는 첨탑과 병풍,
거대한 회색빛 요새 같은 바위 기둥들을 세워 놓았다.
지질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황하석림은 물과 바위가 벌인
수백만 년의 침식과 융기의 경이로운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이 척박하고 장엄한 미궁은 단지 지질학의 교과서에만 머물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이 회랑은 흉노와 한족,
유목과 정주가 칼끝을 겨누며 길항하던 치열한 최전선이었다.
한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하서사군을 설치하며
이 길을 중원의 판도로 끌어들인 이래,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隊商)들과 군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이 붉은 협곡 사이에 겹겹이 쌓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륙을 달리던 칭기즈 칸의 정예 기마부대 또한 서역을 정벌하고 초원을 호령하는 도중
이 험준한 석림 일대에 주둔하여 말을 먹이고 진을 쳤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위 협곡 사이로 스치는 소리는
마치 옛 유목 제국의 말발굽 소리나 쓸쓸한 가락의 변방요(邊方謠)처럼 귀가를 맴돈다.
인간의 발길이 닿기 전, 이곳은 이미 신화와 전설이 깃든 영험한 땅이었다.
옛사람들은 기이하게 솟구친 바위 기둥들을 보며 신들이 세운 거대한 성채라 믿었다.
천상의 신선들이 지상의 질서를 잡기 위해 세워둔 돌장승들이라 하기도 하고,
억울하게 사라진 영웅들의 혼이 바위로 굳어져 대지를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협곡의 그늘마다 구전처럼 스며 있다.
이 거대한 자연의 미로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시간이 비껴간 듯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오아시스 마을, 용만촌(龍灣村)이 숨겨져 있다.
황하의 물줄기가 사방을 거칠게 휘감아 도는 이 고립된 반도 모양의 대지 위에서,
용만촌은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독자적인 생태를 꾸려왔다.
황토를 이겨 쌓아 올린 흙담 가득 토속적인 온기가 배어 있고,
골목마다 늙은 배나무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며 마을의 세월을 대변한다.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황하의 범람과 척박한 사막의 바람을 견디며,
좁은 밭에 대추와 배를 심고 뗏목을 띄워 생계를 이어왔다.
이 아늑하고 평화로운 돌담길을 지나야 비로소 본격적인 협곡의 입구가 열리기에,
용만촌은 석림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그 거친 대자연에 안긴 유일한 인간의 안식처였다.
하지만 황하석림이 세상에 알려지고 거대한 관광지로 변모하면서,
용만촌의 평화로운 풍경에도 격변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과거 가난했던 오아시스 농촌은 석림을 찾는 수많은 여행객들로 인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때는 마을 어르신들이 몰던 당나귀 마차는 협곡을 누비는 가장 인기 있는 이동 수단이 되었고,
집집마다 소박한 문을 열어 여행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와 잠자리를 내어주는 민박촌으로 탈바꿈했다.
외지에서 자본이 유입되고 관광 열풍이 불면서 마을의 경제적 풍경은 눈부시게 달라졌지만,
그 소란스러운 발전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삶의 리듬이 흔들리는 씁쓸한 상처 또한 깊게 파여갔다.
현대에 이르러 이 관광지의 영화 뒤에는 더욱 가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황하 상하류의 대규모 수자원 개발과 수력 발전 프로젝트,
그리고 저수 계획이 추진되면서 황하석림 일대와 더불어 그 안에 삶의 뿌리를 박고 살아가던
용만촌 전체가 수몰될 운명에 처해 있다.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며 반짝 빛났던 이 마을은,
이제 개발의 거대한 논리 앞에서 대대로 일구어 온 터전과
공동체의 역사 전체를 통째로 물밑에 내어주고 강제 이주를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물이 만들어낸 위대한 조각품과 그 품에서 싹튼 오아시스 마을이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둔 물에 의해 지워져 간다는 사실은,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새삼 깨닫게 하며 가슴 한켠을 아리게 만든다.
그 수몰의 운명을 앞둔 황하의 누런 물결 위를 건너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 있다.
바로 양가죽을 통째로 벗겨 바람을 불넣고 엮어 만든 양가죽 뗏목(皮筏子)이다.
둥글게 부풀린 수십 개의 양가죽 부레 위에 굵은 나무 엮음을 얹은 이 원시적인 배는,
수천 년 동안 황하의 거친 격류를 건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십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품에 안겨 건넜던 그 양가죽 뗏목은,
이제 모터보트의 굉음이 요란한 현대의 강가에서 한켠에 쓸쓸히 전시된 유물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흘러온 유라시아의 진짜 시간을 증언하던 그 옛 배의 모습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실정회동
첫댓글 모든 세상의 흐름이 바람에 휘날리듯 없는듯 있는듯 해야하지만 개발이라는 변화는 언젠가는 자연앞에 굴복하겠지요.. 마실 정회동님 글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