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예루살렘에서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행해진 600여만명의 유대인 살상에 관계한 일로 법정에 섰다. 이때 아이히만은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를 통해 그 일이 오직 “주어진 일을 잘 처리하려는 것”, 즉 근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것에서 나왔을 뿐임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그 자신 개인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악의가 전혀 없으며, 집단학살은커녕 사람 하나 살해할 배짱이 없다고도 증언했다.
요컨대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의도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과정에서 ‘그냥 일어났던’ 부수적 피해일 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자신은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자기에 대한 살인죄 기소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악의 평범성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주간 교양잡지 ‘뉴요커’의 청탁으로 이 재판을 취재했다. 그녀는 2년 후 출간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우리가 아이히만의 증언을 듣고 충격을 받으며 받아들이기 몹시 괴로워하는 이유는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사악한 의도가 있다는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라고도 주장했다. 이 말은 괴물과 악마들이 수백만 명의 학살을 설계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충격적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그렇다. 악의 평범성,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말이다. ‘유동하는 공포’를 쓴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같은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악인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어떤가? 당신도 이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한다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질문은 조금 수정되어야 한다.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신은 왜 우리 모두를 악인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난 회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그것은 오해다. 신은 모든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디모데전서 4:4)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의문은 당연히 이렇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세상에 만연하는 악, 곧 악의 평범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 생각에는 이것이 이 회장의 질문이 뜻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살펴보자. 악이란 무엇인가 고대인들은 흔히 신을 빛과 어둠, 온기와 냉기, 불과 물, 행운과 불운, 선과 악 같은 이원적 힘의 근거로 인식했다. 또는 다양한 개개의 현상에 모두 신적 힘을 부여해 다원적으로 파악했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이고, 후자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그리스 신화다. 예컨대 조로아스터교에는 두 신이 있다. ‘아우라 마즈다’는 빛과 선의 신이고, 이에 대항하는 ‘앙그로 마이뉴’는 어둠과 악의 신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의 신에게 충실하고 악의 신과 싸워야 하는데, 최후의 심판 때에 이에 상응하는 상벌을 받는다. 이원적이든 다원적이든, 이 같은 다신론적 구조 안에서는 악이 선과 대등하게 대립하는 하나의 실체이고 악마 또는 악인은 그것에 사로잡혀 봉사하는 개체들이다. 때문에 고대인들은 고통, 불행, 재앙, 질병 등 자기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악한 일들의 뒤에 악의 신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마냥 두려워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은 단 하나뿐인 유일신이다. 기독교가 형성되기 약 1300년 전에 이미 유대인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4~5)라고 외쳤다. 물론 모세가 선포한 신이 후일 기독교 사상가들이 생각한 선과 악에 관한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말이 후일 유일신 사상을 교리로 정립하려 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작업에 초석이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질송(1884~1978)은 모세의 선포에 대해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이었으나 중대한 철학적 변혁의 씨를 내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 변혁의 씨앗을 싹트게 한 사람이 플라톤이고, 그것을 꽃피워 선악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정립한 이가 아우구스티누스다. 플라톤은 그의 ‘국가’에서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들의 신으로 인정한 ‘일자’를 ‘선 자체’라고 규정하고 태양에 비유했다.(‘국가’ 509b)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졌다. 하나는 만물의 근원인 신은 오직 선하고 결코 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태양이 만물에 빛을 주어 생육하게 하듯이, 신이 만인에게 선을 주어 인간으로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후 서양문명에서는 ‘신과 선이 동일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크고 작은 악한 일들 앞에서 마냥 무서워하며 떨던 고대인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위로가 되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인 신이 유일하고 선하다면 악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일시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비로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플라톤을 “그리스어로 저술한 모세”라고 칭송했던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그랬듯이, 아우구스티누스도 플라톤 철학의 이 같은 ‘구세적 성격’을 기독교 교리에 접목시켰다. 그는 조로아스터와 마니처럼 선을 빛으로, 악을 어둠으로 파악했지만, 플라톤을 따라 선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악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단지 ‘선의 결핍’이라고 규정했다.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마치 빛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이지만, 어둠은 빛의 결핍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한 것과 같다. 만일 당신이 이 말을 듣고 고개가 갸우뚱해진다면 이렇게 되물어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는 왜 빛을 내뿜는 기구들은 만들 수 있지만, 어둠을 뿌리는 기구는 만들 수 없을까? 그것은 어둠이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빛을 차단함으로써만 어둠을 만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이 바로 그렇다. 악은 선이 차단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악인도 그 어떤 악령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선이 결핍된 사람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만물의 창시자이나 악의 창시자는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래서 우리의 물음은 이제 우리에게 왜 선의 결핍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알아보자. 태양을 등지고 멀어져서야 한나 아렌트는 악의 본질을 ‘무사유’라고 규정했다.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생각이 없음’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 용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 해석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이나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칸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순수이성의 불능이나 부재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불능이나 부재에서 악이 나온다는 뜻이다. 논리의 부재가 아니라 윤리의 부재가 악의 근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 ‘신을 떠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논리적 귀결이다. 신이 가장 완전한 선, 곧 ‘선 자체’라고 규정하는 체계에서 신에게서 돌아서서 그를 떠나면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태양을 등지고 멀어져서야 어찌 어둠을 피할 수 있겠는가! 아렌트가 지적한 무사유는 그 어둠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 그 어둠,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와 히로시마가 상징하는 지옥들에서 우리가 목격한 그 어둠 안에는 사유뿐 아니라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다. 그 정체는 일찍이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1033~1109)가 신을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최고 위대,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이라고 부른 것을 상기해 보고서야 비로소 어림짐작할 수 있다. 안셀무스가 나열한 이 모든 것들이 결핍된 상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모든 것이 부재하는 그 황폐한 어둠이 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난 자가 바라보는 악의 실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직 이것이 성서에서 신이 선지자들의 입을 빌려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라 하였노라”(예레미야 2:28) “때가 되었다… 내게로 돌아오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예레미아 3:23)라고 외치는 까닭이다.
▲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위해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리하자. 신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오직 선하다.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났기 때문에 악이 발생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던가! 여기에도 아주 특별한 예외가 있다. 성서에 보면, 신이 인간에게 고의로 고통, 불행, 재앙, 질병 등과 같은 악을 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간혹 등장한다.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우스 사람 욥의 경우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뿐만 아니라 신이 칭찬할 만큼 의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이 그를 악으로 시험한다. 욥은 한순간에 열 명의 자녀와 헤아릴 수없이 많은 가축과 종들을 한꺼번에 모두 잃어버리는 엄청난 재앙을 당한다. 게다가 온몸에 악창에 돋아나 기왓장 조각으로 고름이 흘러내리는 몸을 줄곧 긁어야만 겨우 견뎌낼 수 있는 참혹한 상황에 처한다. 그것도 부족해 평소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마지막 남은 그의 아내조차 신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악담을 한 다음 떠난다. 신은 욥에게 왜 이런 악한 일을 했을까? 이에 대한 기독교의 답을 우리는 ‘고난’이라는 용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고난은 당사자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분명 악이다. 하지만 고난은 그것을 견딘 사람에게는 오히려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 선에 속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독일의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1882~1950)의 말을 들어보자. “고난도 가치이다. 고난이 어째서 가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불행을 견뎌낼 능력이 없는 자에게 고난은 가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낼 만큼 충분히 강한 자는 고난을 통하여 스스로 강화된다. 그의 인간성과 덕성이 증대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고난 또한 가치이다. 고난은 도덕적 능력의 시련이다. 깊은 도덕적 능력을 일깨워 주는 촉매제 구실을 한다. 고난은 인간의 활동력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감성 및 이해를 심화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나 자신의 마음의 깊이뿐 아니라 남의 마음의 깊이를 알게 된다. 아니, 인생 일반의 깊이를 알게 된다. 가치를 인식하는 안목이 확장되고 예민하게 된다.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높아짐과 동시에 행복 능력도 높아진다. 위대한 고난을 거친 위대한 기쁨과 행복감,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은 고난이었는데 구하지 아니한 행복이 그에게 주어진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난에 대한 윤리적 해석일 뿐 기독교적 해석이 아니다. 고난이 일단 기독교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 그 안에 ‘역설’이 들어있는 어떤 특정한 상태를 가리킨다. 무슨 소리냐고? 욥의 경우를 보자. 욥은 신이 칭찬하는 의인이었다. 그런데 가장 혹독한 불행과 재앙을 당했다. 이 역설이 욥의 고난이다. 만일 욥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고 그 죄 때문에 재앙을 당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에게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고난은 아니다. 이처럼 고난은 그 안에 ‘이해할 수 없음’ ‘부조리함’이라는 역설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이것이 고난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 상황이 신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종교적 상황을 만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 인간은 오직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신에게로 돌아간다. ‘신에게로 돌아감’, 바로 이것이 고난의 종교적 의미다. 신은 그의 백성이 자기를 떠나 악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다시 말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 선하게 살게 하기 위해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준다. 그래서 고난은 신의 일반섭리가 아니라 특별섭리에 속한다. 19세기 영국의 시인 프랜시스 톰슨(1859~1907)은 이 같은 신의 섭리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까닭은/ 너를 해롭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너는 그것을 내 품에서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일어나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어린애의 젖을 떼야만 할 때 과연 그런가? 욥은 어땠는가? 모든 가족과 재산을 한순간에 잃고 잿더미에 올라 앉아 악창이 돋은 몸을 긁던 욥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기 3:11~13) 이후 자기가 당한 끔찍한 재앙과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친구들과 숱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것마저도 버리고 가차 없이 신에게로 돌아갔다. “주께서는 못할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룰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기 42:2~3) 자기를 위한 변론마저 내려놓은 욥의 고백이다. 그러자 신이 그를 축복하여 욥은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이전보다 갑절이나 많은 부와 행복을 누렸다. 고난이란 신이 그가 사랑하는 백성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먼저 내리는 고통과 불행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신이 인간에게 악을 허락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1813~1855)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 특별한 섭리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린애의 젖을 떼야만 할 때 어머니는 자신의 유방을 검게 물들인다.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 될 때 어린애가 유방에다 미련을 갖게 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유방을 검게 물들여 놓으면 어린애는 그 유방이 달라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고 어머니의 눈길은 여전히 인자하고 부드럽다.” 탁월한 비유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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