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대통령은 원고를 덮어 버렸다.
朴대통령은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흐느낌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강당 안은 눈물바다가 됐다. 朴대통령은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로 전했다.
30분 예정으로 함보른 광산에 들렀지만, 강당에서 행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朴대통령은 곧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朴正熙 대통령 일행은 광부들 숙소를 돌아 봤다.
우리 광부들의 얼굴과 팔·다리 등에는 상처투성이였다. 채탄 작업 중 부러진 드릴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은 상처들이었다.
『지하 1000m 아래에서 採炭(채탄) 작업을 하고 나서 갱 위로 올라와 한잔 마시는 것이 즐거움이지만,
한국인 광부들은 그 돈도 아껴 본국으로 송금한다』는 얘기를 朴대통령은 들었다.
광부들 탄가루 묻은 손을 내밀어 광부 대표 유계천씨는
『異國 땅에서 대통령 내외분을 뵈니 친부모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면서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독일에 남아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줄 것을 요청했다.
朴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떠나려는데 한국인 광부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갓 막장에서 나와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의 광부들이 많았다.
그들은 朴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각하, 손 한번 쥐게 해 주세요』
朴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차 안의 朴대통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울지 마세요』라며 朴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본의 숙소에 도착한 朴대통령 내외는 한국일보의 鄭光謀(정광모·한국소비자연맹 회장)
기자를 방으로 불렀다.
朴대통령과 陸여사는 하도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鄭기자가 『울지 마세요. 저녁에 파티가 있는데 울면 어떻게 합니까』
라며 대통령 내외를 위로했다.
그러자 朴대통령 내외는 鄭기자를 붙들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한참만에 눈물을 그친 朴正熙 대통령은 鄭기자에게 두 가지 다짐을 했다.
『기왕에 정해진 동남아 순방만 마치고 나면,
우리 국민들이 밥술깨나 들게 될 때까지는 외국에는 나가지 않겠다』
『우리 국민들이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만들어야겠다』
『그때 朴대통령이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
통역관으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白永勳(백영훈ㆍ前 중앙대 교수. 9·10代 국회의원)씨는
『그때 朴대통령이 광부, 간호사들과 함께 흘린 눈물이 조국 근대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당시 朴대통령을 수행했던 李慈憲(이자헌)
前 체신부 장관은 함보른 광산에서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1964년 12월11일자 朝鮮日報 1면에 쓴 기사의 제목은
『「後孫 위해 繁榮(번영)의 터전을」 - 모두 눈물 적시며 感激(감격)의 한때』였다. 『
눈물바다였어요. 간호사들이 陸여사를 붙들고 울고, 陸여사가 통곡을 했어요.
취재하던 기자들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일은 내 인생에서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보른 광산에서 朴대통령 내외를 만난 광부와 간호사들은 조국의 처참한 가난이 서러워서,
돈을 벌러 이역만리에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서러워 눈물을 흘렸다.
작년 11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광부 출신 교민 황만섭씨는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며
『독일에 간 후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국제전화가 됐을 때,
전화기를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울기만 하다가 월급의 3분의 1을 전화요금으로 날렸다』고 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만9000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들이 독일로 派送(파송)됐다.
수십 對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광부들 가운데는 상당수의 대학졸업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鄭光謨씨는 『당시 독일에 간 광부들 가운데 진짜 광부 출신은 소수였고,
공과대학 등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첫 번째로 나가는 사람들이 잘해야 앞으로도 계속 광부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을 이력서 위조해서 광부라고 내보냈다』고 했다.
1962년 10월 한국이 서독으로부터 최초로 들여온 1억5000만 마르크의 借款(차관)은
바로 이들 광부와 간호사들의 급여를 담보로 들여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정부 차관은 우리나라에 대한 공공차관이 중단된 1982년까지 총 5억9000만 마르크에 이르렀다.
독일에 돈을 벌러 간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은 적지 않았다.
광부 출신 在獨교포들 모임의 이름은 「글뤽 아우프」, 우리 말로 「무사히 위로 올라가세요」이다.
이곳에서 발간한 「派獨 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다.
그 중에는 작업 중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
인터넷에 떠돈 「陸士 교장의 편지」 경제개발의 첫걸음을 떼던 시절에 벌어졌던
「함부른 광산의 눈물」이 최근 4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작년 11월 金忠培(김충배) 陸士 교장이 「생도와의 대화」 시간에 한 강연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다.
金교장은 이 강연에서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美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던 냉대,
광부와 간호사들의 派獨, 함보른 광산에서 이뤄진 朴대통령 내외와 파독 광부·간호사들과의 만남,
1960년대 우리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과 쥐털로 만든 모피 제품을 수출한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金교장은 강연을 이렇게 매듭지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國力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守舊 保守 세력으로 폄하하는 그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60代와 70代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新·舊세대가 한 덩어리가 되어 국민소득 4만 달러대의 高地를 달성하자』
金교장의 강연은 「陸士 교장의 편지」,
「朴正熙 前 대통령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날 강연을 들었던 陸士 근무자가 인터넷에 강연 내용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도 이 글은 인터넷을 통해 계속 傳播(전파)되면서 화제가 됐고,
금년 2월초에는 주요 일간지에 소개됐다.
인터넷에 떠도는 젊은이들의 감상 評은 긍정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朴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갓난아기였다.
다시 말해 요즘 어른들이 말하는 철없는 젊은이에 불과한 나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이 글을 읽으며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사람들이 볼까 싶어 슬쩍 닦아 냈다.
저 광부들과 간호사들…. 할머니·할아버지가 되셨겠지만, 암튼 저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1970년대, 80년대에 중동의 거친 사막에서 밤낮 없이 피땀 흘렸던, 그러나 희망에 찼던 시절이 회상됩니다.
우리도 젊었을 때는 기성세대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 잘난 줄 알았으나
나이가 들고 보니 그분들이 고마우신 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金忠培 陸士 교장의 글은 10·11代 국회의원을 지낸 金遺腹(김유복·陸士 7기)
예비역 육군 준장이 작년 6월 한국 로터리클럽 기관지인
「로터리 코리아」에 기고했던 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자라나는 세대에게 바른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김유복) 이 글은 金永光(김영광) 前 국회의원에 의해 지난해 전직 국회의원들의 친목모임인
「헌정회」의 기관지 「憲政」 6월호에 소개됐다.
金遺腹씨의 글은 金忠培 陸士 교장의 강연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金 前 의원은 이 글을 쓴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春園 李光洙 선생의 옆집에서 살았어요.
春園 선생은 보통학교(초등학교) 4, 5학년이던 나를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 다리를 주물러 드려라」,
「마을 길을 쓸어라」고 하셨어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길에 담배 꽁초가 떨어진 것을 보면 얼른 줍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 주는 어른이 없어요.
일류병에 걸린 부모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한 달에 100만원씩 하는 과외를 시키면서도 남을 위해 사는 정신은 길러주지 않아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바른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그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