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가운데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칠 개(改), 허물 과(過), 옮길 천(遷), 그리고 착할 선(善)을 씁니다. “지난 허물을 고쳐서 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다 개과천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변화를 고후 5:17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재창조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다른 새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오래된 건물을 골격을 그대로 둔 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을 리모델링(Remodeling)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리모델링하셔서 새롭게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도해서 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된 일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난 일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물(gabe)라고 개념화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새사람이 되게 해 주셨으니 이제 새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엡 5: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나님께서 어두움이던 우리를 빛으로 리모델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빛을 발하는 빛의 자녀로 살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 사는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우리의 과제(aufgabe)라고 개념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새사람으로 리모델링된 것입니다. 이제 새사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과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새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출 16:2-3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놓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430년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자유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먹거리가 다 떨어져서 배가 고파오니까 옛날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는 애굽 사람들이 먹을 것은 책임져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유고 뭐고 배고파 죽겠다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면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인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자유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납니다. 그리스도인 된 것의 그 복됨을 잊어버립니다. 유혹에 넘어가 다시 옛사람처럼 살려고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이 다가오니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배교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하나씩 둘씩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웠으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새사람답게 살 수 있는 중요한 비결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새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비행기 여행을 하다보면 비행기 착륙 20분전에 착륙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옵니다. 여행 도중에 어떤 사람들은 잠자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겉옷을 벗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짐도 이것저것 풀어놓고 있습니다. 내릴 준비를 하라는 사인으로 안내방송을 합니다.
방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긴장을 합니다. 저마다 태도가 달라집니다. 짐을 꾸립니다. 옷도 고쳐 입습니다. 화장도 다시 합니다. 내릴 준비를 하게 됩니다. 방송이 있은 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내릴 차비를 하고 착륙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는 마치 기장이 착륙 안내 방송을 하듯이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객들이 내릴 준비를 하듯이 그날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날을 맞을 준비를 하고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렇게 늘 종말을 준비하며 사는 것을 종말론적 삶의 태도라고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성자라고 불려지는 알로이시오이라는 분의 일화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재미있게 놀다가 잠시 스승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스승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 학생이 답했습니다. “빨리 교회에 달려가서 기도하겠습니다.” 다른 학생이 답했습니다. “당장 집으로 가서 부모님부터 뵙고 살펴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학생이 답했습니다. “어제 한 친구와 다투었는데 빨리 가서 화해하겠습니다.”
알로이시오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지금은 휴식시간이니 이대로 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은 평소에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종말이 온다면 따로 준비할 것 없이 이대로 종말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세상을 떠나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종말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또 그 날이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 속에 사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말이 있음을 알면서도 종말을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도적 같이 임하는 종말의 날 다급해 하면서 후회하게 됩니다.
이런 시가 생각이 납니다. “어쩌면 오늘일지도”(Perhaps Today)
평생에 세 번 온다는 행운이 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게도 첫사랑은 시작되겠지 어쩌면 오늘일지도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언가 시작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 나무를 심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보고 싶은 반가운 친구가 찾아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오실 날이 어쩌면 오늘 일 수 있다는 생각,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어쩌면 오늘 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종말을 준비한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며 죽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죽음이 문턱을 넘어 들어올 때 “돈을 조금 더 벌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출세했어야 했는데...”라는 식의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었어야 했는데, 가족을 사랑했어야 했는데, 올바르게 살았어야 했는데...”라는 식의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종말을 대비하여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인생의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인생의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점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종말론적 삶을 살며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 세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기도하라
본문 7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종말론적 삶의 우선적인 특징은 기도하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마 24장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의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째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5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그래서 4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이 가까우면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극성을 부립니다. 마치 유괴범들이 어린 아이를 미혹하듯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이 극성을 부립니다. 그래서 길이 아닌 곳을 따라 나서기도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되고, 심지어 믿음의 길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도하되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영적으로 긴장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근신하라는 말은 구체적인 삶으로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미혹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주님을 붙잡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하고 외출할 때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 손입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어도,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한눈을 팔더라도 엄마 손만 잡고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끈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 끈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든든하게 해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말이 도적같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에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하라
본문 8절을 보면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삶의 또 다른 삶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마 24:12에 보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종말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식어져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에 사랑이 식어 가면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얼어붙습니다. 부부가 그 마음에 사랑이 불붙고 있으면 서로를 바로 볼 때 서로의 장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서로가 최고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가 그 마음에 사랑이 식으면 서로를 바라 볼 때 서로의 단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서로 미워하게 되고 원수시 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사랑이 식어서 서로 미워하고, 갈등이 증폭되고, 서로 다툽니다. 그래서 세상이 더욱 각박해 지고 점점 지옥처럼 변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말이 다가옴을 깨달으면서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이 될 수록 자칫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도 사랑이 식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서 점점 마음에 사랑이 식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종말이 가까움을 깨달을수록 더욱 사랑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셋째, 봉사하라
본문 10절을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삶의 또 하나의 특징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마 25장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과 심판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종 셋에게 재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답니다. 때가 돼서 돌아와 그 결과를 살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냥 묻어두어 하나도 남기지를 못했습니다. 주인이 크게 진노했습니다.
이 말씀의 취지는 재림 이후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섬김의 사명을 잘 담당했는지를 확인하는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 이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어떻게 봉사했는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론적 삶을 살면서 결코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저마다 맡은 분량은 다를 지라도 청지기로 나름대로의 봉사의 직무를 맡았습니다. 이것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종말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든 아니면 우리의 죽음이 먼저 오든 그 날이 오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종말론적 삶입니다.
종말론적 삶을 살면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우선 기도입니다. 우리를 주님 곁에 붙잡아 놓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입니다. 종말에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식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봉사입니다. 우리가 청지기이고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