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109卷-列傳22-禹倬-000
禹倬.
#高麗史109卷-列傳22-禹倬-001
○禹倬丹山人父天珪鄕貢進士. 倬登科初調寧海司錄. 郡有妖神祠名八鈴民惑靈怪奉祀甚瀆. 倬至卽碎之沈于海*滛{淫}祀遂絶. 累陞監察*紏{糾}正. 時忠宣蒸淑昌院妃倬白衣持斧荷藁席詣闕上*䟽敢*諌{諫}近臣展*䟽不敢讀. 倬厲聲曰: “卿爲近臣未能格非而逢惡至此卿知其罪耶?” 左右震慄王有慚色. 後退老禮安縣. 忠肅嘉其忠義再召不起. 倬通經史尤深於易學. 卜筮無不中. 程傳初來東方無能知者倬乃閉門月餘叅究乃解敎授生徒. 理學始行. 官至成均祭酒致仕. 忠惠三年卒年八十一.
우탁
우탁은 단산 사람인데 아버지 우천규는 향공진사였다. 우탁은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에 영해 사록으로 임명되었다. 고을에는 팔령이라는 요괴한 귀신의 사당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그의 영험이 신기하다는 데 미혹하여 미신놀이를 하여 민심을 흐리게 하였다. 우탁이 부임하자 곧 이것을 파괴하여 바다에 처넣었더니 미신이 드디어 없어졌다.
여러 번 승진하여 감찰규정이 되었다. 이때에 충선왕이 숙창 원비를 간통하였으므로 우탁이 소복 입고 도끼를 들고 집 방석을 메고 궁궐로 들어가 상소문을 들어 대담한 말을 하였으므로 측근 신하가 상서문을 펼쳐 놓고 감히 읽지 못하였다. 우탁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그대는 근신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이와 같은 추악한 일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그대는 자기의 죄를 아는가? ”라고 하였다. 좌우에 있던 자들이 놀라 떨고 왕은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예안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충숙왕이 그의 충성을 기특히 여겨 두 번이나 소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우탁은 경사(경사)에 통달하였고 더욱 역학에 대한 지식이 심오하였다. 그의 점술은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전이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 오자 능히 해득하는 자가 없었는데 우탁이 월 여를 문을 닫고 전심 연구하여 드디어 문리를 해득하였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교수하였다. 이리하여 이학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벼슬이 성균좨주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충혜왕 3년에 죽으니 나이 8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