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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직업학교 류정호 원장
성공과 실패를 거쳐 직업학교를 일구다
“솔찬하시”라는 전라도 말이 좋아 아들 이름을 ‘류솔찬’으로 지었다는 충청도 출신 류정호 씨를 만났다. 24년 전, 순천으로 유학을 오며 줄곧 순천에 살았으니, 이제는 순천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지만 뼈에 박힌 충청도 사람의 특성 때문에 말 못할 사연이 많다. 그는 순천대학교 앞에서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키는 파란직업전문학교 교장이다.
뭉쳐 노는 것이 통한 직업학교
지인의 추천으로 간 직업학교. 그 직업학교는 임시 휴교 후, 다시 시작한 상황이라 복잡했다. 인수인계 과정도 없이 사람을 뽑고 행정업무에서 영업까지 전반을 맡아서 했다. 당시 이사장은 첫 만남부터 믿음을 강조했는데, 두 달 정도 월급이 나오더니 그 뒤로 월급이 안 나왔다. 그래도 이사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월급도 못 받는 상태에서도 일을 했다.
당시 교직원은 10여 명이었는데 뭘 해도 해보자는 분위기였다. 한 번은 문도 안 닫히는 버스를 빌려 학생들과 소록도에 놀러갔는데 교사들까지 아주 좋아했다. 월급도 안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직원들끼리는 잘 뭉쳤다. 돈도 없으면서 1주일에 몇 번씩 술자리를 했고 형편도 빤한데 술값은 서로 내고 싶어 했다.
월급 때문에 했던 이벤트도 있다. 보름 뒤에 준다고 한 월급이 안 나오는 날 아침 직원들 볼 낯이 없어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던 중 슈퍼에서 파는 복권을 본 류정호 씨, 조회시간에 3억짜리 복권을 한 장씩 나눠주며 “당첨되면 반은 갖고, 반은 직업학교 만들어 봅시다”며 하루를 시작했다. 운영비도 안 나오는 학교에서 자신의 카드로 회사에 필요한 용품도 사고, 생활비까지 쓰다 보니 어느 날 카드 한도가 찼다. 그렇게 숨넘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직원들과 새롭게 준비한 과정이 승인이 났다. 안정을 찾자 놀랍게도 이사장이 출근을 시작했다. 더 이상 이사장의 비위를 맞추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출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업교육원에서의 몇 달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 광양 중마동에 직업학교를 열었다. 당시 35세, 뭐든지 열심히 했다. 살면서 꼭 필요한 소중한 내용을 직업교육에 넣고 싶었다. 그 자신이 가장 재미있었던 대학시절 탈패 경험을 교육과정에 넣었다. 학생들과 조회, 종례를 하고, 발표도 시키고, 매달 특강과 함께 특별활동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했던 체육대회, 산행, 역사기행 같은 특별활동은 노동부에서 전혀 지원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교육생들은 아주 즐거워했는데, 종교처럼 몰입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작은 도시에서 입소문만으로 모집이 잘되었다.
강사는 최상의 강사를 구했다. 한 번은 독일에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해 비행기 비용을 주고 면접을 오라고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과정이 첫 기수부터 혼연일체가 돼서 돌아갔다. 상상할 수 없는 취업률이 무려 5년 동안 이어졌다. 직업학교는 취업률, 자격증 취득률 등으로 노동부에서 인센티브를 받는데 그가 운영하는 직업학교는 80% 이상 취업 되었으니 거의 인센티브 대상이었다. 교육에 쏟았던 열정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인생사 새옹지마
한참 잘 될 때 임대한 공공건물의 임대사업자들이 자신들이 비슷한 사업을 하려고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했다. 엄청나게 투자하며 키워왔는데 그 억울함이 오죽했을까.
광양에서 10기까지 교육생을 배출하고 순천으로 이전을 했다. 손실이 컸지만 어쨌든 다시 일으키려고 분투했다. 주변의 선배들이 흔쾌히 도와줬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이전을 해서 인테리어를 마친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 울고 싶은 심정인데 노동부의 제도까지 바뀌었다. 기존 시스템과 조직은 방대한데, 바뀐 시스템에서는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노동부 제도가 바뀌거나 회사에 변화가 있을 때 상처가 컸다. 요즘은 강사가 모두 주인처럼 운영하는 형태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고.