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⑦
공은 반야의 등불 켜기 위한 부싯돌
십이연기 이해가 깨달음 아니듯
空도리 알았다고 반야 현현하진 않아
반야라는 말은 대승불교시대가 되어 새롭게 드러난 개념은 아니다. 반야는 초기불교 이래 깨달은 자의 마음상태를 상징하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서, 또한 붓다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획득해야 할 지력의 하나로서 간주되어 왔다.
누차 언급했듯이 궁극적으로 반야란 일체의 존재가 처한 상태를 알아채고 일으키는 지혜의 빛이다. 그렇다면 공과 반야는 어떤 관계를 지닐까?
원래 공은 무상-고-무아라는 입장을 한 마디로 표명한 개념이다. 일체법은 덧없고 실체 없으니, 집착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공은 일체의 집착을 여읨을 말하며, 집착의 근거가 되는 그 어떤 실체도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공을 이렇듯 여읨의 논리로만 바라보려는 데에 있다.
팔천송반야에서 보는 한, 반야는 단지 일체법이 텅 비어 있다는 실상, 곧 공도리(空道理)를 깨닫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체법이란 괴롭고 무아이니 집착할 필요도 없이 여의고 떠나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대승의 입장이 되면, 일체법은 텅 비어 있기에 평등할 따름이다. 또한 그 누구도 그런 일체법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기에 여의고 떠날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이젠 떠날 필요조차 없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채는 순간 그런 덧없는 일체법 속에 함께 존재하는 뭇 삶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이 비로소 우러나게 되는데, 그 순간이 바로 반야지의 현현인 것이다.
수부티는 공의 도리를 가장 잘 깨달은 불제자로서, 그는 어느 것이나 공성에 관련해 설명할 줄 알며, 그의 예지력은 어느 것이나 공성에 관련해 열리고 있었다. 그런 그는 일체법을 벗어난 삶으로 살아가고, 일체법을 인식하지 않는 삶으로 머무는 위대한 성자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수부티의 공의 삶은 일체법을 여의지 않는 보살의 삶에 비견되면서 그 가치를 잃고 만다.
“수부티의 이 같은 일체법을 벗어난 삶과 일체법을 인식하지 않는 삶은 반야바라밀에서 행하면서 머무는 보살마하살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아가 비유한다거나 견준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수부티를 비하하는 것은 다름 아닌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얻어내는 깨달음이 존재의 궁극 행복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런 식의 깨달음은 차라리 세상을 어루만지고 진정 세상에 애착하기로 마음 먹은 보살마하살의 마음에 비할래야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팔천송반야와 같은 초기대승 경전에는 명백히 지향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그 의도란 한마디로 삶의 완성이자, 행복한 존재의 실현이다. 그것을 우리는 바라밀이라고 한다.
단언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가르침은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세상에 어떤 믿음치고 삶에 희망을 주고 에너지를 불러일으켜 주지 못하면서 종교라고 불리는 경우란 없는 듯하다.
원래 불교에서는 삶에 무관심한 가르침들을 외도라 부르고 삿된 견해라 불러왔다.
공의 도리를 안다고 반드시 반야가 현현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초전법륜인 사성제를 외우고 이해한다고 해서, 또한 십이연기를 낱낱이 분석하고 납득한다고 해서 행복한 붓다의 깨달음을 만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자칫 반야를 단순히 공의 논리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공이란 다만 반야라는 등불의 심지를 켜기 위한 부싯돌과도 같은 것이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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