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즐거웠다. 아주 어려서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지금 열 살이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우리는 아주 즐거웠다. 엄마는 아빠의 사진을 탁자 위에 놓아두고 언제나 내게 아빠 이야기를 하였다.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어땠었다 하는 식으로. 아무튼 아빠는 멋진 사람이었고 대학에서는 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그런 다음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엄마랑 결혼했다. 또, 아빠가 우리를 위해 주식을 사놓아 아빠가 죽은 후에도 엄마가 일하러 다니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세살이었고, 아빠의 일을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해 내려 한 적도 있지만 살아 있는 것과 똑같으니까 뭐. 얼마는 가끔 "네 성적표가 모두 A라는 걸 알면 아빠가 매우 기뻐하실 텐데." 하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나면 탁자 위의 아빠 사진이 정말 나 때문에 기뻐 웃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 웃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정말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엄마를 '미망인'이라 부르는데, 나는 그 말뜻을 지난해까지 몰랐다. 사진 속의 아빠가 백발인 걸 보면 아빠는 나이가 많은가 보다. 엄마는 흰 머리카락이 없고 젊고 또 미인이다. 금발머리가 탐스럽고 파랗고 큰 눈을 가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다. 나는 엄마를 놓치지 않을 거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크면 플로리다로 가서 보물을 찾는다거나 외국에 가서 괴물이 나오는 호수 속의 괴물을 찾겠다며 집 나갈 궁리를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친구들한테 말할 수는 없다. 한 번은 빌리에게 난 엄마를 두고 떠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 애는 피식 웃어 버렸다. 우리 엄마같이 멋진 엄마를 가진 애는 하나도 없다. 다른 애들의 엄마는 늘 무서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눈 사이에 주름이 몇 개씩이나 그어져 있지만, 우리 엄마는 절대 무서운 얼굴을 하지 않는다. 1년 전에 내가 그런 사실을 아빠 사진 앞에서 말했더니 아빠는 "넌 착한 애로구나, 그렌." 하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모르지만 아빠는 틀림없이 알고 있다. 너트가 오기까지 무엇이든 잘되어 갔다. 그런데 작년 여름 밤 텔레비전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소리를 좀 줄여 달라고 부탁하러 거실로 나갔다가 낯선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엄마는 날 보고 깜짝 놀랐다. "왜요, 엄마?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내가 물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있겠니?" 나는 나이가 많고 코가 큰 너트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아저씨 누구야?" 내가 묻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친구, 너트 씨야." 그런 다음 나는 침대로 돌아왔지만 잘 수가 없었다. 나 말고 엄마에게 친구가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해 보았다. 엄마가 저 사람과 다시는 만나지 말았으면 하고 그것만 원했다. 그래도 엄마는 그를 계속 만났으며 집에도 몇 번이나 데리고 왔다. 엄마는 "그렌, 이리 온. 와서 아저씨에게 인사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내가 열 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두 번 다시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러나 효력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엄마가 너트 씨와 외출했다며 근처 아주머니가 나를 돌봐주러 오셨다. 나는 두 사람이 없는 동안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슬퍼 죽어버린다면 엄마는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난 죽지 않고, 엄마와 너트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언젠가 둘은 일주일 내내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엄마는 토요일 아침, 내게 이별의 키스를 해주며 꼭 안아주었다. 저 보기 싫은 영감이 드나들기 시작한 뒤부터는 모든 게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희망은 엄마와 단둘이 지내는 것이다. 뭐가 어쨌든 간에 그것은 우리의 '당연한 모습'이니까. "깜짝 놀랄 일을 가르쳐줄게." 일요일 밤, 둘이서 다시 돌아왔을 때 너트가 말했다. "엄마와 아저씨는 어제 아침에 결혼했단다." "그래, 그렌.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엄마가 아무 말 안 했단다. 우리는 앞으로 행복해질 거야." 우리라고? 그 우리는 나와 엄마가 아니라 엄마와 저 보기 싫은 늙은이겠지. 울다 지쳐 죽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벌써 골백번 죽었을 테니까. 엄마는 그 남자하고만 떠들고 내겐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나는 날이 갈수록 깊고 검은 구덩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깊고 시커먼 암흑으로. 아빠는 나보다 더 싫은 모양이다. 나는 가끔 난로 앞에 서서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는데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사진 속의 아빠가 울고 계셨다. 액자에 끼여 있는 유리 위까지 눈물이 흘러넘쳐 탁자 위에 물이 괴여 있다. 그날 밤 내가 아빠랑 이야기를 할 때, 그 물방울이 넘쳐 카펫 위에 떨어졌다. 그때 마침 엄마가 들어와서는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거 봐요!" 내가 말했다. "엄마가 너트와 결혼해서 아빠가 울고 있어요. 자!" 엄마는 이상한지 나를 유심히 보더니 방을 나갔다. 그리고 곧장 엄마와 너트 씨가 다투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큰소리를 내는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뭔가 이상한 것 같아 소파에 책을 내던지고 방을 둘러보았다. 없어졌다. 아빠의 사진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거다. "엄마!" 나는 소리쳤다. "어디다 두셨어요?" "그렌, 뭐 말이냐?" 엄마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아빠 사진이 없어요!" "지금은 너트 씨가 내 아빠란다. 사진은 치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탁자에 이마를 부딪치며 너트는 내 아빠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아빠는 사진 속의 사람밖에 없어. 그 사람이 진짜 우리 아빠야!" 엄마가 말했다. "그렌, 너도 이제 커서 알 거야. 여자는 남편이 필요해. 네 아빠는 6년 전에 돌아가셨지 않니? 그래서 엄마는 혼자야. 지금 엄마는 엄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났어. 그게 너트 씨가 엄마 남편이 된 이유야. 그러니 너도 엄마를 위해 빨리 적응해 주어야 하지 않겠니?" 엄마의 두 눈 사이에 얼굴을 찌푸릴 때 흔히 생기는 주름이 보였다. 그날 밤, 또 나를 돌봐줄 사람이 왔다. 엄마와 너트가 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두 사람 다 집에 없으니 좋은 기회였다. 엄마 방에 들어가서 옷장 첫째 서랍을 열었더니 생각한 대로였다. 나는 사진을 꺼내어 바라보았다. 복도 불빛으로 아빠의 얼굴이 지금까지보다 더 생생하게 보였으며, 나를 응시하면서 내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로부터 닷새 뒤, 나는 캄캄한 터널에서 빠져 나왔다. 모든 게 잘 되었다. 집에 있는 것은 엄마와 나 둘뿐. 결국 우리는 '당연한 모습'이다. 경관이 몇 명이 와서 시체를 운반한 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이 아이는 처벌하지 않습니다. 아직 어려서 자기가 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엄마는 머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고개를 흔들면서 경관에게 뭐하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난 그 뜻을 모르겠다. "그 말은 바로 6년 전에도 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