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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7> 법공 스님 “중생은 본래 깨달은 자…미혹만 버리면 돼”
‘깨달음과 수행’은 불교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깨달음에 대한 이해와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에 관한 바른 견해가 없으면 불교는 외도의 길에 빠지게 된다. 불교를 알고 실천한다는 것은 바로 ‘깨달음과 수행’을 탐구하고 해명해 나가는 과정이다.
‘깨달음과 수행’기획토론 이번호에는 “우리는 모두 본래 깨달은 자이며, 미혹을 떨치면 불성이 드러난다”는 주장을 펴는 동국대 강사 법공스님의 기고를 싣는다. 계정혜 삼학 닦아서 ‘오분법신’성취해야 깨달음 완성 대승불교에서는 중생구제 위한 육바라밀 이타행 강조 불교에서는 어떻게 하면 번뇌를 끊고 각자(覺者)가 되는가 하는 것이 항상 근본 문제가 되어 왔다. 대승불교의 교학이 완성되어 중국, 한국 등으로 전파되어 다양한 종파적전개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고찰은 더욱 발전하여 사상적으로도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누구라도 불타, 각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부처님에 의해 설명되기도 하고, 중기 대승경전에서는 여래장이나 불성사상이 이를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ㄱ) 해탈이 무언가 인도적인 냄새가 풍기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산스크리트어의 어원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원어의 vimoksa, vimukti(음사. 毘木叉, 毘目叉)의 뜻은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미혹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원시불교경전에서는 “마음이 탐욕에서 여의어 집착함이 없고 제루(諸漏.번뇌)에서 해탈한다”고 하는 문장이 자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번뇌에서 해방된 마음의 상태로서 그것은 ‘번뇌가 없는 마음’이란 뜻이다. 이것은 열반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처님의 정각을 “심해탈(心解脫)”이라고 한다.
불교의 역사는 부처님의 심해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수행모델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이 제시되고 있다.
즉, 계를 지켜 생활을 바로 잡고(戒), 마음을 집중하여 정에 들고 (定), 그런 연후에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이나, 사제(고, 집, 멸, 도)등을 철저히 인식하여, 지혜를 일으켜 (慧), 이 지혜의 활동에 의해 번뇌를 단멸해 해탈을 얻으며(解脫), 최후에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각하는 (解脫智見) 것이다. 이것을 뒷날 오분법신(五分法身)이라 칭하게 되었다.
대승의 〈반야경〉에 의한 해탈이란 ‘최고의 지혜’에 의해 아집(我執), 법집(法執)으로 생기는 번뇌를 끊는 경지를 말한다. 물론 이 해탈에는 이타의 실천이 함축되어 있고,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얻기 위해 사제보다 육바라밀의 실천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향이 자기위주보다 타인과 같이 하는 대승불교특유의 정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ㄴ) 각(覺)이란 보리(bodhi)의 신역어로, 눈이 띄는 것처럼 이전까지는 알지 못 했던 것을 밝게 안다는 뜻이다. 혹은 열반을 깨닫는다는 뜻으로, 또는 불(佛)의 번역어에 해당한다. 구역에서는 보리를 도(道), 불(佛)을 각(覺)으로 했으며 신역에서는 보리를 각(覺), 불(佛)을 각자(覺者)로 번역하여, 법(法)과 인(人)을 구분하였다.
〈기신론〉에서는 만유의 본체인 아뢰야식에는 각(覺)과 부각(不覺)의 두 가지의 뜻이 있으며, 각(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2각이 있다고 한다. 즉, 만유의 본체는 원래 청정한 각체(본각)이지만, 무시이래의 무명망념에 의해 덮여있기에 현실에는 불각(不覺)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수행하여 지혜를 일으킨다면 이 불각에서 깨어나서 심원(心源)을 깨닫는데 이것이 시각(始覺)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해탈과 각의 의미를 살펴보고, 보다 우리에게 낯익은 깨달음의 내용으로서, 최초로 선종의 종지가 된 〈능가경〉의 깨달음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초기 북종선의 학문적인 선의 경우에도 자료나 경전을 보면 돈오(漸悟)보다는 돈오선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돈점에 의한 종파의 구분을 초기선종에서 명백히 구별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능가경〉에 의하면, 각기 그 선사들의 성질에 따라 돈도 되고 점도 되었던 것이다.
다시 각성이란 무엇이며 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얻어서 키워나가야 하는 가라는 질문에, “그대가 바로 각성이다. 각성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각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단지 진리가 아닌 것들을 진아로 오인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에 순수한 각성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다.”
끝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티벳트불교의 보리도차제를 소개로 말을 마치려 한다. 굳이 보리도차제를 인용하는 것은 ‘깨달음’이란 좌선을 통해서만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7가지의 디딤돌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1. 예배 2. 공양 3. 참회 4. 수희(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그리고 중생들에 의한 선행을 기뻐하는 마음) 5. 권청(가르침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 6. 불보살이 열반에 들지 말고 세상에 상주하시기를 간청하는 것 7. 기원의 일곱가지다.
즉 예배를 하면 자만심이 없어지고, 공양을 올리면 아까워 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참회를 하면 탐, 진, 치 삼독이 없어지고, 수희를 행하면 질투심이 없어지고, 권청을 하면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지은 죄를 없애게 되고, 불보살들께서 오래 사시기를 원하면 부처님이나 스승에게 지은 죄가 없어지고, 기원을 하면 깨달음에 나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법공 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39호/ 6월15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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