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글쓴이 : 이 강
술은 태초에 여자의 것 이었다.
아주 오래전, 수 만년전, 원시시대 때의 이야기이다.
남자나 여자나 각자가 사냥을 하고 식량을 구하며 동굴 속에서 생활을 할 때 였다.
성인 남녀 두 사람이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 사이에는 아기가 태어났으며 출산을 하게 된 여자는 식량을 구하러 나 갈수가 없었다.
이제 남자는 자신의 식량만이 아니라 여자의 식량까지 구해 와야 되었다.
여자가 얼만 큼 먹을지를 모르는 남자는 많은 양의 식량을 구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식량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후 사냥을 나가지 않고 동굴 속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배가 고파도 먹을 게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배가 고플 때 까지 사냥을 나가지 않았다.
여자는 꾀를 내었다.
남자가 식량을 구해오면 남는 음식을 동굴 깊숙한 곳에 감추기 시작하였다.
남자는 여자와 아기의 몫 까지 많은 양의 식량을 장만하여야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여자는 숨겨놓은 식량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여자는 호기심에서 한 모금 먹어 보았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알게 된 여자는 육아를 핑계로 사냥은 나가지 않고
몰래몰래 그 물을 떠먹으며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러던 어느 날 사냥에서 일찍 돌아오게 된 남자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그 물이 궁금해진 남자가 한 모금 먹어보니 갑자기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그동안 동굴로 돌아오면 여자가 기분이 좋아서 자신에게 사랑을 주었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구해온 식량으로 만든 것이니 내 것이다. 앞으로 너는 먹지 말 어라”
이리하여 여자에게서 빼앗아간 술이 남자의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술을 이겨내는 신체적 조건이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이것은 머~언 옛날 원시시대 때 조상이 만들어놓은 신체조건 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나라에서 술의 의미는 여러 조건에서 발전되어 왔다.
제사를 지낼 때나 잔치를 할 때 술이 필요했으며 손님을 접대하거나 어르신을 공량 할 때도 술은 필요하였다.
예전에는 각 가정에서 술을 빚어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가양주(家釀酒)라고하며
집안마다 술 빚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술맛은 여러 가지였다.
제사를 지낼 때 혼백(魂魄)을 부르는 것은
향을 피워 연기가 하늘에 올라 혼(魂)을 불러오고 술은 땅에 스며들어 백(魄)을 불러온다고 하여
술을 사용 하였다.
가양주 이외에도 궁궐에서 빚는 궁중 술, 사찰에서 빚는 사찰 술, 마을에서 공동으로 빚는 마을 술,
술을 팔기위하여 만드는 주막 술, 그리고 모내기철이나 농사지을 때 피로를 도와주는 농주 등이 있다.
조선시대 때 잘 빚은 가양주는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궁중으로 들어가는 때도 있었고,
사찰 술이 마을 술이 되기도 하고 주막 술이 가양주가 되기도 하면서 서로 소통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조선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살던 우리의 술 문화 풍습은 일본의 조선 침탈로 인하여 끊기게 되었다.
1909년 주세법을 만들어 술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허가 없이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고 양조장에서만 술을 만들게 하였다.
주세가 국세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가
1930년부터 식량의 부족을 핑계 삼아 쌀로 술을 담그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농번기 때면 몰래몰래 농주를 만들어 농사일에 힘든 일꾼들을 위로하여 주었다.
그 후 밀주단속은 심하게 이루어졌으며 누룩의 제조를 허가제로 바꾸어
가양주는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한 집안의 건강보조식품으로 집안 어르신들의 기혈순환을 도와 주었으며,
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잘 접대 한다는 의미로 술상이 차려지기도 하였던 가양주 이었다.
절 에서는 고승들의 고산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술을 빚어 곡차로 마셨다.
술은 단순한 노동의 피로회복과 여흥의 음식이 아니라
종교와 예절과 문화와 합하여 풍류를 찾고 시와 예술을 탐구 노력하는 선조들의 정신도 함께 담겨있다.
예술인들의 술 이야기는 참으로 많다.
그 중의 하나,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양주동 박사께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수유리 밖 다락원에서 몇몇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소를 타고 미아리고개를 넘어왔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나는 젊은 시절 명동의 정종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여수에 아주 귀한 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술 마시던 사람들과 객기가 통하여 서울역으로 나간 적이 있다.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밤을 달려와 순천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열차는 여수행 객차 한 칸을 떼어놓고 목포로 떠났다.
한 시간여 가 지난 후 다른 기관차가 객차를 달고 여수에 도착하니 오후 2시였다.
증기기관차의 시커먼 연기를 밤새 뒤집어쓴 우리들은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역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잠시 외국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고급 나일론 옷 이었다.
학교를 다녀오는 어린이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도 모두 일본제 나일론 제품이었다.
그 당시는 일본 과 의 밀수 거점이 여수여서 그곳 사람들의 일상용품에 일본제품이 많았던 것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명랑했다.
밀수경제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여수사람들은
생활에 찌 들림이 없는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모습이었다.
우리를 유혹한 그 술, 취락(醉樂) 정종을 사들고 오동도 섬으로 갔다.
바위 밑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해산물을 파는 아주머니와 마주하며 그 술을 즐겼다.
오동나무 숲 과 여수 앞바다의 풍광이 독특한 술 맛과 곁들여 고생하며 찾아온 우리를 만족시켜 주었다.
뭇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에게는 철없던 젊은 시절의 뿌듯한 객기 였으며, 반항하던 젊은이의 가련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